지난해에 첫째 딸이 제게 말했습니다.
“아빠한테 가장 고마운 게 뭔지 알아요?”
“글쎄~ 뭐야?”

"저를 기다려준 거요. 아빠는 저를 기다려줬어요."

이 말이 참 좋았다.
두 아이에게 <책으로 자란 이야기>를 쓰자 한 지 2년 6개월이 지났다.
드디어 오늘, 글을 받았다. 첫째가 준 첫 번째 글. 제목은 <인상을 남겨라>이다.

인상을 남겨라

즘 아빠는 집에서 온라인으로 독서 강의를 하곤 한다. 예전에는 아빠의 독서 강의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제는 일주일마다, 한 달마다 들을 수 있다. 나는 아빠가 강의를 하고 있으면 내 방에서, 거실에 앉아서, 아니면 아빠 책상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내용을 듣는다. 내 방에서 들으면 소리는 좀 작아도 편하게 들을 수 있고, 아빠 옆에서는 소리가 잘 들리지만 바닥에 앉아야 해서 좀 불편하다.

그래도 나는 아빠 옆이 좋다. 한 시간 동안 바닥에 꼼짝없이 앉아서 매일 듣는 아빠의 목소리로, 거의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듣는 게 좋다. 아빠가 글쓰기와 토론에 대해 말할 때면 나는 행복에 빠진다. 아빠가 자랑스럽고, 나도 자랑스럽고,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던 기억에 빠져서 허우적댄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지금도 난 웃고 있다.

책, 도서관, 토론, 글쓰기. 이 말들은 사람마다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누군가는 딱딱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할 테고, 다른 누구는 가까이하고 싶지만 다가서기 힘든 무언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그것들을 죽을 만큼 싫어하거나 좋아하기도 한다. 나로 말하자면, 책이나 글과 같은 말을 듣기만 해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행복해진다.

기분이 나쁠 때 내가 쓴 글을 떠올리면 마음이 풀린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내며 모든 게 필요 없다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에 글은 나를 부정적인 생각에서 끌어올린다. 더 이상 머릿속에 뭔가를 더 집어넣지 못할 정도로 온갖 감정과 생각으로 터져나가는 중만 아니라면. 그럴 때는 말 그대로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나는 왜 책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좀 너그러워지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생길까? 왜 뭔 일만 있으면 글로 써서 간직하고 싶어하고 독서토론을 하던 때를 잊지 않으려 머릿속을 뒤지곤 할까? 중요한 건 기억이다. 그것들이 어릴 적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는 한, 나는 절대 글을 싫어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책을 어떤 인상으로 기억하느냐에 따라 평생 책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책과 관련된 인상을 남겨야 한다. 아빠 옆에 딱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들을 때의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 만화책이나 나보다 한참 어린 애들을 위한 책을 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 때에만 생기는 자유. 함께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낄낄거렸고, 책 속 이야기를 꺼내어 주변에 덮어씌우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얼마나 재미있어 보였는지. 책 하나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

책 말고도 즐거운 기억은 많다. 가족이 함께 텔레비전을 봤을 때 나는 어느 때보다도 크게 웃었지만, 그게 딱히 좋은 추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놀이공원에서 기구를 탄 것보다 동네 놀이터에서 한 놀이가 더 재미있었다. 정해진 활동을 하는 것보다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게 훨씬 낫다. 책은 그런 일을 하기 딱 좋은 자원이다. 재미있는 기억으로 모든 걸 채워버리자.

https://forms.gle/LrXrLGGCkFG2CzPP7

 

아빠 냄새. 책 냄새. 신청 안내

안녕하세요. 저는 책을 아홉 권 쓴 아빠,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책을 읽고, 책으로 수업하고, 책으로 강의하는 책벌레입니다. <곁에.서>라는 이름으로 펀딩해서 한림화상재단(1000만원)과 세움(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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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서재 이름이 <책뜰안애>입니다.
책이 가득한 뜰에서 평안과 사랑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책뜰안애 서재 책꽂이입니다.
높이 3m 50cm쯤 되고,  책꽂이 재료는 편백나무입니다.

가장 아래쪽은 수납장을 만들고 쿠션을 깔았습니다. 의자 겸 수납장입니다.
제가 설계한 책꽂이를 목수에게 맡겨서 만들었습니다.
"여기 책 다 못 꽂으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책꽂이 만들면서 목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드는 게 힘들었나 봐요.
어쩌죠? 벌써 다 채웠네요!

책꽂이를 만들고 싶다면

1. 책꽂이 한 칸 높이를 책보다 3cm 정도 높게 계획하세요.
   (기성품 책꽂이는 간격이 높아서 책을 많이 꽂지 못합니다. 덩그러니 놓인 느낌도 납니다.)
   (제 책꽂이 가장 아래쪽은 33cm입니다. A4 크기를 넣고 3cm 남습니다.)

2. 책꽂이 앞뒤 폭을 책보다 5cm 정도 넓게 계획하세요.
   (기성품은 폭이 너무 넓습니다. 작은 책은 앞뒤로 두 줄 꽂아도 될 정도입니다.

3. 책꽂이에 책을 꽂을 때  앞쪽에서 2cm쯤 들어가게 꽂으세요.
   (책꽂이 뒤쪽에 닿게 책을 쭉 밀어넣지 마세요. 그럼 보기 싫어집니다.)

4. 꽂을 책 권수를 여유롭게 생각해서 만드세요.
   (책꽂이가 남으면 책 표지가 보이게 책을 펼쳐서 꽂으면 됩니다. 그러나 책이 너무 많으면 ~
    똑같이 다시 만드는 거 아주 힘듭니다.)

5. 책꽂이만 목수에게 맡기면 비쌉니다. 다른 걸 한꺼번에 만드세요.
   (저는 침대, 식탁, 옷장, 신발장, 소파까지 모두 목수에게 맡겼습니다.)

6. 책꽂이 한두 개를 싸고 손쉽게 만들려면 싱크대 회사에 맡기세요.
   (가로, 세로, 각 칸의 높이와 간격을 표로 그려서 만들어달라 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책은 읽는 물건입니다. 꽂아두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양쪽 책꽂이에 책이 삼천 권쯤 됩니다. 저는 대부분 읽었답니다.

2년 전 사진입니다. 지금은 책꽂이가 꽉 찼어요.
코로나 끝나고 여기서 모임하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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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교회에서 일어난 가스폭발사고

머니투데이  2012 년  7 월  21 일 기사

시골 작은 교회에서 가스가 폭발했다. 목사님 부부가 아이들을 위해 무료 공부방을 운영하며 간식을 준비하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교회에서, 아이를 위해 헌신하다가, 가스가 폭발해서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

하나님께서 내 등을 떠밀며 소달초에 가라 하셨다. 이미 다른 학교에 발령이 나서 안 가도 되는 학교였다. 아픈 아이들을 돌볼 사람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소달초에 가기로 결정했다. 소달초는 교감 없이 교사 두 명이 아이 일곱 명을 가르쳤다. 나와 함께 근무하는 교사는 지난해에 신규교사로 발령받았다. 아이 일곱을 내가 맡은 셈이다.

전교생 일곱 명 중 셋이 화상 환자였다. 화상 입지 않은 아이들도 아팠다. 한 아이는 삼 년 동안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다가 4학년 때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는 아빠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어른, 특히 남자에게 말을 하지 않는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다. 일곱 명 중 다섯은 부모가 이혼해서 엄마가 아이를 떠났다. 여섯 아이 아빠는 광부였다. 아이들 삶이 석탄 갱도 마지막 구간처럼 어두워 보였다.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사가 무얼 해야 할까?

부는 소달초에 가게 된 과정, 가스폭발 사고로 화상을 입은 아이들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소개한다.

 

1. 교회에서 가스폭발 사고가 나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할까?

1주일 동안 두 학교로 발령을 받다.

2013년에 동해시에서 삼척시로 근무지를 옮기며 교사로 첫걸음을 시작한 곳에 가겠다고 신청했다. 그런데 이곳에 자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2013210일에 인사 담당 장학사가 신동초등학교로 가달라 했다. 15km 더 멀고 두 학년을 같이 가르쳐야 하지만 괜찮았다. 2013215, 삼척 신동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때 예능 프로그램 <12>이 인기가 높았다. 217일에 <12> 출연자들이 신동초등학교 아이들과 운동회 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뛰어놀았다. 연예인보다 아이들이 눈에 더 들어왔다. ‘저 아이들과 지내겠구나!’ 생각하며 이름을 외웠다. 아이들 얼굴을 기억하며 새로운 학교를 기대했다.

월요일,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들이 12일 이야기를 했다. 어떤 분은 나를 보면서 “1!”이라고 인사했고, 나는 “2!”이라고 대답했다. 인사하면서 즐거웠다. 누군 귀엽더라, 누군 달리기 잘하더라 하며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유난히 힘들게 지낸 학교에서 떠나게 되어 기뻤고, 화면으로라도 아이들을 먼저 만나서 참 좋았다.

나흘 뒤 금요일, 교무실에서 일하는데 전화가 왔다. 삼척교육청 인사 담당 장학사였다. 신동초등학교 대신 소달초등학교로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황했다. 난 이미 신동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무슨 일일까? 신동초등학교에 인사하러 가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왜 갑자기 다른 학교로 가라 할까? 정말 이상했다. 동시에 번쩍하며 가스 폭발사고가 생각났다.

 

가스 폭발사고

소달초등학교는 탄광 마을에 있다. 탄광이 번창하던 1980년대에는 학생이 많아 3층 건물을 올렸다. 운동장 옆에 2층 건물이 하나 더 있어서 전체 교실이 20칸이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학생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2012년에는 교사 4명이 아이 14명을 가르쳤다. 한 학년이 2~3명뿐이어서 교사 한 명이 두 학년을 한 교실에서 가르쳤다. 세 명은 담임을 맡았고, 한 명은 교무 업무를 하며 두 과목을 전담으로 가르쳤다. 11교실을 써도 될 만큼 넓은 곳에 아이가 14명뿐이었다.

소달 마을 위쪽에 경동탄광 사원아파트가 있다. 경동아파트에 아이들이 십여 명 있는데, 일부는 7km 떨어진 도계초등학교에 다녔다. 친구 많이 사귀라고 가까운 학교 놔두고 큰 학교에 자녀를 보냈다. 마을에 있는 은총교회에서 방과 후에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무료로 공부방을 운영하며 아이들 간식을 챙겨주셨다. 경동아파트에 사는 아이 몇 명은 도계초등학교에 갔다가 방과 후에는 교회에 왔다.

교회 바로 뒤편에 빈집이 있었다. 교회에서 집을 사서 형편이 어려운 가정이 쓰게 했다. 그 가정이 가스 온수기를 설치해서 쓰다가 4년 뒤에 이사 갔는데 교회에서는 이 사실을 몰랐다.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사모님이 간식을 준비했다. 이날 마침 성도들이 점심을 준비하느라 가스레인지를 다 사용했다. 빈집에 가스레인지가 있는 게 생각나서 사모님이 찐빵을 들고 빈집에 가서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가스 온수기에서 가스가 누출되었는데 사모님은 가스 온수기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가스가 폭발하면서 밖에 둔 가스통까지 모두 터지고 말았다.

이 일로 열 명이 화상을 입었다. 사모님과 도계초 5학년 남자아이가 전신 50% 3도 화상을 입었다. 소달초 6학년 남자아이 두 명이 중증 화상을 입었고 다른 여섯 명도 화상을 입었다. 며칠 뒤에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큰 사고인데다가 아이가 아홉 명이나 다쳐 학교와 지역 단체에서 오랫동안 모금 운동을 했다.

도계초 교장 선생님이 이외수 작가에게 부탁해서 사고가 알려졌고, 여러 사람이 치료비를 후원했다. 치료비는 채워졌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견디는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몰랐다. 소달초등학교는 전교생 14명 중 5명이 아팠으니 학교에서 아무 행사도 못 했을 것이다. 현장학습과 수학여행도 못 가고, 운동회도 못 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겠지만 무거운 분위기를 날려버리지는 못했을 것 같다.

왜 갑자기 소달초로 가라 하는지 장학사에게 물었다. 2012년에 소달초 전교생이 14명이었다. 침울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로 2012년을 마쳤는데 7명이 졸업했다. 졸업생은 많고 입학생이 없었다. 학부모들은 가스 폭발사고, 화상 환자 이미지가 강한 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으려 했다. 2013년에도 입학대상이 있지만, 학교에 오는 아이가 없었다. 모두 인근 학교로 가버렸다.

3학년 2, 4학년 1, 5학년 2, 6학년 2명이 남았다. 학생이 줄어 교사도 줄었다. 교사 두 명이 다른 학교로 갔고, 교무 선생님과 신규교사만 남았다. 교무 선생님은 존경하는 형이다. 어느 학교에 가든지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아이 찾아다니며 도와주었다. 집을 고쳐주고 화장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소달초에서는 이상한 부모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자, 온갖 쌍욕을 들으면서도 집에 찾아가고 또 찾아가서 3년 만에 아이를 학교로 데려왔다.

가스폭발 사고가 일어난 뒤에 형은 병원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보살폈다. 후원금을 모으고, 언론을 상대하고, 병원에서 아이들을 돌봤다. 병원에서 아이 곁을 지키다가 며칠 지나서 학교에 일하러 오기를 반복했다. 화상은 금방 낫지 않는다. 학교에 나와도 특별하게 돌봐야 했다. 형이 아이를 돌보며 점점 지쳐갔다.

입학생이 있는데도 입학하지 않는 학교는 내리막을 달리는 눈덩이와 같다. 1년 지나면 4~6학년 5명만 남는다. 이때도 입학생이 없으면 ‘3년 뒤에 학교가 문을 닫는구나!’ 생각해야 한다. 친구가 없고, 1학년 다음에 4학년 2명만 있다면 누가 아이를 보내겠나! 더구나 화상을 입은 아이가 셋이나 있다. 소달초 동문회 임원들도 아이를 모교에 보내지 않았다. 학교 분위기가 어두웠다.

 

아이를 돌보다 지친 선생님이 수술을 받는다.

신규교사일 때 교사 공부 모임에서 형(교무 선생님)을 만났다. 재미있는 수업 아이디어를 많이 가르쳐주셨다. 형은 간이 약하게 타고나서 자주 아팠다. 피곤하면 몸이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다친 아이들을 돌보며 학교 업무까지 처리하느라 지나치게 일했다. 간이 약하기 때문에 아프면 회복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화상 입은 아이들을 돌보면서 형은 회복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결국 간 이식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몸은 이식한 간을 자기 신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가 아니라 세균이라 판단해서 면역 체계가 이식한 간을 공격한다. 이식한 간이 몸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데 면역 체계가 공격하니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면역 억제제를 먹어야 한다. 면역 억제제는 세균과 싸우지 않게 만드는 약이다. 이식한 간뿐만 아니라 몸에 들어오는 모든 세균과 싸우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면역력이 약해져서 감기에 걸려도 잘 낫지 않는다. 이처럼 위험하기 때문에 건강이 최대한 악화할 때까지 간 이식을 늦춘다고 한다. 약해져서 아파도 자기 간으로 버티는 게 낫기 때문이다.

형은 간 이식 외에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약해졌다. 기증자를 찾기 위해 가족을 검사했다. 자녀가 적합하지 않았는데 조카가 기증하겠다고 했다. 소달초에는 가스폭발 사고가 나고 학생이 줄어 교사 둘만 남았다. 정규발령이 끝난 뒤에 수술이 결정되어 형이 휴직을 신청했다. 이식수술하고 회복하려면 1년은 쉬어야 했다. 그럼 소달초에 교사 한 명만 남는다. 남는 교사는 지난해에 처음 교사가 된 신규였다.

소달초등학교는 소규모 학교라서 교감이 없다. 20학급, 30학급에서 20~30명 교사가 하는 일을 둘이 모두 해야 했다. 교무 선생님은 교감 업무까지 해야 한다. 보건교사가 없어서 보건 업무도 해야 하고, 전담 교사가 없어서 모든 수업을 담임교사가 해야 했다. 그것도 두 학년을 동시에 가르치는 복식수업을 하면서 해야 한다. 교무부장 곁에는 이제 2년차 교사뿐이다. 교무부장이 2년차 교사 데리고 교감, 교무, 연구, 과학, 생활, 정보, 체육, 환경, 보건, 독서, 학부모…… 끝없이 이어지는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운동회도, 현장학습도, 출장도 모두 두 사람 몫이다. 게다가 화상 치료를 하는 아이가 셋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때에 이식이 결정되었다. 한 달 일찍 이식이 결정되었으면 형은 큰 학교로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그럼 큰 학교 소속이 되어 휴직했을 테고, 큰 학교에는 신규교사나 기간제교사가 오면 된다. 교사 한 명이 빠져도 다른 교사가 많으므로 감당이 된다. 소달초에는 새로운 교사를 보내면 된다. 소달초에 가려는 교사가 없다 해도, 정규 발령인지라 순위가 낮은 사람을 보내면 된다. 그러나 정규 발령이 끝난 뒤에 갑자기 이식이 결정되는 바람에 교무부장 자리가 비었다. 교원 인사 규정에 따르면 신규교사가 소달초에 와야 했다.

규정대로 소달초에 신규교사를 발령내면 1년차 교사와 2년차 교사 둘이 학교를 책임져야 한다. 2년차 교사가 교감, 교무, 연구, 생활, 체육, 독서 업무를 하면서 3학년과 4학년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에 처음 근무하는 1년차 교사가 정보, 과학, 환경, 학부모 업무와 기타 업무를 하면서 5학년과 6학년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보건교사가 없으니 아이가 다치면 선생님이 치료해주어야 한다. 경험이 없는 교사 둘이 이 모든 일을 하면서 가스폭발 사고 후유증으로 아픈 아이들을 어떻게 감당하겠나!

삼척교육지원청에서 경력이 있는 선생님을 소달초에 보내려 했다. 소달초에서 근무할 교사를 찾는 공문을 추가로 삼척 관내 학교에 보냈다. 정규 인사발령이 난 뒤에 한 사람을 찾는 공문을 보내는 경우도 없거니와, 고생이 뻔한 곳에 스스로 올 사람도 없었다. 규모가 있는 학교 교무를 구했다면 누군가 신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규 2년차 교사와 단둘이 화상 환자를 돌보는 자리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삼척과 동해는 작은 중소도시이다. 특히 교직 사회는 좁아서 서로를 잘 안다. 신동초로 발령 났을 때 여러 사람과 소식을 주고받았다. 신동초등학교 선생님과도 전화로 인사하고 학교에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다들 거절한 자리에 가야 할까? 전화를 받자마자 왜 나일까?’ 같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무조건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해에 소달 마을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다는 마음이 훅 들어왔다.

장학사가 소달초등학교로 갈 수 있느냐며 전화했을 때 가스 폭발사고와 함께 소달초 교무 선생님이 생각났다. 형은 아이들과 교회를 위해 젊은 날을 바쳤다. 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며 사랑했다. 형이 다니는 교회에 아이들이 찾아왔고, 형은 아이들에게 부모가 돼주었다. 형을 아빠처럼 따르던 아이들은 어른이 된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형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형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헌신할수록 교회가 형을 부려 먹었다. 형은 목사에게 실망해서 교회를 떠났다.

형에게 가끔 형이 교회를 떠났지만 예수님은 마음에 있겠지?” 하고 물었다. 그럼 형은

교회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을 버렸는데, 너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고 했다.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에게 교회 가란 말을 자주 하면 반발할 것 같아 몇 년에 한 번씩 가끔 물었다. 그럼 형은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목사에게 상처받아 교회를 떠난 형이, 가스폭발 사고를 당한 아이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하다가 간을 이식할 지경에 이르렀다. 형을 대신할 사람을 찾다가 아무도 없어서 나에게 가달라고 한다.

내가 소달초에 가야 할까?’

 

2021년 <곁에.서>라는 제목으로 글을 보내드렸습니다.
얼마나 공개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좋은교사 글쓰기 연수를 했다.
10월부터 1월까지 열 번 동안 만나, 글쓰기를 배우고 직접 글을 썼다.
모르는 분들이 서로 알아가며 마음을 글로 표현했다.
연수하며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었다.         ---------- 표지----->
마지막 과제인 <연수 후기>를 소개한다.

                               나에게 글쓰기 연수는 어떤 의미를 남겼나?
전북 교사

20222학기 권일한 선생님의 글쓰기 연수를 신청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란 나에게 잘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는 것이었다. 교사가 되고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야 했다. 나도 자신 없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어려웠다. 그런 글쓰기 지도에 용기를 가지고 문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10회 동안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 지도를 받고 난 후,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이번 연수로 무엇을 배웠니?’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것을 뱉어내기에는 모호했다. 적다가 그만두고, 시도를 계속하다가 제출일이 다가왔다.
이제 어떻게든 써야 한다.”

먼저, 이번 연수를 통해 글쓰기 지도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나부터 글쓰기를 시도해 보았다. 오히려 글쓰기에 대해 배우고 나니 염두에 둘 것이 많아져 글을 쓰기가 더 어려웠다. ‘더구나 이를 가르친다고?, 내가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시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글을 쓸수록 나에게 글쓰기가 주는 여운이 진했다. 내 안에 잠깐 머물러 가는 감정과 생각을 놓치지 않고 글로 낚아 뱉어내는 순간, 진한 감동이 있었다. 글을 쓰고 난 후에도 꽤 오래 따뜻함이 마음에 머물렀다. 그 감동을 안고 살아가는 경험이 신선했다. 글쓰기 맛을 경험하고 나니 이를 가르쳐야 할 이유가 명료해졌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도 이 감동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삶이 더욱 따뜻할 것 같다.

내가 글쓰기가 어려워서 좌절했던 이유는 글쓰기 지도 목적을 아이들이 쓴 글, 즉 결과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결과보다는 글을 쓰고, 함께 나누는 과정 자체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단 아이들과 함께 써보려고 한다. 그렇게 하나씩 하다 보면 나도 성장하고 아이들도 성장하겠지.

이 밖에도 연수를 들으며 글쓰기교사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연수를 듣기 전에는 글쓰기를 잘하려면 글을 쓰는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글쓰기 지도란 책을 많이 읽어서 배경지식을 얻게 하고, 글을 쓰는 기술을 가르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수를 들으면서 내가 좋은 글이라고 느낀 글은 넓은 배경지식과 정교한 글쓰기 기술로 쓰인 글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삶 속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로 울림 있게 전하는 것. 이런 글을 만났을 때, ‘! 좋다.’ 하며 마음이 동하였다.

권일한 선생님은 이런 글을 위해선 교사가 아이들 마음 문을 두드려야 한다고 하셨다. 어쩌면 교사의 역할은 글쓰기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도 모르게 닫힌 마음을 열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내가 글쓰기 지도를 어려워했던 이유는 기술을 잘 가르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글쓰기와 교사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변하니, 글쓰기 지도를 해보고 싶다.

교사로 발령받아 106개월 교직 생활을 경험하고, 지역을 옮겨 교사 제 2막을 시작하는 나에게 이번 글쓰기 연수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연수를 받으면서 앞으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함을 다짐한다. 나에게 아이들을 맞추려 하지 말고, 그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두드리는 교사가 되고 싶다. ‘이라는 연결 고리로 아이들과 통()하길 시도해봐야겠다.

 

                                                김 선생님을 위한 추천 연수
서울 교사

김 선생님,
글쓰기 연수가 얼마 전에 끝났어요. 연수를 받으며, 종종 선생님과 함께 배우는 상상을 했어요. 좀 더 빨리 연수 소식을 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집합 연수라는 착각만 하지 않았어도, 분명 선생님은 흔쾌히 배움에 동참했겠지요? 실시간 화상수업으로 진행된 이번 연수는 수업 후 먼 집까지 가야 하는 부담도, 엄마를 기다리다 일곱 살 아들의 목이 늘어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죠. 3개월간의 글쓰기 수업이 궁금했을 선생님을 위해, 나만 누려 아쉽고 미안했던 호사에 대해 몇 자 적어볼게요.

3년 전, 쓰고 싶은데 쓸 수 없어 갑갑했던 내 눈에 ***문화센터 글쓰기 강좌가 들어왔어요. 강좌명에 홀딱 사로잡혔으면서도, ‘글쓰기를 혼자 배울 엄두가 나지 않았죠. 그때 지나가는 말로 물었는데, 단번에 함께 등록을 해줘서 얼마나 힘이 되었던지요. 첫 과제 나에게 글쓰기란?’이라는 주제로 써낸 선생님의 글은, 또 얼마나 나를 자극하고 감탄케 했던지요. ******에서 뒤처진 동료를 두고 갈 수 없어 혼자 남아 기다려야 했던 30, 점점 조여오는 조난의 공포를 감당하게 했던 건 손바닥만 한 일기장이었다고 했어요. 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에 글쓰기를 선택했던 선생님, 그런 김 선생님에게 이 연수가 딱 어울려요.

글쓰기 수업의 으뜸은 권일한 선생님을 3개월 넘게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따님들에게 풍긴다는 아빠 냄새를 우리도 마음껏 맡을 수 있거든요. ‘책 읽고 공부할 마음이 생기게 한다는 아빠 냄새를 말이죠. 독서 관련 연수로 권일한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을 특별하게 보이게 했던 것도 바로 이 냄새였을 거예요. 강의를 듣고 있는데, 미치도록 책이 그립게 만들던 냄새였어요. 그 후 권일한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으나 검색 능력의 부족 탓인지, 정보력이 꽝인지 통 기회가 오지 않았죠. 세상에나! 그런 제게 동학년 000 선생님은 권일한 선생님을 자석처럼 끌어다 놓으셨어요. ~ 은혜로운 선생님! 그런데 이상도 하지요? 입도 뻥긋 한 적 없었는데 말이죠. 끌어당김의 법칙이 정말로 존재하는 모양이에요.

김 선생님, 이 연수 덕분에 나는 우리 집 서재에서 전국 각지에 계신 선생님들을 만나고 사귈 수 있었어요. 저를 포함하여 9명이 매주 또는 2주에 한 번씩 오붓하게 만났어요. 어색함은 글과 시간을 나누는 사이 사라졌고, 온라인 공간이지만 마주 보면 반가운 인연이 되었지요. 배움의 열정과 글쓰기를 향한 부지런한 사랑을 이분들로부터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물론 나는 그중 가장 게을렀지만요. 선생님과 함께 이분들을 만났다면, 그리고 이분들도 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겠다 싶어요.

우리가 함께 배웠던 글쓰기 수업과 이번 연수의 가장 큰 차이는 아이들의 유무에요.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를 배우고 써보았던 ***문화센터 글쓰기 수업은 나로 가득한 시간이었다면, 좋은 교사 글쓰기 연수는 늘 아이들이 그 중심에 있었지요. 나도 몰라 대충 가르쳤던 장르의 글쓰기에 접근하는 요령을 배웠어요. 좋은 글은 형식을 가르치기에 앞서, 쓰고 싶은 마음을 끌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새겼구요. 글 속에 담긴 아이 마음을 읽고, 응어리를 글쓰기로 다독이고 풀어줄 수 있음을 믿게 되었어요.

김 선생님, 좋은 교사 글쓰기 연수에 참여할 기회는 1년에 한 번 오나 봐요. 그 기회가 왔을 때, 선생님의 일상이 평안하여 망설임 없이 잡을 수 있길 바랍니다. , 가끔 성경을 들려주시는데 문외한인 저에게도 와닿는 구절이 종종 있었어요. …… 선생님은 종교가 있었던가요……? 그러고 보니, 4년을 만나며 서로의 종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군요. 우리 더 알아가기로 해요. 여러모로! ^^

 

                                                        연수를 마치며
서울 교사

이번 글쓰기 연수에 참여한 건 오로지 권일한 샘께 직접 배우고 싶다였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다. 권샘의 진짜 비결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우리 반 애들도 신나는 글쓰기의 여정에 초대하였으며, 글쓰기를 전혀 하지 않던 나 또한 글쓰기의 매력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재미도 느끼고, 참여한 분들의 생각도 나누면서 글쓰기를 실제적으로 배웠다. 때로는 동료들에 비해 생각이 얕은 내 모습이 드러날까 봐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주어진 과제를 하기 위해 새로운 글쓰기를 학급 아이들과 시도해보면서 조금씩 내 것으로 소화했다. 과제가 모인 문집을 매번 받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결과물을 안겨줘야 애들도 기쁘고 더 잘 쓰려는 마음이 들겠구나를 직접 경험했다. 반 아이들이 써낸 글을 직접 읽고 타자로 작성하면서 내 마음도 점점 아이들과 가까워졌다. 게다가 반 아이들의 부족해 보이는 글이 점점 좋아졌다. 연수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 비결을 조금은 알게 됐다. 권샘처럼 아이의 처지와 마음을 알아주고 있는 그대로 아이의 삶을 받아주어야 한다.

이제 거대한 양이 된 문집. 하나, 둘 보이는 선생님들의 글에서 위로를 받는다. 글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 주셔서 글솜씨에 감탄도 연발하면서 샘들과 친해진 듯한 마음이 든다. 글쓰기는 분명 힘들지만, 글을 쓰면서 자신의 아픔이 치유될뿐더러 읽는 이에게도 같은 마음을 줄 수 있다.

연수 내내 잔잔한 강원도 억양으로 즐거움과 깊은 내용을 전해주신 권 선생님께 참 감사드린다. 선생님의 삶을 연수로 녹여 보여주셔서 더욱 감사하다.

 

                                                            <연수후기>
경기 교사

계절이 바뀔 때 느끼는 뒤숭숭함, 학년초와 학년말의 싱숭생숭함과 허전함, 간혹 기분이 착 가라앉을 때 나는 꽃을 사거나, 화려하게 꽃바구니를 만들어 내게 배달을 시켰다. 꽃을 보며 기분 전환을 하는 호사를 누린 것이고, 그 이면에는 나 이 정도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야.‘ 티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듯하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는데?”

몇 달 만에 만나는 팀원들이 이 말을 할 때, 사진을 찍어준 후 사진을 보여주며,

봐봐. 확실히 달라졌다니까. 분위기랑 표정이 달라졌어.”

라고 할 땐,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문득, 요즘 내게 꽃 선물을 안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왜일까 생각하다가 몇 가지 이유를 찾았고, 그것을 팀원들과 나누었다.

가장 큰 것은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졌다.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니 사람에 대해 실망할 것도, 기대하다가 맘 다치는 일도 적어졌다. ’그럴 수 있어. 당연하지 뭐.‘가 되니,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힘들고 불편한 관계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욕심도 내려놓게 되어 고민 끝에 모임도 정리를 했다. 이러는 도중 만난 것이 글쓰기 연수를 통해 만난 산둥 수용소였다. 극한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자신의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며 처음엔 충격이었지만 그럴 수 있고, 그것은 당연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인생 책이라고 하고, 정말 좋은 책이라고 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귀가 팔랑거려 구입하였는데 이제는 이 책을 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나누고, 책 모임 사람들과 작년 11월 함께 읽고 나누면서 한 번 더 사람에 대해, ’에 대해,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글쓰기‘.

글쓰기를 많이 시키고, 나름 글을 쓴다고 생각했었는데 주제별로

숙제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글은 사람을 나타낸다. 글을 읽으면 글 속에 숨겨진 그 사람이 보인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나인지라 글 쓰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그리고……강의를 들을수록 권일한 선생님께 글을 보인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나를 드러내는 것 같아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고, 버틸 만금 버티기도 했다.

이런 글쓰기 작업을 통해 내 생각, 내 삶과 교육의 지향점 등을 돌아보며 군더더기를 덜어내듯 아주 조금이지만 생각 정리도 되었다. 지금도 정리 작업 중이기에 덜어내기가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글쓰기 연수가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한 를 보게 하고, ’를 좀 더 따뜻하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으니 여유있게 작업을 이어가려 한다.

책 모임을 위해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서 얻은 황금 문장이 있다.
"인생은 'B' birth'D' death 사이의 'C' choice." (장 폴 사르트르)
멋있다 생각하여 언젠가 써먹기 위해 기억해두었던 문장인데 이 글에서 처음 사용한다.

삶이 선택이라면, ’글쓰기 연수는 나의 탁월한 선택이었고, 이 연수를 통해 나를 긍정적으로 돌아보게 된 것 또한 나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선택에 탁월한 안목이 있는 나를 칭찬한다. 앞으로 또 수많은 선택에 당면할 것이지만 사려깊게 선택할 것이고,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보다는 감사하며 내 맘을 지키고 나를 지켜갈 것이다.

 

                                                 자기 부인의 시작
부산 교사

글쓰기에 목마름이 있었다. 글쓰기 연수 시작 한 달 전에 *** 프로그램 작은책반을 끝냈던 차였다. 책을 쓰면서 머릿속에 있던 것들을 풀어냈지만, 문장이나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에 부족함이 느껴졌다. 문장을 매끄럽게 쓰고 싶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논리정연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책을 쓰기 전까지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썼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기도 했고, 뒤죽박죽된 생각들이 논리의 순서와 상관없이 나열되기도 했다. 퇴고하며 글을 다듬을 수 있었지만, 책 쓰기 전까지는 그마저도 잘 하지 않았다. 책을 쓴 이후로,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내가 잘 쓰면, 아이들을 가르치는데에도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연수를 들으며, 글쓰기를 가르치는것이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친다는 말의 늬앙스에 이미 힘의 구조가 느껴진다. 가르치는 사람이 위에 있고, 배우는 사람이 아래에 있다. 통제의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모든 가르침이 그렇겠지만, 통제 아래에서는 제대로 배울 수 없다. 형식과 방법은 배울 수 있어도, 마음은 배우지 못한다. 나와 너가 분리되고, 공동체는 사라진다. 나는, 힘의 구조 위에서 군림하며 가르치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드러나는 글은 가르침에서 오지 않는 거 같다.

나는 글쓰기 연수에서 무엇을 얻고자 했던 걸까? 솔직히, 아이들의 마음보다 아이들 글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내면보다 외양에 치중했다. 나는 안전한 상황이 아니면 내 감정을 무시하기에, 아이들의 감정도 쉽게 넘겼다. 감정이 드러나는 게 두려웠다. 아이들의 글에 드러나는 감정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글쓰기를 제대로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이들 글에 드러나는 아이들의 감정을 덮어두고 싶어서, 아이들의 글을 외면했던 건 아닐까?

대학원에서 상담을 공부하며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냈다. 대학원 졸업 후 후유증이 너무 심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기도 했고, 상담을 자체적으로 쉬었다. 학급에 상담이 필요한 아이가 있었는데, 외면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도닥여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감정의 힘을 알아차려서인지, 내 감정이 날뛰는 것을 혼자서는 제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성의 힘을 빌렸다. 감정을 이성으로 풀려고 했다.

어떤 선생님은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는 자신의 슬픔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는 내 슬픔이 버겁기만 하다. 시나브로 흘려보내려고 감정일기를 쓰고 있지만, 알아차리지 못하게 흘려보내는 것으로 감당할 수 있는 양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담는 말은 보이는 재주와는 다르다. 말로 꽉 채우지 않고, 사람이 머물 공간을 비워둘 수 있어야 한다. 말 자체가 빛나기보다는 사람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말 그릇, 207-전자책을 소장하고 있어서 종이책으로 쪽수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빛나고 싶어서 말을 잘하고 싶은 걸까, 상대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말을 잘하고 싶은 걸까?’ 이 생각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빛나고 싶어서 글을 잘 쓰고 싶은 걸까, 아이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글을 잘 쓰고 싶은 걸까?’ 교사의 영광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답이다. 자기 부인은, 아이들의 글을 제대로 마주하면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연수후기>
전북 교사

어색한 첫 만남으로 시작한 연수. 이미지만으로 다른 이가 좋아하는 책을 찾는 활동, 모둠 이름 만들기, 글 맛보기 활동 등, 책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은 어색함을 기대감으로 바꾸는 데 충분했다. 글감 글쓰기는 무엇을 써야할 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너무나 유용한 글쓰기였는데, 다양한 글감을 찾아보고 그 중에 하나를 가지고 글을 쓰니 재미있게 글을 쓸 수 있었다. 1분 글쓰기는 그 1분을 생각하는 것으로도 흥미진진했고, 글을 그렇게 즐거워하며 써본 경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즐겁고 자세하게 묘사하며 글을 써볼 수 있었다. 줌으로 가능할까 생각하며 활동했던 탐정 글쓰기는 가장 짜릿하게 참가했던 시간이었다. 매시간 선생님 강의는 너무 재미있었고, 배우는 기쁨이 가득했다. 빨리 학교 현장에 다시 돌아가서 아이들과 책놀이를 하고, 글을 쓰는 기쁨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연수를 받으며 큰아이에게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친구 문제로 괴로워하는 줄은 알았지만, 글에서 아이의 목소리로 너무나 외로웠다는 감정이 전해지니 부모로서 아무것도 못 해주는 상황이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다. 그 글을 쓴 이후로 아이는 신기하게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는 표현을 썼고, 기적적으로 몇 개월간 쌩까고 지낸 무리의 아이들과 다시 친해지고 다니던 학교를 잘 졸업하였다.

권일한 선생님 글쓰기 연수를 듣기 전 글쓰기에 대한 마음이 어땠을까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교사인 내가 글을 쓰는 능력을 기르고, 아이들에게도 그 능력을 길러주게 하고 싶다가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나 연수가 진행될수록, 내 자녀의 글쓰기를 통한 회복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에게 삶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선물 같은 일이 될까 생각하였다. 상담 글쓰기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특별한 노하우가 아닌,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하였다. 아이들에게 글을 통해 아픈 마음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마음을 글과 글을 읽은 내가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힘이 되지 않을까. 그게 함께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지난해가 힘들었기 때문일까? 이번 방학에는 책만 읽었다. 글을 쓰지 못했다. 초등 전 학년 국어지도서 보며 몇 가지 정리한 일 외엔 쉬기만 했다. 방학이면 늘 글 쓰고, 다음 해 아이들 만날 생각하며 바쁘게 살았는데 올해는 그저 쉬었다. 내 생애 이런 방학은 처음이다.

6학년을 맡았다. 교육과정, 진도표, 시수표, 주간학습안내 다 준비했다. 평소에는 아이들과 하고 싶은 계획을 세웠는데 올해는 업무만 했다. 필요한 서류 끝내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과 무얼 할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훌훌을 읽으면서 예전의 나를 찾은 것 같다. 편부모 가정,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등의 이름으로 뭔가 부족한 아이일 거라고 이름 붙인 아이들이 생각났다. 부모가 다 있는데도 아픔과 고통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 했던 아이도 생각났다. 그 아이들 마음을 읽고, 감추어둔 마음을 찾아내어 훌훌 털어버리게 하려고 노력했던 날들이 생각났다.

마음을 살피려고 노력하면서 아이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겼다. 훌훌에서 연우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보였다. 유리와 세윤이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엄마 서정희 씨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왜 자신을 더 아프게 했는지 안다. 훌훌에는 모두를 품는, 사랑이 아주 많은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유리는 연우에게 화를 내며 때렸다. 로봇처럼 차가웠던 할아버지는 폭발했다. 고향숙 선생님은 두 학생의 시비에 평정심을 잃었다. 세윤이는 갑자기 침묵했고 유리는 살던 곳에서 떠날 생각만 했다. 그런데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 조금씩 손을 내밀고, 마음을 나누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간다. 이 과정이 참 자연스러웠다.

나와 메일을 주고받는 후배가 있다. 힘들다고 메일을 보내면 답을 보내주었다. 며칠 전에 입양은 생각해봤어?” 묻고 싶었다. 훌훌은 입양을 다룬 책이다. 같은 동네에서 사는 친구가 아이를 입양한 지 10년쯤 되었다. 입양한 아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다른 분도 안다. 그러나 후배에게 입양을 생각해보라고 말하지 못했다. 내 말이 후배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혈통주의가 강하다. 작가가 어떻게 훌훌을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나는 작가를 안다. 작가가 쓴 글을 오랫동안 읽었다. 처음에 글 쓴다 했을 때 말리고 싶었다. 상상하는 힘이 뛰어났지만, 부족함도 많았다. 아이가 글을 쓴다면 단점을 극복하겠지만, 어른은 쉽지 않다. 더구나 소설은 정말 만만찮다. 훌훌을 읽으며 이제 문경민 작가 글 읽고 뭔가 도와주겠다는 생각은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초안을 읽었는데 훌훌은 그때 글과 견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글을 썼냐?” 하면 , ~” 하며 뭐라뭐라 할 텐데 그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이 책 참 좋다.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제 기억에 남은 <<나눔 추억>>을 소개합니다.

#_번째_학교 - 삼척남초, 3-4-6-5-6학년
도덕 시간에 봉사하는 삶을 배우면서 이웃돕기 모금을 했다.
5학년과 17만 원을, 같은 아이들과 6학년 때 50만 원을 모금했다.
동네 할머니, 소아암 환우, 사할린 할머니 집에 보내드렸다.

사진> 동네 할머니께 쌀과 라면 갖다드렸다. 비가 와서 쌀 포대가 터졌다. 그래도 아이들은 웃었다.

#_번째_학교 - 삼척초, 4-4-6학년
4학년과 도덕 시간에 이웃돕기 모금했다.
어떤 단체에 보냈는데, 금액도 기억나지 않는다(20만원쯤?).

#_번째_학교 - 도계초, 3-3-1학년
태풍 루사와 매미로 아이들이 수해를 입었다.
선생님의 숨바꼭질』 Ⅱ. 1장에 소개했다.

#_번째_학교 - 마읍분교, (1,4)-(1,2)-(4,6)학년 복식
국민편지쓰기 대회 금상, 청소년 문예제전 금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50만 원, 30만 원 받은 아이에게
“10%는 네 것 아니다. 다른 사람 도와주면 좋겠다.” 했다.
아이들은 5만 원, 3만 원을 기부했다.
선생님의 숨바꼭질내용의 절반이 이 아이들 이야기다.

#다섯_번째_학교 - 정라초, 5학년-전담(연구학교)-전담
대한민국 독서토론/논술대회 초등부 대상과 몇몇 상을 받았다.
아이에게 기부하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여섯_번째_학교 - 북삼초, 전담(교무부장)-2학년
나눔, 기부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일곱_번째_학교 - 소달초, (3,4)-4-(5,6)-(1,2)학년 복식
가스폭발 사고로 화상 입은 아이들 <<곁에.>> 지냈다.
<<곁에.>>라는 펀딩의 주인공들이다.
아이들 이야기를 글로 써서 10달 동안 보내드리고 후원을 받았다.
천만 원은 화상재단에, 오백만 원은 재소자 자녀 돕기 단체에 보냈다.

#여덟_번째_학교 - 미로초, 2-4-3-3학년
청소년문예제전 초등부 최우수상을 2년 연속 받았다.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받은 아이들에게 10% 이상 기부하라고 했다.
아이들이 이곳저곳에 10% 이상 기부했다고 알려주었다.

#아홉_번째_학교 - 삼척남초, 6학년
기부와 관련해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했다.
방학 동안 <<화상 환자 건강보험 적용 요청>> 글을 써서 국민청원했다.
동의 요청 메일을 받은 분 중에 한 작가가 30만 원을 보내주셨다.
10년 동안 화상 치료를 위해 수십 번 수술한 아이에게 50만 원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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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손을 잡고 함께 나누었던 일이 <이야기>로 남았다.
이런 이야기가 아이들의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하리라 믿는다.

나누면 따뜻해집니다.
따뜻한 세상을 바란다면, 함께 나누어요.

이번에는 제가 자녀를 기른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빠 냄새 책 냄새>> 펀딩에 참여해주세요.
3~12월까지 저는 글을 보내드리고, 여러분은 후원금을 보내는 펀딩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forms.gle/ADLvhtUWZsAUY23y5

 

아빠 냄새. 책 냄새. 신청 안내

안녕하세요. 저는 책을 아홉 권 쓴 아빠,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책을 읽고, 책으로 수업하고, 책으로 강의하는 책벌레입니다. <곁에.서>라는 이름으로 펀딩해서 한림화상재단(1000만원)과 세움(500

docs.google.com

 

근덕초등학교에 소속된 분교가 셋이었다.
마읍분교 전교생이 5명, 노곡분교 5명, 동막분교 14명이다.
마읍분교는 이쪽 산에, 노곡분교는 저쪽 산에,
동막분교는 가운데 바닷가에 있다.
화요일마다 동막분교에 모여 아이들과 글을 썼다.
마읍 아이들은 내가, 노곡 아이들은 노곡분교 선생님이 데려왔다.
나는 왕복 24km, 노곡 선생님은 왕복 26km 강원도 산길을 운전했다.
(내 계획을 듣고 허락해주신 교장 선생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첫날, 아이들이 쓴 자기 소개글을 읽으며 늘 하던 방식을 던져버렸다.
아이들에겐 마음을 만지는 자기고백이 필요했다.

이때 <상담 글쓰기>를 시작했고
대부분 내용을 <<선생님의 숨바꼭질>>에 실었다.

4학년 여학생이 아래 1문단 내용으로 자기소개 글을 썼다.
아이 이야기를 조금씩 들으며 엄마에게 편지를 써보자고 했다.
내용은 모두 아이가 썼으며 문단 순서는 내가 고쳐주었다.

하늘에 계신 엄마께!

하늘에 계신 엄마,

오늘처럼 더운 날에는 눈부신 해를 보면 자꾸 엄마 생각이 나요. 엄마는 저를 이 세상에 살아가도록 낳아주시고 일찍 돌아가셔서 저는 엄마한테 한 번도 효도해 드리지 못했어요. 자꾸 효도 얘기를 하든가 효도 생각을 하면 엄마께 효도를 못해드려서 마음에 걸려요. 다섯 살 때라도 엄마한테 한 번만이라도 효도해 드렸으면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거 후회 안 할텐데……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그런지 기억나는 일도 얼마 없어요. 내가 태어날 때 아빠를 닮아 이마가 클까봐 엄마가 걱정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엄마처럼 뚱뚱할까봐 맨날 기도했다고 했죠! 지금은 그 기도 덕분에 안 뚱뚱하고 날씬해요. 정말 잊혀지지 않는 게 하나 있어요. 3살 때 공원에 갔는데 엄마가 화장실 간다고 나를 할머니한테 맡기고 갔는데 나는 날 버리고 가는 줄 알고 엄마를 쫓아가다가 넘어져 이마를 다쳤어요. 그 흉터가 아직도 내 이마에 남아있어요. 그래서 앞머리를 만들어 흉터를 가렸어요. 가끔 흉터를 만지면 조금 파여서 느낌이 이상해서 내 이마가 싫을 때도 있어요. 엄마가 돌아가셔서 헤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저는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몰랐는지 울지도 않고 엄마묘만 바라봤대요. 이제 조금 철이 들어 엄마에게 편지를 쓰려고 해도 보내드릴 주소가 없어요.

그렇지만 엄마는 제가 항상 마음 아픈 일, 슬픈 일, 속상한 일 있을 때 제 꿈에 나타나서 절 즐겁게 해주셔서 조금은 위로가 돼요. 정말 고맙고 엄마가 제 곁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또 가끔씩 슬픈 일, 속상한 일, 마음 아픈 일 없을 때도 제 꿈에 나타나서 눈물 흘리며 자꾸 미안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날은 그 꿈 때문에 엄마 생각이 나서 우울하고 쓸쓸해요. 그러니깐 제 꿈에서 눈물 흘리며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엄마가 일부러 자살해서 죽은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일찍 죽어서 미안하다고 하세요? 엄마는 아빠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리고 저한테 미안하다고 안 하셔도 되요. 엄마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절 잘 보살펴 주고 잘 키워주고 계세요. 그러니 엄마는 걱정 말고 제 꿈에서 울지 마세요. 그냥 제가 슬프고 우울하고 마음 아파 속상할 때 나타나서 즐겁게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저는 아무 것도 못해 드렸는데 엄마는 절 즐겁게 해주시고…… 엄마가 하늘에 계셔서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해 드리지만 엄마가 꿈에서 말한 것처럼 엄마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효도 많이 해드릴게요.

제가 7살 때 유치원에서 어버이날 축제 같은 걸 해서 할머니가 오셨댔어요. 할머니나 엄마가 우리를 도와주는 게임을 했는데요. 그때 할머니가 30분도 있지 않고 바빠서 집에 갔어요. 그때 엄마가 있었으면 끝까지 다른 아이들처럼 마칠 수 있었을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울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다른 할머니와 엄마를 우리 할머니랑 엄마라고 생각하고 어버이날 게임을 하고 그랬어요. 다른 할머니, 엄마들을 우리 할머니, 엄마라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해진 느낌이었어요. 저 이렇게 울지 않고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6살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동막으로 이사를 와서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요. 이사올 때는 나는 한 것이 없는데 왠지 피곤했어요. 엄마가 없어서 그랬나봐요. 아빠는 어디 갔는지 가버렸는데 올해 3월에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아빠! 하고 말하면서 받아보니 무슨 여자가 받았어요. 그때 새엄마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나는 괜찮지만 엄마가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어떨까 생각하니 엄마가 슬펐을 것 같아요. 엄마가 아빠 때문에 슬퍼하는 거 생각하니 화가 나요. 아빠도 그렇고 새엄마도 그렇고…… 아빠한테 새엄마가 생겨도 꿋꿋하게 잘 지낼게요. 그리고 엄마! 하늘에서 건강하게 사세요. 저랑 있을 때처럼 아프지 마시고요. 안녕히 계세요.

엄마가 보고싶은 딸 00 올림.


서울에서 열린 시상식에 마읍, 노곡, 동막 분교 아이들을 모두 데려갔다.
황금찬 시인께서 사인을 해주시고 사진도 같이 찍어주셨다.
고향 강원도에서 온 아이들이라며 책 많이 읽고 글쓰기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아이들과 서울 구경하고 돌아왔다.

초등부 금상 상금이 50만원이었다. 아이에게 말했다.

"10%는 네 것 아니다. 다른 사람 돕는데 쓰자."

아이는 5만원을 기부했다.

2007년에 있었던 일이다.

대상도서 : 「난설헌」, 최문희

초당 허엽



강릉은 묵향(墨香), 솔향(松香)의 고장으로 불린다. 예부터 글을 쓰는 선비들이 많아 먹물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는 곳, 소나무 향이 가득한 곳이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경포대에 올라 경포호를 바라보며 글을 쓰기 원했다고 한다. 기회가 생기면 얼마 동안 강릉에 와서 시를 쓰고 벗을 사귀

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유가 있는 선비는 좋은 집에서 지냈지만 그렇지 않은 선비들은 풀과 짚으로 임시 거처를 만들고 잠시 동안 지내다가 돌아갔다. 풀로 지은 집이 많았기 때문에 경포호수 주변을 ‘초당’이라고 불렀다. 강릉시 경포호수 주변은 도로명주소를 쓰기 전까지 줄곧 초당동으로 불렸다.

강릉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초당두부가 있다. 초당 마을에서 주로 판매하는 초당두부는 허엽이 처음 만들었다. 허엽이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초당두부 만든 인물로 더 알려졌을 것이다. 강릉은 천일염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두부를 만들기 어려웠다. 허엽은 소금 대신 동해 바닷물을 사용해서 두부를 만들었다. 동인의 우두머리인 허엽이 아낙네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초당두부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허엽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허엽의 호가 바로 초당(草堂)이다. 고상한 뜻을 지닌 호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 하필 ‘풀로 지은 임시 집’을 호로 삼은 까닭이 뭘까? 허엽은 화담 서경덕 밑에서 학문을 배웠고 동인의 영수였다. 이황과 다툴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며 대사성, 부제학을 지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학문과 권력을 가진 조선시대 양반이 두부를 만들었다니 이상하다. 조선시대 양반은 두부 만드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허엽은 당대 예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글을 가르쳤으며 자식들과 허물없이 시를 주고받았다. 난설헌 허초희가 안동 김씨 집안에 시집갈 때 시어머니가 “책 읽고 시 쓸 생각은 하지도 마라.”고 했다는 사실로 보아 허엽이 딸을 대한 태도는 당대 양반가에 파격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허초희의 글 솜씨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시에 반해 허초희를 인정한 선비가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여성에 대한 평가는 아들 낳는 어머니로 충분했다. 그러나 허엽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해도 여자가 어찌 시를 쓴단 말인가!’라는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 허엽의 자유로운 마음은 딸인 허초희를 시인으로 자라게 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어둠의 시대였던 조선은 허난설헌을 감당하지 못했다. 남성인 허균이 가진 파격적인 생각도 조선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가 재미있게 읽는 홍길동 이야기는 조선시대엔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었다. 허균과 허난설헌은 시대가 감당하지 못했다.

난설헌 허초희

허균과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은 지금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되었다. 소나무가 쭉쭉 뻗은 뜨락 사이에 정갈한 기와집이 있다. 나는 가끔 경포대와 허난설헌 생가에 간다. 경포대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며 호수 주변에 세워진 초당을 상상한다. 허난설헌 생가를 둘러싼 소나무 길을 걸으며 두 분이 어떤 마음으로 소나무 길을 걸었을까 생각한다. 사람과 가게, 자동차와 네온사인이 넘쳐나는 경포해수욕장과 달리 이곳은 옛 선비들의 숨결이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젠 다시 그곳에 가면 슬프고 힘들 것 같다. 허난설헌이 시집가서 고생하다가 28살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난설헌」을 읽기 전에는 어떤 고생인지 몰랐다. 마음에서 솟구친 시상이 머리에서 넘쳐나는데도 쓰지 못하는 아픔, 자기보다 학문과 인품에서 부족한 남편의 질투와 냉대, 딸에게 시를 가르친 허엽 일가를 멸시하는 시어머니의 말과 몸짓이 얼마나 큰 아픔을 주었는지 느꼈다. 여성이었기 때문에 시를 쓰면 안 되고, 딸이기 때문에 추억이 어린 집에 가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허난설헌은 시어머니처럼 날카롭게 분노하지 않았다. 무능한 남편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 정갈함과 고고함이 시댁 식구들에게는 더욱 미운 털이 되었다.

허난설헌은 정말 외로웠을 것 같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씌워진 굴레에 신경 쓰지 않았던 아버지 허엽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던 중에 병을 얻어 돌아오다가 상주에서 객사했다. 글로 마음을 나누던 오빠 허봉 역시 함경도 종성에 유배를 간 뒤에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38세에 객사했다. 허난설헌을 아는 사람들, 허초희의 글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쓸쓸하게 사라져갔다. 고립무원의 섬 같은 시댁에서 허난설헌은 외로움에 짓눌렸다.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으나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시어머니에게 빼앗겼고, 그마저도 병 때문에 둘 다 어려서 죽었다.

허난설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허균뿐이다. 허균은 27살에 죽은 누이의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시집은 중국과 일본 학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래도 허균은 힘들었을 것이다. 허균 역시 이루어지지 않을 이상을 홍길동전에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를 잃고 허균이 느낀 마음이 곧 허난설헌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기념관 현판을 신영복 선생이 썼다. 이 책에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백일홍, 간지럼나무

허균, 허난설헌 생가 마당에는 나무 백일홍(배롱나무)이 서있다. 허난설헌은 백일홍을 좋아했다. 시어머니는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백일홍을 싫어했다. 형식으로 껍질을 둘러치고 시대의 생각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은 껍질이 부서지며 자라는 백일홍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껍질을 깨뜨리고 인간의 존재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가며 고민하는 사람을 억누르려고만 했다.

지금은 나무 백일홍을 간지럼나무라고 부른다. 껍질이 벗겨진 나무 둥치를 쓰다듬으면 잎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아서 간지럼을 타는 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이들은 간지럼나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무 둥치를 살살 문지르며 잎이 움직이는지 바라보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 남녀 아이들이 나무에 옹기종이 붙어 나무를 간지럽히는 모습을 허난설헌이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백일홍을 간지럼나무라고 부르는 시대는 허난설헌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텐데 아쉽다.

15년 전에 만난 아이가 <순서>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다. 재기발랄한 아이의 마음이 허난설헌을 생각나게 한다.

---------순서

김샛별 (삼척초 4)

어제는 할머니 댁에 갔다가
바로 외갓집으로 갔다.
난 외갓집에 먼저 가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남자 쪽이라서?
그건 너무 불공평해 !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

맞다. 순서가 있는 게 아니다. 허난설헌이 살던 시대에도 순서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허난설헌은 경포 호수와 소나무 가득한 이곳에서 배롱나무를 키우며 초당 허엽에게 시를 배웠다. 8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으로 불리었다. 그림에도 뛰어났고 용모와 성품도 아름다웠다. 허난설헌이 지금 태어났다면 사람들에게 사랑 받으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마음껏 펼쳐냈을 것이다. 오빠들과 시를 나누고 인간의 존재를 자유롭게 토론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편견에 사로잡힌 시대가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짓밟고 어둠과 절망을 남겼다. 허균도 벼슬에 올랐다가 파직당하고, 다시 벼슬에 올랐다가 파직당하기를 되풀이했다. 시대가 감당하지 못한 생각을 가진 두 남매는 조선시대에 날개가 꺾인 남성과 여성의 대표자이다. 허난설헌과 허균은 수백 년의 시간을 앞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꺾였다.

한(恨)이 없는 시대

허난설헌은 세 가지 한이 있다고 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남편의 아내가 된 것……”

지금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한스럽다고 말할까?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대답 대신 다른 이유들이 또 생겼을 것이다. 우리를 아프고 슬프게 하는 편견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편견이 클수록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줄어든다. 사람들이 꿈을 꾸게 하려면 발목을 붙잡아 끌어내리는 편견이 사라져야 한다.

「난설헌」은 제1회 혼불문학상을 받았다. 저자는 난설헌의 아픔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없

기를 바라며 글을 썼을 것이다. 책을 읽고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며 마음껏 글을 쓰는 세상이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깔깔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모습이 얼마나 귀한지! 생각을 글에 담아 표현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허난설헌을 길러내는 학교가 되면 좋겠다. 그래서 편견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꿈을 꾸는 세상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안채에서 고등학생들과 글 쓰고 발표하는 모습 (일반 관람객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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