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는 본문 인용 -

권일한

모태 신앙으로 내내 교회에 다녔다. 중고등부가 가장 좋았다. 그때는 교회가 집보다 좋았다. 형과 누나가 많았고 친구도 많았다. 64계단을 금세 올랐고, 다다다다 뛰어 내려와도 무섭지 않았다. 탁구를 배웠고 긴긴 계단을 웃으며 쓸었다. 좋은 기억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서로 챙기고 사랑했다. 사랑하자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1980년대 교회는 하늘과 땅 식료품점 느낌이 났다. 그러나 이젠 이런 교회를 찾기 어렵다.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니면 내가 변했을까?

무엇이 그때 우리를 행복하게 했을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나를 살아있게해주었던 30년 교사 시절과 달리 그땐 할 일이 없어도 살아있음을 느꼈다. 순간순간 얼마나 생기로웠던지! “자애가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묻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교회 곳곳에 자애가 넘쳤다. 교회에 초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랑이 많은 권사님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문을 잠그는 법이 없다. 사람들에게 늘 외상을 주고 돈을 갚으라고 하는 법이 없는데 누가 물건을 훔치겠는가.”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곳이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아니었나? 어린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라 아름답기만 했던 걸까? 그런 부분도 있다. 그때 교회는 편견이 많았다. 목사와 장로는 모두 남자였다. 사십일 금식 기도한 사람을 엘리야인 양 우러러봤다. 나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이(헌금 많이 하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 있었다. 초나처럼 흑인들에게 전화를 쓰게 해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사랑이 많았으나 근본주의 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함께 모여 소리를 높이고 같이 울며 사랑했지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말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말이 끄는 수레를 가진 유색인을 고용해서 그가 끄는 수레 뒤에 타고 마을로 내려가, 마을 공용 우물의 급수용 펌프 꼭지에서 여러 개의 통에 물을 가득 받아와 그 유색인에게 비어 있는 미크바에 목욕물을 채우게 했다면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여자가 나서고, 장애인이 나서면 입방아를 찧었다. 상처 많은 사람이 함께 우는 곳이었지만, 위로만큼이나 다시 상처를 주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도 그 교회가 그립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에 가까웠던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식료품점은 우리를 먹이는 곳이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은 하늘의 음식을 땅에, 땅에서 난 것들을 하늘에 보내는 식료품점이다. 영업이익이 없는 곳, 흑인과 백인의 경계가 없는 곳, 종교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곳, 뿌리를 끊어내고 새롭게 이식한 곳에서 싹을 내기 위해 끙끙대는 미국 이민자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넣어준 곳이다. “제 나라 없이 유령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 어떤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과 이성 너머의 그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사람이 뿌리를 내리게 해주는 곳이다.

이런 교회를 꿈꾸었다. 교실을 이렇게 만들고 싶었다. 이런 공동체를 이루고 싶었다. 잠깐 그런 적이 있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에 가까웠던 교실과 공동체를 몇 번 맛보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상처를 내보이며 함께 울었던 독서 모임도 있다. 그러나 치킨힐의 흑인들이 초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그녀를 이웃이 아니라 자유에 숨을 불어 넣는 자유의 동맥처럼 여겼다.” 1980년대 교회가 엄마들에게는 자유의 동맥이었지만, 내겐 아니었다. 내가 누린 교실과 공동체도 잠시뿐이었다. 내가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았을까?

몽키팬츠가 도도를 도와주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이런 내용을 좋아했고 나도 몽키팬츠를 꿈꾸었다. “친구를 위험에서 구해주기 위해, 친구에게 쏠릴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 어둠의 땅에서 친구에게 빛을 던져주기 위해 스스로를 더럽히고싶었다. 조금 더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조금 더 힘들게 살았다. 어쩌면 몇몇은 내게서 초나의 일부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들면서 추상적이고 고상하기만 한 (유대교) 가르침들이 점점 더 쓸모없고 멀게만 느껴져 고이 접어 두었다.” 하는 점만 비슷한 것 같다. 더구나 햇살과도 같은 도도라는 현실이 내게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나타난다고 해도 지금은 글쎄~

미기는 로우갓(낮은 하나님)이 어디에서 왔던 우리는 우리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하고 말했다. 내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은 1980년대 교회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 이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초나의 병은 그들 모두를 뒤흔들었고 그녀가 회복하자 그들 모두 행복해졌다는데”, 교회는 점점 회복에서 멀어진다. 20년 동안 가르친 중고등부도 조금씩 조금씩 하늘과 땅 식료품점에서 멀어졌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은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학교가 교회라고 생각했다. 내게도 도도가 있었다. 아프고 슬프고 힘들게 사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삶의 절름발이였다. 아이들에게 기댈 언덕이 되고 싶었다. 슬픔을 살폈고 아이의 슬픔을 읽으며 울었다. 잠깐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이루어졌다. “절름발이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함께 온전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이루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온전한 모습으로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만나면 온전하게 사는지묻지도 못하겠다. 아이는 스스로 자기 길을 가야 하니까.

초나 같은 사람이 없어서 교회가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되지 못했을까? 다른 이유가 있을까? 내가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도도를 도도로, 몽키팬츠를 몽키팬츠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치려 했던 노력이 지나쳤던 것 같다. 내 힘으로 이르지 못할 높이를 바라보고, 힘을 쏟았다. 벌써 할아버지가 된 것 같다. 그 교회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도도를 만나지 못할 것 같고, 만나도 어색할 것 같다.

랍비 현자들이 말하길, 우리는 세 가지의 이름이 있다고 하더군요.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 가족이 지어준 이름, 그리고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주는 이름이요.” 친구, 가족, 자신은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들이 불러주는 이름보다 타인, 우리와 시간을 보내지 않고 우리와 추억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초나를 절름발이로 부르는 이들 말이다.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살라고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지 않아서,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이렇게 말했나 보다. 1980년대 교회에 다니던 중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았던 것 같다. 교사가 되면서 좋은 교사가 되려고 힘을 줬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약한 모습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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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2장을 계속 묵상합니다.
저에게 주신 말씀이, 누군가에게 필요할 것 같아 나눕니다.
열왕기상 22장 29~34절

한 병사가 쏜 화살이 우연히(random) 아합에게 맞았다. 갑옷을 이어붙인 조각 사이에 화살이 들어갈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합을 맞히려던 화살이 아니다. 아합은 왕복을 벗고, 일반 병사 사이에 섞여 조용히 싸웠다. 그러나 아합의 변장이 소용없게 되었다. 여호와의 화살이 아합을 향해 날아갔다. 아합은 피할 수 없었다.

아합이 400명의 예언을 믿었다면 왜 왕복을 벗고 변장했을까? 갈멜산에서 450명이 엘리야 한 명을 이기지 못한 사건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아합 특유의 불안과 초조한 성격 탓일까? 미가야가 승리를 예언했다면 왕복을 입고 출전했을 것이다. 미가야가 아합의 패배를 선언했고, 아합은 변장으로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미가야가 거짓말했다면 무슨 위험이 있겠는가? 또한 미가야가 진실을 말했다면 변장하건 말건 아합은 죽을 것이다. 변장이 무슨 소용이 있나? 변장은 자신을 속일 뿐 결과를 바꾸지 못한다. 누가 하나님의 눈을 피하며, 하나님의 뜻에서 숨을 수 있을까! 아합은 그저 도망칠 궁리만 했다. 여호와의 화살이 아합을 쫓아갔다.

나도 골방에 숨는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혼자 지내고 싶다. 아닌 척 변장한다. 마음을 감추고 사람들이 내 본심을 모르도록 속인다. 내 마음을 감춰두고 숨는다. 하나님은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라 하시는데 나는 혼자 지쳐서 도망치려 한다. 우연히 들리는 한 마디에 가슴을 감싸고 괴로워한다. 내가 나를 속이면 화살이 약한 곳을 파고든다. 화살을 쏘지 않아도,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아 쓰러진다.

숨지 마라. 다른 사람인 척 변장하지 마라. 잠시 안심하려고 자신을 속이지 마라. 다른 사람이 한 말을 화살로 만들지 마라. 자신을 못나게 보며 후회하는 시간은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화살 맞을 준비를 스스로 해놓고 어디에선가 화살이 날아온다고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입어야 할 옷을 입고 있어야 할 곳에서 해야 할 일을 당당하게 하자. 네가 싸워야 할 싸움에 임해라. 지금까지 하나님이 은혜로 인도하셨으니 계속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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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묵상하며 나를 돌아본다.
열왕기상 22장을 묵상한지 2주가 넘었다.
새학기 시작을 앞두고 지인이 힘들어한다.
그들을 생각하며 묵상 일부를 나눈다.
미가야가 한 말이 아합과 선지자들에게 황당하게 들리진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은 이런 현상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을 거짓 선지자 취급하고 아합이 죽는다고 말한 내용은 싫어했다.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어떻게 자기를 떠나 미가야에게 가서 말씀하시느냐?” 따졌다. 시드기야는 정말 몰랐던 것 같다. 자기가 거짓 예언자인 줄.
시드기야는 확신했다. 확신이 너무 커서 미가야의 뺨을 치고 여호와께서 자기와 함께한다고 큰소리쳤다. 목소리 크기로 진실성을 판단한다면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가야의 말을 인정하셨다. 아합이 이길 거라고 빈정댔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열린 이상한 회의를 말한 미가야가 옳았다.
교회에 시드기야와 미가야가 온다면 사람들이 누구 말을 들을까? 시드기야의 확신에 넘치는 퍼포먼스를,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보낸다고 말하며 빈정거리는 미가야보다 좋아했을 것 같다. 하나님이 미가야에게 하시는 말씀이 진짜라고 분별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걸 ‘내가’ 올바르다는 주장으로 바꾼 것 같다.
이런 걸 경계했다. 세상이 하는 말에 속지 않고, 주위 사람들이 간다고 생각 없이 따라가지 않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속지 않고 하나님 뜻을 분별하려 했다. 내가 잘하는 줄 알았다. 옳다고 생각했다. 힘든 길을 선택했고, 외로웠다. 지금은 지쳤다. 나를 내세우는 것에도 지친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런데도 시드기야의 자리에 앉진 않았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내 삶에 관해 낄낄대며 평가하는 회의가 열리진 않기를 바란다.
v25 골방에 들어가 숨는 날 알게 된다. v25, v28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날이 온다. 곧 아합이 죽고, 시드기야는 골방에 숨어 떨 것이다. 그가 예언하는 재앙이 결국 임할 때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을 계속 들었는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춤추며 웃고 지하실에 살던 사람들이 경치 좋은 곳을 내려다보며 살 날이 올까?
그날을 기다린다. 이런 날이 오면 좋겠다. 그러나 내 마음은 계속 슬픔과 고통이 이어지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날을 견뎌내야 할 거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시드기야가 골방에 숨어야 하는데 내가 골방에 숨는다. 골방은 아벡에서 패배한 뒤에(20:30) 벤하닷이 숨었던 곳이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당신이 있을 곳도 아니다.
우리는 슬픔을 나누고 아픔을 이겨낸다. 혼자 견디지 말고, 슬픔과 고통을 나누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좋은 것(돈, 재능 등 나눌수록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고통, 슬픔, 외로움, 절망 등 나눌수록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것들)을 나누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런 모습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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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2026년 2년 동안 매일성경에 글을 냅니다.
첫 글을 소개합니다. (매일성경에는 글이 조금 줄어서 나왔습니다.)
다음 글부터는 매일성경을 구독해서 읽어주세요.

성서유니온선교회 출판

 

성서유니온선교회 출판

1년 : 27,000원 2년 : 54,000원

sup.su.or.kr:8888

 

성전에서 시작하고 광야에서 마치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성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성전에 머무르지 않았다. 성전을 떠나 살았다. 성전을 등지고 광야에서 외치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아이 없는 제사장 가문

세례 요한은 부모가 모두 아론 자손이며 제사장 집안이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 아비야는 아론의 후손으로 다윗 시대에 제8반차의 수석 제사장이었다(대상 24:10). 아내 엘리사벳도 아론 자손이었다.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았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1:6).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칭찬받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진골 출신인 셈이다.

두 사람에겐 아이가 없었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127:5)이라고 솔로몬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노래했다. 아론 지파 제사장, 의인, 흠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녀가 없다니. 우리는 요한이 태어난 걸 안다. ‘세례 요한하면 태어난 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요한이 태어날 줄 몰랐다.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마음이 어땠을까? 자기들이 잘못해서 자녀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 열심히 섬기면 여호와께서 자녀를 주실 거로 믿었을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지 않았다. 누구에게 원인이 있는지 알아보지 못한다. 사가랴는 남편과 아내 중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은 아예 없었다. 시험관 시술을 권하면 이방 종교의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겠지. 차라리 대리모를 이해하기 쉽겠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낳아준 하갈이 그나마 대리모에 가까우니까.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다. 길이 하나뿐일 때 오히려 결정하기 쉽다. 받아들이기도 편하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을 흠 없이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길은 하나뿐이다. 주 우리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사라의 하나님, 한나의 하나님, ‘마노아의 아내의 하나님을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여호와께서 아이를 주시리라 믿었다. 정말 천사가 나타났다. 하나님이 간구를 들으셨고 아이를 주겠다고 하셨다. 이름까지 정해주셨다.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정해준 사람은 다섯 명뿐이다. 이삭, 이스마엘, 이스르엘(1:4), 요한, 그리고 예수.

 

아이 얻은 기쁨이 아이 없는 상처를 모두 치유할까?

후배 부부가 유산했다. 당황하고 힘들어하며 하나님을 붙들었는데 다시 유산의 고통을 겪었다. 직장에서도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온갖 잡무를 붙들고 고생했다. 후배의 슬픔을 듣고 양혜원님이 자녀를 잃은 슬픔을 쓴 글을 줬더니 쪽지를 보내왔다.

(남편) “글을 읽으며 내 맘 깊은 곳에서 가라앉아 있던 슬픔과 고통이 밀려왔어요. 아내를 병원 수술실에 보내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던 기억들. 이상한 거 같다고 이야기하던 아내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두려움과 불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고민했던 시간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친구들의 출산 이야기, 둘째 이야기…… 모든 것이 부러웠던 시간이었는데.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 나보다 더 아플 아내가 있어 내색하지 못했던 것들…… 양혜원 씨가 표현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 “난 그 아픔을 잘 몰라서 말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 뜻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려워. 내 아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하나님은 죽어가는 모든 아이에게 느끼실 테니, 다른 아이에 대해 내 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는 나는 하나님 뜻이 어떠하다 말할 수가 없지! ~” (중략)

(남편)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실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조금은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아내와 나에게 성가대며 일을 해야 한다고 권유했어요. 어떤 사람은 임신 마지막 달까지 성가대 지휘를 했다느니, 교회 일 열심히 하면 다 될 거라느니 이런 이야기들이. 상처…… 그렇게 표현하기에도 속상한 말이었어요. 양혜원 씨의 글, 오늘 선생님께서 주신 글이 내 맘 깊이 남네요.”

교회에서 잘 섬기고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소원을 들어주실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성전에서 충성하고 여호와를 잘 섬겨서 아들이 태어났을까? 후배도 교회에서 일을 열심히 하면 다 잘 될까? 아이를 낳으면 이전에 느꼈던 아픔과 상처가 나을까? 깨끗하게 치유될까?

 

성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사가랴는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이었다. 사가랴의 삶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누가복음 1장을 살펴보자. 사가랴는 성전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다가 분향단 오른쪽에 선 주의 사자를 만났다. 아들을 낳을 거라며 요한이라고 부르라는 예언을 들었다. 아이가 큰 자가 되고(15),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15),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고(16), 엘리야의 능력으로 ~ 백성을 준비한다(17)는 내용이다. “아멘, 할렐루야!” 외칠 만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가랴가 믿기 어려웠다고 한다. 아이를 달라고 기도해놓고는 아이를 준다고 하시니 믿기 어려웠다(18). 사가랴의 간구를 여호와께서 듣고(13) 아들을 준다고 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믿지 못했다. 그럼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믿음을 잘못 보셨을까? 이제라도 아들 주겠다는 약속을 취소하실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사가랴가 한동안 말을 못 하게 했지만(20),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가랴가 믿지 못해서 말을 못 하는 게 백성에게는 증거가 되었다. 성전 밖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은 사가랴가 말을 못 하자 환상을 보았다고 믿었다. 말을 못 하는 상태로 성전에서 직무를 마쳤다(22~23) 천사의 말이 이루어져서 엘리사벳이 요한을 임신했다. 여섯 달 뒤에는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갔다.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가브리엘이 말하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왔다. 마리아의 문안을 듣고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찬양했다(1:41~45). 이에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찬양을 했다. 사가랴가 말을 못 하는 것을 제외하면 복된 일이 계속 이어진다. 간증이 넘쳐난다. 얼마나 귀한가!

사가랴는 벙어리로 지내다가 요한이 태어날 때 입이 열렸다. 다시 말하게 되자마자 하나님을 찬송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67) 찬송하며 예언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없다. 아브라함은 나이 들어 부름을 받았다. 모세의 아버지가 누군지(아므람)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한은 제사장의 자녀로,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아, 태어날 때부터 능력을 받았다. 기드온과 삼손, 엘리야와 엘리사 모두 적어도 태어날 때는 요한과 견줄 수가 없었다.

제사장, 의인, 흠이 없음, 천사, 큰 자, 성령 충만, 엘리야의 능력, 찬가, 그리고 성전. 요한은 이런 낱말로 삶을 시작했다. 아버지 사가랴는 가브리엘을 만났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각각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말씀이 이어진다. 요한은 이스라엘에서 영적인 금수저였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사람이라고 했다. 요한은 엘리야에 필적하는, 놀라운 일을 할 것이다(1:11~17). 이 모든 이야기가 성전에서 시작되었다. 사가랴가 성전에서 봉사할 때 말이다.

 

성전을 떠나 광야에서

성전과 관련된 요한의 이야기는 이것뿐이다. 요한은 더 이상 성전에 나타나지 않는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을 싫어한 것처럼 보인다. 부모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전에서 일해야 한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제사를 드려서 속죄해야 한다. 당시에는 속죄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사가랴가 했던 제사와 성전 예배를 요한이 드렸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요한은 성전이 없는 곳,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이야기를 광야에서 시작한다. 영적인 금수저로 보였던 요한은 성전을 떠나 광야로 갔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산당이 있는 벧엘이나 단, 조상의 기억이 남은 실로나 헤브론이 아니었다. 광야라니! 희생 제물을 갖고 성전에 제사하러 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며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을 찾아 광야에 갔던 사람들은 한바탕 욕을 들었다. 세례받으러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욕을 해대다니(3:7) 이상하지 않은가!

회개하러 돌아다니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만약 사가랴가 요한을 지켜봤다면 뭐라 했을까? 제사장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제사장이 하지 말아야 할 욕을 해대며, 성전을 떠나 광야에서 외치는 아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가브리엘이 축복하며 말했던 예언이 이렇게 이루어졌다고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요한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요한이 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성전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나눠주라, 세리는 세금을 똑바로 받아라, 군인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3:11~14).” 일상에서 이웃에게 잘해라,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었다. 요한에게 성전은 어떤 곳이었을까? 아버지 사가랴는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일했는데 아들 요한은 왜 성전을 멀리 떠났을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웃에게 잘했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요한이 사가랴처럼 성전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되지 않았을까? 성전에서 섬기며 이웃을 사랑할 수도 있었다. 사가랴는 사람들이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했다. 성전을 떠나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요한은 왜 성전에서 시작한 자신의 삶을 광야로 가져갔을까? 성전에 문제가 있다면 성전 개혁을 외쳐도 됐을 텐데 왜 성전을 부정하는 듯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할까?

 

성전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성전이란?

유산 자체만으로도 후배는 아프고 힘들었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더 아프게 했다. 도와주려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과 위로가 상처를 쑤셔댔다. 예수님께서 내쫓은 돈 바꾸는 사람들도(21:12~13) 성전 예배에 꼭 필요했다. 로마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성전에서 쓰면 십계명 제1계명을 범하게 되었다. 모세가 받은 계명에는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20:4) 말씀이 있었다. 그러므로 데나리온을 바치면 안 된다. 세겔로 바꾸어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상에서 쓰는 돈을 가져와서 성전에서 쓰는 돈으로 바꾸었다. 돈을 바꾸려면 환전상이 필요했다. 그들이 환율을 마음대로 바꾸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전상들은 환율을 조정해서 폭리를 취했다. 사람들은 불합리한 환율을 감당하지 못했다. 별일 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는 말이 아프고 힘든 사람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가 된다. 후배가 그랬다. 교회 일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는 말이 누구에겐 덕담이지만, 누구에겐 상처가 된다.

레위기 규정(5:1~13)에 따르면 속죄 제물로 양이나 염소를 바쳐야 한다. 양과 염소를 살 형편이 안 되면 비둘기를 바쳐도 된다. 당시 비둘기가 얼마일까? 환전상의 손을 거치면 비둘기가 9~10만원이 되었다. 성전 밖에서 파는 비둘기보다 몇 배나 비쌌다. 속죄제를 드리려면 10만원이 있어야 하는데 가난한 과부에겐 두 렙돈밖에 없었다. 과부가 가진 모든 것, 생활비 전부가 겨우 두 렙돈이었다. 천원, 이천 원밖에 안 되는 돈으로는 속죄제를 드릴 제물을 사지 못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12:43~44).”

정성껏 헌금하라는 말이 아니다. 생활비 전부를 털어도 속죄 제물로 드릴 비둘기 한 마리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과부의 처지를 보라는 말이다. 가난한 과부가 속죄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성전 현실을 보라는 말씀이었다. 과부는 성전이 불편했을 것이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 예배, 봉사, 헌신, 성가대, 직분이 없는 곳에서 마음이 편하다면 그들 곁에 있는 성전은 어떤 곳일까?

 

광야에 사람이 모여든다.

성전 구조에서는 들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고아와 과부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성전에 가기 어려웠다. 성전에 가려면 제물이 있어야 했다. 예물이라도 가져가야 했다. 렙돈으로는 어림없다. 사가랴도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을 것이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으니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 체제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성전에서 제사하고 옷 두 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두 렙돈을 바치는 과부가 계속 생겼다. 성전에 제물을 바칠 여유가 있는 사람도 성전 체제의 한계에 갇혔다.

세리와 군인은 성전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에 충성하는 변절자들이 성전에 나타나면 거룩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성전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가는 곳이었다. 세리는 안 된다. 군인도 안 된다. 가난한 과부는 제물이 없으니 제사하지 못한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안 된다. 성전에서는 정해진 절차와 형식에 따라야 했다. 절차와 형식을 따르기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우리 교회는 어떨까?

이제 성전에서 하는 일이 교회에서 하는 일로 바뀌었다. 교회도 자격을 갖춘 사람이 가는 곳인가? 정해진 절차와 형식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인가? 그런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을 것이다. 학교는 어떨까? 학교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가는 곳이다. 정해진 형식과 절차가 있다. 학교가 해야 할 공식적인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초등학교는 학생이 190일 이상 공부하도록 교육 과정을 짜야 한다. 1000시간 내외로 정해진 시간을 수업해야 한다. 각 과목마다 정해진 시간을 이수해야 한다. 엄격한 체계가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정해진 날짜, 수업 시간 준수를 강조하면 떠나는 아이가 생긴다. 수업하는 190일 중 100일 넘게 지각한 아이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데 말이다. 아이에게 지각하지 말라는 말이 필요할까? 받아쓰기에서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수십 번 연속으로 0점을 받았다. 부모가 싸우면서 이혼한다는 말을 듣고 학교에 온 아이에게 규칙과 체계를 강조해야 할까? 광야 같은 삶을 사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6살 때 집에 불이 났다. 그때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삼촌께서 날 구하셨다. 삼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도 있지 못했을 것이다. 7살에는 생각이 나지 않고 8살에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너무 슬펐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잘 챙겨주시고 유치원에 갈 때 먹을 것을 사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못해서 너무 슬프다. 9살 때는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 12살 때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13살에는 학교 문제가 어려워 기분이 나쁘다.”

사랑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빠는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엄마는 조현병에 걸렸다.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광야에서 만난 아이들

기대를 한몸에 입고 태어난 요한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까? 로마에 대항하여 제 2의 마카비가 될까? 불병거와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까? 아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3:5~6).”

산은 높고 골짜기는 낮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면 높이가 같아진다. 그럼 길이 곧아진다. 내가 사는 강원도 산길은 구불구불하다. 터널과 다리를 놓지 않으면 평평하게 길을 만들지 못한다. 땅이 평평해져야 길이 곧아진다. 산이 높을수록, 길이 험할수록 길이 구불구불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는 구불구불한 길이 있다. 권력자와 약자도 곧바로 만나지 못한다. 한참 돌고 돌아야 한다.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높아져야 둘이 만난다. 부자와 빈자가 같이 평탄한 길을 걸으면, 그러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본다.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특히 교회에서는 성공한 이야기, 믿음으로 승리한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우리 삶이 그런 이야기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강원도 시골에서 부모 없는 아이를 많이 만났다. 부모 노릇을 하는 사람이 없는 집에서 끙끙대는 아이도 만났다. 가난한 아이, 아픈 아이, 선생인 나보다 먼저 죽어간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들 이야기가 내 삶에서 메아리를 울린다.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글을 쓸 때는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들린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면 좋겠다. 아이들도,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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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시대에 나라가 견고해진 배경에는 나단 선지자가 있다. 나단 선지자의 역할이 없었으면 솔로몬은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전성민 교수님은 열왕기가 선지자들의 기록이라고 했다. 사무엘기가 엘리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했다면, 열왕기는 나단으로 시작한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아니라 선지자가 나라를 이끌어간다고? 우리나라도 선지자가 이끌어가는 나라인가?

내 삶은 누가 이끌어가나? 여호와께서 이끌어가게 하려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 뜻을 찾았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뜻을 찾으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찾는 행위에 매몰되진 않았나? 하나님 뜻을 찾고 조금 안다는 사실에 빠져 찾기만 하는 건 아닌가? 하나님 뜻을 찾는 사람을 도와줄 때가 있어서 정말 잘 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열쇠를 찾는 사람이 어리석은 줄 안다. 열쇠를 잃어버린 곳에서 찾아야 하는 줄 안다. 하나님 뜻을 아는 건 열쇠 찾기와 다르다. 어디서 잃어버린 줄 모른다. 잘못된 가르침을 들어서, 시대와 문화의 가르침에 물들어서,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구한 적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여호와의 뜻을 모른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열쇠를 찾는다.

내 가로등 불빛은 어디일까? 내가 열쇠 비슷한 것을 찾았던 자리 아닐까? 과연 그 자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을 장소인가? 보통 고통의 자리, 힘들고 어려운 때 하나님 뜻을 찾는다. 나는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날마다 고민하며 하나님 뜻을 찾았다. 행복할 때도 고통을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을 찾는 내 패턴, 내 방식에 매몰되진 않았나? 마치 열쇠를 잃어버린 장소가 아닌 불빛 아래에서 헤매는 사람처럼.

나는 불빛이 있어야 찾기 쉽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계속 불빛 주위에서 서성이는 사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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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6 솔로몬이 말하였다. “당신이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주와 함께 성실과 공의(째다카)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를 위하여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셔서 지금처럼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 공의, 정직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faithfulness(에흐메쓰)는 성경에 127회 쓰였다. 확고함, 충실함을 뜻한다. righteousness(쩨다카)157회 쓰였다. 의를 말한다. uprightness(강직함)는 한 번만 쓰였다. 솔로몬이 다윗을 생각하며 따로 고른 낱말인 것 같다. 솔로몬은 다윗이 충실하고, 의롭고, 강직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생각했다. 솔로몬은 다윗의 잘못을 몰랐을까? 아니면 의례로 하는 말일까?

솔로몬은 다윗이 올바로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했다. 사람이 올바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올바로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건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행하는 바가 중요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계획이 악할 뿐임을(6:5, 8:21) 아신다.

물론 솔로몬은 자신에게 안정된 나라를 물려준 아버지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했겠지. 나라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다윗의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다윗처럼 올바로 행동해야 하는데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다. 하나님께 제사하고 기도할 때는 괜찮았지만, 외교 관계에서는 이방 여인을 데려왔다. 군사력을 위해 말과 전차를 사들였고, 외국에 팔기도 했다.

솔로몬은 종교 행위(제사, 기도)는 하나님 백성처럼 했으나 왕의 역할은 이방인처럼 했다. 지금 신자들 같다. 교회에서는 하나님 백성이지만, 회사와 가정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는다. 다윗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사는 동안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날이 위기였으니 순간순간 하나님을 찾았다. 솔로몬은 아도니야 외에는 위기가 없었다. 아도니야도 다윗이 겪은 문제다.

솔로몬은 다윗에게 베푸신 큰 은혜에 감사했다. 세월이 지난 뒤에 돌아보면 안 좋은 일에서도 은혜가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 게 현실이다. 다윗처럼 올바로 행해도 사울이 죽이려 한다.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생긴다. 올바로 행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전도서가 괜히 쓰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만은 변함이 없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걸 잊지 말자.

3월에 교사는 힘들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 달라진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아이들이 다투고 갈등한다. 선생님 기준과 스타일에 맞추느라, 새로운 친구들과 관계를 시작하면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상담해야 한다. 몇 시간 수업에 녹초가 된다. 자다가도 깨어 기도하게 된다. 평안한 날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가 일으키는 변화는 아이들이 아니라 내게 나타난다.

아이들은 내가 가르쳐야 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이들이 배우고 자라지는 않는다. 기도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다시 힘을 얻는다. 사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생각하는 이때가 복된 날 아닐까? 하나님 은혜로 평안한 나날을 보내는 건 축복이다. 하지만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도 복되지 않나?

물질적 풍요와 번영만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다. 축복은 하나님을 누리는 삶이다. 돈과 권력은 하나님을 누리는 삶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돈과 권력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한다면 솔로몬의 길을 따르는 셈이다. 한국 교회가 솔로몬의 지혜와 부를 부러워하며 구했기 때문에 예배와 기도 따로, 가정과 직장에서의 모습 따로가 되었다.

나는 돈과 권력을 바라지 않는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평안하게 지내면 좋겠다. 교사로 30년 지내며 많이 닳았다는 생각이 커진다. 나를 소모하며 가르쳤다. 사람들을 떠나 나무를 돌보며 지내는 삶을 기대하는 게 하나님 뜻에서 멀어진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이 나를 높이는 죄악 아닐까? 다윗이 이루어놓은 것을 솔로몬처럼 누리려고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v6 솔로몬이 말하였다. “당신이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주와 함께 성실과 공의(째다카)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를 위하여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셔서 지금처럼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영어를 직역함)

솔로몬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 공의, 정직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faithfulness(에흐메쓰)는 성경에 127회 쓰였다. 확고함, 충실함을 뜻한다. righteousness(쩨다카)157회 쓰였다. 의를 말한다. uprightness(강직함)는 한 번만 쓰였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충실하고, 의롭고, 강직하다고 하셨다. 솔로몬은 다윗의 잘못을 몰랐을까? 아니면 의례로 하는 말일까?

솔로몬은 다윗이 올바로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했다. 사람이 올바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그 은혜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올바로 행해도 나쁜 일이 생긴다. 올바로 행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전도서가 괜히 쓰이지 않았다.

물론 솔로몬은 자신에게 안정된 나라를 물려준 아버지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했겠지. 나라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다윗의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다윗처럼 올바로 행동해야 하는데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다. 하나님께 제사하고 기도할 때는 괜찮았지만, 외교 관계에서는 이방 여인을 데려왔다. 군사력을 위해 말과 전차를 사들였고, 외국에 팔기도 했다.

솔로몬은 종교 행위(제사, 기도)는 하나님 백성처럼 했으나 왕의 역할은 이방인처럼 했다. 지금 신자들 같다. 교회에서는 하나님 백성이지만, 회사와 가정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는다. 다윗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사는 동안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날이 위기였으니 순간순간 하나님을 찾았다. 솔로몬은 아도니야 외에는 위기가 없었다. 아도니야도 다윗이 겪은 문제다.

3월에 교사는 힘들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 달라진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아이들이 다투고 갈등한다. 선생님 기준과 스타일에 맞추느라, 새로운 친구들과 관계를 시작하면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상담해야 한다. 몇 시간 수업에 녹초가 된다. 자다가도 깨어 기도하게 된다. 평안한 날을 달라고 기도한다. 사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생각하는 이때가 복된 날 아닐까? 하나님 은혜로 평안한 나날을 보내는 건 축복이다. 하지만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도 복되지 않나?

물질적 풍요와 번영만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다. 축복은 하나님을 누리는 삶이다. 돈과 권력은 하나님을 누리는 삶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돈과 권력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한다면 솔로몬의 길을 따르는 셈이다. 한국 교회가 솔로몬의 지혜와 부를 부러워하며 구했기 때문에 예배와 기도 따로, 가정과 직장에서의 모습 따로가 되었다.

나는 돈과 권력을 바라지 않는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평안하게 지내면 좋겠다. 교사로 30년 지내며 많이 닳았다는 생각이 커진다. 나를 소모하며 가르쳤다. 사람들을 떠나 나무를 돌보며 지내는 삶을 기대하는 게 하나님 뜻에서 멀어진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이 나를 높이는 죄악 아닐까? 다윗이 이루어놓은 것을 솔로몬처럼 누리려고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열왕기 1장 1~4절 / 1주일 동안 묵상

     1장은 초점이 이다. 다윗왕이 9, 왕이 39회 쓰였다. 동사를 포함하면 왕과 관련된 낱말이 70회 나온다. 다윗이 어떤 왕이었는지, 다윗을 이어 누가 왕이 될지 묻는다. 모세의 지도력은 여호수아에게 이어졌으나 사사기 시대의 혼란으로 마무리되었다. 왕조를 시작한 사울은 분열을 초래하고 다윗에게 왕권이 이어졌다. 다윗은 깔끔하게 왕위를 이어줄까?

v1~4 늙은 다윗
    다윗(사랑받는 사람)도 세월을 이기지 못한다. 옷을 겹쳐 입어도 따뜻하지 않다. 신하들이 가장 좋은 것들로 다윗을 보호했을 테지만 삭신이 쑤셨을 것이다. 오죽하면 다윗을 껴안을 젊은 여인을 신하들이 데려와야 했다. 신하들이 주도했고 다윗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멜렉)이라는 낱말로 시작한 문장에서 다윗은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신하들이 해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처지가 되었다. 왕들의 기록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드러낸다.

v1 다윗 왕이 날이 오래되고 늙어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v2 신하들이 말하기를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왕 앞에 젊은 처녀를 데려와서, 왕 앞에 두고, 우리 주 왕을 품게 하자.”
v3 그들이 수넴 여자 아비삭을 데려왔다. 온 이스라엘에서 가려 뽑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를 왕에게 데려갔다.
v4 아비삭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왕을 돌보게 하였으나 다윗이 동침하지(알지, 야다) 않았다.

     다윗의 연약함을 해결하기 위해 찾고 찾다가 선택한 대안이 아비삭이다. 아비삭은 이스라엘 사방 영토를 살펴 찾았던 아름다운 처녀다. “아비삭을 왕에게 데려가서, 앞 앞에 두어 왕을 돌보게 하고, 왕을 품어주게 하자.” ‘다윗을 위해라는 말로 신하들이 한 일에 다윗이 하는 일은 없다. 어느날 한 여인이 나타나 자기를 돕는데 동침하는 관계도 아니다.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 다윗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연약한 사람이 되었다.

다윗은 왜 약해졌을까?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판단하지 말자. 누군가에게 들었던 다윗에 관한 정보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자. 인생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고민하지 않고 한 사람의 삶이 이렇다저렇다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 누가 나를 그렇게 판단하면 어떨까?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등 평상시 마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다윗을 판단하고 싶으면 다윗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젊은 날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목숨을 구걸했다. 사울을 죽일 기회에서 두 번이나 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쫓겨 다니며 고생했다. 하나님 뜻을 따르려다 환난을 겪는 시간을 견뎠다. 나발에게 벌컥 화를 내는 모습은 다윗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

     왕이 된 뒤에도 이스라엘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브넬과 이스보셋을 물리쳐야 했다. 요압이 제멋대로 하는 걸 계속 봐야 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왕으로 인정받기까지 20년은 도망다니거나 싸워야 했다. 야곱이 말한 것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나라가 안정된 뒤에는 주변 나라들과 싸웠다. 가는 곳마다 이겼지만, 다윗은 엄청난 압박과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죽을 위기를 만나기도 했고 부하들이 전쟁터에 나오지 말라고 다윗에게 간청할 정도였다.

주변 나라들을 정복한 뒤에는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다투고 서로 죽이기도 했다. 첫째부터 셋째까지 갈등을 일으키거나 병에 걸려 자신이 직접 묻어야 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사랑했지만, 최소 1(나단), 최대 3(시므아, 소밥, 나단, 대하 3:5)을 잃었다. 다윗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살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70살 다윗은 다 그만두고 쉬어야 했다. 쉬고 싶었을 테고, 아무것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교사로 30년째가 지나갔다. ‘쉬고 싶다하는 마음이 커졌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느려졌다. 방학을 기다리는 마음이 커졌다. 가끔은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며 맥박이 올라갔다. 당황했다. 몸의 반응에 당황했고, 내가 이렇게 반응한다는 게 이상했다. 몸이 지칠 때까지 일할 밭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10년도 안 되었는데 지쳐서 그만두고 싶다는 교사도 있다고 들었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삶이 쉽지 않다. 힘들고 지쳤을 때 소명을 앞세워 다시 일어서야 할까, 연약해진 상태를 인정하고 쉬어야 할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늘 생기있는 모습으로 살아갈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서 생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상 내 모습에서 다윗처럼 늙은 상태를 찾으니 내가 소명을 가진 사람인지 의심하게 된다.

     물론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내 소명의 영역을 줄였다. 책을 쓰고 강의해서 많은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줄였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생각을 따르지 않고 좁은 길로 가라고 설득하는 일을 했는데 잘 안 된다. 부모는, 심지어 교사 부모도 자녀를 학원에 보내고, 교사는 클릭만 하면 수업하게 해주는 사이트를 의지하고, 사람들은 돈과 외모에 집착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아는 그리스도인조차.

     다윗 왕이 늙었다. 후계자를 정해서 물려주어야 했다. 다윗이 후계자를 정하고 물러났다면 후계자를 중심으로 역사가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고 우리에게 슬픈 노년을 보여준다. 다윗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까닭을 모르겠지만, 왕위를 물려주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이해하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다윗이 우리 모습이다. 120살까지 강건했던 모세가 예외일 것이다. 나이 드는 게 나쁘진 않다. 50 조금 넘은 나이에 너무 늙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서 정신 차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시 20대처럼 하는 방식은 아니다. 후계자를 찾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다른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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