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을 상상해서 쓴 일기 -
가인 :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 4:1)
아벨 :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창 4:2)
셋 :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5)
12월 31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은 잠깐 느끼고 끝났다. 선악과가 탐스러워 보인다고 할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아내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함께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내 말을 들은 내가 어리석었다. 선악과를 딸 때 말렸어야 했는데, 덥석 먹어버릴 줄은 몰랐다. 난 소심한데 아내는 과감했다. 아내는 여러 가지에 관심이 많았다. 난 아내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안 먹겠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보면 어느새 일이 벌어졌다. 마음이 아프다.
스산하다. 오늘 에덴에서 쫓겨났다.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에덴동산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자꾸 화가 난다. 아내가 잘못했는데 같이 쫓겨나다니… 물론 나도 나쁘다. 잘못했다. 그래도 전능자가 설마 우릴 쫓아낼 줄이야! 아내 때문에 쫓겨나지만, 저 바깥세상에서 의지할 이라고는 아내밖에 없다. 창자 아래쪽이 묵직하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2년 뒤 5월 5일,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 배가 조금씩 커졌다. 동물이 새끼 배는 건 봤지만 아내가 아이를 배다니 놀랍다. ‘배가 얼마나 부르면 아이가 태어날까? 어떻게 생겼을까? 무슨 소리를 낼까?’ 궁금한 것투성이다. 임신하기 전에 아내를 볼 때마다 에덴동산 생각이 났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나를 믿고 도와주며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러나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소리치면 잠깐 시원하지만, 창자 아래쪽이 더 아파졌다. 피부가 긁히고 갈라져 피가 나도 며칠 지나면 괜찮아졌다. 그러나 창자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낫지 않는다.
드디어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사내아이다. 아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허전함을 아이가 채워주려나? 아내는 온통 아이에게 사로잡혔다. 선악과를 바라볼 때와 같은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생긴 아픔과 눈물,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다. 어쩌면 동산 밖에서 사는 것도 참을 만하겠다.
첫째 이름을 가인(קַיִן)이라 정했다. ‘창, 얻다’는 뜻이다. 아내가 가인을 낳으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한 말에서 정한 이름이다. 내가 처음 얻은 아들, 내게 창이 되어줄 아들, 내가 낳은 첫 후손이다. 아내도 기뻐하며 말했다. “ ‘내가’ 아들을 낳았다. ‘내가’ 얻은 아들이다.” 이 땅에서 수고하며 견딘 모든 아픔을 찔러 쪼갤 창이 될 아이, ‘내가’ 얻은 보물이라 외쳤다.
12년 뒤 4월 19일,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점점 더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아이가 태어나고 한동안은 아프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아프다. 가인이 나를 위해 던져지는 창이 될 줄 알았는데, 아이가 창이 되어 나를 찌른다. 가인은 이기적이다. 자기 생각만 내세우고, 자기 뜻대로 하려 한다. ‘내가 저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땀 흘리며 일하는 게 힘들었지만, 집에 오면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집에서도 쉬지 못한다. 가인을 보면 눈을 돌리게 된다. 아내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날마다 한숨만 쉰다.
둘째 이름을 지어야 한다. 가인이 태어날 때 아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여호와께 감사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호와는 그냥 하는 말이고, ‘내가’ 낳았다는 뜻이다. 가인이 하는 걸 보면 둘째도 기대할 게 없다. 한숨만 나온다. 아벨(한숨, 덧없음, 허망함, הֶבֶל)은 어떨까? 헛되고 헛된 세상, 소망 없는 삶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둘째 이름을 아벨로 지었다고 하자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빤히 바라본다. 눈물이 슬쩍 맺히더니 고개를 떨군다. ‘아벨로 해도 괜찮다는 뜻이겠지!’ 그러고 보면 아내도 나만큼 상처받았다. 불쌍한 사람!
32년 뒤 4월 16일, 죽음.
아벨은 가인과 달랐다. 가인을 보고 한숨만 내쉬며 살았기에 동생 이름을 아벨로 지었는데 둘이 바뀐 것 같다. 가인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오히려 아벨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 같다. 그러나 어쩌랴! 가인이 장자이고 아벨이 동생인 것을! 가인에게 가업을 물려주었다. 아벨은 양을 치게 했다. 먹지도 못하는 양이나 기르게 하다니 안타깝다. 여호와께 제사할 때도 아벨은 형이 곡식을 거둘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아벨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적도 없다. 아벨이 장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할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설마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줄은 몰랐다. 첫째가 둘째를 죽였다. 어찌 사람을 죽일 생각을 했을까? 전능자가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동생을 죽이다니… 전능자가 하신 일을 자기가 평가하려 들다니… 여호와께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하시며 죄라는 말을 처음 쓰셨다. 그만큼 가인에게 신경 쓰셨는데 가인이 걷어 차버렸다. 에덴을 떠난 뒤에 내 삶은 계속 한숨뿐이다.
아벨을 땅에 묻었다. 가인은 떠나버렸다.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외로웠다. 아내에게 하지 않는 말이 늘어났다. 말하지 않으면 오히려 편했지만, 그때마다 마음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이번에는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아들이 태어나 함께 땀 흘리기를 바랐는데 동생 피를 흘릴 줄이야!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는 전능자의 말씀(창 2:23)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소망이 있을까?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져낼까?
★ 하와의 한 마디 : 오늘 아담이 쓴 일기를 봤다. 가인이 나를 두고 자기만 생각한다고 썼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아담이다. 자기 혼자 상처받은 줄 안다. 이 일기가 증거다.
가인을 낳고 하와가 말했다. “With the help of the LORD I have ~” 아벨을 낳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인을 기르며 기대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여호와께 감사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실망한 것 같다. 셋을 낳았을 때는 주어가 바뀐다. 가인을 낳고 “내가 낳았다.” 했는데, 셋을 낳고는 “God has granted me another child in place of Abel, since Cain killed him.” 즉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성경에 죄라는 낱말이 창세기 4장에 처음 나온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죄를 다스리라 말씀하셨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대신하는” 사람이 나서야 한다. 가인의 죄악을 대신 해결하는 셋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 민망히 여기다는 말(σπλαγχνίζομαι)은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받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영혼의 집이 창자에 있다고 생각했다. 즉 가슴 저미는 아픔을 말한다. 그래서 아담이 받은 상처를 ‘창자 아래쪽의 아픔’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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