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서재 이름은 <책뜰안애>입니다.
책이 있는 뜰에서 평안(安)을 누리며 사랑한다(愛)는 뜻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책뜰안애에서 독서 모임을 합니다.
처음엔 교사, 목사, 아나운서가 참여했고 고등학생이던 제 자녀 둘도 함께했습니다.
지금은 첫째 아이와 저까지 일곱 명입니다.
책을 읽으면 반드시 글을 씁니다.
8월, 『주홍글씨』를 3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9월, 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하루 한두 시간씩 삼 일간 글을 썼는데 첫째 딸이 쓴 글을 읽고 제 글을 내놓기 부끄러워졌습니다.
내 글을 부끄럽게 만드는 자녀를 보는 느낌이란~~
얼마나 멀리 가야 할까
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로저가 아서를 용서해줬으면 했다. 한 사람이 열성적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원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로저 칠링워드는 처음 헤스터를 형대에서 보았던 때의 차분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점점 자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죄에 관련된 세 사람 모두 불행해진다.
헤스터는 죄에 걸려 넘어지는 그들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으나, 로저에게만은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죄인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기에 스스로 죄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지만, 피해자에게는 용서할 권리가 있다. 헤스터와 아서에게서 무거운 죄책감을, 낙인을 없애줄 수 있는 사람은 로저였다. 그만이 그들을 용서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로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함께 불행해지는 쪽을 택했다. 그는 예수님이 아니었다.
로저가 결국 용서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펄에게 유산을 물려준 것을 보면 용서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증오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헤스터는 죄가 영원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돌아와서 주홍글씨를 달았다.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주홍글씨를 치욕의 표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헤스터 자신에게는 달랐을 것이다. 피해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유로워져도 되지만, 죄인은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사람은 모두 죄를 짓고, 저마다 스스로의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비교적 작은 죄에도 뼈저리게 스스로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 세상이 놀랄 죄를 지어놓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죄에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기가 죄에 걸려 쓰러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점점 추악해져갔던 로저 칠링워드처럼 말이다. 같은 죄에 대해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무게를 부과하는 것은 시대상이나 문화 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의 성격 차이나 가치관 때문일 수도 있다.
딤즈데일 목사는 자기가 지은 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느꼈다. 그는 헤스터와 달리 주홍글씨를 달지도, 자기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도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헤스터가 지은 죄의 무게는 이미 온 도시에 공표되었다.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것. 헤스터는 딱 그만큼만 이겨내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만 걸음을 가면 된다.
하지만 아서에게는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천 걸음을 가야 하는지, 만 걸음을 가야 하는지, 아니면 온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된다. 헤스터가 감당해야 했던 무게가 가벼웠다는 뜻은 아니지만,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반면 미지는 갑갑하고 불편하다.
한편 로저 칠링워드는 아서보다도 그 죄를 무겁게 여겼다. 얼마나 무겁다고 생각했냐면, 몇 년 동안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지내면서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또 일부러 아서의 죄책감을 자극시키고 복수를 계획할 정도였다. 그는 심지어 아서와 헤스터가 배로 떠나려는 것을 알아내고 같이 가려 하는 경악스러운 짓도 저질렀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죄에 더 많은 무게를 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로저의 복수심은 과해 보인다. 그도 나름대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원하는 바가 있었을 텐데, 인생을 복수에 걸어버리다니 말이다.
로저의 복수심은 아서에게 명확한 기준을 제공해버린 셈이 되었다. 로저가 헤스터의 남편이었다는 걸 알게 된 뒤, 아서는 로저가 자신에게 부과한 죄의 무게가 합당하지 않다고 느꼈다. 스스로의 죄가 크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아서는 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얻었다. 측정 불가능했던 죄는 감당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헤스터의 말을 듣고 자기가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으며 바다 건너 다른 도시로 떠나기로 한다. 어떤 의미에서 로저는 아서에게 죄책감에서 벗어날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다른 사람의 기준을 받아들여 죄를 측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스스로 죄의 무게를 재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인간의 생각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이 공정하게 처벌한다고 말해도 불합리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헤스터와 딤즈데일 목사가 겪은 수난이 그 죄에 비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로저 칠링워드의 복수가 심하다고 본다. 하지만 수많은 법률이 있는 지금도 우리는 어떤 벌이 적절한지 확신할 수가 없다. 얼마나 멀리 가야 알맞은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걸 아는 건 하나님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멀리 갈지 결정해야만 한다. 도시에 남을 것인지 배를 타고 떠날 것인지 선택할 순간이 온다. 어떤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속죄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감당 안 될 정도로 멀리 가다 쓰러지는 딤즈데일 목사 같은 사람도, 기어코 이겨내고 마는 헤스터 같은 사람도 있다. 죄를 지었는데도 백 걸음도 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만 걸음이고 2만 걸음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니까.
가장 좋은 건 그럴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에는 죄를 짓고 먼 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의로 걷기 시작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강요 때문에 그러기도 한다. 우리는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너무 가혹하거나 벌을 받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죄의 무게를 잴 수 없으며,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그 무게를 확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란 온 지구를 도는 고행길을 걷는 사람에게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백 걸음, 2백 걸음이면 된다고 선을 그어주는 것. 그게 용서다.
나는 로저가 아서를 진작 용서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부끄러운 내 글>>>
『주홍글씨』를 왜 읽을까?
권일한
『주홍글씨』는 인간이 찍은 낙인이다. 좋은 것을 낙인이라 하지 않는다. 금메달, 상장, 합격으로 얻은 칭송은 주홍글씨에 속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어른들은 전과자, 난봉꾼, 이혼한 사람을 비난했다. 지금은 이런 낙인이 많이 줄었다. 이혼은 더 이상 비난받지 않는다. 전과자라고 다 나쁘게 보는 것도 아니다. 선거 공보에 민주화 운동으로 전과자가 되었다고 자랑스레 쓴다. 그러나 대상이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낙인을 찍는다. 인간은 낙인을 찍고 타인을 배제하면서 만족하는 존재이다.
청교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살던 나라를 떠났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 나라를 버렸던 사람들이 죄악을 근절하겠다고 낙인을 찍었다. 그들은 마을을 이룰 때 교회와 함께 감옥도 지었다. 몇 가지 죄악을 정해놓고 어긴 사람을 따로 떼어놓았다. 주홍글씨는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주홍글씨를 새긴 사람은 누구도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죄인이라는 뜻이었다. 문둥병 환자를 진 밖으로 내쫓아 격리하듯, 대상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격리해버렸다. 마을에서 살되 마을에 속하지 않은 자, 항상 비난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주홍글씨를 받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책하며, 외로움에 짓눌려 서서히 죽어간다. 가슴에 과녁판을 달고 살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비난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항변할 수도 없다. 죄인임을 받아들인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주홍글씨를 향한 손가락질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주홍글씨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게 만든다. 죄책감과 압박에 짓눌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청교도 주민들은 간음한 여인에게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몰랐을까?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나라를 떠났다면 예수님이 죄인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윌슨 목사를 존경했다. 딤즈데일 목사는 젊었는데도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며 영혼에 관심이 많았다. 목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그 은혜가 자신들에게도 흐르기를 기대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라면 결코 하지 않는 방법으로 낙인을 찍었다. 하나님 뜻과 반대로 행하는 줄 몰랐다.
헤스터는 주홍글씨를 새긴 채 힘들게 살아가야 했다. 헤스터는 사람들과 같이 웃지 못했고, 함께 슬퍼하지도 못했다. 철저히 외롭게 혼자 살아가야 했다. 사람들은 헤스터를 비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주홍 글씨는 격리와 단절, 배제와 적대감의 표상이었다. 헤스터에게 펄과 딤즈데일 목사가 없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견딘 건 보호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스터는 펄과 딤즈데일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비난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더 잘 견딘다. 지키고 싶은 게 자존심이라 해도. (지키고 싶은 것)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다가 자신이 망가지는 사람이 많다. 보호하고 싶은 대상도 망가뜨리면서 모르는 사람도 많다. 헤스터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가면서 무너지지 않았다. 펄이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도 조바심 내지 않았다. 펄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잘못된 행동을 해도 화를 내거나 짜증내지 않았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마음을 나눌 사람이 전혀 없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홍글씨를 죄악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을 바꿔놓았다. 헤스터 덕분에 주홍글씨가 힘을 잃었다. 비현실적이다.
사람들은 죄악을 감추려 한다. 아이들도 거짓말로 자기를 보호한다. 죄악이 드러나도 부인한다. 상대의 반응을 과장하고 자기 잘못을 축소한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나쁜 짓을 더 많이 했으며, 밝혀지지 않았을 뿐 죄인이 많다고 생각한다. 모두 자기를 지키려는 반응이다. 자신을 보호하는 행위는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릴 위험을 만든다. 헤스터는 죄악을 감추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 (칠링워드에게 딤즈데일 목사 이름을 말하지 않은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자기 잘못을 축소하지 않았고, ‘너희들도 다 죄인이다’ 하지 않았다. 펄과 딤즈데일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게 놔두었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주홍글씨』는 청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편견을 드러낸다. 당시 사람들은 호손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서 자신들을 돌아봐야 했다. 헤스터가 달고 다녔던 주홍글씨처럼 겉으로 드러난 죄악뿐만 아니라 딤즈데일이 가슴에 담아두고 괴로워하던 보이지 않는 죄악을 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홍글씨로 낙인을 찍었던 명명백백한 죄악도 보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고 하자. 지금은 인권이 향상된 시대다. 그때로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은 왜 『주홍글씨』를 읽을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낙인을 찍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자신도 낙인을 찍혀 힘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일까?
'나누고 싶은 글 > 내가 만난 아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8회 국민편지쓰기대회 초등부 금상작 (0) | 2022.02.27 |
---|---|
2020. 청소년문예제전 우수상 (0) | 2020.11.01 |
아이들에게 받은 편지 (0) | 2020.08.01 |
우리 집, 진짜 없는 게 없다. (0) | 2020.07.26 |
잔디 인형 (0) | 2020.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