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김남일, 난이도 ★★

민주주의의 등불 장준하, 김민수, 난이도 ★★

저는 줄곧 강원도 시골에서 삽니다. 보수적인 동네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집집마다 생활필수품을 나눠준 기억이 있습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가난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비누와 라면을 주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정서가 고정되어 이명박, 박근혜에게도 표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얼 줄 건지만 생각했습니다.

강원도 사람들에게 문익환은 빨갱이 목사입니다. 저와 함께 교회에 다닌 분들도 문익환 목사님을 목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여기 사는 분들은 문익환 목사님에게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선물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이분 덕분에 더 자유롭게 살아가는 줄은 모른 채 무조건 빨갱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랫동안 그런 분들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도 문익환 목사님이 빨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문익환은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문익환의 부모님은 1899년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건너가 독립과 국권 회복에 힘썼습니다. 문익환은 12세에 명동학교에서 송몽규,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이름으로 문예 잡지를 냈습니다.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학교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에 일본신학교를 다니다가 군인으로 끌려가기 싫어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28세인 1945년에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죽은 뒤에 문익환 목사님은 복음동지회라는 모임에서 장준하 선생님을 만납니다. 1968년부터 8년 동안은 가톨릭과 함께 공동 구약 번역 책임자를 맡았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공부하고 가르치는 학자와 어울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청년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처지를 알리려고 분신하고, 장준하 선생님이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시자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며 목사로, 학자로 지내던 선생님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책만 보고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에 뛰어들어 해결점을 찾는 신학을 시작합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여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구속됩니다. 감옥에 들어갔다 풀려나고, 다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되풀이하면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9년에는 72세의 나이로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구속됐습니다. 1991년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라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은 장례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또 감옥에 갇혔습니다.

뉴스에서 문익환 목사님에 대한 소식이 나올 때마다 강원도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계속 비난했습니다. 저 역시 대학생이 된 뒤에도 어릴 때부터 듣던 문익환은 빨갱이를 떨쳐내기 어려웠습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기독교 역사를 배우면서 문익환 목사님이 평화를 사랑하는 학자에서 투사로 변한 계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바로 장준하 선생이 하던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등불 장준하

장준하 선생도 문익환 목사님처럼 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똑같이 1918년에 태어나 지난해에 탄생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193315세로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여, 20세부터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 교사로 지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신학교에 입학하고 결혼도 하지만 19441월에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갑니다.

장준하는 훈련과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일본군에게 지지 않겠다는 결의로 맞섰습니다. 마취제 없이 수술을 받고, 탈출해서 독립군이 되려는 일념으로 기어코 중국 선발대에 뽑힙니다. 결국 중국 쉬저우에 주둔하는 츠카타 부대에서 친구 셋과 함께 탈출합니다. 탈출한 학병이 한 명도 없을 만큼 감시가 삼엄한 부대를 벗어난 뒤에도 여러 번 위기를 넘기며 한국 광복군 훈련반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갑니다.

미군과 함께 OSS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 작전을 기다리던 중에, 작전 5일을 앞두고 광복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독립을 위해 가족과 목숨까지 바친 분들이 아니라 정권을 장악하려는 사람들의 적이 됩니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껄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일본군 중위로 독립군과 싸웠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장준하 선생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196610월에 박정희를 비판하는 연설로 구속됩니다. 이듬해 6월에 국가원수모독죄로 감옥에 갇힙니다. 1973년에는 유신 헌법을 고치라고 요구하는 백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고 또 감옥에 갇힙니다. 1975817,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 초에 집에 사상계가 있었습니다. 사상계는 장준하 선생님이 1953년부터 1970년까지 발행한 잡지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언론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박정희가 폐간시켰습니다. 내용은 모르지만 표지는 기억납니다. 문익환을 빨갱이라고 하던 제 아버지도 장준하 선생에게는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의문의 사고 배후에 박정희가 있을 거라는 추측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훌륭한 분이 안타깝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두 책은 문익환 목사님과 장준하 선생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펴냈습니다. 두 분이 살아온 과정을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두 분은 백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사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 말과 글과 행동으로 독재에 맞서 싸웠습니다.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가난했고, 위협과 협박을 받으며 감옥살이를 했지만 굽히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우리가 자유롭게 말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201811월에 수학여행을 다니는 중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들렀습니다. 마지막 장소에서 독립운동가와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분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독립투사들을 가두었던 옥사마다 두 분씩 소개했는데 그곳에 문익환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문득 강원도 어르신들이 이곳에 오면 뭐라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을 욕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칭찬하던 발걸음이 문익환 목사님 자료 앞에 섰을 때 과연?

만약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계속 박정희를 반대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셨다면 빨갱이라고 불렸을 지도 모릅니다. 독재정권이 선생님을 빨갱이로 몰아붙였을 테니까요. 그래도 선생님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을 것 같습니다. 비록 그 자유가 자신을 빨갱이라고 부르게 하더라도.

고맙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장준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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