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은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다른 학교에 가서 ‘샬롯의 거미줄’로 토론 수업을 보여주었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정답 찾는 수업도 부담스러운데,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 토론하는 모험을 했다. 토론은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야 한다. 담임교사가 “그분 오시면 발표 잘하고 적극 참여해라” 한다고 되지 않는다. 내용 이해 활동만 하다 끝날 수도 있다. ‘정답 맞추기 그만하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라’고 외치고 싶어서 모험을 했다.
두 편으로 나눠 번갈아가며 윌버와 관련된 내용 말하기 시합을 했다. 토론해도 될 정도로 대답을 잘한다. 긴장이 풀리며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샬롯은 윌버에게 소중한 친구다. 샬롯이 윌버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았다면 윌버는 살지 못했을 거다. 윌버는 펀에게 소중한 돼지다. 펀이 윌버를 살리려 애쓰지 않았다면 윌버는 틀림없이 죽었다.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보여주려고 E. B. 화이트가 ‘샬롯의 거미줄’을 썼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것’을 이야기해야겠다.
펀이 윌버를 어떻게 만났는지 물었다. 아빠가 죽이려는 무녀리를 펀이 살려주었다고 대답한다. 무녀리를 살려야 하느냐 물으니 다 살리겠다고 한다. “모두 살려야 한다고 말하니 내가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너희들 모두 다 덤벼라. 내 의견을 꺾어봐라.” 했다. 논리에 맞는지 따지지 않고 덤벼든다. 독서토론을 해보지 않은 아이들이라 동네싸움 하듯 따진다. 이렇게 두면 계속 가벼운 논리에 감정만 실어 소리를 높이겠구나 싶어 다른 질문을 했다. 이쪽 길은 막혔으니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지.
“펀은 버스 안에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창밖만 내다보며 세상이 너무 아름답고 ( )를 혼자 차지하게 되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했다.(16쪽)” ( )에 들어갈 내용을 물어보니 윌버라고 한다. “맞아. 윌버지. 이게 너희들 이야기라고 생각해보자. 너희는 무얼 차지하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까?” 했더니 허황된 답을 말한다. “세상을 다 갖고 싶다. 학교를 갖고 싶다.” 한다. “아니,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 현실에서 가능한 걸 말해보자” 했더니 “최신 핸드폰, 죽은 고양이 나비가 다시 살아오면 좋겠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한다. 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아이가 많다.
죽은 고양이 대답을 듣고 준비한 질문 순서를 바꾸었다. 토론을 처음 하면 준비한 질문을 그대로 하는 실수를 한다. 초보는 준비한 과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워한다. 예외가 생기면 어떻게 감당할지 모른다. 아이들이 관심 가지는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이 정답을 유도하는 것처럼 느낀다. 자기들이 관심을 두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정답만 말하게 된다. 토론을 잘하려면 아이들 대답에 맞게 물 흐르듯이 토론을 이끌어야 한다.
독서토론이 생소한 사람은 눈앞에 있는 질문에만 집중해서 아이들을 어디로 이끌고 가야할지 모른다. 그러면 어떤 날은 굉장히 좋다가 다른 날에는 토론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 대답이 다른 가치를 따라갈 때, 그걸 존중하고 발문 자체를 그쪽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아이들이 어떻게 대답해도 계속 ‘무녀리를 살려야 하나?’ 물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디로 빠지더라도 ‘무엇 때문에 살아갈 가치가 있나?’를 물을 것이다. 토론을 처음 하는 아이들은 가벼운 생각을 계속 늘어놓는다. 다 받아주면 즐거운 시간 보내고 끝이다. ‘깊이’를 맛보게 하려면 한 가지를 깊이 나누어야 한다.
죽은 고양이 나비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게 소중한 것’을 제대로 토론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었다.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위험한 일이라도 할 마음이 있는 대상을 소개해 보자.” 키우고 있거나 키워본 애완동물을 주로 말한다. 아파서 죽은 동물, 처음부터 약하게 태어나서 죽어간 동물도 있다. “좋아하는 동물이 힘들어하고 고통당하는 걸 봤잖아. 마음이 힘들었지? 그럼 태어날 때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동물도 고통당하지 않고 너도 힘들지 않잖아!” 하니 그것도 괜찮겠다고 한다. “약하게 태어나서 고통당할 거라면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를 다시 물었다. 3/4이 찬성한다.
아이들이 ‘죽는 게 낫다’고 말하도록 유도하지 않았다. 그건 나쁜 태도이다. 윌버를 당연히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 죽는 게 나은 건 아닌지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면 반대로 ‘살려야 할 이유’를 생각하도록 계속 자극했을 것이다. 무조건 옳다는 생각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토론은 누가 더 조리 있게 내세우는지 알아보는 시합이 아니다. 토론은 생각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토론해서 생각이 바뀐다면 정말 좋은 토론이다. ‘설득’이 아니라 ‘이해와 경청, 용납’이 더 중요하다. 나는 계속 ‘어떨까? 아닐까? 그럴까?’ 하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도록 물었다.
“우린 ‘아프고 고통당하며 힘들어할 거라면 죽는 게 나을까? 아프고 힘들더라도 추억을 나누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게 나을까?’를 생각했어. 처음에 너희는 살리는 게 당연하다 말했지. 그러다가 자기가 키운 애완동물이 죽은 경험을 말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이 중요해. 우린 펀의 아버지 입장에서 죽이느냐 살리느냐를 고민한 거야. ‘샬롯의 거미줄’을 쓴 작가는 죽여야 할 돼지를 살리기 위한 대안이 있었어. 그게 뭐지?”
“힘들고 어려워도 친구가 도와주면 이겨낼 수 있다는 거예요.” “누가 어떻게 도와줬어?” “펀은 아빠가 윌버를 죽이려 할 때 살려줬어요.” “어떻게 살려줬는지 과정을 말해봐.” “죽이지 말라고 말했어요.” “아빠를 설득하려 했구나! 또? 말만 했어?” “아빠 도끼 붙들고 못 죽이게 말렸어요.” “그래, 행동도 했구나! 말만 하지 않고 행동도 했단 말이지! 다른 의견은 없을까?” “샬롯은 거미줄을 만들어줬어요. 동물들이 윌버를 위해 회의를 했어요.~”
독서토론이 잘되면 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저절로 어떤 결론을 향해 흘러간다. 나는 토론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발문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마지막 발문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에게 어떤 행운이 생겼나?’ 이다. 다분히 교사다운, 열심히 하자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질문이다. 물론 토론할 때는 이 질문을 하지 않았다. 독서토론이 ‘삶에서 무엇이 소중한가? 한 존재의 삶을 귀하게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로 흘러가는데 ‘일찍 일어나는 사람’ 꺼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럼 작가는 윌버를 왜 살렸을까?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친구들이 도와주면 윌버도 살 수 있어요.” 그래, 이게 핵심이다. 고통, 상실이 크더라도 함께 추억을 나누고, 위로하며, 행복한 기억을 갖게 해준다면 죽이는 게 나았다는 생각 자체가 의미 없어진다. 결론은 중요하지 않다. 토론이 아이에게서 무엇을 끌어내는지가 중요하다. 토론한지 30분 만에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만약 왕따 같은 일로 고통당하는 아이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하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샬롯처럼 친구가 되어주면 된다.”고 대답한다. 상처와 상실을 추억과 기쁨으로 바꿔주면 윌버는 살아난다.
모르는 아이들과 독서토론 한다고 했을 때 걱정했다. 토론이 잘되지 않으면 ‘아이들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토론이 안 됐다.’고 말하겠다고 변명까지 생각해뒀다. 그러나 토론하면서 독서토론이 얼마나 좋은지 더 확신했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너희는 1학년부터 계속 같은 반이었잖아. 서로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 좋아졌다 싫어졌다 하며 지내왔지?” 모두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그럼 우리, 서로에게 고백해볼까? 샬롯이 윌버에게 '대단한 돼지, 겸허한 돼지'라고 말한 것처럼 친구에게 ( ) 친구라고 말해보자 했더니 “우리반을 즐겁게 만드는 ○○○ , 비밀을 지켜주는 ○○○, 청소를 잘 도와주는 ○○○ ”이라고 칭찬한다. 칭찬이 사랑 고백처럼 이어진다. 정말 따뜻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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