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2026년 2년 동안 매일성경에 글을 냅니다.
첫 글을 소개합니다. (매일성경에는 글이 조금 줄어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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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유니온선교회 출판
1년 : 27,000원 2년 : 5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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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시작하고 광야에서 마치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성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성전에 머무르지 않았다. 성전을 떠나 살았다. 성전을 등지고 광야에서 외치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아이 없는 제사장 가문
세례 요한은 부모가 모두 아론 자손이며 제사장 집안이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 아비야는 아론의 후손으로 다윗 시대에 제8반차의 수석 제사장이었다(대상 24:10). 아내 엘리사벳도 아론 자손이었다.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았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눅 1:6).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칭찬받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진골 출신인 셈이다.
두 사람에겐 아이가 없었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시 127:5)이라고 솔로몬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노래했다. 아론 지파 제사장, 의인, 흠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녀가 없다니. 우리는 요한이 태어난 걸 안다. ‘세례 요한’ 하면 태어난 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요한이 태어날 줄 몰랐다.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마음이 어땠을까? 자기들이 잘못해서 자녀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 열심히 섬기면 여호와께서 자녀를 주실 거로 믿었을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지 않았다. 누구에게 원인이 있는지 알아보지 못한다. 사가랴는 남편과 아내 중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은 아예 없었다. 시험관 시술을 권하면 이방 종교의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겠지. 차라리 대리모를 이해하기 쉽겠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낳아준 하갈이 그나마 대리모에 가까우니까.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다. 길이 하나뿐일 때 오히려 결정하기 쉽다. 받아들이기도 편하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을 흠 없이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길은 하나뿐이다. 주 우리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사라의 하나님, 한나의 하나님, ‘마노아의 아내’의 하나님을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여호와께서 아이를 주시리라 믿었다. 정말 천사가 나타났다. 하나님이 간구를 들으셨고 아이를 주겠다고 하셨다. 이름까지 정해주셨다.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정해준 사람은 다섯 명뿐이다. 이삭, 이스마엘, 이스르엘(호 1:4), 요한, 그리고 예수.
아이 얻은 기쁨이 아이 없는 상처를 모두 치유할까?
후배 부부가 유산했다. 당황하고 힘들어하며 하나님을 붙들었는데 다시 유산의 고통을 겪었다. 직장에서도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온갖 잡무를 붙들고 고생했다. 후배의 슬픔을 듣고 양혜원님이 자녀를 잃은 슬픔을 쓴 글을 줬더니 쪽지를 보내왔다.
(남편) “글을 읽으며 내 맘 깊은 곳에서 가라앉아 있던 슬픔과 고통이 밀려왔어요. 아내를 병원 수술실에 보내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던 기억들. 이상한 거 같다고 이야기하던 아내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두려움과 불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고민했던 시간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친구들의 출산 이야기, 둘째 이야기…… 모든 것이 부러웠던 시간이었는데.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 나보다 더 아플 아내가 있어 내색하지 못했던 것들…… 양혜원 씨가 표현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나) “난 그 아픔을 잘 몰라서 말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 뜻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려워. 내 아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하나님은 죽어가는 모든 아이에게 느끼실 테니, 다른 아이에 대해 내 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는 나는 하나님 뜻이 어떠하다 말할 수가 없지! ~” (중략)
(남편)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실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조금은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아내와 나에게 성가대며 일을 해야 한다고 권유했어요. 어떤 사람은 임신 마지막 달까지 성가대 지휘를 했다느니, 교회 일 열심히 하면 다 될 거라느니 이런 이야기들이. 상처…… 그렇게 표현하기에도 속상한 말이었어요. 양혜원 씨의 글, 오늘 선생님께서 주신 글이 내 맘 깊이 남네요.”
교회에서 잘 섬기고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소원을 들어주실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성전에서 충성하고 여호와를 잘 섬겨서 아들이 태어났을까? 후배도 교회에서 일을 열심히 하면 다 잘 될까? 아이를 낳으면 이전에 느꼈던 아픔과 상처가 나을까? 깨끗하게 치유될까?
성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사가랴는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이었다. 사가랴의 삶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누가복음 1장을 살펴보자. 사가랴는 성전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다가 분향단 오른쪽에 선 주의 사자를 만났다. 아들을 낳을 거라며 요한이라고 부르라는 예언을 들었다. 아이가 큰 자가 되고(15절),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15절),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고(16절), 엘리야의 능력으로 ~ 백성을 준비한다(17절)는 내용이다. “아멘, 할렐루야!” 외칠 만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가랴가 믿기 어려웠다고 한다. 아이를 달라고 기도해놓고는 아이를 준다고 하시니 믿기 어려웠다(18절). 사가랴의 간구를 여호와께서 듣고(13절) 아들을 준다고 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믿지 못했다. 그럼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믿음을 잘못 보셨을까? 이제라도 아들 주겠다는 약속을 취소하실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사가랴가 한동안 말을 못 하게 했지만(20절),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가랴가 믿지 못해서 말을 못 하는 게 백성에게는 증거가 되었다. 성전 밖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은 사가랴가 말을 못 하자 환상을 보았다고 믿었다. 말을 못 하는 상태로 성전에서 직무를 마쳤다(22~23절) 천사의 말이 이루어져서 엘리사벳이 요한을 임신했다. 여섯 달 뒤에는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갔다.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가브리엘이 말하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왔다. 마리아의 문안을 듣고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찬양했다(눅 1:41~45). 이에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찬양을 했다. 사가랴가 말을 못 하는 것을 제외하면 복된 일이 계속 이어진다. 간증이 넘쳐난다. 얼마나 귀한가!
사가랴는 벙어리로 지내다가 요한이 태어날 때 입이 열렸다. 다시 말하게 되자마자 하나님을 찬송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67절) 찬송하며 예언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없다. 아브라함은 나이 들어 부름을 받았다. 모세의 아버지가 누군지(아므람)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한은 제사장의 자녀로,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아, 태어날 때부터 능력을 받았다. 기드온과 삼손, 엘리야와 엘리사 모두 적어도 태어날 때는 요한과 견줄 수가 없었다.
제사장, 의인, 흠이 없음, 천사, 큰 자, 성령 충만, 엘리야의 능력, 찬가, 그리고 성전. 요한은 이런 낱말로 삶을 시작했다. 아버지 사가랴는 가브리엘을 만났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각각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말씀이 이어진다. 요한은 이스라엘에서 영적인 금수저였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사람이라고 했다. 요한은 엘리야에 필적하는, 놀라운 일을 할 것이다(눅 1:11~17). 이 모든 이야기가 성전에서 시작되었다. 사가랴가 성전에서 봉사할 때 말이다.
성전을 떠나 광야에서
성전과 관련된 요한의 이야기는 이것뿐이다. 요한은 더 이상 성전에 나타나지 않는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을 싫어한 것처럼 보인다. 부모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전에서 일해야 한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제사를 드려서 속죄해야 한다. 당시에는 속죄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사가랴가 했던 제사와 성전 예배를 요한이 드렸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요한은 성전이 없는 곳,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이야기를 광야에서 시작한다. 영적인 금수저로 보였던 요한은 성전을 떠나 광야로 갔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산당이 있는 벧엘이나 단, 조상의 기억이 남은 실로나 헤브론이 아니었다. 광야라니! 희생 제물을 갖고 성전에 제사하러 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며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을 찾아 광야에 갔던 사람들은 한바탕 욕을 들었다. 세례받으러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욕을 해대다니(눅 3:7) 이상하지 않은가!
“회개하러 돌아다니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만약 사가랴가 요한을 지켜봤다면 뭐라 했을까? 제사장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제사장이 하지 말아야 할 욕을 해대며, 성전을 떠나 광야에서 외치는 아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가브리엘이 축복하며 말했던 예언이 이렇게 이루어졌다고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요한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요한이 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성전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나눠주라, 세리는 세금을 똑바로 받아라, 군인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눅 3:11~14).” 일상에서 이웃에게 잘해라,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었다. 요한에게 성전은 어떤 곳이었을까? 아버지 사가랴는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일했는데 아들 요한은 왜 성전을 멀리 떠났을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웃에게 잘했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요한이 사가랴처럼 성전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되지 않았을까? 성전에서 섬기며 이웃을 사랑할 수도 있었다. 사가랴는 사람들이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했다. 성전을 떠나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요한은 왜 성전에서 시작한 자신의 삶을 광야로 가져갔을까? 성전에 문제가 있다면 성전 개혁을 외쳐도 됐을 텐데 왜 성전을 부정하는 듯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할까?
성전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성전이란?
유산 자체만으로도 후배는 아프고 힘들었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더 아프게 했다. 도와주려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과 위로가 상처를 쑤셔댔다. 예수님께서 내쫓은 돈 바꾸는 사람들도(마 21:12~13) 성전 예배에 꼭 필요했다. 로마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성전에서 쓰면 십계명 제1계명을 범하게 되었다. 모세가 받은 계명에는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출 20:4) 말씀이 있었다. 그러므로 데나리온을 바치면 안 된다. 세겔로 바꾸어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상에서 쓰는 돈을 가져와서 성전에서 쓰는 돈으로 바꾸었다. 돈을 바꾸려면 환전상이 필요했다. 그들이 환율을 마음대로 바꾸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전상들은 환율을 조정해서 폭리를 취했다. 사람들은 불합리한 환율을 감당하지 못했다. 별일 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는 말이 아프고 힘든 사람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가 된다. 후배가 그랬다. 교회 일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는 말이 누구에겐 덕담이지만, 누구에겐 상처가 된다.
레위기 규정(레 5:1~13)에 따르면 속죄 제물로 양이나 염소를 바쳐야 한다. 양과 염소를 살 형편이 안 되면 비둘기를 바쳐도 된다. 당시 비둘기가 얼마일까? 환전상의 손을 거치면 비둘기가 9~10만원이 되었다. 성전 밖에서 파는 비둘기보다 몇 배나 비쌌다. 속죄제를 드리려면 10만원이 있어야 하는데 가난한 과부에겐 두 렙돈밖에 없었다. 과부가 가진 모든 것, 생활비 전부가 겨우 두 렙돈이었다. 천원, 이천 원밖에 안 되는 돈으로는 속죄제를 드릴 제물을 사지 못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 12:43~44).”
정성껏 헌금하라는 말이 아니다. 생활비 전부를 털어도 속죄 제물로 드릴 비둘기 한 마리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과부의 처지를 보라는 말이다. 가난한 과부가 속죄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성전 현실을 보라는 말씀이었다. 과부는 성전이 불편했을 것이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 예배, 봉사, 헌신, 성가대, 직분이 없는 곳에서 마음이 편하다면 그들 곁에 있는 성전은 어떤 곳일까?
광야에 사람이 모여든다.
성전 구조에서는 들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고아와 과부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성전에 가기 어려웠다. 성전에 가려면 제물이 있어야 했다. 예물이라도 가져가야 했다. 렙돈으로는 어림없다. 사가랴도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을 것이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으니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 체제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성전에서 제사하고 옷 두 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두 렙돈을 바치는 과부가 계속 생겼다. 성전에 제물을 바칠 여유가 있는 사람도 성전 체제의 한계에 갇혔다.
세리와 군인은 성전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에 충성하는 변절자들이 성전에 나타나면 거룩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성전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가는 곳이었다. 세리는 안 된다. 군인도 안 된다. 가난한 과부는 제물이 없으니 제사하지 못한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안 된다. 성전에서는 정해진 절차와 형식에 따라야 했다. 절차와 형식을 따르기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우리 교회는 어떨까?
이제 성전에서 하는 일이 교회에서 하는 일로 바뀌었다. 교회도 자격을 갖춘 사람이 가는 곳인가? 정해진 절차와 형식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인가? 그런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을 것이다. 학교는 어떨까? 학교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가는 곳이다. 정해진 형식과 절차가 있다. 학교가 해야 할 공식적인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초등학교는 학생이 190일 이상 공부하도록 교육 과정을 짜야 한다. 1000시간 내외로 정해진 시간을 수업해야 한다. 각 과목마다 정해진 시간을 이수해야 한다. 엄격한 체계가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정해진 날짜, 수업 시간 준수를 강조하면 떠나는 아이가 생긴다. 수업하는 190일 중 100일 넘게 지각한 아이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데 말이다. 아이에게 지각하지 말라는 말이 필요할까? 받아쓰기에서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수십 번 연속으로 0점을 받았다. 부모가 싸우면서 이혼한다는 말을 듣고 학교에 온 아이에게 규칙과 체계를 강조해야 할까? 광야 같은 삶을 사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6살 때 집에 불이 났다. 그때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삼촌께서 날 구하셨다. 삼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도 있지 못했을 것이다. 7살에는 생각이 나지 않고 8살에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너무 슬펐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잘 챙겨주시고 유치원에 갈 때 먹을 것을 사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못해서 너무 슬프다. 9살 때는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 12살 때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13살에는 학교 문제가 어려워 기분이 나쁘다.”
사랑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빠는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엄마는 조현병에 걸렸다.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광야에서 만난 아이들
기대를 한몸에 입고 태어난 요한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까? 로마에 대항하여 제 2의 마카비가 될까? 불병거와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까? 아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 3:5~6).”
산은 높고 골짜기는 낮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면 높이가 같아진다. 그럼 길이 곧아진다. 내가 사는 강원도 산길은 구불구불하다. 터널과 다리를 놓지 않으면 평평하게 길을 만들지 못한다. 땅이 평평해져야 길이 곧아진다. 산이 높을수록, 길이 험할수록 길이 구불구불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는 구불구불한 길이 있다. 권력자와 약자도 곧바로 만나지 못한다. 한참 돌고 돌아야 한다.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높아져야 둘이 만난다. 부자와 빈자가 같이 평탄한 길을 걸으면, 그러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본다.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특히 교회에서는 성공한 이야기, 믿음으로 승리한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우리 삶이 그런 이야기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강원도 시골에서 부모 없는 아이를 많이 만났다. 부모 노릇을 하는 사람이 없는 집에서 끙끙대는 아이도 만났다. 가난한 아이, 아픈 아이, 선생인 나보다 먼저 죽어간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들 이야기가 내 삶에서 메아리를 울린다.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글을 쓸 때는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들린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면 좋겠다. 아이들도,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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