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연수를 하면 단골로 나오는 질문이 있다.
"애가 한 권만 주구장창 봐요. 말려야 하나요?"
책벌레 딸이 <글>로 대답합니다.
<아빠 냄새 책 냄새>라는 펀딩을 위해 쓴 글이에요.
-------------------------------- 반복 읽기
--- 책벌레 따님
내가 많은 책을 읽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나는 하나의 책을 여러 번 읽는 편이지, 다양한 책을 읽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반복하여 보면서도 새로운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지금은 예전보다 나아진 편인데도 여전히 그렇다. 어떤 사람은 새 책을 집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과연 내가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빠져들어도 괜찮은 책인지 의심부터 하고 보기도 한다. 뭐가 그리 의심되던지!
한 번은 아빠가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 책을 가져오셨다. 서진이와 아빠가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왠지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이 없다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빠의 강력한 추천에도 책 표지를 노려보기만 했다.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은 왠지 내 눈에 자주 띄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일 년을 버텼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첫 장을 넘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책에 익숙해졌고, 때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책을 읽어치웠고, 급기야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되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는 그냥 읽었지만 나중에는 특이한 방법으로 읽었다. 홀수 쪽만 읽기, 짝수 쪽만 읽기, 뒤에서부터 읽기(장, 페이지, 문단 단위로)....... 그렇게 읽어도 괜찮으냐고? 당연히 괜찮다! 많이 읽은 책이라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도 들고 재미있다. 특히 뒤에서부터 읽는 것은 색다른 느낌이라서 좋다. 살면서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을 느껴볼 기회는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책은 한 번만 읽어도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으면 분명 달라지는 게 있다. 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것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기행을 하더라도 그렇다.
내가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8번쯤 읽었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주제로 한 독서캠프에 참가했다. 캠프에서 조를 정하고 조원들과 인사를 하면서 내가 그 책을 8번 읽었다고 말했다. 사실 정확히 8번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좋아하는 책을 계속 보는 게 내게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늘 그렇게 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그런 나를 놀라워하셨다. 어떻게 한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고 말이다. 모두가 내 말을 감명 깊게 들어준 덕분에 나는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8번이나 읽은 놀라운 아이’가 되었다. 캠프 마지막 시간에 서로 책에 롤링페이퍼를 써주었는데, 내 것에는 온통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8번이나 읽다니 놀랍다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직 그 책을 잘 가지고 있다.
또 내가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서른 번쯤 읽었을 때, 우리는 다시 독서캠프를 했다. 그때 자만심이라는 주제로 독서 감상문을 썼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잘 쓴 것 같았다. 사실 자만심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고 나도 놀랐다.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에는 루스가 손으로 벌을 잡는 장면이 나온다. 첫 번째 독서캠프를 했을 때 우리 스스로 퀴즈를 만들었었다. 나는 루스가 잔디밭에서 벌을 몇 마리나 잡았는지를 묻는 질문을 만들었다. 답은 다섯 마리였다. 그리고 두 번째 독서캠프에서 나는 벌을 잡으며 으스대는 루스를 보고 자만심이라는 주제를 떠올렸다.
책을 8번 읽었을 때는 내용 이해만 하고 숫자나 세고 있었다면, 30번 읽었을 때에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책 속에서 전혀 관계없는 두 사건에서 자만심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책을 한 번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러 번 읽어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물론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도 있다. 아빠가 하나의 주제를 찾아서 글을 쓰는 게 좋다는 것을 알려 주셔서 자만심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30번이나 읽지 않았다면, 절대로 자만심이라는 주제를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50번 넘게 읽었다. 이제 나는 책 하면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은 내가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재미있는 책도 아니고, 가장 좋아하는 책도 아니다. 더 깊은 감동 받았던 책과 더 마음에 드는 말이 많이 나오는 책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내 독서 인생에서 이 책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게 내가 가장 처음의 도전이자 처음으로 마음을 연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그만 읽을 수 없다.
책을 한 번만 읽는 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똑같은 책을 다시 읽는 게 아무 쓸모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억울할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더 기대가 된다. 나는 역시 새 책보다 이미 읽은 책이 좋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책만 보는 사람이 답답할 수도 있다. 다른 책 좀 보라고 말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럴 때 새 책을 권해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읽은 책을 계속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그냥 담아두기를 바란다. 그런다고 그만 읽을 거였으면 진작 읽기를 멈췄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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