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 (창 3장 6절)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장 1~11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 1서 2장 16절)

뱀의 말을 듣기 전에는 그냥 나무였던 선악과가, 뱀의 말을 듣고 난 뒤에는 달라졌다. 맛있을 것 같고, 보기 좋아, 갖고 싶은 대상이 되었다. 너무 맛있어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킬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보기 좋아 안목의 정욕을 채워줄 것 같고, 탐스러워 자랑으로 삼을 만하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다. 뱀이 알려준 지식에 아담과 하와가 무너졌다.

현대 사회에서 지식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수단이다. 지식과 정보는 돈을 벌게 해준다. 지식을 많이 알면 학벌이 높아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맛집 정보만 많이 알아도 유익하다. 맛있는 음식, 보기 좋은 물건, 탐스러운 대상은 지금 우리도 사랑하는 것들이다. 먹방과 사고 싶은 물건에 대한 탐욕이 방송과 매체를 가득 채운다. 아담과 하와를 무너뜨린 것들이 지금은 인기의 척도가 되었다.

요한은 세상에 있는 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정리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세 가지 시험도 돌을 빵으로 바꾸는 것(먹음직, 육신의 정욕), 눈에 보이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갖는 것(보암직, 안목의 정욕), 성전에서 뛰어도 괜찮은 것(탐스러움, 이생의 자랑)이었다.

먹고 싶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을 먹였던 예수님이 굶주린다. 이스라엘의 돌은 모양과 색깔까지 빵과 비슷하다. 누가 아비에게 빵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7:9)라고 말한 이유다. 일하지 않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인류의 소망이다. 내일 양식을 위해 염려하는 사람은 정말 힘들다. 오천 명을 먹였을 때 사람들이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구하며 예수님을 쫓아다닌 것도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는 소망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도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와 양념을 그리워했으며,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귀에게 절하는 일도 아니고 십계명과 율법을 어기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 육신의 어려움을 해결하라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개인적인 필요를 채워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맛도 나지 않을까!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했다. 자신을 위해 한 번 능력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일하게 된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전에 내 필요를 먼저 챙기고 육신의 정욕에 매이게 된다. ‘한 번은 괜찮겠지는 생각은 두 번, 세 번을 이끈다. 아담과 하와는 보암직한 선악과에 손을 내밀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

갖고 싶다.

한 번만 고개 숙이면 원하는 걸 얻는다? 힘든 과정을 겪지 않고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준다면?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고 죄를 짊어지고 고통스럽게 죽는 과정을 겪게 한다. 누가 이걸 하려 하겠나! 편하게 잘 살면 최고인 세상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고통을 겪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한 사람을 바꾸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도 같은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이라 유혹도 단번에 넘기고 늘 확신과 믿음 안에 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흔들렸고 위험에 직면했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갖고 싶은 것 앞에서 넘어진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겠다고 찬양하지만 이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한다. 이건 속임수다. 마귀 자신도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이 마귀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전히 온 만물의 주인이시다. 자기(마귀)가 넘겨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대항할 기초를 잃는다. 그래서 스스로 속이고 내가 주인이다외치며 하나님과 대적한다. 같은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라 생각하면 속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한다. 편하게 결과를 얻으려는 유혹을 이겨내려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쁨에 젖어야 한다.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과정이 너무 좋아서 유혹과 싸워 이기는 능력이 생겨야 한다. 세게 기도 한 번 한다고 기도의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의지를 갖고 성경 한 번 읽는다고 변하지도 않는다. 날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는 과정이 믿음의 사람을 이끈다.

유명해지고 싶다.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에 데려간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에 마귀가 예수님을 데려간다. 마귀는 예수님께 뛰어내려도 괜찮을 거라고 한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며 시험한다. 성경의 일부를 자기 뜻대로 인용해서 성도를 무너뜨리려 한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모르고 한 구절에 매이면 뛰어내릴 수도 있겠지. 모험해도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좋겠다는 소망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며 뛰어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믿음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기 확신일 뿐이다.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놓았는데 축복만 붙들고 잘 될 거라고 믿는다면 말씀을 왜곡시킨 자기 확신이다.

마귀가 인용한 시편 91편은 9~13절이 조건절이다. ‘만약 네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거처로 삼고 여호와를 피난처라 말하면(9)’ 보호하시겠다는 말이다. 지존하신 하나님을 거처로 삼고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굳이 성전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보호한다는 뜻이 아님을 안다. 시편 기자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찬양하며 쓴 고백을 실제로 뛰어내리라고 말하면 안 된다. 교회에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행해도 믿음대로 살지 않는 선택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말씀을 골라 듣고는 하나님 뜻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필요가 너무 커서 하나님이라도 끌어서 내 편 만드는 셈이다.

먹고, 갖고, 유명해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있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 약하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쉽게 넘어진다. 마귀가 하와에게 찾아갔을 때도, 우리에게도 같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우리는 먹는 거에 넘어지고, 갖고 싶어서 넘어진다. 유명해지려고 예수님도 이용한다. 사단은 약점과 강점을 가리지 않는다. 흔들 수만 있다면 말씀이라도 사용한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뜻과 상관없이 말할 때가 너무 많다. 사실 무엇이 하나님 뜻인지 아는 것부터 힘들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결정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어 보일 때도 많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에 대해 민감하다.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다. 죄를 짓지만, 예수님 이름을 부른다. 죄를 거부하고 또 맞선다. 먹는 것이 우리를 유혹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린 기도해서 빵 트럭을 받는 게 아니라 형제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형제가 형제를 먹인다. 굳이 성전에서 뛰어내려 주목받지 않아도 된다. 외롭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해 절망하고 지친 형제 곁에 그리스도인이 있다. 형제를 먹이고, 형제에게 주고, 형제를 높이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마귀에게 절하는 게 더 빠르다. 하나님은 거짓과 불의를 용납하지 않지만,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서 성공하기 위한 확실한 길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성공은 무너지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를 사랑하고 모든 죄를 피하고 모든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힘은 우리가 죄를 짓는다 해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시다.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 아들을 주신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하셨다. 우리 모두 넘어진다. 그러나 기억하자. 하나님 사랑은 돌아서는 자에게 항상 풍성하시다. 먹고, 갖고, 이름을 높이는 것에 앞서 하나님을 기억하자.

 

⁕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창 4:8)

⁕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자, 가세. 들로 나가세." (삼하 20:11)

⁕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5)

아들은 힘을 겨룬다. (장난감이라도) 총칼을 들고서, 자신은 살아남고 상대가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만족한다. 에서와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싸웠다. (25:22) 태어난 뒤에도 서로 형이 되겠다고 신경전을 벌였다. 유다의 아들 베레스와 세라는 먼저 태어나려고 다투었다. (38:28~29) 가인과 아벨이 시작한 싸움이 지금도 이어진다. 더 좋은 것 가지려고, 더 많이 먹으려고, 먼저 하려고 끊임없이 싸운다. 형은 동생을 누르고, 동생은 형에게 덤빈다.

동생을 들판에 데려가 죽이는 형

가인이 태어났을 때 하와는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아벨이 태어났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인이 꽤 속 썩인 모양이다. 창세기 42절은 아벨은 양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고 썼다. 형 가인보다 동생 아벨을 먼저 썼으니, 성경을 기록한 사람(과 독자들도) 가인보다 아벨을 좋게 평가했나 보다. 가인은 이런 평가를 싫어했다.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인데, 허무하다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 자기를 앞서는 걸 참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고 자신에게는 반응하지 않자 가인이 !’ 했다.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화가 났다. (4:5)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을 좋게 평가하자 자신이 낮은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형인데……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하시자 더 화났다. 동생을 좋게 평가한 것도 화나는데 화가 난 마음을 몰라주니 분노가 치솟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가인이 여호와의 판단을 평가한 셈이다.

아니, 몰라서 묻는 겁니까? 저 동생 놈이 나보다 얼마나 잘났습니까? 내가 동생보다 부족한 게 뭡니까? 내가 곡식을 주지 않으면 살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양이나 치는 목동 주제에 뭘 잘했단 말입니까?’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형의 위치, 형이 누려야 할 것)이 어긋나자 동생을 죽이고 싶어졌다.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는 게 뭐가 있어? 왜 나를 이렇게~’

하나님은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하며 네 죄나 잘 다스려라.” 하셨다. 이 말을 듣고 가인은 폭발했다.

동생아, 들로 나가자.” 하며 들로 불러내어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동생을 죽인 결과, 땅에서 농사짓고 수확하던 사람이 땅에서 피해 다녀야 했다. (4: 12) , 정착민 가인이 유목민으로 살아가야 했다. 역사에서 정착민은 늘 유목민을 무식한 무리, 약탈하는 나쁜 놈들로 취급했다. 가인은 ! 내가 오랑캐 같은 유목민이 되다니~!” 하며 탄식했을 것이다. 가축을 치며 떠돌다가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과 함께, ‘나를 죽이려는 놈은 아닐까?’ 생각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인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땅에 정착했다.

동생을 들판에 데려가 살리는 형

여호와께서 다윗을 선택했고,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하자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재현되었다. 가인이 아벨을 대하듯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 사울에겐 동조자도 있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사람들이 사울에게 알렸다. 다윗도 아벨처럼 들판에서 죽을 처지였다. 그런데 이곳에 은혜의 사람이 있었다.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려가 죽였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살리려고 들로 나간다. 같은 모습인데 의도가 달라졌다. 가인은 죽이고 요나단은 살린다.

사무엘상 12~23절까지 요나단이 다윗을 살리려고 짠 계획이 길게 이어진다.
v12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증인이다.
     v12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알려주는 시기 (내일이나 모레)
          v13 여호와께서 자네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v14 나도 주의 인자하심을 누리기 원하네
               v15 다윗의 원수가 없어지는 날에, 나를 생각해주게
.
          v16 여호와께서 자네의 대적을 치실지어다.
     v17~22 아버지 뜻을 확인하고 알려주는 방법 (활쏘기)
v23 주께서 길이길이 증인이 되신다.

핵심 내용은 v14 내게 인자를 베풀어달라. v15 네 인자를 내 집에 영원히 끊지 말라는 부탁이다. 다윗이 왕이 된다는 말을 듣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에게 사울의 가문을 부탁했다. 사울은 다윗을 쫓아다니느라 시간과 힘을 버렸고, 요나단은 사울을 살리려고 아버지에게 맞섰다. 사울은 가족을 위해 여호와의 뜻에 저항했고, 요나단은 가족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가인의 행위를 따르는 게 쉽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 뜻을 따랐다. 요나단의 순종이 다윗에게는 은혜였다.

들판에서 유리하다가 돌아온 동생

맏아들은 늘 칭찬받았다. 아버지를 섬기는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 (1529) 자기를 위해 아버지가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지만, 성실하게 일했다. 동생이 빈둥대며 사고 칠 때마다 형이 수습했다. 형은 동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타이르고 혼내도 동생은 그때뿐이었다. 형이 묵묵히 일할 때 동생은 아버지를 위협해서 재산을 한몫 챙겨 떠났다.

(상상) 동생이 집을 떠나고 맞이한 첫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다. 회당장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읽었다.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말이 꼭, 형의 삶을 받으셨다는 내용으로 들렸다. ‘난 가인 같은 형은 아니야. 난 동생과 비교하지 않아. 비교할 수준이 되어야 말이지. 여호와께서 내 제사는 받아도 아버지 재산 챙겨서 집 나간 놈의 제사는 받지 않을 거야. 틀림없이!’

몇 년 뒤에 동생이 거지꼴로 돌아왔다. ‘꼴 좋다! 아버지 재산 챙겨서 나갔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살아야지, 왜 돌아온 거야?’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아버지가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시자 더 화가 났다. 형은 과거에 매여 현재를 놓쳤고, 아버지는 사랑 때문에 과거를 용서했다.

아니, 몰라서 묻는 겁니까? 저 동생 놈이 나보다 얼마나 잘났습니까? 내가 동생보다 부족한 게 뭡니까? 재산 다 털어먹은 놈을 위해 잔치라니요? 나를 위해서는 무얼 해줬어요? 열심히 일한 대가가 고작 이거랍니까!”

형은 동생을 죽이고 싶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건 말도 안 되지만, 자신이 가인 같은 동생을 죽이면 사람들도 인정할 거라 확신했다. 첫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재산을 달라했으니 아버지 죽으라는 말과 같다. 둘째, 이방인에게 가서 돈 다 써버린 놈이니 하나님 자녀가 아니다. 셋째, 돼지(부정하다 부정하다!) 치면서 돼지가 먹는 걸 먹었다던데 말도 안 된다. 부정한 짐승에 손을 댄 정도가 아니라~ 어휴, 말하기도 싫다.

힘이 아니라 은혜로

성경에는 동생이 잘되는 이야기가 많다. 형에게는 아버지 이름을 받고, 유산을 두 배 상속받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권리를 당연하게 내세우면 은혜가 사라진다. 성경은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25:23) 하셨다. 힘센 형 에서가 아니라 약한 야곱, 막내 다윗, 가난하고 연약한 자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된다. 요나단은 들판을 살리는 곳으로 바꾼다. 탕자라도 은혜에 감사하고,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면 아버지 품에 안긴다. 가인의 마음은 들판뿐만 아니라 집도 살인 장소로 만든다. 요나단의 마음으로 동생과 함께 인자하심을 누리자(삼상 20:14~15).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때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 하였다. (창 4:15~17)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창 11장 2~4절)”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는데, 그는 세상의 첫 장사가 되었다. (창 10장 8절, 대상 1장 10절)

아담이 에덴을 떠나고 나서 낳은 첫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 이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2)” 말씀하셨다. 가인은 (에덴이나 아담을 떠난 게 아니라) 주님 앞을 떠나 동쪽으로 갔다. 가인은 돌아다녀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떠돌아다니기를 거절하고 놋 땅에 정착했다(4:16). 놋은 떠돌다는 뜻이다. 자신이 거하는 곳을 떠돈다는 뜻의 이라 부르고 나는 떠도는 곳에 산다.’ 하며 자신을 속였다. 떠돌아다니라는 명령에 꼼수를 쓴 셈이다.

가인은 누구든 자기를 만나는 사람이 자기를 죽일 거라며 두려워했다(4:14). 불특정 다수가 자신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면 불안감에 짓눌린다. 가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찾은 방법이 성(Castle)이다. 하나님이 안전을 보장했는데도 가인은 성을 쌓아 외부 공격에서 안전을 지키려 했다. 쌓은 성이 멋있어 보였는지 아들 이름을 붙였다. 떠돌아다녀야 하는 사람이 도시를 세우고 성에 아들 이름을 붙였으니 명백한 불순종이었다. 하나님 말씀대로 떠돌아다녔다면 성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자손 대대로 성에 자리를 잡고 잘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가인의 아들, 성주 에녹

가인은 하나님의 에덴을 대신하여 도시를 만들고 아들 에녹을 성주로 삼았다. 성은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곳,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장소이다. 가인은 여호와께서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듣지 않았고,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도 믿지 않았다. 가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결과 <도시>가 생겼다.

에녹은 시작또는 개벽을 뜻한다. 가인은 새로운 세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시작과는 다른,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부르는 도시를 시작했다. 도시는 에녹의 의도에 걸맞은 역할을 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바벨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도시를 세운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바벨 탑을 세웠다.

하나님은 땅에 충만(1:22, 1:28, 9:1, 9:7에서는 편만’)하라 하셨다. 땅에 충만하려면 흩어져야 한다. 도시는 사람들이 모여야 만들어진다. ,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반대해야 도시가 이루어진다. 도시는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인간은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막으려 했다. 가인이 그랬고, 시날에 모인 사람들도 그랬다. 그곳에 니므롯이 등장한다.

니므롯, 시날의 역사

노아 이후에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에 정착했다. 시날은 강포함과 포악 위에 세워진 도시다. 바벨탑이 세워진 곳이 시날(11)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잡아간 무리의 우두머리는 시날(14:1) 왕이었다. 아간의 범죄를 일으킨 물건도 시날 산 외투(7:21)였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성전 물품을 가져다가 자기 신을 섬기는데 두었던 곳도 시날(1:2)이었다. 이때 다니엘은 바벨론이란 이름 대신 일부러 시날이라고 썼다.

세상의 첫 장사로 알려진 니므롯의 나라가 시날 땅(10:10)에서 시작한다. 시날은 시대를 이끌고 지배하는 정신을 나타낸다. 힘과 권력, 돋보이는 능력, 사람들이 따르는 넓은 길을 보여준다. 시날에 도시를 세우고 이웃 나라를 공격한 사람들은 모두 가인의 자손이다. 놋 땅에 도시를 만든 가인과 에녹 성주의 후손이 제국을 세우고 예루살렘을 무너뜨렸다. 이스라엘은 시날(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리하는(26:5)’ 백성, 도시와 상관없는 유랑민으로 정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곳에 모여 힘을 기르고 제국을 이루어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돈을 내세워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제국을 원하셨다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나라를 세웠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문명의 중심지에 발달한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했다. 이집트에 내려갔으나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스라엘은 두 제국 사이에 끼인 땅 가나안에서 시작했다. 그곳은 전쟁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던 다윗을 제국의 황제로 만들지 못하는 땅이었다.

성전은 모였다가 다시 삶의 자리로 흩어지게 하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성전에 모일 때도 우리는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죄인이다.’를 생각하고 이스라엘 곳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흩어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모여들어 힘을 과시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성전조차 구심점으로 삼아버렸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석구석까지 보여주는 출발점이 아니라 국가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돼버렸다. 하나님 없이 사는 영웅(니므롯)이 세운 도시(시날, 바벨론)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예수님은 니므롯과 반대 모습으로 사셨다.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셨다. 가난하고, 온유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으라 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을 쌓고 도시를 이루는 정신과 거리가 멀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성전이라 해도 스스로 중심에 둔다면 하나님께서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성전이 무너진 곳에 사람들은 교회를 세웠고,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자 또 니므롯이 등장했다.

도시의 의미 (자크 엘룰이 쓴 도시의 의미를 참고하였다.)

자크 엘룰은 도시를 인간이 전능한 장소라고 썼다. 도시를 의사 불통의 장소, 하나님의 크나큰 아이러니가 숨어있는 곳이라 불렀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낸다. 자신을 위해 도시를 건설하지만, 자신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지내게 된다. 도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게 자기 나름의 정의를 세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지 말아야 할까? 수도권과 광역시에 거주하는(2020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의 81.4%가 흩어져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29:7)” 하셨다. 포로 된 곳에서 주인처럼 살라 하셨다. 니므롯의 자리에 앉아 부와 권력의 주인이 되는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로 주인처럼 살라 하셨다.

종은 시키는 대로 하지만, 주인은 스스로 결정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더 높아질까, 더 편하게 지낼까 물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걸 묻는다. 그들이 말하는 걸 누리기 위해 질문을 잃어버리고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말하는 아파트, 연봉, , 대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문에 마음을 둔다. 7월호의 <세 가지 질문>을 떠올려보자.

도시는 우리를 바쁘게 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잊게 만든다.

나를 찾을 여유가 있나? (네가 어디에 있느냐?)

도시는 이웃을 없앤다. 옆집, 윗집은 있어도 이웃은 사라지게 만든다.

이웃이 보이는 곳인가?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도시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결정하는 건 무엇일까? 돈 아닌가? 돈이 되는 곳에 사람들이 모인다. 우리도 돈을 위해 살아가야 하나?

무엇을 하며 살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여호와를 기쁘게 하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그곳은 에녹 성이고, 놋 땅이고, 시날 땅이다. 떠나야 한다.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9)
“네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창 4:10)

첫 번째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물으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잘못한 아담에게 무엇을 했느냐?” 묻지 않고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잘못된 곳에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말씀하신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피한다.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함께 있는 자리를 피한다. 어른도 잘못한 게 있으면 피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상태임을 피하는 모습으로 드러낸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리는 아담이 자유롭게 서 있던 곳에서 피해야 할 곳으로 바뀌었다. 한 번 잘못된 장소에 간 뒤에 아담은 피하는 자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3:8)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동쪽으로 쫓겨났다. 그 뒤로 아담의 후손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어디(여호와 앞)를 장소(where)로 착각하여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곳(place)을 찾아다녔다. 바벨탑을 쌓고, 성을 만들었다. 성스러운 곳을 정해놓고 이곳에서는 안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예루살렘 성전도 그들이 믿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장소였다.

모세가 꺼지지 않는 불꽃을 향해 나아갈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는 말씀을 들었다. 모세가 선 곳, 시내산이 거룩하다는 말일까? 특별히 거룩한 장소가 있으니, 그곳에서는 경건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라는 말일까? 우상을 믿는 사람이 나무, 바위, 신령한 장소를 찾아다니듯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까? 집보다 예배당이,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가 건물 예배당보다 기도 응답 잘 받는다는 산속 기도원이 더 거룩할까? 더 특별한 장소가 있을까?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나서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5:15)” 말했다. 요단강과 여리고성 사이에 있는 장소가 거룩하다는 뜻일까? 그래서 이곳을 길갈이라 부르며 성막을 세웠을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곳은 장소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을 때(15) “네 자손이 사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셨다. 아브람에게 당장 가나안 땅을 주지 않은 까닭은, 그곳에 사는 아모리 족속이 아직 심판받을 정도로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왔을 때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꽉 찼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사람들의 행동을 본받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18:24~25)”) 말씀하셨다. 가나안 족속이 쫓겨난 까닭은, 그들이 더러운 행동으로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선 땅은 가나안 족속이 심판받을 정도로 죄악이 가득한 곳이었다. 땅에 사는 사람이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주인이 바뀌었다.

죄악으로 더러워진 땅에 선 여호수아에게 군대장관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 했다. 거룩한 까닭은 땅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 여호수아’, ‘바로 네가선 곳을 말한다. 시내산이 있는 땅, 여호수아가 건넌 땅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땅은 죄악이 가득해서 심판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서면 거룩한 땅이 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선 곳은 어디든 거룩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Coram DEO) 살기 원하신다.

두 번째 질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여호와께서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한 질문도 무얼 했느냐?”가 아니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다. 자신이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하게 되자 동생도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이 뒤따른다. 하나님 앞에 사는 존재가 반드시 들어야 할 질문이다. ‘하나님이 곁에 두신 형제가 어디에 있는가?’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삼았던 동생이 어디 있을까? 부모는 어디에, 가족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곳에 있나? 아이들은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길로 가는 중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 개인의 행복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이 내 아우 아벨에게로 흘러가기 원한다. 아벨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보낸 형제였다. 가인을 하나님께로 이끌 신실한 증인이었다.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으므로, 가인이 아벨을 잘 살펴보면 가인도 여호와를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제거하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여호와 앞에 있다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나를 여호와께로 인도한다. 그를 죽이지 말고, 피해 도망가지 말고, 다음번에도 함께 제사해야 한다. 아이, 학부모, 동료 교사, 교장이나 교감이라면 함께 지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라면 배우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면~ “When a man’s ways please the LORD, He makes even the man’s enemies live at peace with him. (잠언 16:7)” 대학 때 사람의 길(way, 방법)이 여호와를 기쁘게 하면, 여호와께서 그 사람의 원수가 그와 함께 평화롭게 살게 하신다는 잠언 말씀을 참 좋아했다. 나이가 들면서 이 말씀을 현실화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느꼈다.

나를 괴롭히는 저 사람이 과연 내 아우 아벨일까?’가 해결되지 않았다. 화평과 평안을 기대하며 여호와의 뜻을 분별하려고 노력했지만, 원수와 평화롭게 살지 못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도 있었고, 대부분 피하고 싶었다. 그럼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여호와께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여호와는 이미 아벨의 피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는 소리를 들었다. 여호와께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물은 까닭은, 아벨을 가인 곁에 두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는 아벨이 어디에 있든 알 바 아니라는 말이다. 아벨은 가인에게 알 바 아닌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가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아벨로 생각하진 못해도, 어떤 사람은 동생 아벨 같은 존재이다. 여호와 앞에 갔을 때 여호와께서 적어도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는 물으실 것이다.

세 번째 질문,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우리는 행동을 본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살핀다고 배웠다. 바리새인들의 정체성은 의로운 행동에 있다. 주일날 설교 내용에서 행동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을 정도로 지금도 행동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무얼 했는지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보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여호와 앞에 있다면 우리의 행동이 일으킨 죄악을 여호와께서 용서하신다. (영화 밀양의 살인범처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전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물었다. 우리 반 아이가 잘못하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묻는다. 왜 그랬는지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했는지를 가장 늦게 물으셨다. 무엇을 하였느냐 묻기 전에 네 이웃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이웃에게 어려움이 생겼다면 그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라는 뜻이다. 나를 살피고, 아이를 살핀 다음에 왜 그렇게 했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이 곁에 두신 형제가 어디에 있는지, 형제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 내 형제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 나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 라는 대답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대부분 이 대답에서 멀리 떠나있다.

 

<본문>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려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창 2장 10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창 3장 23절)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창 4장 12절, 14절)

강원도 태백시에 삼수령(三水嶺)이라는 고개가 있다.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 고개라는 뜻이다. 비가 삼수령 꼭대기에 내리면서 북쪽으로 흐르면 강원도 삼척시로 흘러가 오십천을 이룬다. 빗방울이 남쪽으로 구르면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흐르면 한강으로 나간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다르다. 오십천 발원지는 백산골, 낙동강 발원지는 황지연못, 한강 발원지는 검룡소로 알려졌다.

한강, 낙동강, 오십천은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든 물이 모여 이루어졌다. 어느 한 곳에서 강이 출발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강과 낙동강의 1/10밖에 안 되는 오십천도 작은 지류가 50개 모여 오십천이라고 부른다. 발원지가 50개나 되는 셈이다. 다만 하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백산골을 발원지라 부를 뿐이다.

에덴에서 뻗어나가는 ~ (창 2장 10절)

에덴동산에는 삼수령이 아니라 사수령(四水嶺)이 있다. 비손강, 기혼강, 힛데겔(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이 에덴에서 흘러나간다. 삼수령에 올라 사방을 둘러봐도 한강과 낙동강과 오십천이 보이지 않는다. 삼수령에 오르면 물이 흘러가는 희미한 흔적도 찾지 못한다. 그저 여기 어디쯤에서 흘러나갈 거라 예상할 뿐이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가는 강도 삼수령 같을까? 에덴동산 한가운데에도 여기 어디쯤이라 말할 만한 곳이 있을까? 그곳에서 네 강이 흘러갈까?

재미난 상상을 해보자. 만약 아담과 하와(와 후손까지 모두)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동산에 10억이 산다면? 50억이 산다면? 에덴에 사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에덴이 인구를 감당할까? 아담과 하와가 거닐던 동산이 사람 수에 따라 점점 넓어질까? 에스겔이 일천 척 나가면 발목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나아가면 무릎에, 더 나가면 허리에, 마지막에는 건너지 못할 정도로 넓어진 강을 보았다. 에덴동산도 이렇게 넓어질까? 하나님 나라가 커지듯 사람이 많아질수록 에덴동산도 점점 멀리까지 넓어질까? 아담이 쫓겨난 땅까지 에덴동산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득 찰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에덴동산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면, 에덴동산 바깥까지 에덴동산처럼 복된 곳이 되는 건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창 3장 23절)

칭기즈칸, 알렉산더, 나폴레옹은 정복자로 불린다. 출발지에서 가장 먼 곳까지 정복했기 때문이다. 정복지가 넓을수록 영향력이 커지며 사람들이 높게 평가한다. 여호와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하셨다. 아담(과 후손)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칭기즈칸과 알렉산더와 나폴레옹보다 더 넓은 땅을 정복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 안에 거한다. 달이나 화성에 다다른다 해도 정복이란 말을 쓰는 대신 하나님 나라가 거기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를 이루며 살 것이다. 영향력을 내세우거나 성취감에 우쭐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선악을 알게 되자마자 죄악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사람이 되었다.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4:18), 아담은 땀이 흐르도록 수고해야 했다. (4:17, 19) 사람이 달라졌고 땅도 달라졌다. 아담은 중심지(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가인은 더 먼 곳으로 이동했다. 아담의 후손이 많아질수록 에덴에서 점점 먼 곳까지 옮겨야 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에 순종한 걸까?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쫓겨난 사람은 넓은 땅을 차지하고 멀리 정복할수록 에덴에서 멀어진다. 정복이 아니라 추방이라 불러야 하지 않나? 그렇다면 여호와께 받은 명령의 의미나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하지 않나? 죄악에 물든 사람이, 죄악에 물들기 전에 받았던 명령(땅을 정복하라는 명령), 죄악에 물든 마음으로 따라야 할까?

백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에덴동산에서 죄없이 살던 사람들인 것처럼 정복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수많은 유색인종(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 원주민)이 고통을 당했고 죽었다. 단 한 구절을 내세워 아메리카 원주민을 거의 멸절 수준으로 죽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로 주신 말씀을 앞세워 아프리카에서 인간을 짐승처럼 잡아 팔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쫓겨난 사람의 후손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정복자처럼 땅을 넓혀갔다.

우리도 넓은 땅에서 높은 짓 짓고 살기를 바란다. 옳을까?

쉬지 못하고 떠도는 자 (창 4장 12, 14절)

가인은 농부였다. 농부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간다. 떠돌이 삶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하게 여긴다. 중국에서 농경민 한족은 짐승 떼를 이끌고 떠돌며 살아가는 유목민을 모두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범죄한 결과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정착민이 멸시하던 유목민으로 살아야 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 가인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중심에서 멀리 가는 일이 정복자에겐 성공이지만, 피하며 유리하는 자에겐 추방이다. 높은 건물을 세우고, 넓은 땅을 차지하고 산다 해도 여호와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피하며 유리하는 중이다. 삶의 목표를 돈과 권력에 두고, 여호와를 떠나 자기 힘으로 왕국을 세우는 일은 헛되다.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 얼마나 멀리 가느냐, 얼마나 넓은 땅을 차지하느냐 생각하기 전에, 출발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중인지, 피하며 유리하는 중인지……

많은 작가가 헛된 목표를 세우고 자기만의 왕국을 이루었다가 무너진 사람을 이야기로 썼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출발지를 생각하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높은 건물과 넓은 땅)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승진하고, 더 넓은 아파트를 사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마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만 채울 수 있는 공허함을 직위, 재산, 성공으로 채우려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중심에서 솟아나는 강

한강 발원지 검룡소는 작은 개울이다. 오십천 시작되는 곳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다. ‘이게 발원지야?’ 할 정도이다.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 연못에는 물이 퐁퐁 솟아난다. 땅속에서 물이 솟아나 흘러가기 때문에 맑고 깨끗하다. 물이 흘러가며 지류가 합쳐지면서 커지면 강이 된다. 그런데 성경은 에덴에서 발원한 강이 동산을 적셨다고 한다. 모여서 이루어지는 강이 아니라 솟아나는 강이다. 네 곳으로 흘러 강을 이룰 정도로 물이 넘치게 솟아난다.

지구상에서 강의 발원지를 찾는 방법은 모두 똑같다. 물줄기를 따라 가장 높은 곳을 찾아간다. 그렇다면 에덴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을까? 흘러서 만들어지는 강이라면 산꼭대기여야 한다. 분수처럼 아래에서 솟아나는 강이라면 다르다. 에스겔이 건너려 했던 물, 발목에서 무릎을 지나 허리에 오르고 헤엄할 만큼 많아진 물은 성전 문지방 밑(에스겔 471)에서 나왔다. 요한이 봤던 생명수의 강도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221)로부터 솟아났다.

쉬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은 솟아나는 곳에서 멀어진다. 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 모이고 모인다. 하나님의 사람은 중심에서 솟아나 밖으로 흘러간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자라고 열두 가지 과일이 열린다.

“(나를 포함한) 당신에겐 솟아나는 강이 있는가?”

 

 

창세기 4장을 상상해서 쓴 일기 -

가인 :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 4:1)
아벨 :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창 4:2)
셋 :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5)

12월 31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은 잠깐 느끼고 끝났다. 선악과가 탐스러워 보인다고 할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아내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함께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아내 말을 들은 내가 어리석었다. 선악과를 딸 때 말렸어야 했는데, 덥석 먹어버릴 줄은 몰랐다. 난 소심한데 아내는 과감했다. 아내는 여러 가지에 관심이 많았다. 난 아내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안 먹겠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보면 어느새 일이 벌어졌다. 마음이 아프다.

스산하다. 오늘 에덴에서 쫓겨났다.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에덴동산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자꾸 화가 난다. 아내가 잘못했는데 같이 쫓겨나다니물론 나도 나쁘다. 잘못했다. 그래도 전능자가 설마 우릴 쫓아낼 줄이야! 아내 때문에 쫓겨나지만, 저 바깥세상에서 의지할 이라고는 아내밖에 없다. 창자 아래쪽이 묵직하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2년 뒤 5월 5일,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 배가 조금씩 커졌다. 동물이 새끼 배는 건 봤지만 아내가 아이를 배다니 놀랍다. ‘배가 얼마나 부르면 아이가 태어날까? 어떻게 생겼을까? 무슨 소리를 낼까?’ 궁금한 것투성이다. 임신하기 전에 아내를 볼 때마다 에덴동산 생각이 났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나를 믿고 도와주며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러나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너 때문에이렇게 되었다고 소리치면 잠깐 시원하지만, 창자 아래쪽이 더 아파졌다. 피부가 긁히고 갈라져 피가 나도 며칠 지나면 괜찮아졌다. 그러나 창자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낫지 않는다.

드디어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아이다. 아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허전함을 아이가 채워주려나? 아내는 온통 아이에게 사로잡혔다. 선악과를 바라볼 때와 같은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생긴 아픔과 눈물,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다. 어쩌면 동산 밖에서 사는 것도 참을 만하겠다.

첫째 이름을 가인(קַיִן)이라 정했다. ‘, 얻다는 뜻이다. 아내가 가인을 낳으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한 말에서 정한 이름이다. 내가 처음 얻은 아들, 내게 창이 되어줄 아들, 내가 낳은 첫 후손이다. 아내도 기뻐하며 말했다. “ ‘내가아들을 낳았다. ‘내가얻은 아들이다.” 이 땅에서 수고하며 견딘 모든 아픔을 찔러 쪼갤 창이 될 아이, ‘내가얻은 보물이라 외쳤다.

 

12년 뒤 4월 19일,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점점 더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아이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아프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아프다. 가인이 나를 위해 던져지는 창이 될 줄 알았는데, 아이가 창이 되어 나를 찌른다. 가인은 이기적이다. 자기 생각만 내세우고, 자기 뜻대로 하려 한다. ‘내가 저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땀 흘리며 일하는 게 힘들었지만, 집에 오면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집에서도 쉬지 못한다. 가인을 보면 눈을 돌리게 된다. 아내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날마다 한숨만 쉰다.

둘째 이름을 지어야 한다. 가인이 태어날 때 아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여호와께 감사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호와는 그냥 하는 말이고, ‘내가낳았다는 뜻이다. 가인이 하는 걸 보면 둘째도 기대할 게 없다. 한숨만 나온다. 아벨(한숨, 덧없음, 허망함, הֶבֶל)은 어떨까? 헛되고 헛된 세상, 소망 없는 삶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둘째 이름을 아벨로 지었다고 하자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빤히 바라본다. 눈물이 슬쩍 맺히더니 고개를 떨군다. ‘아벨로 해도 괜찮다는 뜻이겠지!’ 그러고 보면 아내도 나만큼 상처받았다. 불쌍한 사람!

 

32년 뒤 4월 16일, 죽음.

아벨은 가인과 달랐다. 가인을 보고 한숨만 내쉬며 살았기에 동생 이름을 아벨로 지었는데 둘이 바뀐 것 같다. 가인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오히려 아벨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 같다. 그러나 어쩌랴! 가인이 장자이고 아벨이 동생인 것을! 가인에게 가업을 물려주었다. 아벨은 양을 치게 했다. 먹지도 못하는 양이나 기르게 하다니 안타깝다. 여호와께 제사할 때도 아벨은 형이 곡식을 거둘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아벨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적도 없다. 아벨이 장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할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설마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줄은 몰랐다. 첫째가 둘째를 죽였다. 어찌 사람을 죽일 생각을 했을까? 전능자가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동생을 죽이다니전능자가 하신 일을 자기가 평가하려 들다니여호와께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하시며 죄라는 말을 처음 쓰셨다. 그만큼 가인에게 신경 쓰셨는데 가인이 걷어 차버렸다. 에덴을 떠난 뒤에 내 삶은 계속 한숨뿐이다.

아벨을 땅에 묻었다. 가인은 떠나버렸다.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외로웠다. 아내에게 하지 않는 말이 늘어났다. 말하지 않으면 오히려 편했지만, 그때마다 마음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이번에는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아들이 태어나 함께 땀 흘리기를 바랐는데 동생 피를 흘릴 줄이야!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는 전능자의 말씀(2:23)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소망이 있을까?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져낼까?

★ 하와의 한 마디 : 오늘 아담이 쓴 일기를 봤다. 가인이 나를 두고 자기만 생각한다고 썼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아담이다. 자기 혼자 상처받은 줄 안다. 이 일기가 증거다.

가인을 낳고 하와가 말했다. “With the help of the LORD I have ~” 아벨을 낳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인을 기르며 기대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여호와께 감사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실망한 것 같다. 셋을 낳았을 때는 주어가 바뀐다. 가인을 낳고 내가 낳았다.” 했는데, 셋을 낳고는 “God has granted me another child in place of Abel, since Cain killed him.” 하나님이하셨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성경에 죄라는 낱말이 창세기 4장에 처음 나온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죄를 다스리라 말씀하셨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대신하는사람이 나서야 한다. 가인의 죄악을 대신 해결하는 셋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 민망히 여기다는 말(σπλαγχνίζομαι)은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받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영혼의 집이 창자에 있다고 생각했다. 즉 가슴 저미는 아픔을 말한다. 그래서 아담이 받은 상처를 ‘창자 아래쪽의 아픔’으로 표현했다.

 

※ 2008년 3월호부터 13년 동안 좋은교사에 책 소개를 했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책 소개 대신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싶었다. 2021년 좋은교사 1월호에 낸 첫 번째 글을 올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9)

1. 생명 나무 : the tree of life
2. 선악과 :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우리 학교 6학년 아이 부모가 닭을 17만 마리 키웁니다. 글 쓸 게 없다는 아이에게 17만 마리의 닭이 어떻게 사는지 보면 저절로 글이 나올 거라 했습니다. 가로, 세로 1m 안 되는 철장 안에 거의 열 마리나 되는 닭이 갇혀서 알만 낳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니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쪼아댑니다. 털이 뽑히고 피가 납니다. 그래도 달걀 개수만 많으면 주인이 좋아합니다. 우린 그렇게 만들어진 달걀을 먹습니다. 아이에게 물었죠.
“시간이 지나 닭이 달걀을 낳지 못하면 어떻게 해?”
자연 상태에서 닭은 15년 정도 삽니다. 닭장에 갇힌 닭은 보통 1년 지나면 알을 잘 낳지 않습니다.
“기계에 갈아서 비료로 만들어요.”
아이 표정에 변화가 없습니다. 15년 사는 닭이 일 년 동안 알을 낳고는 기계에 갈려 버립니다. 부모님이 양계장을 하시니, 아이 눈에는 닭이 생명체로 보이지 않나 봅니다. 아이가 아는 지식이 무얼 하나요? 생명을 주나요? 생명을 귀하게 여기나요?

에덴동산에 두 나무가 있었어요. 동산에 있는 수많은 나무와 달랐지요. 두 나무에는 이름이 있었어요. 생명 나무와 선악과! 생명 나무가 생명의 나무인데 선악과는 ‘선악의 나무’가 아니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입니다. 두 나무는 ‘지식’이 있고 없음이 달라요. 어떤 지식일까요?
선악과는 자기 생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하는 나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손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판단하는 지식이 생겼습니다. 지식으로 무얼 할까요? 하와가 말합니다.
“뱀이 저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와에게 생긴 지식은, 뱀이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뱀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생각을 만들었습니다. <자기 보호와 거짓말!> 익숙하지 않나요? 아담도 지식을 똑같이 사용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죄를 하와에게 떠넘깁니다. 지식은 하와와 아담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넘치는 시대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우리나라를 휩쓸고 10년이 지났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칭송합니다. 성공하고 승리해야 선이라 생각하게 만듭니다. 성공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하고, 능력을 갖추려면 성적, 스펙, 외모 등을 가져야 하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쉬지 못합니다. 능력 사회는 곧 피로 사회입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기보다 배우고 또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고 밀어붙입니다.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교사도 계속 배웁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로 연수가 정말 많아졌습니다. 교사들이 쫓기듯 연수에 참여합니다. 코로나로 만나지 못하는 처지에서도 연수가 끊이지 않습니다. 지식을 쌓고 또 쌓으면 잘 살까요?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디모데후서 3:7)

배우고 또 배우는데 왜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할까요? 디모데후서 3장을 살펴봅시다. 1절 말세에 고통하는 때에 2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6절 욕심에 끌린 사람을 예로 들며 이들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배우고 또 배워도 진리의 지식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 배워서 욕심을 이루겠다는 바탕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식의 총량을 늘이는 게 핵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명 나무는 지식의 총량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씁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다니엘서 12장 4절)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 쓰인 바로 그 낱말입니다. 마지막 때에 지식이 많아진답니다. 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지금은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모두 자기만의 지식을 갖고 자기를 위해 지식을 활용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도 자신을 위해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누리나요?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는 지식

우리가 아는 지식이 우리와 이웃을 보호합니까? 우리는 자신을 위해 지식을 이용합니다. 일부만 골라내어 전체를 왜곡해서라도 자기를 만족시킵니다. 기자나 정치인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온 땅을 우리에게 주시며 다스리라 하셨는데 하와는 뱀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데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뱀의 말을 들었을까요? 뱀이 얼마나 지켜줄까요? 소용없다는 걸 몰랐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행동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식을 가진 순간, 그들은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 외에 무엇이 그들을 해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옷을 만들어 가린다고 얼마나 가려질까요? 겨우 하루만이라도 지켜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왜 그렇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죠? 아이들은 자기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걸 몰라서 엉터리 지식, 거짓 지식을 내밉니다.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려 합니다. 자기 보호는 결코 자신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거짓말을 합니다. 아이들보다 더 교묘하게 하거나 뻔뻔하게 하죠. 자기 보호는 이웃을 비난하게 만듭니다. 거짓에 거짓을 쌓습니다. 자기 보호에 빠지면 자기가 정말 옳다고 생각합니다.

‘뱀이 속여서 그랬어요. 뱀을 만든 사람은 제가 아니죠.’

하와가 자신에게 유리한 지식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내밉니다. 이 지식이 하와를 구원합니까? 이 말은 누굴 비난합니까? 아담은 다릅니까?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아담도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을 고릅니다. 이 지식은 누구를 비난합니까? “하나님, 왜 이러세요?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난 거죠?”는 누구를 비난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일어나게 하신다면, 당신을 예배해야 하는지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하는 태도 아닌가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대신 자신에게 유리한 지식을 내세우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죄악에 사로잡힙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데 주력합니다. 이미 공동체는 깨지고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에덴 공동체만 깨진 게 아닙니다. 피조물과 하나 되기 원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공동체도 깨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보호를 위해 선악과를 사용한 순간, 인류는 서로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자기방어야말로 그들의 우선 관심사였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를 보호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 신뢰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자기를 보호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했어야죠. 아쉬울 것 하나 없지만, 우리를 만드시고 함께 거닐기 원하는 분이 곁에 계심을 기억해야죠. 신뢰가 깨지면 책임지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희생양을 찾아다니죠. 때론 학생, 때론 교사, 때론 교장, 때론 하나님에게 비난을 돌립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망가뜨려서라도 자기를 지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어린양이 세상 죄를 지어야 했습니다.

"주 하나님이 웃사에게 진노하셔서, 거기에서 그를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
주께서 그렇게 급격히 웃사를 벌하셨으므로, 다윗이 화를 내었다."

언약궤를 옮기며 다윗은 찬양대와 함께 축하했다.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셈이다. 언약궤를 다 옮기지 못한 채 웃사가 죽었다. 다윗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긴다는 생각에 들떠 반드시 생각해야 할 과정을 놓쳤다. 그런데도 v8 하나님이 웃사를 쓰러뜨렸다고 다윗이 분노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시지 않자 화가 났다. 다윗의 결정이 올바르지 않았는데도 화가 나서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었다면 여호와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오히려 회개하며 여호와께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컸고,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자기 생각에 빠지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나는 분노나 순간적인 생각에 매이지 않는다. 대신 내 안으로 숨고, 머뭇거리며, 외로움과 허무로 빠져든다. 여호와께서 내 생각대로 하지 않으며, 우리 삶에 잘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호와께서 내 생각대로 하셨다면 나는 망가진 모습으로 살았을 것이다. 여호와를 서랍 안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쓰는 ‘서랍 안의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이를 알기 때문에 감사하며 산다. 그래도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싫다. 내가 이렇다.

나를 이룬 생각들이 옳지 않다고 알지만 벗어나지 못하겠다.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눈치 보며 살면서 사람을 살피는 태도가 몸에 뱄다. 지금도 사람을 살피는 태도가 나를 사로잡는다. 사람을 살피면 쉽게 실망하게 되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눌려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다 보면 생각할 바를 넘어서 생각한다. 이런 태도가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한다. 겉으로 강한 척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연약한 자아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나를 보며 알았다.
하나님 은혜가 아니었으면 나는 나로 살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내 뜻대로 하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선한 길로 인도하셨다. 내가 나로 살아가게 한 인도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면서 힘든 일도 많이 겪었지만 ‘운이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 많았다. 올해 만난 아이들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려고 끙끙대며 하나님의 은혜를 만난다. 아이들이 1학기 때보다 많이 좋아졌다. 내가 해준 진지한 이야기가 조금은 마음에 남을 거로 생각한다.

나도 한때 언약궤를 내가 원하는 장소에 옮기려 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고백했고, 이런저런 결심을 하고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삶이란 목표를 정하고 정복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여호와다. 올해 아이들과 어떻게 헤어질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화내지 말고 계속 마음에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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