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9~11절을 1주일째 묵상 중입니다. 그 중 일부입니다. (본문은 영어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v9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네가 육신의 영역이 아니라 영의 영역에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v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음에 굴복하나 영이 의를 인하여 생명을 준다.
v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신다.

거하다(οκέω)는 집으로 삼다, 집이 되다, 산다는 뜻이다. 복음서에 쓰이지 않은 낱말이다. 가룟이 아닌 유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14:23).” 하셨다. 이때 쓰인 낱말은 거주하는 장소를 뜻하며 요한복음 14장에만 두 번 쓰였다. 요한복음 14장은 성령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떠나도 아버지 안에, 너희 안에 예수님이 있다고 하셨다. 가룟이 아닌 유다가 어찌하여 우리(제자들)에게는 나타내시느냐고 묻자 예수님이 거처를 함께하겠다고 하셨다.

당시 사람들에게 거처를 함께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했을까? 그리스도가 거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이의 영이 거하고,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는 게 뭘까? 두 사람이 결혼해서 같이 살기 시작하면 다툰다. 다투면서 생각과 태도를 조정한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면 내 생각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내 생각을 바꾸나? 이게 거한다는 뜻일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내 욕망과 다투고 난 뒤의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인가? 다투고 또 다투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 많아지는 과정이 성화인가?

성령이 거하지 않았으면 다르게 살았을까? 그렇다면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 건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한다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게 더 쉬워야 하지 않나?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의 한계를(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말한 뒤에 8(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에서 성령을 소개한다. 그런데 왜 나는 성령을 알고도 다시 7(곤고함, 갈등)으로 돌아갈까? 왜 계속 곤고한 상태로 살아야 할까?

8장이 아무것도 하나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선언으로 끝나는 건 좋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갈등과 괴로움은 어찌하랴! 8장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면 해답을 얻을까? 에베소서에도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행하고 자라는 모습을 표현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3:17).”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사랑 가운데 사는 게 낫지 않나?

어쩌면 우리가 죄의 심각성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물론 죄는 심각하다. 죄는 죽이고 무너뜨린다. 어떤 이단의 주장처럼 앞으로의 죄까지 모두 용서받았으니 자유롭게 살아가자는 말은 지나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된 사람이 계속 죄의 심각성에 매달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죄를 생각하고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쓸수록 슬픔과 우울함에 빠져들었다. 바울은 죄의 심각함을 알고도 하나님께 소망을 가졌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죄를 생각하면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다. 하지 못한 일이 앞을 가로막는다. 복음을 전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고, 이웃을 더 사랑했어야 하는데 못했고, 더 헌신하고 봉사해야 했는데 안 했다.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한두 해 전부터 의무감이 줄어들었다. 힘이 빠진 것 같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줄어들자 나는 할 수 있다.’ 하는 자만도 줄어들었다. 성취욕이 줄어들자 교만과 이기심도 줄어든 것 같다. 지금까지 살던 모습으로 사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성령이 함께하는 모습이 꼭 열광적인 모습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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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가 쓴 나니아 연대기 2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슬란은 에드먼드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는 아슬란과 함께 나니아를 구하고 영국에 돌아간다. 나니아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 영국에서 1년 흐르는 동안 나니아에서는 1300년이나 지나버렸다. 그동안 지형지물이 바뀌어서 나니아로 돌아온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맨다.

캐스피언 왕자에서 아슬란을 발견한 루시가 길을 안내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피터와 수잔은 루시를 믿지 않고 편안하게 보이는 길로 간다. 가다가 적을 만나 힘들게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아이들은 루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아슬란이 루시에게 나타나 오빠와 언니가 안 믿는다고 해도 루시가 아슬란을 바라보면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 말한다. 아슬란을 만난 뒤에 루시는 피터가 자기 말을 무시하고 수잔이 꿈을 꾼 거라 말해도 앞장서서 걸어간다.

깜깜한 밤에 절벽 길을 따라가는 건 어리석어 보인다. 막내 루시가 투정 부린다고 피터와 수잔이 짜증을 낼 만도 하다. 그러나 아슬란을 만나면 아무리 위험해도 아슬란을 따라가야 한다. 루시는 아슬란을 만난 뒤에 오빠와 누나가 실망해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슬란을 만났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도

모든 사람이 등을 돌려도 끝까지 믿어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나를 하나님께 인도했거나, 일어날 힘이 없을 때 붙잡아준 분이다. 그렇게 믿던 분이 실수하거나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면 실망해서 충격이 더 크다. 맞다. 실망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께 실망했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7:28)’라고 예수님께 칭찬받았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인 줄 아는 안목을 가졌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쳤으며,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3:30)고 고백했다. 성령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임하는 모습을 직접 봤다(1:32). 세례 요한은 최고의 증인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오실 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7:19)” 물었다. 직접 만나고, 세례를 주고, 성령이 임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도 흔들렸다. 예수님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실망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는 행동(죄인을 사랑하는 행동)이 요한의 눈에는 율법을 폐하는 것(죄를 거부하지 않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구약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는 과연 이분이 맞나?’ 고민한 것 같다.

세례 요한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죄를 고백할 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다. 훌륭한 사람이라도 잘못 판단하고 죄악에 넘어진다. 우리는 모두 허물이 많고 실수하며 넘어지는 죄인이다. 우리가 믿는 상대방도 우리를 실망시킨다. 죄악을 이기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실망을 피할 수는 없지만, 좌절감에 매여 주저앉아 있지는 말자. 예수님은 요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하지 않았다.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7:22-23)”고 대답하셨다.

요한은 이 말씀이 이사야의 예언이라는 걸 알았다. 이사야는 구원자가 오실 때(35:5)에 소경의 눈이 밝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고,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라고 예언(35:5-10)했다. 요한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베드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며 여러 번 실망했지만 한 번도 실족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배신할 줄 알고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밀처럼 체질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돌아올 때,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22:31-32)”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다. 예수님이 베드로 때문에 실족했을까? 그렇지 않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통곡했다(26:75, 14:72, 22:62) 무덤을 확인했고(24:12, 20:1-10),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24:36-43, 20:19-23) 도마와 함께 예수님을 또 만났다(20:26-29). 예수님을 부인했으면 그 뒤에 더 잘해야 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충성해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제자들 6명과 함께 고기 잡으러 가버렸다(21:2).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셨다. ‘날이 새어갈 때’(21:3)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다(21:4).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명하셨다(21:5-6). 베드로는 제자로 부름 받았던 때(5:6)처럼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 요한이 그때 일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21:11)고 기록했다.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들어 다가왔을 때 예수님은 생선을 굽고 계셨다. 생선을 뒤집는 예수님 손에 못 박힌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못 박힌 자국을 보았기 때문일까, 고기를 가져오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잡은 물고기가 전부 몇 마리인지 세었다. 좋은 고기 몇 마리 골라서 가져오면 될 텐데 153마리인 줄 확인한 뒤에도 예수님께 달려가지 않았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도 모자라,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도 제자 여섯을 데리고 고기 잡으러 도망 왔으니 민망했을 것이다.

히브리어는 알파벳을 숫자로 바꿀 수 있다. 베드로를 숫자로 바꾸면 153이 된다. 물고기가 153마리였을 때 베드로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피해 도망 다니려 해도 예수님은 계속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베드로가 회복될 때까지 놓지 않으신다. 베드로가 가져온 생선을 구워서 드신 뒤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처럼 배 오른편에 고기를 던지라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때처럼 세 번 물으셨다. 베드로를 처음 부를 때처럼 다시 회복시키시며 어린 양을 맡기셨다. 꾸짖지 않으시고 거절하지 않으신다. 물론 실망도 하지 않으신다.

우리도

사람은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망시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거절하지 않고 계속 받아주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마음대로 생각해 놓고, 하나님이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하나님은 이것조차 받아주신다. 실망한 사람의 부족함과 무책임함을 하나님께 말하자. 하나님께 실망했다면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말하자. 왜 하나님이 불의를 보고 가만히 계시느냐고 물었던 하박국에게 대답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답해주실 것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자. 상대방이 잘못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어릴 때 살던 곳에 가면 동네가 작아 보인다. 어릴 때 기억하던 긴 골목, 넓은 공터, 높은 나무가 그리 크고 높지 않다는 걸 알고는 놀란다. 어린아이 눈으로 본 골목과 공터와 나무는 길고 넓고 크지만 어른 눈으로 보면 자그마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마냥 우러러보기만 하던 사람이 평범하게 보이는 건 그분이 부족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자랐다는 뜻일 수도 있다. 계속 자라자. 아슬란을 따라,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라도 가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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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신이 아라비스를 다치게 했나요?”
그렇단다.”
왜죠?”
얘야, 난 그 애가 아니라 네 얘기를 하고 있어. 난 당사자 얘기만 하지.”
당신은 도대체 누구세요?”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땅이 울릴 정도로 아주 굵직하고 낮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다!” 

나니아 연대기 3말과 소년은 말이 주인공이다. 소년 샤스타가 종으로 팔릴 위기에 처하자 말인 브레가 샤스타를 구해내서 나니아를 찾아 도망한다. 둘은 친구를 만나고 적에게 쫓기다가 위기를 넘긴다.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라비스가 떠나고 샤스타 혼자 남을 때 샤스타가 아슬란에게 묻는다. 아슬란은 아라비스가 아니라 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뒤에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21:21-22)”라고 말씀하셨다. 샤스타와 베드로의 질문은 우리 앞에서 이렇게 바뀐다. “이 사람은 어떻게 돼요?”, “저 사람도 구원받나요?”, “쟤는 이렇게 하잖아요!”

“아니, 죄인이 회당장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발아래에 엎드려서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밀었다.(5: 21-24)”

아버지가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다. 회당장이라는 직책과 무리의 시선도 아빠라는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당장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회당장은 엄격한 유대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을 테니까. 그래도 사랑이 더 강했다. 예수님은 절박한 아버지와 함께 딸을 만나러 가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동안 절박한 다른 여자가 끼어든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 (‘제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5: 25-29)”

그녀는 12년 동안 병을 앓으며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낫지 않고 괴로움만 당했다. 가진 재산 다 날려도 고치지 못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비관하게 된다.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님 옷에만 손을 대도 구원받는다는 믿음을 갖는다. 꼴 보기 싫은 의사와 바리새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아슬란)를 바라본다.

피나 고름을 계속 흘리면 몸이 닿는 사람은 모두 부정해진다. 유출병 있는 자와 접촉하는 자뿐만 아니라 유출병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사람까지 부정하다(15:2-13). 공공장소에 다니지 못하고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자는 부정한 몸이 가져올 결과보다는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군중을 뚫고 간다. 옷을 만져도 낫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밀며 옷에 손을 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는 예수님께 나아간다.

“~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5: 30-34)

여자는 믿음으로 병이 나았지만 기쁨도 잠시, 자신의 수치를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께 다가오는 동안 접촉한 사람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으니 고백하기 힘들다. 병이 나았으니 조용히 돌아가면 좋을 텐데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말하라 한다. 여자는 무리 앞에서 모든 사실즉 혈루증 걸린 사실을 낱낱이 말해야 했다. 이때 회당장 야이로는 어땠을까? 예수님이 딸을 고쳐준다고 했을 때는 너무나 기뻤겠지만 부정한 여자가 예수님 붙들고 시간 낭비할 때 화나지 않았을까? 혈루증 여인에게 시간을 내주는 예수님께도 화가 났을 것이다. “저 여자가 왜?”

“너 때문에 내 자식이 죽었다!”는 생각 앞에서

그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고치기는커녕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회당장은 혈루병 걸린 여자가 꼴 보기 싫었을 것이다. 차라리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텐데, 여자가 길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여자가 야이로를 가로막았다. 그래도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5:36)고 하신다. 자기를 방해한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정말 싫겠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여자를 원망하며, 원망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야이로가 딱 우리 모습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5: 38-40)”

야이로가 소망을 갖고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에 혹시나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다. 아빠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으니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 죽은 아이를 위해서 통곡하며 떠드는 일 외에 무얼 할 수 있으랴! 우리는 상황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곡이나 하면서 사람들이 정해놓은 규정에 따른다. 아이가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가 잔다고 하신다. 자는 아이는 깨우면 일어난다.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 죽음도 예수님께는 깨우면 되는 잠에 불과하다. 무리가 죽었다고 단정 지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리신다. 아이가 살아나고, 야이로가 위로받고, 예수님의 능력이 무리 가운데 나타났다.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곧 일어나라 말씀하셨다. 그러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여자가 혈루증을 앓기 시작할 때 태어난 12살 아이가 살아났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 앞을 가로막았을 때 저 사람은 왜?” 했던 야이로에게도 기쁨이 찾아왔다. 여인은 나를 비난한 사람들을 잊고, 야이로는 나를 방해한 여인을 잊고 예수님만 바라본다.

아슬란을 만난 기쁨과 두려움에 젖어 샤스타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아슬란 앞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동체에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 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말과 소년을 읽어보시라고 권한다. 본회퍼가 이렇게 말했다. “공동체를 향한 자신의 꿈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지한 열정을 갖고 있다 해도 공동체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또한 저 사람도 사랑하신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C. S. 루이스, (고등학생 이상)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비롯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아슬란이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슬란은 두려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사자이다. 아슬란은 마녀의 마법을 깨뜨리고 나니아 백성을 구한다. 아슬란의 포효 소리에 악한 세력이 도망한다. 아슬란은 믿음을 회복시키고 의로운 자들을 구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슬란은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말을 쫓아가서 말이 더 빨리 달아나게 하지만 뒤쫓는 적을 해치우지는 않는다. 혼자 싸우면 더 쉽고 간단하게 이기지만 아슬란을 믿는 백성들이 적에 맞서 싸우게 한다. 아슬란의 뜻을 따르는 백성들이 함께 싸우며 아슬란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게 한다.

열심히 해야 할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가르셨다. 여리고를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다. 이제는 백성들이 스스로 가나안 민족을 무찔러야 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공동체를 이루어야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일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서로 도와주고 이웃을 위해 내미는 손을 기뻐하신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봉사를 힘들어한다. 해야 할 일과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 섬김과 봉사가 믿음을 드러내는 증거처럼 되어서 부담스럽다. 봉사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열심히 하자를 강조하는 말씀은 끊이지 않는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씨름한 말씀은 열심히 기도하자. 기도의 용사가 되자는 내용이 아니다. 요셉이 30살에 총리가 되어 7년 풍년이 지나고 흉년 2년째에 야곱은 바로를 만나 나그네 길이 130(47:9)이라고 말했다. 야곱 나이 130- 요셉 나이 39= 91. 야곱은 91세에 요셉을 낳았다. 라반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오다가 천사와 씨름할 때 야곱은 95세쯤 되었을 것이다. 야곱의 생애 147(47:28)에서 91세를 우리 시대(수명 80살 기준)로 보면 50살이다. 50살인 아저씨가 천사를 붙들고 늘어지는 모습이 우리가 상상한 씨름인가?

32:24-28의 주어는 계속 어떤 사람이다. 어떤 사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야곱이 마음과 생각을 꺾을 때까지 싸운다. 야곱이 열심히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설득당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에 자기가 뜻을 정하고 열심히 하자고 한다. 얍복강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이야기를 열심히 기도하자는 내용으로만 적용하면 안 된다.

열심히 하자는 말이 아프게 한다.

기쁨을 잃은 의무적인 봉사는 바리새인을 만든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오히려 하나님 일을 방해했다. 후배 부부가 유산했다. 당황하고 힘들어하며 버텼지만 다시 유산의 고통을 겪었다. 직장에서도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온갖 잡무를 붙들고 고생했다. 후배의 고백을 듣고 양혜원님이 자녀를 잃은 슬픔을 쓴 글을 보냈더니 쪽지를 보내왔다.

(남편) “글을 읽으며 내 맘 깊은 곳에서 가라앉아 있던 슬픔과 고통이 밀려왔어요. 아내를 병원 수술실에 보내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던 기억들…… 이상한 거 같다고 이야기하던 아내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두려움과 불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고민했던 시간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친구들의 출산 이야기, 둘째 이야기…… 모든 것이 부러웠던 시간이었는데.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 나보다 더 아플 아내가 있어 내색하지 못했던 것들…… 양혜원 씨가 표현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 “난 그 아픔을 잘 몰라서 말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 뜻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려워. 내 아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하나님은 죽어가는 모든 아이에게 느끼실 테니, 다른 아이에 대해 내 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는 나는 하나님 뜻이 어떠하다 말할 수가 없지! ~” (중략)

(남편)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실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조금은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아내와 나에게 성가대며 일을 해야 한다고 권유했어요. 예를 들면서 어떤 사람은 임신 마지막 달까지 성가대 지휘를 했다느니, 교회 일 열심히 하면 다 될 거라느니 이런 이야기들이. 상처…… 그렇게 표현하기에도 속상한 말이었어요. 양혜원 씨의 글, 오늘 선생님께서 주신 글이 내 맘 깊이 남네요.”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 긍휼히 여긴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자궁을 표현하는 낱말에서 나왔다.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낱말로 가려 뽑은 곳, 긍휼을 표현한 곳에서 자라던 아이가 죽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빛을 보기도 전에 끊어졌는데 봉사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다.’고 한다. 무너지는 아비 마음에 못을 박는 줄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처럼 상처를 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죄를 이렇게 지적한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6:14, 8:11)”

봉사해라를 정답처럼 떠밀면 안 된다. 열심은 순종의 모조품이다. 자기 멋대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마음 상태이다. 하나님 뜻을 분별함으로 삶에서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자신을 희생시키는 어떤 위대한 열심보다 훨씬 귀하다. 올바른 방향을 잡은 뒤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열심은 합리주의가 만든 함정이다. 투입이 클수록 산출이 크다면 은혜가 사라진다. 일한 것 없이 선물을 받는 종의 기쁨도 사라진다. 사역에만 관심을 두고 열심을 내세워 몰아붙인다고 하나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산한 후배를 긍휼히 여기셔서 두 자녀를 주셨다. 자녀를 주셨으니 감사해서라도 교회에서 열심히 해야 할까? 자녀를 어린이집과 학원에 보내놓고 부모는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달라고 기도할까? 하나님은 부모가 자녀를 잘 키우는 과정을 기뻐한다.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온전한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하나님 일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를 말씀으로 돌보는 게 예배이다. 후배는 가정을 위해 꾸준히 섬기던 기독교사모임에 나오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 일을 하고 있다. 봉사하라고 강요할 대상이 아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섬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뒤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매가 무덤에 찾아간다.(16:1-2) 예수님 시체에 바르려고 향품을 미리 사놓았다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일찍 무덤에 갔다. 율법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다고 했다. 장사지낼 때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장사지낸 뒤에 다시 만질 필요가 없었다. 장례 절차 중에 발라야 하는 향유를 장사지낸 시체에 바른다는 건 율법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들의 사랑은 율법 규정을 뛰어넘어 섬길 마음을 갖게 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여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값비싼 향유 준비해서 찾아갔다. 고귀한 섬김이지만 믿음 없는 열심이었다. 향품을 가져간 것도,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울 걱정도 소용없는 일이다. 무덤 안에는 예수님이 없었다.

여인들이 좋은 마음에서 섬겼지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잘못된 섬김은 당황스러운 상황을 일으키고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열심히 봉사해도 허탈해진다. 행위 자체는 아름답지만 믿음에 어울리지 않는 섬김이 있다. 믿음과 상관없는 지나친 열심에서 나온 섬김, 과시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섬김은 사람을 보게 만든다. 오랫동안 사람을 보면서 일하면 자신을 과시하며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하나님께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노아, 요나, 예수님의 제자들, 바울은 폭풍우를 만났을 때 다른 태도를 보였다. 제자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폭풍우를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를 저으며 수고했지만, 폭풍우를 이기지 못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환난 앞에서 당황한다. 제자들은 열심히 노력하기 전에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아라. 내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했다.

요나는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킨 줄 알았기 때문에 폭풍우에도 떨지 않았다. 그런데도 엎드려 간구하지 않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혼자 잘났던 요나는 하나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자 피해 버렸다. ‘열심히 해봐라. 그런다고 해결되나? 불쌍한 것들!’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노아는 열심히 방주를 만들지만, 비가 내린 뒤에는 아무 일도 안 한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떠다닌다.

바울은 죄수로 묶인 몸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로마로 끌려가는 중이다. 제자들처럼 스스로 노를 젓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요나처럼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지도 않는다. 폭풍우를 만났지만, 배에 탄 사람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죄수에게 짐과 생명을 맡긴다.(27:27-44) 바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을 담대하게 하였고 선원들은 바울의 말을 듣는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열심으로 바꾸면 얼마나 위험한지 호통하는 편지이다. 바울은 열심을 내세우는 갈라디아 교회에 화를 내며 복음은 열심이 아니라고 한다. 바울은 과거에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핍박했다. 옳지 않은 열심이었다. 갈라디아 교회가 행위를 복음으로 바꾸자 큰 글씨로 직접 써서(6:11),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신의 말을 들으라(6:17)고 외친다.

눈에 띄는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믿음을 판가름한다. 열심에 앞서 마음이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한다.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기꺼이 지겠다하는 태도는 멋모르는 자만과 방종에 불과하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7:22)”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7:23) 하신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해본 사람은 안다. 다만 하나님보다 봉사를 앞세우거나, 봉사가 주는 이익 때문에 봉사하지는 말아야 한다.

가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연회장이 잔치 끝날 때 신랑을 불러 진짜 포도주를 내놓았다고 칭찬한다. 신랑과 연회장은 좋은 포도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에 함께 있었고 포도주를 맛보며 놀랐지만, 예수님을 모른다. 신랑을 칭찬하고 연회장에게 인사하지만 영광을 나타내신(2:11) 예수님을 모르고 돌아간다. 결혼식 잘 준비했다고 칭찬하고, 다른 결혼식에 갈 때면 이번 결혼식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주인공을 잊는다.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2:9)” 하인들은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걸 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물을 떠왔고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기 때문이다. 하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참여했다. 이게 진짜 봉사이다.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침 일찍 무덤 찾아가는 마음을 귀하게 보시지만 유산한 부모에게 봉사 열심히 하면 좋은 일 생긴다고 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다르게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형제자매를 섬기고 섬김 받으며 함께 살아간다. 섬김과 봉사는 우리를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며 자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해준다. 이기적인 봉사에서 벗어나 하나님 뜻 안에서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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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에 기독교 세계관으로 수업하겠다고 모임을 만들었다.
교육과정을 재구성해서 수업하는 게 재미있었다.
행복한 수업만들기(초등)에서 모임을 여럿 개척했지만 몇 년 반짝하다가 무기력해졌다.

이후로 줄곧 나만의 수업에 몰두했다.
글쓰기 수업, 독서 수업, 자연을 거니는 수업, 마을을 다니는 수업!
이런 수업은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수업일까?

30년 전에는 기독교 세계관을 창조-타락-구속으로 설명했다.
20년쯤 전에 창조-타락-구속-회복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구조를 수업에 적용하기 어려웠다.
창조, 타락, 구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업에 적당히 끼워넣는 수준이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도예베르트의 우주법철학이 발전된 형태입니다.
대부분의 사상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면 핵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적고
대중이 좋아하는 개념만 남지요.

기독교 세계관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생각한다.
같은 기독교인들이라 해도 통일된 관점을 정하기 어렵다.
또한 세계관은 도구로 활용될 가치가 크지만 도구는 늘 오용될 위험이 크다.

기독 교사로 30년 동안 수업하면서 든 생각,
수업은 관계다.
세계관도 하나님과 한 사람의 관계다.
수업하는 사람(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수업과 학습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이런 게 세계관이라 생각한다.
설명과 전달이 아니라 토론과 묵상(숙고)이 필요하다.

2022년 9월 <복음과 상황>에 좋은 기사가 실렸다.
<복음과 상황> 잡지사에 전화해서 선생님들과 기사를 나누고 싶다고 했더니 1주일 동안 무료로 읽게 해주었다.
1주일이 지나면 회원만 기사를 읽게 바뀐다.

<아돌프 히틀러, 칼 바르트, 그리고 세계관 투쟁>에 나오는 부분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같은 성서적 주제로 세계관을 구성한다고 하여
그리스도인이 신뢰하고 활용할 만한 좋은 '기독교' 세계관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계관' 개념 없이, 혹은 '세계관'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지금 여기서 현실에서 듣고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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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돌려드립니다 9 (좋은교사 2022-5월호 원고)


맨 끝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제일 관심을 끌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호화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키가 훤칠하며, 숨 막힐 정도로 험상궂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너무나 아름다웠다.(69쪽)”

나니아 연대기는 C. S. 루이스가 기독교 세계관을 담아 쓴 동화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죄가 시작되는 마법사의 조카부터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는 마지막 전투까지 일곱 권이지. 마법사의 조카에서 디고리가 호기심 때문에 종을 치겠다고 고집을 부려.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같아. 호기심이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 쓰이면 위험해. 종을 쳤기 때문에 사악한 제이디스 여왕이 깨어나. 여왕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디고리는 그만 유혹에 넘어갔어. 보암직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처럼 말이야. 디고리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없었다고 말해. 여왕의 오만한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나 우리는 외모를 본다.

방송 매체는 사단, 마귀, 마녀를 괴상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표현해. 이들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은 예쁘고 잘생겼지. 백설 공주는 살려준 사냥꾼에게 감사하지 않았고, 난쟁이 집에 함부로 들어갔으며, 어리석게 독 사과를 받아먹었어. 그러나 예뻤기 때문에 잘생긴 왕자를 만났잖아. 외모가 예쁘면 마음도 착하다는 가치관이 아이들 이야기부터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선과 악은 이렇게 간단하게 나뉘지 않아. 예를 들어볼까?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모델로 다비드 상을 만들면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뛰어난 왕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몸매를 가진 훈남의 대명사가 되었어. 세계 여러 광장과 대학 곳곳에 다비드 상이 있어. 다윗이 정말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 상처럼 생겼을까?

사무엘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면서 “'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 앞에 나와 섰구나(삼상 16:6)” 하며 감탄했어. 그러나 하나님은 형들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 보아서는 안 된다(삼상 16:7)”며 다윗을 찾으셨어. 즉 다윗은 외모가 출중하지 않았어. 사울은 백성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지만(삼상 10:23) 다윗은 형들과 견주기엔 부족한 막내였어.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멋지게 만든 까닭은 다윗이 훌륭한 왕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다윗의 외모에만 신경 쓰느라 생식기를 할례받지 않은 모습으로 조각했어. 이스라엘에서 할례받지 않았다는 말은 이방인에게나 쓰는 모욕이었는데 다윗을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다윗은 골리앗을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삼상 17:36)”라고 불렀어. 그런 다윗을 할례받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었으니 말도 안 되지.

세상을 선과 악의 전쟁터로 가르는 생각을 이원론이라 그래. 이원론은 역사가 깊어. 고대 사회에서는 우리처럼 이치를 따져서 생각하지 않았어. 태양이 가려지면 신의 저주라 생각했지. 지금처럼 황사가 자주 불면 신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며 제사를 엄청 지냈을 거야. 이원론이 잘 드러난 곳이 그리스야. 그리스 신화는 선과 악의 전쟁터야. 북유럽 신화도 선악의 대결이 강해.

그리스 문화는 페르시아 제국에 영향을 주었어. BC 660년 경에 페르시아 제국에서 조로아스터교가 생겨.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을 바탕에 두었지. 페르시아는 인도 서북부까지 영향을 주었고 인도에서 생겨난 불교에 영향을 끼쳐. 불교 역시 세상은 선과 악의 끝없는 대립으로 생긴 고통의 현장이라며, 속세를 떠나야 한다고 말해. 우리나라는 오래도록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이원론 방식의 생각에 금방 넘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원론으로 생각하는 거지.

사람들은 보기에 좋으면 그냥 받아들여. 다윗이 할례를 안 해도, 목수로 사신 예수님 손이 곱고 부드러워도 보기 좋으면 괜찮다고 생각해.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어. 목수로 사신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게 당연해(53: 2). 그러나 우리가 흔히 보는 예수님은 잘생긴 백인 외모에 완벽한 물결을 이루는 머리카락을 가졌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천으로 머리를 동이고 있어도 예수님만은 바람에 머릿결 날리게 만들었잖아. 이원론은 예수님을 멋지고 잘생긴 분으로 둔갑시켰어.

사람들은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사람은 외모도 멋질 거라 생각해. 예수님도 온화한 인상을 지닌 잘생긴 남자였을 거라 착각해. 사실과 다르다 해도 기왕이면 보기 좋은 게 낫다는 생각이 일어나. 더구나 영상매체와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예쁘고 잘생긴 외모가 점점 중요해져. 노벨문학상 받은 책에는 못생긴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영화와 드라마에선 그렇지 않아. 사람들이 안 보니까.

눈이 가려지지 않게 하라.

기업은 이미지를 광고해. 제품을 좋은 이미지로 포장해서 이미지만을 기억하게 만들어. 소비자가 이미지만 보고 판단해야 물건이 많이 팔리기 때문이야. 그래서 특정한 물건을 소유하면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포장해서 광고해. 유명한 연예인이 제품을 써서 예뻐지거나 잘생겨진 게 아닌데도 연예인 보고 제품을 사게 만들지. 텔레비전은 짧은 광고 시간에 청중을 사로잡아야 하므로 지성의 작동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감정에 호소해. 보고 느끼는 감각만으로 판단해서 물건을 구매하게 만들어. 생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화려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 이런 영상은 우리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 놓지.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줄 알아도 판단의 기준이 점점 외모와 소유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어.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며 자란 아이는 이미지의 포로가 돼. 청소년은 말과 글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잖아. 친구를 만나도 대화하지 않고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이미지에 빠져드는 거 봤지? 한글조차 이미지로 바꿔서 표현해. 잘생기고 예쁘면 좋다는 것은 다음 세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미지가 됐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만들었어. 외모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이미지가 반영된 작품이야. 그러나 현대 문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하고 특정한 이미지를 가져야 좋은 작품이라고 속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이웃을 무시하며 잘생기고 예쁜 모습을 찾아다니는 건 우상이야.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 하나님께서 보시는 중심을 보아야 해.

예수님은 잘생기지 않았을 거야. 엘리야는 대머리였어. 낙타 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은 정말 이상하게 보였을 거야. 그러나 이분들은 모두 하나님께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어. 기왕이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대 문화는 속담이 말하는 수준을 넘어섰어. 취직하기에 좋은 관상으로 얼굴을 고치는 수준이라면 통탄할 일이야.

아이들을 촬영해서 방송하는 과정을 몇 번 지켜봤어. 보통 4~5일 촬영하는데 하루 이틀 남기고 피디가 새로운 걸 찍자고 해. 아이의 일상을 조용히 찍기만 하겠다는 약속이 사라지고 감동적인 이야기, 시청자를 만족시킬 만한 이야기를 조작해내. 시골 아이의 평범한 일상조차 상품으로 바꾸어버려.

영상매체, 친구들과 주고받는 이야기는 줄곧 하나님은 없다’, ‘네 마음에 드는 대로 살아라.’라고 주장해. 가치관을 흔드는 세계관이 사방에서 에워싸고 공격하고 있어.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도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해.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갇히면 안 돼. 잘생기고 예쁜 게 좋다는 속살거림에 넘어가지 말고 세상 앞에서 당당하자. 우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어. 사람들이 아무리 외모를 보더라도 당당하게 살면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해. 짓눌리지 말고 문화를 뛰어넘자.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나는 사고 싶지 않을 권리가 있다, 미카엘 올리비에, (중학생 이상)

죽도록 즐기기, 닐 포스터먼 (대학생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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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부터 사무엘상하를 묵상하다가 2022년 3월 압살롬의 반역 부분을 묵상하며~

다윗이 달린다.
골리앗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사울을 피해 달아난다.
동굴로, 들판으로, 국토 최남단으로 도망다닌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으로 달아난다.
왕이 된 뒤에는 사방으로 전쟁하러 다니며 달렸다.

우리도 빠르게 달린다. 대한민국은 달리는 나라다.
아이들이 학원으로 달린다. 학생들이 성적 높이려고 달린다.
청년도, 장년이 되어도 계속 달린다. 편안하게 쉴 미래를 향해 달리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다.

쉬지 못하는 사람에게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쉴까?
쉴 줄 알까? 편안하게 쉬면서 평안을 누릴까?

사울이 죽었을 때 요나단도 죽었다.
원수가 죽으면 영웅이 함께 사라진다고 했다.
다윗이 위협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도 사라졌다.
다윗은 늘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게 지냈다.
형들이 무시했고, 사울이 죽이려 했다.
사울에게 쫓길 때 다윗 곁에 있던 사람들도 다윗과 의견이 달랐다.
사울을 죽일 수 있을 때 살려주는 다윗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투에 참여한 사람만 전리품을 나누자고 주장했다.
시글락에 있던 가족이 잡혀갔을 때는 부하들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을 때도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싸워야 했다.
이스보셋이 죽고,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나라가 안정되었다.
그럼 다윗이 평안하게 살았을까?

다윗은 달리던 사람이라 멈췄을 때 허전했을 것이다.

외로움, 이해받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이 거절당할 때 드러나는 현상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다윗은 일찍 왕으로 지명되었고, 일찍부터 도망 다녔고 많은 사람을 책임지면서 늘 문제에 얽혀 살았다.
다윗이 쓴 시편으로 보건대, 다윗은 감상적인 사람이었다
하프 연주하던 목동이 왕이 되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안정을 누리게 되자 다윗이 무기력해졌다.
사방의 적을 모두 평정하자, 아들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아들이 딸을 강간했고, 아들이 아들을 죽였다그런데도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미 온갖 일을 겪었고,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가졌다. 자살과 우울증, 폭력과 적대감이 폭발한다.
다윗은 아버지보다 아껴주는 요나단이 있어야 했다.
살살 달래며 잘못을 고쳐주는 나단 선지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들과의 전쟁에서는 요압밖에 없었다.

나단과 아비아달은 어디에 갔을까그들은 왜 압살롬과 싸울 때 다윗 곁에 없었을까?

내 곁에 요나단 같은 친구, 나단 같은 사람이 있나?
사랑해주는 사람, 아끼는 마음으로 꾸중하는 사람이 소중하다.
곁에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어릴 때 성경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었어요.
너무 친근해서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성경에 쓰인 내용이 궁금해졌어요.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인 게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이 생겼지요.
질문이 생기자 성서가 재미있어졌습니다.
“왜 그럴까?” “어떻게 그럴까?”를 묻다가
“내가 당연하게 들은 해석이 올바를까?” 고민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성경을 읽는 방법, 해석하는 방법을 다룬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성경 공부할 때 제가 묵상한 내용을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어떻게 묵상하느냐 물어서 성경 해석 책을 몇 권 소개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소개한 책이 너무 어렵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쉬운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책이 나오지 않아서
제가 썼어요. 그 책이 <성경을 돌려드립니다>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신학교 졸업한 사람이 해석해주기를 기다려요.
자기 스스로 읽고, 해석하고, 묵상하지 않아요.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해설한 걸 읽으려 해요.
그래서 <성경을 돌려드립니다>를 직접 느끼게 해드리려 해요.
성서를 어떻게 읽는지 함께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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