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비롯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아슬란이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슬란은 두려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사자이다. 아슬란은 마녀의 마법을 깨뜨리고 나니아 백성을 구한다. 아슬란의 포효 소리에 악한 세력이 도망한다. 아슬란은 믿음을 회복시키고 의로운 자들을 구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슬란은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말을 쫓아가서 말이 더 빨리 달아나게 하지만 뒤쫓는 적을 해치우지는 않는다. 혼자 싸우면 더 쉽고 간단하게 이기지만 아슬란을 믿는 백성들이 적에 맞서 싸우게 한다. 아슬란의 뜻을 따르는 백성들이 함께 싸우며 아슬란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게 한다.
열심히 해야 할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가르셨다. 여리고를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다. 이제는 백성들이 스스로 가나안 민족을 무찔러야 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공동체를 이루어야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일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서로 도와주고 이웃을 위해 내미는 손을 기뻐하신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봉사를 힘들어한다. 해야 할 일과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 섬김과 봉사가 믿음을 드러내는 증거처럼 되어서 부담스럽다. 봉사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열심히 하자’를 강조하는 말씀은 끊이지 않는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씨름한 말씀은 ‘열심히 기도하자. 기도의 용사가 되자’는 내용이 아니다. 요셉이 30살에 총리가 되어 7년 풍년이 지나고 흉년 2년째에 야곱은 바로를 만나 나그네 길이 130년(창 47:9)이라고 말했다. 야곱 나이 130살 - 요셉 나이 39살 = 91살. 야곱은 91세에 요셉을 낳았다. 라반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오다가 천사와 씨름할 때 야곱은 95세쯤 되었을 것이다. 야곱의 생애 147년(창 47:28)에서 91세를 우리 시대(수명 80살 기준)로 보면 50살이다. 50살인 아저씨가 천사를 붙들고 늘어지는 모습이 우리가 상상한 씨름인가?
창 32:24-28의 주어는 계속 ‘어떤 사람’이다. 어떤 사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야곱이 마음과 생각을 꺾을 때까지 싸운다. 야곱이 열심히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설득당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에 자기가 뜻을 정하고 열심히 하자고 한다. 얍복강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이야기를 열심히 기도하자는 내용으로만 적용하면 안 된다.
열심히 하자는 말이 아프게 한다.
기쁨을 잃은 의무적인 봉사는 바리새인을 만든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오히려 하나님 일을 방해했다. 후배 부부가 유산했다. 당황하고 힘들어하며 버텼지만 다시 유산의 고통을 겪었다. 직장에서도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온갖 잡무를 붙들고 고생했다. 후배의 고백을 듣고 양혜원님이 자녀를 잃은 슬픔을 쓴 글을 보냈더니 쪽지를 보내왔다.
(남편) “글을 읽으며 내 맘 깊은 곳에서 가라앉아 있던 슬픔과 고통이 밀려왔어요. 아내를 병원 수술실에 보내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던 기억들…… 이상한 거 같다고 이야기하던 아내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두려움과 불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고민했던 시간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친구들의 출산 이야기, 둘째 이야기…… 모든 것이 부러웠던 시간이었는데.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 나보다 더 아플 아내가 있어 내색하지 못했던 것들…… 양혜원 씨가 표현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나) “난 그 아픔을 잘 몰라서 말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 뜻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려워. 내 아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하나님은 죽어가는 모든 아이에게 느끼실 테니, 다른 아이에 대해 내 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는 나는 하나님 뜻이 어떠하다 말할 수가 없지! ~” (중략)
(남편)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실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조금은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아내와 나에게 성가대며 일을 해야 한다고 권유했어요. 예를 들면서 어떤 사람은 임신 마지막 달까지 성가대 지휘를 했다느니, 교회 일 열심히 하면 다 될 거라느니 이런 이야기들이. 상처…… 그렇게 표현하기에도 속상한 말이었어요. 양혜원 씨의 글, 오늘 선생님께서 주신 글이 내 맘 깊이 남네요.”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 긍휼히 여긴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자궁을 표현하는 낱말에서 나왔다.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낱말로 가려 뽑은 곳, 긍휼을 표현한 곳에서 자라던 아이가 죽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빛을 보기도 전에 끊어졌는데 ‘봉사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다.’고 한다. 무너지는 아비 마음에 못을 박는 줄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처럼 상처를 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죄를 이렇게 지적한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렘 6:14, 렘8:11)”
‘봉사해라’를 정답처럼 떠밀면 안 된다. 열심은 순종의 모조품이다. 자기 멋대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마음 상태이다. 하나님 뜻을 분별함으로 삶에서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자신을 희생시키는 어떤 위대한 열심보다 훨씬 귀하다. 올바른 방향을 잡은 뒤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열심은 합리주의가 만든 함정이다. 투입이 클수록 산출이 크다면 은혜가 사라진다. 일한 것 없이 선물을 받는 종의 기쁨도 사라진다. 사역에만 관심을 두고 열심을 내세워 몰아붙인다고 하나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산한 후배를 긍휼히 여기셔서 두 자녀를 주셨다. 자녀를 주셨으니 감사해서라도 교회에서 열심히 해야 할까? 자녀를 어린이집과 학원에 보내놓고 부모는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달라고 기도할까? 하나님은 부모가 자녀를 잘 키우는 과정을 기뻐한다.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온전한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하나님 일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를 말씀으로 돌보는 게 예배이다. 후배는 가정을 위해 꾸준히 섬기던 기독교사모임에 나오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 일을 하고 있다. 봉사하라고 강요할 대상이 아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섬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뒤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매가 무덤에 찾아간다.(막 16:1-2) 예수님 시체에 바르려고 향품을 미리 사놓았다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일찍 무덤에 갔다. 율법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다고 했다. 장사지낼 때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장사지낸 뒤에 다시 만질 필요가 없었다. 장례 절차 중에 발라야 하는 향유를 장사지낸 시체에 바른다는 건 율법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들의 사랑은 율법 규정을 뛰어넘어 섬길 마음을 갖게 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여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값비싼 향유 준비해서 찾아갔다. 고귀한 섬김이지만 믿음 없는 열심이었다. 향품을 가져간 것도,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울 걱정도 소용없는 일이다. 무덤 안에는 예수님이 없었다.
여인들이 좋은 마음에서 섬겼지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잘못된 섬김은 당황스러운 상황을 일으키고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열심히 봉사해도 허탈해진다. 행위 자체는 아름답지만 믿음에 어울리지 않는 섬김이 있다. 믿음과 상관없는 지나친 열심에서 나온 섬김, 과시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섬김은 사람을 보게 만든다. 오랫동안 사람을 보면서 일하면 자신을 과시하며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하나님께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노아, 요나, 예수님의 제자들, 바울은 폭풍우를 만났을 때 다른 태도를 보였다. 제자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폭풍우를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를 저으며 수고했지만, 폭풍우를 이기지 못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환난 앞에서 당황한다. 제자들은 열심히 노력하기 전에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아라. 내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했다.
요나는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킨 줄 알았기 때문에 폭풍우에도 떨지 않았다. 그런데도 엎드려 간구하지 않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혼자 잘났던 요나는 하나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자 피해 버렸다. ‘열심히 해봐라. 그런다고 해결되나? 불쌍한 것들!’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노아는 열심히 방주를 만들지만, 비가 내린 뒤에는 아무 일도 안 한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떠다닌다.
바울은 죄수로 묶인 몸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로마로 끌려가는 중이다. 제자들처럼 스스로 노를 젓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요나처럼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지도 않는다. 폭풍우를 만났지만, 배에 탄 사람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죄수에게 짐과 생명을 맡긴다.(행 27:27-44) 바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을 담대하게 하였고 선원들은 바울의 말을 듣는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열심으로 바꾸면 얼마나 위험한지 호통하는 편지이다. 바울은 열심을 내세우는 갈라디아 교회에 화를 내며 복음은 열심이 아니라고 한다. 바울은 과거에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핍박했다. 옳지 않은 열심이었다. 갈라디아 교회가 행위를 복음으로 바꾸자 큰 글씨로 직접 써서(6:11),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신의 말을 들으라(6:17)고 외친다.
눈에 띄는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믿음을 판가름한다. 열심에 앞서 마음이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한다.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기꺼이 지겠다’ 하는 태도는 멋모르는 자만과 방종에 불과하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마 7:22)”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 7:23) 하신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해본 사람은 안다. 다만 하나님보다 봉사를 앞세우거나, 봉사가 주는 이익 때문에 봉사하지는 말아야 한다.
가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연회장이 잔치 끝날 때 신랑을 불러 ‘진짜 포도주’를 내놓았다고 칭찬한다. 신랑과 연회장은 좋은 포도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에 함께 있었고 포도주를 맛보며 놀랐지만, 예수님을 모른다. 신랑을 칭찬하고 연회장에게 인사하지만 영광을 나타내신(요 2:11) 예수님을 모르고 돌아간다. 결혼식 잘 준비했다고 칭찬하고, 다른 결혼식에 갈 때면 이번 결혼식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주인공을 잊는다.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요 2:9)” 하인들은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걸 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물을 떠왔고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기 때문이다. 하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참여했다. 이게 진짜 봉사이다.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침 일찍 무덤 찾아가는 마음을 귀하게 보시지만 유산한 부모에게 봉사 열심히 하면 좋은 일 생긴다고 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다르게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형제․자매를 섬기고 섬김 받으며 함께 살아간다. 섬김과 봉사는 우리를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며 자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해준다. 이기적인 봉사에서 벗어나 하나님 뜻 안에서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