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가 쓴 나니아 연대기 2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슬란은 에드먼드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는 아슬란과 함께 나니아를 구하고 영국에 돌아간다. 나니아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 영국에서 1년 흐르는 동안 나니아에서는 1300년이나 지나버렸다. 그동안 지형지물이 바뀌어서 나니아로 돌아온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맨다.

캐스피언 왕자에서 아슬란을 발견한 루시가 길을 안내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피터와 수잔은 루시를 믿지 않고 편안하게 보이는 길로 간다. 가다가 적을 만나 힘들게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아이들은 루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아슬란이 루시에게 나타나 오빠와 언니가 안 믿는다고 해도 루시가 아슬란을 바라보면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 말한다. 아슬란을 만난 뒤에 루시는 피터가 자기 말을 무시하고 수잔이 꿈을 꾼 거라 말해도 앞장서서 걸어간다.

깜깜한 밤에 절벽 길을 따라가는 건 어리석어 보인다. 막내 루시가 투정 부린다고 피터와 수잔이 짜증을 낼 만도 하다. 그러나 아슬란을 만나면 아무리 위험해도 아슬란을 따라가야 한다. 루시는 아슬란을 만난 뒤에 오빠와 누나가 실망해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슬란을 만났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도

모든 사람이 등을 돌려도 끝까지 믿어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나를 하나님께 인도했거나, 일어날 힘이 없을 때 붙잡아준 분이다. 그렇게 믿던 분이 실수하거나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면 실망해서 충격이 더 크다. 맞다. 실망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께 실망했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7:28)’라고 예수님께 칭찬받았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인 줄 아는 안목을 가졌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쳤으며,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3:30)고 고백했다. 성령이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임하는 모습을 직접 봤다(1:32). 세례 요한은 최고의 증인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오실 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7:19)” 물었다. 직접 만나고, 세례를 주고, 성령이 임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도 흔들렸다. 예수님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실망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는 행동(죄인을 사랑하는 행동)이 요한의 눈에는 율법을 폐하는 것(죄를 거부하지 않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구약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는 과연 이분이 맞나?’ 고민한 것 같다.

세례 요한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죄를 고백할 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다. 훌륭한 사람이라도 잘못 판단하고 죄악에 넘어진다. 우리는 모두 허물이 많고 실수하며 넘어지는 죄인이다. 우리가 믿는 상대방도 우리를 실망시킨다. 죄악을 이기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실망을 피할 수는 없지만, 좌절감에 매여 주저앉아 있지는 말자. 예수님은 요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하지 않았다.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7:22-23)”고 대답하셨다.

요한은 이 말씀이 이사야의 예언이라는 걸 알았다. 이사야는 구원자가 오실 때(35:5)에 소경의 눈이 밝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고,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라고 예언(35:5-10)했다. 요한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베드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며 여러 번 실망했지만 한 번도 실족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배신할 줄 알고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밀처럼 체질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돌아올 때,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22:31-32)”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다. 예수님이 베드로 때문에 실족했을까? 그렇지 않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통곡했다(26:75, 14:72, 22:62) 무덤을 확인했고(24:12, 20:1-10),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24:36-43, 20:19-23) 도마와 함께 예수님을 또 만났다(20:26-29). 예수님을 부인했으면 그 뒤에 더 잘해야 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충성해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제자들 6명과 함께 고기 잡으러 가버렸다(21:2).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셨다. ‘날이 새어갈 때’(21:3)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다(21:4).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명하셨다(21:5-6). 베드로는 제자로 부름 받았던 때(5:6)처럼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 요한이 그때 일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21:11)고 기록했다.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들어 다가왔을 때 예수님은 생선을 굽고 계셨다. 생선을 뒤집는 예수님 손에 못 박힌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못 박힌 자국을 보았기 때문일까, 고기를 가져오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잡은 물고기가 전부 몇 마리인지 세었다. 좋은 고기 몇 마리 골라서 가져오면 될 텐데 153마리인 줄 확인한 뒤에도 예수님께 달려가지 않았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도 모자라,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도 제자 여섯을 데리고 고기 잡으러 도망 왔으니 민망했을 것이다.

히브리어는 알파벳을 숫자로 바꿀 수 있다. 베드로를 숫자로 바꾸면 153이 된다. 물고기가 153마리였을 때 베드로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피해 도망 다니려 해도 예수님은 계속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베드로가 회복될 때까지 놓지 않으신다. 베드로가 가져온 생선을 구워서 드신 뒤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처럼 배 오른편에 고기를 던지라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때처럼 세 번 물으셨다. 베드로를 처음 부를 때처럼 다시 회복시키시며 어린 양을 맡기셨다. 꾸짖지 않으시고 거절하지 않으신다. 물론 실망도 하지 않으신다.

우리도

사람은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망시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거절하지 않고 계속 받아주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마음대로 생각해 놓고, 하나님이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하나님은 이것조차 받아주신다. 실망한 사람의 부족함과 무책임함을 하나님께 말하자. 하나님께 실망했다면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말하자. 왜 하나님이 불의를 보고 가만히 계시느냐고 물었던 하박국에게 대답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답해주실 것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자. 상대방이 잘못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어릴 때 살던 곳에 가면 동네가 작아 보인다. 어릴 때 기억하던 긴 골목, 넓은 공터, 높은 나무가 그리 크고 높지 않다는 걸 알고는 놀란다. 어린아이 눈으로 본 골목과 공터와 나무는 길고 넓고 크지만 어른 눈으로 보면 자그마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마냥 우러러보기만 하던 사람이 평범하게 보이는 건 그분이 부족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자랐다는 뜻일 수도 있다. 계속 자라자. 아슬란을 따라,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라도 가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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