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당신이 아라비스를 다치게 했나요?”
그렇단다.”
왜죠?”
얘야, 난 그 애가 아니라 네 얘기를 하고 있어. 난 당사자 얘기만 하지.”
당신은 도대체 누구세요?”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땅이 울릴 정도로 아주 굵직하고 낮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다!” 

나니아 연대기 3말과 소년은 말이 주인공이다. 소년 샤스타가 종으로 팔릴 위기에 처하자 말인 브레가 샤스타를 구해내서 나니아를 찾아 도망한다. 둘은 친구를 만나고 적에게 쫓기다가 위기를 넘긴다.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라비스가 떠나고 샤스타 혼자 남을 때 샤스타가 아슬란에게 묻는다. 아슬란은 아라비스가 아니라 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뒤에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21:21-22)”라고 말씀하셨다. 샤스타와 베드로의 질문은 우리 앞에서 이렇게 바뀐다. “이 사람은 어떻게 돼요?”, “저 사람도 구원받나요?”, “쟤는 이렇게 하잖아요!”

“아니, 죄인이 회당장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발아래에 엎드려서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밀었다.(5: 21-24)”

아버지가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다. 회당장이라는 직책과 무리의 시선도 아빠라는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당장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회당장은 엄격한 유대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을 테니까. 그래도 사랑이 더 강했다. 예수님은 절박한 아버지와 함께 딸을 만나러 가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동안 절박한 다른 여자가 끼어든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 (‘제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5: 25-29)”

그녀는 12년 동안 병을 앓으며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낫지 않고 괴로움만 당했다. 가진 재산 다 날려도 고치지 못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비관하게 된다.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님 옷에만 손을 대도 구원받는다는 믿음을 갖는다. 꼴 보기 싫은 의사와 바리새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아슬란)를 바라본다.

피나 고름을 계속 흘리면 몸이 닿는 사람은 모두 부정해진다. 유출병 있는 자와 접촉하는 자뿐만 아니라 유출병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사람까지 부정하다(15:2-13). 공공장소에 다니지 못하고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자는 부정한 몸이 가져올 결과보다는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군중을 뚫고 간다. 옷을 만져도 낫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밀며 옷에 손을 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자는 예수님께 나아간다.

“~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5: 30-34)

여자는 믿음으로 병이 나았지만 기쁨도 잠시, 자신의 수치를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께 다가오는 동안 접촉한 사람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으니 고백하기 힘들다. 병이 나았으니 조용히 돌아가면 좋을 텐데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말하라 한다. 여자는 무리 앞에서 모든 사실즉 혈루증 걸린 사실을 낱낱이 말해야 했다. 이때 회당장 야이로는 어땠을까? 예수님이 딸을 고쳐준다고 했을 때는 너무나 기뻤겠지만 부정한 여자가 예수님 붙들고 시간 낭비할 때 화나지 않았을까? 혈루증 여인에게 시간을 내주는 예수님께도 화가 났을 것이다. “저 여자가 왜?”

“너 때문에 내 자식이 죽었다!”는 생각 앞에서

그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고치기는커녕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회당장은 혈루병 걸린 여자가 꼴 보기 싫었을 것이다. 차라리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텐데, 여자가 길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여자가 야이로를 가로막았다. 그래도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5:36)고 하신다. 자기를 방해한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정말 싫겠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여자를 원망하며, 원망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야이로가 딱 우리 모습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5: 38-40)”

야이로가 소망을 갖고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에 혹시나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다. 아빠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으니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 죽은 아이를 위해서 통곡하며 떠드는 일 외에 무얼 할 수 있으랴! 우리는 상황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곡이나 하면서 사람들이 정해놓은 규정에 따른다. 아이가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가 잔다고 하신다. 자는 아이는 깨우면 일어난다.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 죽음도 예수님께는 깨우면 되는 잠에 불과하다. 무리가 죽었다고 단정 지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리신다. 아이가 살아나고, 야이로가 위로받고, 예수님의 능력이 무리 가운데 나타났다.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곧 일어나라 말씀하셨다. 그러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여자가 혈루증을 앓기 시작할 때 태어난 12살 아이가 살아났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 앞을 가로막았을 때 저 사람은 왜?” 했던 야이로에게도 기쁨이 찾아왔다. 여인은 나를 비난한 사람들을 잊고, 야이로는 나를 방해한 여인을 잊고 예수님만 바라본다.

아슬란을 만난 기쁨과 두려움에 젖어 샤스타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아슬란 앞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동체에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 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말과 소년을 읽어보시라고 권한다. 본회퍼가 이렇게 말했다. “공동체를 향한 자신의 꿈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지한 열정을 갖고 있다 해도 공동체를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또한 저 사람도 사랑하신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C. S. 루이스, (고등학생 이상)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비롯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아슬란이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슬란은 두려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사자이다. 아슬란은 마녀의 마법을 깨뜨리고 나니아 백성을 구한다. 아슬란의 포효 소리에 악한 세력이 도망한다. 아슬란은 믿음을 회복시키고 의로운 자들을 구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슬란은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말을 쫓아가서 말이 더 빨리 달아나게 하지만 뒤쫓는 적을 해치우지는 않는다. 혼자 싸우면 더 쉽고 간단하게 이기지만 아슬란을 믿는 백성들이 적에 맞서 싸우게 한다. 아슬란의 뜻을 따르는 백성들이 함께 싸우며 아슬란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게 한다.

열심히 해야 할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가르셨다. 여리고를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다. 이제는 백성들이 스스로 가나안 민족을 무찔러야 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공동체를 이루어야 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일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서로 도와주고 이웃을 위해 내미는 손을 기뻐하신다. 그런데 많은 성도가 봉사를 힘들어한다. 해야 할 일과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 섬김과 봉사가 믿음을 드러내는 증거처럼 되어서 부담스럽다. 봉사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열심히 하자를 강조하는 말씀은 끊이지 않는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씨름한 말씀은 열심히 기도하자. 기도의 용사가 되자는 내용이 아니다. 요셉이 30살에 총리가 되어 7년 풍년이 지나고 흉년 2년째에 야곱은 바로를 만나 나그네 길이 130(47:9)이라고 말했다. 야곱 나이 130- 요셉 나이 39= 91. 야곱은 91세에 요셉을 낳았다. 라반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오다가 천사와 씨름할 때 야곱은 95세쯤 되었을 것이다. 야곱의 생애 147(47:28)에서 91세를 우리 시대(수명 80살 기준)로 보면 50살이다. 50살인 아저씨가 천사를 붙들고 늘어지는 모습이 우리가 상상한 씨름인가?

32:24-28의 주어는 계속 어떤 사람이다. 어떤 사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야곱이 마음과 생각을 꺾을 때까지 싸운다. 야곱이 열심히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설득당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에 자기가 뜻을 정하고 열심히 하자고 한다. 얍복강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이야기를 열심히 기도하자는 내용으로만 적용하면 안 된다.

열심히 하자는 말이 아프게 한다.

기쁨을 잃은 의무적인 봉사는 바리새인을 만든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오히려 하나님 일을 방해했다. 후배 부부가 유산했다. 당황하고 힘들어하며 버텼지만 다시 유산의 고통을 겪었다. 직장에서도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온갖 잡무를 붙들고 고생했다. 후배의 고백을 듣고 양혜원님이 자녀를 잃은 슬픔을 쓴 글을 보냈더니 쪽지를 보내왔다.

(남편) “글을 읽으며 내 맘 깊은 곳에서 가라앉아 있던 슬픔과 고통이 밀려왔어요. 아내를 병원 수술실에 보내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럽게 울었던 기억들…… 이상한 거 같다고 이야기하던 아내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두려움과 불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고민했던 시간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친구들의 출산 이야기, 둘째 이야기…… 모든 것이 부러웠던 시간이었는데.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 나보다 더 아플 아내가 있어 내색하지 못했던 것들…… 양혜원 씨가 표현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어요.”

() “난 그 아픔을 잘 몰라서 말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 뜻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정 짓기도 어려워. 내 아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하나님은 죽어가는 모든 아이에게 느끼실 테니, 다른 아이에 대해 내 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는 나는 하나님 뜻이 어떠하다 말할 수가 없지! ~” (중략)

(남편)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실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조금은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아내와 나에게 성가대며 일을 해야 한다고 권유했어요. 예를 들면서 어떤 사람은 임신 마지막 달까지 성가대 지휘를 했다느니, 교회 일 열심히 하면 다 될 거라느니 이런 이야기들이. 상처…… 그렇게 표현하기에도 속상한 말이었어요. 양혜원 씨의 글, 오늘 선생님께서 주신 글이 내 맘 깊이 남네요.”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 긍휼히 여긴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자궁을 표현하는 낱말에서 나왔다.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낱말로 가려 뽑은 곳, 긍휼을 표현한 곳에서 자라던 아이가 죽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빛을 보기도 전에 끊어졌는데 봉사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다.’고 한다. 무너지는 아비 마음에 못을 박는 줄도 모른다. 욥의 친구들처럼 상처를 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죄를 이렇게 지적한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6:14, 8:11)”

봉사해라를 정답처럼 떠밀면 안 된다. 열심은 순종의 모조품이다. 자기 멋대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마음 상태이다. 하나님 뜻을 분별함으로 삶에서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자신을 희생시키는 어떤 위대한 열심보다 훨씬 귀하다. 올바른 방향을 잡은 뒤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열심은 합리주의가 만든 함정이다. 투입이 클수록 산출이 크다면 은혜가 사라진다. 일한 것 없이 선물을 받는 종의 기쁨도 사라진다. 사역에만 관심을 두고 열심을 내세워 몰아붙인다고 하나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산한 후배를 긍휼히 여기셔서 두 자녀를 주셨다. 자녀를 주셨으니 감사해서라도 교회에서 열심히 해야 할까? 자녀를 어린이집과 학원에 보내놓고 부모는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달라고 기도할까? 하나님은 부모가 자녀를 잘 키우는 과정을 기뻐한다.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온전한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하나님 일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를 말씀으로 돌보는 게 예배이다. 후배는 가정을 위해 꾸준히 섬기던 기독교사모임에 나오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 일을 하고 있다. 봉사하라고 강요할 대상이 아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섬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뒤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매가 무덤에 찾아간다.(16:1-2) 예수님 시체에 바르려고 향품을 미리 사놓았다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일찍 무덤에 갔다. 율법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다고 했다. 장사지낼 때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장사지낸 뒤에 다시 만질 필요가 없었다. 장례 절차 중에 발라야 하는 향유를 장사지낸 시체에 바른다는 건 율법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들의 사랑은 율법 규정을 뛰어넘어 섬길 마음을 갖게 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여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값비싼 향유 준비해서 찾아갔다. 고귀한 섬김이지만 믿음 없는 열심이었다. 향품을 가져간 것도,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울 걱정도 소용없는 일이다. 무덤 안에는 예수님이 없었다.

여인들이 좋은 마음에서 섬겼지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잘못된 섬김은 당황스러운 상황을 일으키고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열심히 봉사해도 허탈해진다. 행위 자체는 아름답지만 믿음에 어울리지 않는 섬김이 있다. 믿음과 상관없는 지나친 열심에서 나온 섬김, 과시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섬김은 사람을 보게 만든다. 오랫동안 사람을 보면서 일하면 자신을 과시하며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하나님께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노아, 요나, 예수님의 제자들, 바울은 폭풍우를 만났을 때 다른 태도를 보였다. 제자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폭풍우를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를 저으며 수고했지만, 폭풍우를 이기지 못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환난 앞에서 당황한다. 제자들은 열심히 노력하기 전에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아라. 내가 함께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했다.

요나는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킨 줄 알았기 때문에 폭풍우에도 떨지 않았다. 그런데도 엎드려 간구하지 않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혼자 잘났던 요나는 하나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자 피해 버렸다. ‘열심히 해봐라. 그런다고 해결되나? 불쌍한 것들!’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노아는 열심히 방주를 만들지만, 비가 내린 뒤에는 아무 일도 안 한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떠다닌다.

바울은 죄수로 묶인 몸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로마로 끌려가는 중이다. 제자들처럼 스스로 노를 젓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요나처럼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지도 않는다. 폭풍우를 만났지만, 배에 탄 사람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죄수에게 짐과 생명을 맡긴다.(27:27-44) 바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을 담대하게 하였고 선원들은 바울의 말을 듣는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열심으로 바꾸면 얼마나 위험한지 호통하는 편지이다. 바울은 열심을 내세우는 갈라디아 교회에 화를 내며 복음은 열심이 아니라고 한다. 바울은 과거에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핍박했다. 옳지 않은 열심이었다. 갈라디아 교회가 행위를 복음으로 바꾸자 큰 글씨로 직접 써서(6:11),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신의 말을 들으라(6:17)고 외친다.

눈에 띄는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믿음을 판가름한다. 열심에 앞서 마음이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한다.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기꺼이 지겠다하는 태도는 멋모르는 자만과 방종에 불과하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7:22)”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7:23) 하신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해본 사람은 안다. 다만 하나님보다 봉사를 앞세우거나, 봉사가 주는 이익 때문에 봉사하지는 말아야 한다.

가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연회장이 잔치 끝날 때 신랑을 불러 진짜 포도주를 내놓았다고 칭찬한다. 신랑과 연회장은 좋은 포도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에 함께 있었고 포도주를 맛보며 놀랐지만, 예수님을 모른다. 신랑을 칭찬하고 연회장에게 인사하지만 영광을 나타내신(2:11) 예수님을 모르고 돌아간다. 결혼식 잘 준비했다고 칭찬하고, 다른 결혼식에 갈 때면 이번 결혼식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지만 주인공을 잊는다.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2:9)” 하인들은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걸 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물을 떠왔고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기 때문이다. 하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참여했다. 이게 진짜 봉사이다.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침 일찍 무덤 찾아가는 마음을 귀하게 보시지만 유산한 부모에게 봉사 열심히 하면 좋은 일 생긴다고 말하면 안 된다.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해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다르게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형제자매를 섬기고 섬김 받으며 함께 살아간다. 섬김과 봉사는 우리를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며 자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해준다. 이기적인 봉사에서 벗어나 하나님 뜻 안에서 일하자.

'성서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도  (0) 2022.10.23
저 사람이 아니라, 너!  (0) 2022.10.23
기독교 세계관과 수업  (0) 2022.09.01
『마법사의 조카』와 외모지상주의  (0) 2022.05.22
다윗이 달린다.  (0) 2022.04.02

#책_소개합니다

앞서 근무한 학교에 간 첫해, 2학년을 맡았다.
6학년이나 1학년이 아니라 2학년만 남았다니 의아했다. 2학년은 군대로 말하면 꿀 보직인데.
(자폐 아이보다 여자아이들 관계가 복잡해서 힘든 반이었다.)

자폐 남자아이는 까끌까끌한 느낌을 참지 못했다. 상표를 다 떼어야 했고, 실밥 하나만 있어도 옷을 벗었다.
아이가 옷을 벗으면 여자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루는 아이가 갑자기 바지를 벗었다. 속옷까지 다 벗겨졌다. 얼른 아이를 가로막고 옷을 끌어올렸다.

10명 내외의 아이들이 6년 내내 같은 반을 했다. 아이들은 6년 동안 자폐 아이와 같은 반으로 지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장애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워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잘 달래며 함께 지냈다.
아이들은 다르게 행동하는 아이를 이해하는 마음을 배웠다. 이건 황금을 주고도 배우지 못하는 훌륭한 태도다.

경쟁, 효율성, 경제적 가치를 따지면 00이는 어떻게 될까?
신자유주의는 약하고, 느리고, 불편한 이웃을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장애인, 세월호, 강제로 수용된 아이들…… 예수님이 말한 고아와 과부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도 그냥 사람인데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 말아야 했다.

                           자폐 아이는 사진을 찍으면 늘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도 우리반이고, 친구들 곁에 있다.

『A가 X에게』와 『그냥, 사람』은 이에 맞선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구조에 반대한다.

『A가 X에게』는 연인에게 쓴 편지로 이에 맞선다.


2008년 부커상 수상 후보작이다. 사실처럼 쓰인 독특한 소설이다.
약국을 운영하는 ‘아이다’가 감옥에 갇힌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쓴다. 사비에르는 편지 뒷면에 메모하며 편지를 모아둔다.
정권은 국민을 위협하며 국가를 이끌어간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국민은 세계화의 파도, 자본의 폭력에 희생당하면서 몸부림친다.
도망자를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막아서고, 약국을 찾아온 사람을 살리고, 각자의 사연을 들어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라며. 
감옥에 갇힌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성의 편지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작가의 능력이 정말 뛰어나다.

『그냥, 사람』은 고통당하는 이웃을 그대로 보여준다.
장애인 곁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냥, 사람』은 한겨레 신문에 5년 동안 쓴 칼럼이다.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의 이야기가 많다.
한없이 약한 사람들이 거대 권력, 거대 자본 앞에서 억눌리고 억압당하고 괴로워하며 고통당한 사연이 많다.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그냥 사람이라고 외쳤다.

자폐 아이에게 ‘괜찮아!’ 말한 2학년 아이들은 자폐 친구를 화장실에 데려갔고, 몸을 가려주었다.
걸어갈 때 기다려줬고, 운동회에서 손을 잡고 뛰었다.
난 다달이 5만원씩 장애인야학 후원금을 보낸다. 곁에서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보다 돈 보내는 게 쉽다.

 

책 놀이를 하며 아이들이 책으로 <봄> 글씨를 만들었다.

나를 꽤 힘들게 한 아이들이었는데 이 아이들에게도 봄이 왔다.

『A가 X에게』와 『그냥, 사람』에 나오는 분들에겐 언제 봄이 오려나?

6학년 국어 2학기 1단원 <작품 속 인물과 나>, 글을 읽고 인물이 추구하는 가치를 생각하는 내용이다.
글이 길고 깊이 생각할 내용이 많아서 힘들어했다.
전체 10시간 분량인데 16시간 동안 공부했다.
읽고, 퀴즈하고,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시간에 자신의 장점, 노력할 점, 이루고 싶은 일을 쓰고 나는 ( ) 같은 삶을 살고 싶어.’를 쓰는 내용이 나온다.
아이들이 교과서에 쓴 내용이 마음에 남는다.

***
1. 잘하는 점 : 숙제 안 미루고 다 함. 아침밥 먹기. 할 일을 제시간에 하기
2. 노력할 점 : 운동하기, 끈기있게 살기, 골고루 먹기, 성실해지기
3. 이루고 싶은 일 : 하고 싶은 직업으로 성공하기, 효도하기
4. 나는 물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무리에 녹아들어 살고 싶다.

우리 반 8명 중 4명 엄마가 외국에서 온 분이다.
세 명은 엄마와 함께 엄마 나라에 가봤다. 이 아이만 비행기를 탄 적이 없다.
외국에서 온 엄마는 아이 낳고 고국으로 떠났다.
가족여행 없고, 외식도 거의 없다그런데도 아이는 자기 할 일을 한다.
연휴 동안 아이는 혼자 그림 그리며 지낼 것 같다.

효도하고 싶다는데, 대상이 엄마인지 아빠인지 묻지 않았다.
아이가 물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할 때 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물처럼 살 거야!” 해줬다.

아이들과 한 달에 한 번 현장학습을 간다. 이 아이 때문이기도 하다.
23일 수학여행에서 좋은 방 내줘야겠다.

지난주, 레일바이크 타고 바닷가를 달리다가 잠시 멈춰서~

***
1. 잘하는 점 :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됨. 집에서 철이 듦. 밥을 잘 먹음.
2. 노력할 점 : 조금 빨리하기. 그림 더 잘 그리기. “?” 하지 말기.
3. 이루고 싶은 일 : 게임 공격력 10000 되기, 엄마에게 좋은 집 사주기, 엄마의 행복 찾아주기

기억에 없는 아빠를 올해 처음 만난 아이다.
외조부모한테 꽤 맞았다. 올해는 철들었다며 안 때린다고 했다.
외조부모 집에서 살다가 올해 엄마 집으로 옮겼다.
내게 종알대면서 우리 집이 아니라 엄마 집이라 한다.
아이가 아빠 얼굴도 모르게 한 엄마, 외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겨버린 엄마,
이 엄마에게 집 사주고 행복하게 해주려 한다.

어른이 아이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야 하지만 어른이 아이에게 배워야 할 것도 많다.
아이들이 행복하면 좋겠다.

 

'나누고 싶은 글 > 아이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아이가 이렇게 돼서~  (0) 2022.11.07
<구멍 난 벼루> 독서동아리 활동  (0) 2022.10.25
난 37000살  (0) 2022.07.16
병아리 부화  (0) 2022.06.24
아이 글-아빠와 재결합  (0) 2022.06.20

 <아빠 냄새 책 냄새>라는 제목으로 글을 씁니다.
1부 10장을 다 썼고, 2부를 쓰고 있어요. 
그 중 4장을 나눕니다.

4. 문해력

공부를 잘하려면 문해력이 좋아야 한다고 해요.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글을 이해해야 하죠. 수학도 글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은 다음 계산해야 합니다. 문해력이 부족하면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문해력이 높아질까요?

체계적으로 노력하기

첫째, 읽은 낱말과 문장, 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낱말을 알고(어휘력) 문장 뜻을 알면 글을 이해하겠죠. 원어민 영어 교사는 학생을 만나기 전에 한글 자음과 모음을 연결해서 글자를 이루는 원리를 배워요. 영어 파닉스 하듯 한글을 읽습니다. 하지만 읽고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읽는 낱말의 뜻을 알려면 공부해야 해요. apple-사과. eat-먹다. heart-마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과, 먹다, 마음이 무엇인지 배워요. 살면서 저절로 낱말을 익히죠.

낱말을 이해하면 낱말을 연결해서 문장을 만듭니다. 그러나 외국인은 저절로 익히지 못하기 때문에 외워요. 우리가 영어를 공부하는 방식이지요. 사과를 먹는다. - I eat apple. 과자를 먹는다. - I eat cookie. 이렇게 해도 장애물을 만납니다. 마음먹는다는 무슨 뜻일까요? I eat heart 로는 해석이 안 됩니다. 외국인이 마음먹는다는 말을 이해할까요? 열심히 외워도 모르는 문장이 많아요. 우리 말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숙어를 외워요. 구문과 문장을 열심히 외웁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죠.

문장을 이해한다고 글을 이해하는 건 아니에요. 글의 흐름을 모르면 글을 이해하기 어렵죠. 문해력은 암기력이 아니에요. 낱말을 알아도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마음먹는다같은 문장이 많거든요. 더구나 수능 시험에 나오는 글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문장도 어렵고 글의 흐름은 더 어려워요.

반면, 낱말을 몰라도 문장을 이해할 수 있어요. 모르는 문장이 있어도 글의 맥락을 이해하죠. 첫째가 고등학교 첫 모의고사 끝나고 영어 시험이 어렵다고 했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단어 외엔 외우지 않았거든요. 시험지에 모르는 낱말을 표시했는데 시험지가 화려했어요. 다만 낱말을 모르는데도 글이 무얼 말하는지 알았대요. 친구는 낱말을 대부분 알고 문장을 해석하고도 글이 무얼 말하는지 몰랐다고 해요. 문해력이 낱말-문장-글을 단계적으로 이해하는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증거지요.

학원과 학교에서는 낱말-문장-글을 단계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가르쳐요. 이렇게 하면 체계를 세우기 쉽거든요. 체계를 세우면 상중하로 나누거나 1단계, 2단계……로 가르침을 세분화할 수 있어요. 2단계 3차시를 모르면 2단계 2차시부터 다시 하면 됩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편리한 방식이에요. 하지만 이 방식으로 이해하려면 공부할 분량이 많아집니다. 3단계 수준에 오르려면 1단계와 2단계를 모두 알아야 하지요.

이렇게 하면 에너지 소모가 큽니다, 효율적이지 않아요. 문해력을 기르기 위해 문제집을 풀고 학원에 가는 방식이 아이들을 힘들게 합니다. 공부할 분량이 너무 많거든요. 그런데도 계속 이렇게 하는 건 비교하기 편해서예요.|
우리 아인 3단계인데, 옆집 누군 벌써 5단계야!”
수준이군요. B반에서 시작하면 되겠어요!”
  이런 방식은 위치 추적은 되지만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과 같아요. 어느 수준인지, 아이보다 잘하는 아이가 몇 명인지 알지만 그 단계에서 벗어나려면 엄청나게 노력해야 해요. 초등학생은 따라갈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고등학생은 공부 분량이 많아서 단계를 뛰어넘기 어려워요.

둘째, 배경지식이 많으면 문해력이 좋아집니다.

아이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걱정할 때 부모님이 다 마음먹기에 달렸어!”라고 하면 마음먹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예요. 이게 배경지식이에요. 비슷한 맥락에서 다 일체유심조야!’ 해도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인지 알아듣지요. 배경지식이 있으면 글을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라고 해요.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지식과 정보, 이야기, 낱말을 만납니다. 문장을 이해하는 수준이 높아지죠.

아인슈타인 관련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이한다고 해봐요. 아인슈타인을 알면 내용을 이해하기 쉬워요. 물론 아인슈타인을 몰라도 글을 읽으면 아인슈타인이 과학자이며 남다른 주장을 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도 배경지식이 많으면 내용을 빨리 이해해요. 앞에서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고 관련 책을 읽게 했다고 썼어요. 책으로 먼저 접한 뒤에 배우면 쉽게 이해해요. 그러나 배경지식이 문해력의 전부는 아니에요. 배경지식이 부족해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요.

제 자녀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낱말과 문장을 외우지 않았어요. 책을 읽었기 때문에 우리 낱말과 문장은 잘 이해했지만, 영어는 모르는 낱말이 너무 많았어요. 고등학교 3년 동안 어느 정도는 극복했지만, 학원 다니는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도시 아이들은 학원에서 정말 많이 공부해요. 교과서 외 지문도 많이 배우죠. 문제집 풀이와 학원 공부로 배경지식을 채웁니다. 그래서 잠을 줄여가며 공부해요.

제 아이는 고등학교 수업 끝난 뒤에 평균 2~3시간 공부했어요.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으로 1시간 30분 공부하고, 집에 와서 1시간쯤 더 공부했죠. 8시간은 잤어요. 국어, 영어 문제집을 풀지 않았어요. 교과서 외 지문을 다룬 문제집이나 수능 대비용 책도 읽지 않았어요. 독서량이 많지만, 수능이나 모의고사에서 다루는 내용의 1/3도 읽지 않았을 거예요. 특히 근현대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어요. 근현대 소설이 지문으로 나오면 어렵다고 했어요. 그런데도 고등학교 3년 동안 국어와 영어는 대부분 1등급이었어요.

셋째, 문해력은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글은 흐름이 있어요. 똑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아요. 느리게 가다가 빨라지고, 곧게 흐르다가 굽이칩니다. 배경이 되는 문장들이 이어지다가 핵심으로 치달아요. 요약이 문해력 향상에 좋다고 하죠. 글의 흐름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빼고 핵심을 골라내는 게 요약이에요. 글의 흐름(맥락)을 이해하면 요약을 잘합니다. 맥락을 이해하면 낱말과 문장을 몰라도 글을 이해하지요.

지난번에 근무한 학교에서 학부모-자녀 독서토론반을 운영했어요. 한 학기에 열 번, 두 시간씩 부모와 자녀가 책을 읽고 함께 토론했어요.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처지가 아니라 자녀와 똑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책을 읽어도 엄마가 모르는 내용이 있어요. 그런 걸 물을 때마다 엄마가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지나치게 엄마를 배려하면 토론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태도로 계속 물었죠.

어느 순간 엄마가 모르는 내용이 나왔어요. 엄마가 답을 몰라 머뭇거리다가 당황해서 곁에 앉은 딸에게 물었어요.
 “넌 알고 있지?”
우리는 딸에게 답을 아느냐고 묻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딸이 예상과 다르게 대답했어요.
 ", 머리에 지우개가 있다는 거요!”
딸은 넌 알고 있지?” 하는 말이 엄마가 왜 대답을 못 하는지 알고 있지?” 라는 뜻인 줄 알아챘어요. 엄마가 무언가 잘 기억나지 않을 때 집에서 지우개 얘기를 했나 봐요. 이 말을 듣고 5학년 남자아이가 왜 엄마 머리에 지우개가 있냐고 물었어요. 아이들이 물어볼 때 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또 묻죠.
"아가씨, 자녀를 낳지 않은 여성, 아이를 셋 키우는 엄마 중에 누구 머리에 지우개가 있을 확률이 높을까?“
아이 셋 키우는 엄마요.“
왜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라고 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딸이 엄마에게 말해요.
"엄마, 고마워요!"

이 사례엔 여러 가지 맥락이 있어요. 우선 엄마와 자녀가 가정에서 나눈 대화가 맥락이에요. 가족만이 아는 맥락이에요. “넌 알고 있지?”란 말을 우리는 넌 어떤 내용인지 답을 알지?” 로 이해했는데 딸은 내가 왜 대답을 못 하는지 알지?” 라고 들었어요. 엄마랑 이야기를 자주 했기 때문에 맥락을 읽어냈지요. 이건 배경지식이기도 해요.

머리에 지우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엄마가 한 말을 이해하는 것도 맥락이에요. 제가 5학년 아이보다 문해력이 뛰어나지요. 그래서 지우개라는 말을 듣고 엄마와 딸의 대화를 이해했어요. 그래서 세 가지 예시를 주고 누구 머리에 지우개가 있을 확률이 높은지 물었어요. 5학년 아이는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제 질문을 듣고서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요. 질문 하나만 듣고 알아챘으니 5학년 아이도 문해력이 좋은 편이에요..

엄마와 딸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서 5학년 아이가 질문했고, 질문에 대답하려고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질문을 들은 5학년 아이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과정에서 딸이 엄마에게 왜 지우개가 생겼는지 이해했어요. 그래서 엄마, 고마워요!”라고 사랑 고백을 했습니다. 잠깐 나눈 이야기에 여러 가지 맥락이 들어있어요.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문해력이에요.

자연스럽게 저절로

주말 독서토론반에서 중 2부터 고 2까지 열 명과 염상섭의 <만세전>을 토론했어요.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서 염상섭의 글 솜씨에 감탄했어요. 염상섭은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라에서 나라 잃은 사람들이 당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곳곳에 펼쳐놓았어요.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일본 강점기)에서 주인공은 아무것도 못 해요. 맞서지도 못하고 동조할 수도 없어서 솟구치는 감정을 교묘하게 덮어버려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합리화하는 모습이 우리 일상에도 자리한다는 걸 이야기했어요.

주말 독서반에서는 책 한 권을 10시간씩 토론했어요. 나만의 주제를 정해 글을 쓸 때까지 토론해요. 토론을 마칠 때 고 2 여학생이 학교에서는 이렇게 배우지 않는다고 푸념해요. 선생님이 문장을 읽고 뜻을 말하면 받아쓰고 외우고 그런대요. 정말 싫다고 화를 냈어요. 우리는 <만세전>을 읽고 실컷 이야기했어요. 3 남학생이 주인공을 까뮈의 <이방인>과 견주어서 까뮈 이야기도 했지요.

2 여학생이 학교에서 배우는 방식과 토론을 비교한 말이 마음에 남아서 시험 삼아 <만세전> 입시 문제를 나눠줬어요. 중학생까지 거의 다 맞췄어요. 토론하면서 글의 흐름을 이해하고 주인공의 상황에 자신을 적용했기 때문이에요. 읽지 않은 작품을 만나도 <만세전>을 읽고 토론하며 이해한 것처럼 분석해서 이해할 거예요. 이렇게 하면 즐겁고, 시험 문제도 잘 맞혀요. 그런데 왜 계속 설명을 불러주고 외우게만 할까요!

낱말-문장을 알아야 하고, 배경지식이 많으면 문해력이 좋아진다고 했어요. 다만 시간과 노력이 정말 많이 필요하지요. 낱말, 배경지식, 맥락 이해를 쉽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대화와 토론이에요. 자녀와 대화가 참 중요해요. 아이는 본능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요. 그래서 끝없이 말하죠. ‘이건 뭐예요? 왜 그래요? 이렇게 했어요. 저렇게 해봐요.’ 하며 문해력을 기르려 하는데 부모가 귀찮다고 혼자 놀라고 해요. 아이가 공부 잘하게 도와주세요하며 대화하자 하는데 부모는 난 네가 공부 잘하는 게 싫어. 그러니 혼자 놀아!’ 하는 거예요.

우리 시대는 부모에게 부담을 많이 지워요. 회사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아이들이 대화를 요구해요. 예전에 아이들은 또래와 마을에서 놀았어요. 동네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어요. 지금은 부모가 해줘야 해요. 아이에게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고, 형과 누나 역할도 해야 하고, 선생님이 되어 알려주어야 하고, 아빠와 엄마로 사랑해야 해요. 너무 힘들죠. 아이는 가족 외에 만나는 사람이 적은데 부모가 아이와 점점 대화가 줄어들어요.

아이들이 점점 말뜻을 몰라요. 몇 년 전 아이들이 다 알았던 낱말을 지금 아이들은 몰라요. 아이들이 집에서 대화하지 않고 뭔가 다른 걸 했나 봐요. <6. 우린 책으로 놀아요>에서 끝말 이어가기 놀이를 소개했어요. 이때 아이가 모르는 낱말을 넣어요. 대화할 때도 가끔 어려운 낱말을 넣어서 말해요. 아이가 낱말 뜻을 궁금해하면 곧바로 뜻을 말하지 않아요. 유추해서 낱말 뜻을 알 때까지 예를 계속 말해요. 아이는 공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빠와 이야기하며 논다고 생각하죠.

책으로도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아이가 학교에서 겪은 일을 말하면 책 내용을 연결했어요. 다툼을 말하면 책에 나온 다툼, 역사에서 일어난 전쟁, 인간의 자존심을 함께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아이가 넓게 생각합니다. 대화는 일상에서 계속 배우게 해요. 자녀가 자라면 대화가 줄어듭니다. 부모에게 곁을 내주지 않으려 하지요. 이때는 독서토론이 좋아요. 갑자기 독서 토론하자고 하면 아이도 낯설겠지요. 책 이야기를 꾸준히 하다가 독서토론으로 이어져야 해요.

유아 때는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읽어달라고 해요. 같은 내용을 계속 읽으며 아이가 마음에 그림을 점점 크게 그린다고 생각하세요. 초등학생은 여러 가지 종류의 책을 많이 읽는 게 좋아요. 지식을 확장하는 거예요. 다만 많이 읽는다고 많이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사람은 자주 생각하고 고민하는 관점으로 책을 읽어요. 백 권을 읽으면 백 가지 시야를 갖는 게 아니라 한두 가지 관점으로 백 권을 읽어요. 아이는 시야가 좁기 때문에 백 권을 모두 한 가지 관점으로만 읽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토론이 필요해요. 사람마다 살아온 과정이 달라서 책을 다르게 읽어요. 배경지식이 달라서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거죠. 함께 토론하면 배경지식이 다른 사람의 해석을 들어요. 그러면 , 이렇게 읽는구나. 이렇게 보는구나!’ 를 직접 겪어요. 토론은 책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단점을 보완하는 기회를 줍니다. 토론할수록 문해력이 좋아지면서 생각이 넓어져요. 자녀가 혼자서는 생각하지 못한 다른 눈으로 책을 살피게 도와주세요.

책을 많이 읽은 아이도 늘 읽던 대로 봅니다. 저는 편견, 선택, 인간의 본성에 관심이 많아요. 어떤 책을 읽어도 편견, 선택, 인간의 본성이 보입니다. 아이도 자기만의 초점으로 책을 읽어요. 백 권을 똑같은 눈으로 읽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책을 잘 읽던 아이도 갑자기 책에서 손을 놓지요. 중학생이 되면 한 권을 깊이 읽어야 해요. 다양한 주제를 다룬 책을 한 권씩 요모조모로 뜯어서 읽어야 해요. 다양한 관점으로 책을 읽으면 문해력이 길러져요.

고등학교 국어 시험에는 교과서 외 지문이 많이 나와요. 문학 관련 내용만 나오는 것도 아니에요. 경제, 사회, 역사, 철학, 과학 관련 내용이 골고루 나오죠. 영어에도 낯선 지문이 계속 나와요. 더구나 학력 경쟁이 크기 때문에 수능 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변별력을 갖추려고 일정 비율의 학생이 틀리도록 출제합니다. 다양한 관점의 해석 가운데 하나를 알아내야 하므로 틀리기 쉬워요. 한 사람의 생각만으로는 답을 찾기 어려워요.

문해력은 글을 이해하는 능력이에요. 글을 이해한다는 건 문장에 스며든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거예요. 작가가 무엇 때문에 글을 썼는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알면 책을 제대로 읽은 거예요. 저는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견주어 봅니다. 작가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따져요. 이렇게 하려면 다양하게 해석해야 해요. 여러 학생의 해석을 다 들어요. 이런 해석이 있고 저런 해석이 있으니 다양한 해석을 잘 기억하라고 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해석하는 능력을 갖춥니다.

학교와 학원에서는 낯선 글을 보면 답을 찾기 어려우므로 수많은 글을 꾸역꾸역 읽으라고 시켜요. 이것보다는 낯선 글을 읽어도 이해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게 나아요. 대화와 토론은 자연스럽게 능력을 길러줍니다. 무엇보다 좋은 방법은 글쓰기예요. 책을 읽으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아 글을 써야 해요. 책 내용을 전혀 쓰지 않아도 돼요. 줄거리만 잔뜩 쓰는 독서감상문, 인터넷에서 찾은 내용을 편집하는 독서 논술이 아니라 에세이를 쓰는 거예요. 자기 생각만 쓴다면 에세이만큼 문해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어요.

진짜 문해력은 자기 자신을 읽는 거예요.

<만세전>에서 주인공 인화는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어요. 조선으로 가다 말고 유학생 친구 을라를 만나죠. 아내가 아프면 곧바로 떠나야 하는데 굳이 을라와 만나 하루를 지체해요. 이 만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토론하다가 second choice라는 말이 나왔어요. 인화는 아내에게 가는 것(First choice, Best choice)을 내팽개치고 을라를 만나요. 문득 학생들이 상처 때문에 second choice를 선택할 상황을 만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얘들아, 너희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상처 때문에 최선을 버리고 차선(second choice)을 선택할 때가 있어. 어떤 사람과 만나거나 그 사람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특히 부모)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버리기 쉬워. 상처 때문에 회피하다가 좋은 사람, 좋은 기회를 놓칠 거야. 상처 때문에 second choice 쪽으로 마음이 기울 때 , 내가 상처 때문에 가장 좋은 선택을 버리는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해.' 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책을 읽는 건 등장인물을 이해하는 거예요. 작가가 지금 이 시대에 왜 이렇게 책을 썼는지 아는 거예요. 작가가 펼쳐놓은 내용을 통해 자신을 읽는 거예요. 이게 진짜 문해력입니다.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고 2 여학생이 이듬해 졸업하면서 편지를 줬어요.

“~제가 선생님께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나를 마주하는 방법이었어요. 스스로를 인정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구요. 내 미운 점까지 전부 나라는 걸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부모님을 보며 난 절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했던 모습도 결국에는 전부 나였어요. 처음에는 괴로웠는데 솔직해지고 비워내려 하니까 받아들여지더라구요. ~ ”

학생은 책을 이해하고,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그렇게 행동하는 까닭도 이해했지요. 문장 사이에 숨겨진 마음, 문장 너머 자기 자신을 읽는 게 진짜 문해력이에요.

#자녀_독서_글쓰기_강의를_들으시려면

https://goodteacher.org/bbs/board.php?bo_table=2022academy_fall&wr_id=12

제 서재 이름은 <책뜰안애>입니다.
책이 있는 뜰에서 평안()을 누리며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책뜰안애에서 독서 모임을 합니다.
처음엔 교사, 목사, 아나운서가 참여했고 고등학생이던 제 자녀 둘도 함께했습니다.
지금은 첫째 아이와 저까지 일곱 명입니다.

책을 읽으면 반드시 글을 씁니다.
8, 주홍글씨3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9, 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하루 한두 시간씩 삼 일간 글을 썼는데 첫째 딸이 쓴 글을 읽고 제 글을 내놓기 부끄러워졌습니다.

내 글을 부끄럽게 만드는 자녀를 보는 느낌이란~~


얼마나 멀리 가야 할까

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로저가 아서를 용서해줬으면 했다. 한 사람이 열성적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원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로저 칠링워드는 처음 헤스터를 형대에서 보았던 때의 차분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점점 자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죄에 관련된 세 사람 모두 불행해진다.

  헤스터는 죄에 걸려 넘어지는 그들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으나, 로저에게만은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죄인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기에 스스로 죄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지만, 피해자에게는 용서할 권리가 있다. 헤스터와 아서에게서 무거운 죄책감을, 낙인을 없애줄 수 있는 사람은 로저였다. 그만이 그들을 용서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로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함께 불행해지는 쪽을 택했다. 그는 예수님이 아니었다.

  로저가 결국 용서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펄에게 유산을 물려준 것을 보면 용서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증오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헤스터는 죄가 영원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돌아와서 주홍글씨를 달았다.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주홍글씨를 치욕의 표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헤스터 자신에게는 달랐을 것이다. 피해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유로워져도 되지만, 죄인은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사람은 모두 죄를 짓고, 저마다 스스로의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비교적 작은 죄에도 뼈저리게 스스로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 세상이 놀랄 죄를 지어놓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죄에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기가 죄에 걸려 쓰러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점점 추악해져갔던 로저 칠링워드처럼 말이다. 같은 죄에 대해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무게를 부과하는 것은 시대상이나 문화 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의 성격 차이나 가치관 때문일 수도 있다.

  딤즈데일 목사는 자기가 지은 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느꼈다. 그는 헤스터와 달리 주홍글씨를 달지도, 자기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도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헤스터가 지은 죄의 무게는 이미 온 도시에 공표되었다.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는 것. 헤스터는 딱 그만큼만 이겨내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만 걸음을 가면 된다.

  하지만 아서에게는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천 걸음을 가야 하는지, 만 걸음을 가야 하는지, 아니면 온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된다. 헤스터가 감당해야 했던 무게가 가벼웠다는 뜻은 아니지만,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반면 미지는 갑갑하고 불편하다.

  한편 로저 칠링워드는 아서보다도 그 죄를 무겁게 여겼다. 얼마나 무겁다고 생각했냐면, 몇 년 동안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지내면서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할 정도였다. 또 일부러 아서의 죄책감을 자극시키고 복수를 계획할 정도였다. 그는 심지어 아서와 헤스터가 배로 떠나려는 것을 알아내고 같이 가려 하는 경악스러운 짓도 저질렀다.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죄에 더 많은 무게를 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로저의 복수심은 과해 보인다. 그도 나름대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원하는 바가 있었을 텐데, 인생을 복수에 걸어버리다니 말이다.

  로저의 복수심은 아서에게 명확한 기준을 제공해버린 셈이 되었다. 로저가 헤스터의 남편이었다는 걸 알게 된 뒤, 아서는 로저가 자신에게 부과한 죄의 무게가 합당하지 않다고 느꼈다. 스스로의 죄가 크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아서는 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얻었다. 측정 불가능했던 죄는 감당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헤스터의 말을 듣고 자기가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으며 바다 건너 다른 도시로 떠나기로 한다. 어떤 의미에서 로저는 아서에게 죄책감에서 벗어날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다른 사람의 기준을 받아들여 죄를 측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스스로 죄의 무게를 재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인간의 생각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이 공정하게 처벌한다고 말해도 불합리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헤스터와 딤즈데일 목사가 겪은 수난이 그 죄에 비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로저 칠링워드의 복수가 심하다고 본다. 하지만 수많은 법률이 있는 지금도 우리는 어떤 벌이 적절한지 확신할 수가 없다. 얼마나 멀리 가야 알맞은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걸 아는 건 하나님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멀리 갈지 결정해야만 한다. 도시에 남을 것인지 배를 타고 떠날 것인지 선택할 순간이 온다. 어떤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속죄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감당 안 될 정도로 멀리 가다 쓰러지는 딤즈데일 목사 같은 사람도, 기어코 이겨내고 마는 헤스터 같은 사람도 있다. 죄를 지었는데도 백 걸음도 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만 걸음이고 2만 걸음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니까.

  가장 좋은 건 그럴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에는 죄를 짓고 먼 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의로 걷기 시작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강요 때문에 그러기도 한다. 우리는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너무 가혹하거나 벌을 받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죄의 무게를 잴 수 없으며,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그 무게를 확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란 온 지구를 도는 고행길을 걷는 사람에게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백 걸음, 2백 걸음이면 된다고 선을 그어주는 것. 그게 용서다.

나는 로저가 아서를 진작 용서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부끄러운 내 글>>>

주홍글씨를 왜 읽을까?

권일한

  『주홍글씨는 인간이 찍은 낙인이다. 좋은 것을 낙인이라 하지 않는다. 금메달, 상장, 합격으로 얻은 칭송은 주홍글씨에 속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어른들은 전과자, 난봉꾼, 이혼한 사람을 비난했다. 지금은 이런 낙인이 많이 줄었다. 이혼은 더 이상 비난받지 않는다. 전과자라고 다 나쁘게 보는 것도 아니다. 선거 공보에 민주화 운동으로 전과자가 되었다고 자랑스레 쓴다. 그러나 대상이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낙인을 찍는다. 인간은 낙인을 찍고 타인을 배제하면서 만족하는 존재이다.

  청교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살던 나라를 떠났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 나라를 버렸던 사람들이 죄악을 근절하겠다고 낙인을 찍었다. 그들은 마을을 이룰 때 교회와 함께 감옥도 지었다. 몇 가지 죄악을 정해놓고 어긴 사람을 따로 떼어놓았다. 주홍글씨는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주홍글씨를 새긴 사람은 누구도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죄인이라는 뜻이었다. 문둥병 환자를 진 밖으로 내쫓아 격리하듯, 대상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격리해버렸다. 마을에서 살되 마을에 속하지 않은 자, 항상 비난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주홍글씨를 받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책하며, 외로움에 짓눌려 서서히 죽어간다. 가슴에 과녁판을 달고 살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비난하는 대상이 되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항변할 수도 없다. 죄인임을 받아들인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주홍글씨를 향한 손가락질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주홍글씨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게 만든다. 죄책감과 압박에 짓눌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청교도 주민들은 간음한 여인에게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하신 예수님 말씀을 몰랐을까?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나라를 떠났다면 예수님이 죄인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윌슨 목사를 존경했다. 딤즈데일 목사는 젊었는데도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며 영혼에 관심이 많았다. 목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그 은혜가 자신들에게도 흐르기를 기대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라면 결코 하지 않는 방법으로 낙인을 찍었다. 하나님 뜻과 반대로 행하는 줄 몰랐다.

  헤스터는 주홍글씨를 새긴 채 힘들게 살아가야 했다. 헤스터는 사람들과 같이 웃지 못했고, 함께 슬퍼하지도 못했다. 철저히 외롭게 혼자 살아가야 했다. 사람들은 헤스터를 비난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주홍 글씨는 격리와 단절, 배제와 적대감의 표상이었다. 헤스터에게 펄과 딤즈데일 목사가 없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견딘 건 보호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스터는 펄과 딤즈데일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비난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더 잘 견딘다. 지키고 싶은 게 자존심이라 해도. (지키고 싶은 것)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다가 자신이 망가지는 사람이 많다. 보호하고 싶은 대상도 망가뜨리면서 모르는 사람도 많다. 헤스터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가면서 무너지지 않았다. 펄이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도 조바심 내지 않았다. 펄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잘못된 행동을 해도 화를 내거나 짜증내지 않았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마음을 나눌 사람이 전혀 없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홍글씨를 죄악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을 바꿔놓았다. 헤스터 덕분에 주홍글씨가 힘을 잃었다. 비현실적이다.

  사람들은 죄악을 감추려 한다. 아이들도 거짓말로 자기를 보호한다. 죄악이 드러나도 부인한다. 상대의 반응을 과장하고 자기 잘못을 축소한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나쁜 짓을 더 많이 했으며, 밝혀지지 않았을 뿐 죄인이 많다고 생각한다. 모두 자기를 지키려는 반응이다. 자신을 보호하는 행위는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릴 위험을 만든다. 헤스터는 죄악을 감추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 (칠링워드에게 딤즈데일 목사 이름을 말하지 않은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자기 잘못을 축소하지 않았고, ‘너희들도 다 죄인이다하지 않았다. 펄과 딤즈데일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게 놔두었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주홍글씨는 청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편견을 드러낸다. 당시 사람들은 호손이 만들어 낸 이야기에서 자신들을 돌아봐야 했다. 헤스터가 달고 다녔던 주홍글씨처럼 겉으로 드러난 죄악뿐만 아니라 딤즈데일이 가슴에 담아두고 괴로워하던 보이지 않는 죄악을 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홍글씨로 낙인을 찍었던 명명백백한 죄악도 보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고 하자. 지금은 인권이 향상된 시대다. 그때로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은 왜 주홍글씨를 읽을까? 우리 사회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낙인을 찍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자신도 낙인을 찍혀 힘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일까?

15년 전에 기독교 세계관으로 수업하겠다고 모임을 만들었다.
교육과정을 재구성해서 수업하는 게 재미있었다.
행복한 수업만들기(초등)에서 모임을 여럿 개척했지만 몇 년 반짝하다가 무기력해졌다.

이후로 줄곧 나만의 수업에 몰두했다.
글쓰기 수업, 독서 수업, 자연을 거니는 수업, 마을을 다니는 수업!
이런 수업은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수업일까?

30년 전에는 기독교 세계관을 창조-타락-구속으로 설명했다.
20년쯤 전에 창조-타락-구속-회복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구조를 수업에 적용하기 어려웠다.
창조, 타락, 구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업에 적당히 끼워넣는 수준이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도예베르트의 우주법철학이 발전된 형태입니다.
대부분의 사상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면 핵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적고
대중이 좋아하는 개념만 남지요.

기독교 세계관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생각한다.
같은 기독교인들이라 해도 통일된 관점을 정하기 어렵다.
또한 세계관은 도구로 활용될 가치가 크지만 도구는 늘 오용될 위험이 크다.

기독 교사로 30년 동안 수업하면서 든 생각,
수업은 관계다.
세계관도 하나님과 한 사람의 관계다.
수업하는 사람(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수업과 학습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이런 게 세계관이라 생각한다.
설명과 전달이 아니라 토론과 묵상(숙고)이 필요하다.

2022년 9월 <복음과 상황>에 좋은 기사가 실렸다.
<복음과 상황> 잡지사에 전화해서 선생님들과 기사를 나누고 싶다고 했더니 1주일 동안 무료로 읽게 해주었다.
1주일이 지나면 회원만 기사를 읽게 바뀐다.

<아돌프 히틀러, 칼 바르트, 그리고 세계관 투쟁>에 나오는 부분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같은 성서적 주제로 세계관을 구성한다고 하여
그리스도인이 신뢰하고 활용할 만한 좋은 '기독교' 세계관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계관' 개념 없이, 혹은 '세계관'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지금 여기서 현실에서 듣고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일이다."

 

'성서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 사람이 아니라, 너!  (0) 2022.10.23
나니아 나라에서의 섬김  (0) 2022.10.23
『마법사의 조카』와 외모지상주의  (0) 2022.05.22
다윗이 달린다.  (0) 2022.04.02
성경 묵상 나눔 8  (0) 2022.03.14

독서 모임에서 예언자들을 읽었습니다. 제가 발제한 내용입니다.

 

Ⅰ 들어가며

1. 저자와 역자 소개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인터넷 서점 저자 소개)
  유대인 학자이며 사상가로서 온 인류를 사랑한 경건한 랍비로서,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의 지도자였고, 소련에 사는 유대인을 돕자고 세계에 호소한 최초의 유대인이었으며, 기독교-유대교의 대화를 재촉한 강력한 에큐메니스트였다. “내 중심된 관심사는 인간의 정황이다라는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190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명한 랍비 가문에서 태어나, 1927-33년 독일의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7년 마르틴 부버로부터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레르 하우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나치의 폴란드 학살이 있기 두 달 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0년 미국 신시내티 히브리 유니온 대학에 초빙받아 5년간 철학과 랍비 문학 강의, 1945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아메리카 유대교신학교에서 신비주의와 유대교 윤리를 가르쳤다. 1965-66년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최초로 해리 에머슨 포스딕 객원강좌를 맡았다. 미네소타, 아이오와, 스탠포드대학교 등에서도 강의했다. 1965년 봄, 알라바마의 셀마에서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민권행진을 하였다.
  주요 번역서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 사람을 찾는 하느님,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누가 사람이냐,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안식이 있다.

. 이현주
  관옥(觀玉)이라고도 부르며, ‘이 아무개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목사이자 동화작가이자 번역가이며, 교회와 대학 등에서 말씀도 나눈다.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드는 글들을 쓰고 있으며,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과 함께 노자 이야기를 펴냈다. 바보 온달

2. 머리말 (10쪽 분량) / 예언자는 사람(언어, 몸짓, 감정 표현 등)이다. 확성기가 아니다.
  머리말 뒤에 <1940~45년의 순교자들에게>라는 글과 시편 44편이 있다. 1940~45년 사이에 유대인 600만 명이 죽었다. 랍비인 헤셸은 하나님께서 왜 홀로코스트를 허락하셨는지, 유대인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 고민했을 것이다. 예언자들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친구와 이웃을 잃은 유대인 랍비의 고뇌가 담겼다.

3. 우리 시대의 예언자
  1990~2000년대는 예언과 예언자가 다수 출현했다. 1992년 다미 선교회가 재림 날짜를 예언한 이후 다수의 예언자(미국 중심)가 대한민국이 위험하다고 예언했다. 성적인 범죄 때문에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국가적 예언부터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말하는 개인적 예언까지 넘쳐났다. 그들이 유명해지고 부자가 될 동안 가나안 신자가 늘어났고 교회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신자들은 자신을 위한 예언을 듣기 위해 기도원으로, 집회로 찾아갔고 그 결과 우리나라 기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로 바뀌고 말았다. 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외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소리 없는 울음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대에 예언자가 있다면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통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Ⅱ 『예언자들』 내용

1: 예언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 악에 민감한 사람
 세상의 아름다움은 보지 않고 분노에 가득 차서 온 세상이 더러운 시궁창이라도 된 듯 고함을 치르는 사람이다. 별것 아닌 일에 고함치는 사람, 남들이 괜찮게 생각하는 것에 흥분하는 사람, 우리가 에피소드로 여기는 것을 세상의 끝장으로 보는 사람이다.
 - 예언자는 철저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그의 영혼에 무거운 짐을 지워주셨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인간의 무모한 탐욕에 망연자실해 있다. 인간의 아픔은 실로 끔찍하다. 그 어떤 인간의 말로도 넘치는 두려움을 전달 못 한다. 예언이란 하느님이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라고 빌려주신 말이며 착취당한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불경스런 부자들에게 내리신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접촉점이다. 하느님은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당신의 분노를 드러내신다. (36) 예언자의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신음을 지나치지 않는다.

. 인간의 역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
- 혼자 떨어져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듣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다.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 더욱 예언한다.

. 다른 것을 보는 사람
- 사람들이 위대한 도시를 선망하며 칭송하는 반면, 예언자는 건물과 도시의 장엄함 대신 폭력과 억압, 도덕적인 문란을 보았다.
- 사람들이 죄에 잠시 분노하다가 안일과 진정과 위안으로 돌아가는 반면, 예언자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처럼 밤이고 낮이고 끝없이 넌더리를 치면서 살아간다.
- 졸지도 자지도 않는 하나님처럼 예언자는 언제나 진지하게 괴로워한다.

. 우상을 부서뜨리는 사람
- 사람들이 성전과 사제직과 분향을 종교로 받아들이는 반면, 예언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조차 우상 숭배로 보았다. 거룩한 성전과 제사를 공격하며 예언자들은 자신이 먼저 부서지는 사람이다.

. 현실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는 사람
- 개인의 목숨을 파멸시키는 자를 온 세계를 파괴하는 자로 대하며, 한 사람을 구원하는 자를 온 세계를 구원하는 자로 대우한다. 별것 아닌 이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 소수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모두에게 묻는 사람
- 백성의 도덕적 상태를 계속 상기시켜 준다. 세상이 편히 누워 잠자는 동안 예언자는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하늘에서 불어오는 동풍을 본다. 재앙과 역병, 고통, 파멸을 외치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 외로움 가운데 고뇌하는 사람
- 예언자들은 외톨이가 되어 고통을 겪었다. 쓰고 불쾌한 일을 감당해야 했다. 동시대인들에게 미친 자라고 낙인찍혔다. 그래도 예언자들은 외쳐야 했다. 듣든지 안 듣든지.

. 분석자, 전달자, 증인
- 야훼의 회의에 참석해서 하느님과 함께 의논하며 하느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증인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을 말하는 자다. 하나님의 증인이다.

2~8: 사례로 살펴본 예언자

. 배경 설명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90)
  선지자는 일어날 일을 선포하지만 점치는 사람이 아니다. 선지자란 말은 선포하는 자, 몸으로 뒹굴다는 뜻이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몸으로 뒹굴며 외치고 반응하는 사람이다. 선지자는 마이크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하나님께 묻고 따지기도 했다. ‘외침은 급할 때 부르짖는 소리다. 선지자는 심판과 징계를 외치며 하나님께 돌아와 멸망을 피하라 했으나 백성은 듣지 않았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고백하지만 이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아무리 말해도 외면당할 줄 알면서 외쳤다.
  선지서는 특정한 시대에 부름을 받아 당대 사람에게 외친 기록이다. 선지자가 외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바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에 따라 4가지로 나눈다.

시간 당시 강대국 주요사건 활동한 선지자
BC 8세기 앗수르 북이스라엘 멸망 요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BC 7세기 바벨론 남유다 멸망 위기 나훔, 스바냐, 오바댜, 요엘, 예레미야, 하박국
BC 6세기 바벨론 바벨론 포로 에스겔, 다니엘
BC 6-5세기 페르시아 포로 귀환 학개, 스가랴, 말라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헤셸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활동한 예언자 중 6(이사야를 1, 2로 나누면 7)을 시대순으로 다룬다. 예언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난 예언자를 주로 다루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 미가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하박국은 남 유다에 외쳤다.

. 아모스
- 유다 왕국 베들레헴 남쪽 드고아 출신으로 북 왕국에 관해 예언함. 북 이스라엘은 남쪽에서 온 예언자의 말을 들을까? 북 왕국 통치자들에게 남쪽 출신 목자의 말이 들렸을까?
- 헤셸이 하느님의 무서운 침묵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바탕에 두고 아모스를 생각한 것 같다. 양을 치면서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아모스는 하느님의 힘찬 음성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작고 조용한 음성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대신 목자와 양떼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아모스는 성실성의 결여와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을 저주한다. (72)
- 하느님이 당신의 모든 적들 위에 군림하시어 온 세계를 친히 다스리실 야훼의 날이 오고 있다는 믿음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은 이스라엘이 무슨 형편에 있든 관계없이 그날에 구원받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야훼의 날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대한 심판과 형벌의 날이 아니라 이교도 나라들에게만 형벌이 떨어지는 그런 날이었다. (78) 아모스는 이를 뒤집습니다.
- 야훼가 진노하고(73), 백성의 잘못으로 구원자가 고통받으나(75), 이스라엘은 우상을 버리지 않았다.(77) 아모스가 전하려 했던 하느님의 혐오감과 아모스의 절망감은 무시되었다. 이스라엘이 살 길은 하느님을 찾는 길밖에 없었으나 이스라엘이 그럴 가망이 없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면(81) 구원(82)은 불가능하다.
- 헤셸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아모스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낙심하고 심히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아모스는 하나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백성을 향한 연민을 품는다. 북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보시는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남 유다 사람으로 북쪽 형제를 동정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과 백성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짓눌리면서 외쳤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을 만날 채비를 하라고 권면한다. 멸망으로 끝내지 않고 희망을 내다보게 한다.

. 호세아.
- 솔로몬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갈라진다. 유다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다. 남쪽 유다는 유다 지파 단일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서 반란의 위협이 적었고 줄곧 다윗 왕가에서 왕이 이어진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잘 섬겨 왕조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유다는 8명이 선한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부터 모두 우상을 섬겼으며 단 한 명도 선한 왕이 없었다. 유다가 섭정(아달랴) 포함 20명이 344년을 다스린 반면 이스라엘은 19명이 208년을 다스렸다. 10지파 연합 체제인 이스라엘은 지파 사이에 세력 다툼이 자주 일어나 왕권이 약하고 왕이 자주 바뀌었다.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75)
- 호세아는 앗수르 제국의 상황에 따라 격랑에 휘말리는 시대에 살았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반란과 찬탈이 계속되는 모략과 음모의 온상이었다.
- 
아모스가 미완으로 남겨둔 것을 호세아가 처리해야 했다. 아모스는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했고 공의를 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그분의 강철 같은 의지를 전달하였다. 호세아는 인간에게 쏟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왔다. 하느님은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기도 하다.
- 
호세아는 사랑만 선포하지는 않았다. 하느님의 분노가 무시무시하게 터져 나온다고 외쳐야 했다. 호세아도 아모스처럼 진노와 동정 사이의 긴장(94) 가운데 선포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은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음란한 여인을 다시 데려와서 결혼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모습이었다.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이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알았을까? 이해하지 못하고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에 따랐다면 호세아는 확성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온전한 감정적 일체를 경험하기 원했고, 이스라엘이 이를 배반하자 호세아가 이 마음을 느껴야 했다.
- 헤셸은 고멜이 창녀가 아니라 바람 피우는 여인으로 묘사한다. (700, 각주 6)
- 
지금도 잘못 인용하는 호세아 61~3절 말씀에 대해 여호와는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6:6)” 라고 말씀하신다.

. 이사야
-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번영의 시대에 살았다. 이사야는 솔로몬 다음으로 명성을 떨치며 국력이 절정에 이른 우찌야(웃시야)가 죽었을 때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 아시리아가 약소국을 약탈하고 삼키며 사마리아를 멸망시켰고 유다의 장래도 불투명해졌다. 아시리아가 동쪽에서 전쟁하는 틈을 타서 유다와 아시리아 사이의 소국들이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고 유다를 압박했다. 아하즈 왕은 아시리아 왕의 아들과 종이 되기로 했다. 이때 여호와께서 반아시리아 동맹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아시리아의 종이 되라는 말도 아니었다.
- 예언자는 <역사란 하느님의 일이 실현되는 무대로서 그 위에서 숱한 왕국과 제국들이 일어섰다가 사라진다고 아는 예언자는, 한순간의 안개와 그림자들 너머에 있는 섭리를 내다보았다.>라는 말을 이해한다. 단기간에 아시리아가 전성기를 맞았다가 몰락하는 상황에서 이사야는 왕과 백성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을 때도 섣불리 나서지 않고 기다렸다. 당시 상황에서 이사야처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거대한 제국 사이에 낀 작은 나라는 외교술로 줄타기를 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예언자는 이를 거절한다. 예언자는 아시리아가 무너지고 에집트도 의지할 바가 아닌 줄 알았다.
- 그렇다고 이사야가 아는 척하거나 냉소하지 않았다. 이사야는 깨닫지 못하는 백성에게 깨달으라고 외치며 기진맥진했다. 왕족과 귀족이 자기 배를 불리려고 백성을 등치는 모습을 참지 못했으며, 하나님께서 격렬하게 진노하신다고 외쳤다. 그러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슬픔은 의미없이 사라져버렸다. 오직 예언자만 이를 느낄 뿐이다.
- 예언자는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에 젖어들었고,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대상인 백성에 대해서도 동정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마음과 하나가 되었고, 백성에게 외치며 백성의 마음과도 하나가 되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사야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 미가
-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처음으로 예언했다.
- 
예언자는 고독한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너무 높고 그의 덩치는 너무 크고 그의 관심은 너무 치열해서 보통 사람이 그것을 더불어 나눌 수가 없다. 맨꼭대기 봉우리에 살고 있는 그의 하느님밖에는 상대가 없다. (175)

. 예레미야
- 유다 말기 왕들(요시아부터 시드키야까지)이 다스리던 때에 하나님 마음을 전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리라 예언했고 실제로 멸망을 지켜보았다. 유다 말기 진노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때와 징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그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았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타오르는 분노와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을 말해야 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슬픔과 분노를 온몸으로 느끼고 한탄, 비탄, 슬픔, 애곡으로 표현했다.
-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은 야훼께서 영원히 거하리라 약속한 거처를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스라엘이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듣지 않는 백성에게 심판과 회복을 말했다. 하나님이 화난 줄 모르는 백성에게 심판과 회복을 말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한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몸소 체험했다.
- 예레미야는 천성이 부드럽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은 극단적으로 하기 싫은 일이었다. 이것이 그를 호전적이며 참을성 없고 성 잘 내는 사람이 되게 했다. 그가 위하여 기도해 준 사람들은 그의 적이 되었다. (211) 그러나 예레미야도 다른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예언이 실제 재난으로 닥쳤을 때,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울부짖는 백성에게 희망과 위로의 말을 들려준다. 앗시리아가 무너지고 바벨론이 일어섰으며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 하박꾹
- 여호야킴 시대(느부갓네살이 승승장구할 때)에 활약한 유다 출신 예언자였다.

. 2이사야 (40~66)
- 유대인 랍비로 헤셸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고난받는 종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이나 메시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으므로 만민이 해방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2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을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에는 하느님의 고통이 포함된다. 그래서 이사야는 야훼를 해산하는 여인으로 비유한다. 이는 어느 예언자도 감히 하지 못한 표현이다.
- 이스라엘의 죄악을 닦달하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표현하신다. 이스라엘을 만국의 빛으로 삼으시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에게 장엄한 현존을 드러내신다. 2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만민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기대를 보여준다.

. 결론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과 백성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짓눌리면서 외쳤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에서 쫓아내라고 말하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이사야는 혼란한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 하느님의 진노와 슬픔을 느끼라고 선포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이 시온을 회복하리라 기대했다. 미가는 영원한 도성,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는 곳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해야 했다. 예레미야는 이사야 자신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외쳐야 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혀진 매듭을 풀어보려고 했다. 하박꾹은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인간의 잘못에 대해 진노를 퍼붓는 하나님의 방법이 옳지 않다고 따졌다.

예언자들은 외쳐야 하는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박국은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며 덤벼들었다. 예언자들은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하나님 마음을 이해해야 했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공감하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했다. 하나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선포는 예언자의 몸짓과 표현으로 드러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예언자들은 단순하게 들은 대로, 본 대로 외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백성의 잘못을 보며 분노했고, 그들은 심판하는 하나님께 섭섭했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잇닿아야 했다. 전망, 분노, 수용, 슬픔 사이를 오갔다. 예언자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느꼈던 감정(파토스)이 곧 예언이었다.

예언자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견디며 백성들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9~11. 역사, 징벌, 정의
. 역사
- 권력은 물리적인 힘을 내세워 백성을 강압으로 지배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는 강한 힘으로 제국을 이루어 주위 나라를 지배하고 백성을 괴롭혔다. 그들은 정의를 무너뜨리고 평화를 빼앗았다. 권력에 희생당하는 대중도 권력의 편에 선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에집트는 백성을 위협하며 악을 자행했다. 그들은 백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 그러나 예언자는 권력에 대항한다. 예언자들은 제국이 힘을 내세우는 걸 악이라고 보았다. 그 누구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는 제국의 지배자와 왕들을 신의 호의를 받은 자들로 보았다. 오직 예언자만이 하느님께서 약한 자의 편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역사가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 손을 들어주었으나, 오직 하느님만이 비천한 자, 짓밟힌 자, 나그네와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에게 마음을 두신다.
- 따라서 역사는 하느님이 도전받으시는 장이며 정의가 패배를 맛보는 곳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좋은곳이었으나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하느님은 좋다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인간이 힘을 이루는 것이 역사이기에 심판을 외칠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인간의 사건(지배자의 권세와 힘이 이루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경험을 본다.
- 그렇다고 예언자가 세상을 증오하거나 문명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예언자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만 문명의 불안정성을 말하고 거짓됨을 폭로했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했다.
- 역사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맞도록 모양을 이루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주 인간사에서 떨어져 계신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역사에 임재하셔서, 하느님 뜻이 실현되기를 바랐다. 개인의 신비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의를 배우는 계시가 임하기를 바랐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면 백성은 범죄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며 이는 무서운 형벌로 나타난다. 그러면 예언자는 백성이 당하는 재난에 당황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본질적인 역설이다.
- 예언자들은 역사 현실을 경험하고 관찰하면서 하느님께 받은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이른다. 사람들이 개량(개선)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개입하는 역사는 개량이 아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며 고통당한 뒤에 비로소 구원이 임한다. 이후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임할 것이다.
- 하느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역사가 이룬 것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권력에 취해 오만방자한 니느웨가 아니라 조용한 거주지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하느님의 도와 그분의 길을 걷는 법을 배우고자.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예언자만이 확신한다.
- 전쟁과 죄악이 가득한 역사에서 예언자들을 구한 건, 그들이 본 메시아에 대한 환상과 인간이 회개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언자는 인간이 이루는 역사를 보면서 낙담하지만, 낙담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다른 날을 기대한다.

. 징벌
- 예언자들은 형벌을 외치면서도 회의를 품었다. 하느님의 목적은 앙갚음, 저지, 교정이라기보다 순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고통이 순결을, 형벌이 교정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마주 대하여도 백성들은 계속 그들을 등졌다. 예언자가 하느님께 들은 말씀을 백성은 전혀 듣지 않았다. 예언자에게 바위를 부수는 망치 소리가 백성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백성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다.
-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로 인간은 죄악에 빠져 형벌을 불러왔다. 마음이 굳어진 백성을 치유하는 길은 굳어진 마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마음이 완전히 굳어버리면 절망으로 바뀌고 자만심이 끝장난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다. 이때 하느님께서 형벌로 말씀을 끝내시면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 어느 말도 그분의 마지막 말씀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이 변하면 하느님의 심판도 변한다. 구원의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 정의
- 예언자가 희생제물보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건 역설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희생제에 인간의 행동을 함께 요구하지 않았다. 제물을 드리며 만족하고 기쁘게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원시 종교의 신들은 기도와 제물을 바치면 만족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지는 신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정의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예언자는 왜 백성에게 공의(즉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외쳤을까?
- (쩨다카)는 정의를 넘어선다. 정의는 법률상 의이며 의는 박애, 친절, 관용을 포함한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며 억압받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느님은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수립하기를 바라신다. 이를 민감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예언자다. 예언자는, 무력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착취당하기만 하는 사람을 위해 나선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인간)에게 관심을 갖는 것처럼 우리도 관심을 이웃에게 옮기며 사랑하라 하셨다.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남에게 그대로 해야 한다(의무). 이것이 미쉬팟이다. 미쉬판과 쩨다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 하느님은 그의 자손과 후손들이 의와 정의를 실현하여 야훼의 도를 지키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의와 정의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뜻이다. 의와 정의가 훌륭한 가치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 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기림을 받는다고 했다.(341)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면 하느님의 의가 역사를 이끄신다.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이 정의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로 구원받는다. 하느님께서 역사에 참여하시려면 예언자들이 하늘의 정념에 참여해야 한다. 예언자는 인간이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선포해야 했다. 고아와 과부를 측은하게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을 의로 선포하는 일이다.

2.
1부에서 예언자 개인의 사상에 하느님의 정념이 차지한 자리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2부에서는 그것의 보편적인 특성을 예언자 신학의 중심되는 범주로 여겨 신중하게 살펴보겠다. (352)
예언 행위의 내용을 정념과 예언자의 동정으로 설명한다(1~4). 14장에서 예언자가 어떤 형식으로주장하는지 밝힌다.

1. 정념의 신학
- 예언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론이나 가치관이 없었다. 그저 이해할 뿐이다. 공부하고 연구해서 깨달은 관점이 아니라 보고 겪으며 이해한 하느님의 태도이다. 사변을 통해 얻은 지식과 달리, 하느님의 현시를 통해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했다.
- 예언자들은 계시의 순간을 통하여, 역사 속에 하느님이 임재하신다는 표징을 느껴 알았다. 분석, 연역법이나 귀납법 따위로 얻어내는 결론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삶으로 얻는 소득이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지만 또한 반사적인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었다.
- 정념의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다. 단순히 명령하고 복종을 기대하는 분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동요되고 영향을 받으며 반응하신다. 인간의 행실과 사건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분노한다. 멀리 떨어진 심판관이 아니다. 인간사에 긴밀하게 반응하신다. 이를 보며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정념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인간과 역동적인 관계를 이루신다.
- 헤셸은 하느님께서 유대인 600만이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분, 세상을 만드시고 멀리 떨어져서 간여하지 않는 무심의 제1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수용소에서 하느님을 버렸지만, 또한 많은 유대인이 하느님을 함께 고통당한 분으로 이해했다. 유대인 랍비가 하느님을 함께 사는 배우자요 파트너며 대리인이라고 고백했다. , 범죄, 고통은 인간의 실패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낙심(358) 표현했다. 인간의 행실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향한 행실인 한 하느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1장을 읽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며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고 느꼈다.
- 정념이 무엇일까? 격정(감정적인 흥분, 무모한 감정)이 아니다. 기질도 아니다. 하느님은 전적 타자가 아니다. 인간과 계약(언약)을 맺고 백성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이 백성과 함께 나누며 이루는 무엇이다.
- 하느님의 정념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의미와 신비, 형이상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하나됨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작용,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대화에 진정한 바탕이 된다. 예언자의 예언자 됨은 미래를 내다보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하느님의 정념을 꿰뚫어보는 데 있다.

2. 비교와 대조 (타 종교와 하느님의 정념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 만물을 창조하신 분, 당신이 창조한 것들 가운데 보잘 것 없는 한 분자가 저질러놓은 일에 영향을 받는단 말인가?
- 하느님의 정념은 에피쿠로스, 그리스, 힌두, 자연신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다르다.
- 노자의 도, 유교, 힌두 철학, 불교와도 다르다.
- 그리스의 운명, 메소포타미아의 필연, 에집트의 예정된 운명, 점성학과도 다르다.
- 원시 종교의 신들은 인간에 대해 악의적이며 질투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르다.

3. 정념의 철학
- 그리스 사상에 뿌리를 둔 철학의 전제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신학자들은 2천 년이 넘도록 하느님의 정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전제는
- 인간이 감정 또는 열정에 빠지는 것은 외부의 영향에 휘둘리는 것이므로 약자라는 증거였다. 신은 이러지 말아야 한다. 신은 물질처럼 피동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신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동자이므로 감정과 거리가 멀었다. 신은 열정, 즐거움과 슬픔, 사랑과 미움, 덕행과 악행과 상관없는 존재라 생각했다. 오히려 냉정(감정을 억압함)이 신의 속성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냉정하며, 감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화를 내지도 않고, 겁내거나 불쌍한 마음을 품지도 않는다고 믿었다. 서양 도덕론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방관자, 느끼지 못하는 분일까? 성경은 예언자들의 하느님이 피조물을 돌보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영원한 하느님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관점이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이 자기 때문에 존재하는 존재물들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절대자임을 부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신을 고정된 존재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본재의 변화는 타락이라는 가치관에 반대하며) 하느님이 인간을 보시며 다양한 감정을 보이는 분이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역사에 관심을 보인다고 알았으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일이 하느님 뜻이라고 생각했다. 예언자의 하느님은 멀리 떨어져서 무심하게 바라보는 신이 아니었다. 창조주, 구원자, 역사의 주인이라고 선포했다.

4. 신인동감동정설 (예전에 많이 공감했으나 다시 읽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 고대 사상가들은 신인동형동성설을 싫어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신이 인간이나 동물처럼 몸과 지체를 가진 것도 싫어했고, 감정이나 열정을 지닌다는 것도 견디지 못했다. 또한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는 개념이어서 싫어했다. 결국 그들은 신이 인간의 감정을 느낀다는 생각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 성경은 신상을 배격했다. 인간이 신을 그려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을 완전하게 설명해봐야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길, 하느님이 기뻐하는 길을 말할 뿐이다.
- 하느님의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지 못한다. 예언자들도 하느님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현존을 나타냈다. 이를 위해 추상 언어가 아니라 장엄하고 격렬한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말해야 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념이라는 뜻 같다.

5. 진노의 의미와 신비 (434쪽 질문과 해바라기(시몬 비젠탈)
-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말했다. 인간사에서 분노는 좋은 감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언자가 외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 분노는 신성한 정념의 표현 방식이다. 성경이 말하는 분노는 죄악을 볼 때 솟구치는 감정이다. 분노는 하느님의 관심을 드러낸다. 예언자는 무관심을 폭로한다. 하느님의 분노는 무관심을 끝장낸다. 하느님은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때로는 분노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잔혹함에 상처입은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분노로 폭발시킨다.
- 그러나 분노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분노는 잠깐이요, 자비는 무궁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기 위해 분노하신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신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에 힘을 넣어주는 것이 분노다.
- 신인동감동정설과 연관해서) 분노는 하느님의 속성이나 기질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상태 중 하나다. 인간이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면 하느님은 분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분노를 보고 인간이 돌이키면 분노를 거두신다.

6. 이라 데이(신의 분노)
- 구약에서 자주 보이는 진노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반대 :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의 의로운 창조주, 자신의 분노를 특히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애정을 강조하는 조물주의 불완전함을 공격했다.
- 영지주의로부터 시작되어 테르툴리아누스, 아르노비우스, 락탄티우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하느님이 무감각하시다는 이론이 일반화된다.
-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잔혹하게 벌하는 파괴자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는 하느님이 과연 선하신지 묻는다. 이는 정념을 지닌 하느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 하고 특별히 정념의 한 형태로서의 분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신음 소리가 당신의 귀에 닿을 때, 하느님의 분노가 폭발한다.

7. 동정(sympathy, 동정, 공감, 위로)의 종교
- 정념으로 볼 때 인간은 신성에 동정으로 반응한다. 예언자는 스토아의 현인인 냉정한 인간과 반대로, 동정하는 인간이다. 하느님의 정념에 휩싸이면 예언자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으로 동정한다. 동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현존에 자기를 열어놓는 상태를 말한다. 예언자들의 거의 모든 말에는 동정이 메아리쳤다.
- 예언자는 백성을 회개하게 하여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한다. 백성이 하느님의 분노를 두려워할 때 예언자는 하느님의 분노가 곧 아픔인 줄 안다. 괴로워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백성에게 전해 뉘우치고 회개하게 한다.
- 동정은 하느님과 함께 동정함, 하나님에게 동정함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전자는 둘이서 한 느낌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후자는 하느님의 정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정념을 이해하고 반응한다. 예언자는 하느님이 느끼는 대로 인도받는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념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예언자다.
- 정념으로서의 영(루아흐)
- 예언자의 동정은 철학자들이 말한 우주의 공감과는 다르다. 종교적 열광과도 다르다. 신이 수난을 겪고 부활하거나 힘을 되찾는 것과도 다르다. 예언자가 말하는 정념의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최고 지배자로서 인간의 행실에 관심이 깊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분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정념에 가까이함으로 같은 감정을 느낀다.


8. 예언과 무아경
- 헤셸은 무아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8~10장에서 135(42, 65, 28)의 참고 자료를 인용해서 학자들이 예언자들의 경험을 무아경으로 보는 이론에 반박한다.
- 무아경은 영혼이 육신을 이탈하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혼이 더 이상 제자리에 있지 않고 육체를 떠난 혼수 상태 혹은 신과 합일된 상태로 이해했다. 신접(광신)은 신이 인간의 몸에 거하는 상태이고 무아경은 혼이 몸을 이탈한 상태이다.
- 그리스, 소아시아,로마, 셈족, 신플라톤주의 등 여러 가지 무아경을 소개한다.

9. 무아경 이론
-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시작한 무아경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단으로 정죄받은 몬타누스와 그를 변호한 테르툴리아누스 외에 교부들은 무아경 이론을 거부하였다.

10. 무아경 이론의 검토
- 구약 예언자들은 무아경은 경험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응하고, 대화하고, 질문하고, 때론 거절한다.
- 예언자들은 광란에 빠지지 않았다. 신과의 신비스러운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인격이 소멸되지도 않았다. 예언자는 인격체로서 하느님과 만나 대화했다. 무아경에 들어가려는 의지도 없었다. 예언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뜻밖에, 미리 기대하거나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또한 예언자는 자의식의 상실 혹은 정신력의 일시 중단을 겪지 않았다. 또렷한 의지로 하느님을 만났다. 예언자는 경험한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여 전달한다. 무아경과 달리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다. 또한 예언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개인적 구원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민중의 삶에 관심이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무아경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나 예언은 예언할 메시지가 목적이다. 무아경은 이 세상을 떠나 천상의 신비를 경험하는 게 목적이나 예언자는 하느님이 관심을 두는 세상, 당대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둔다. 무아경은 내면에서 경험하는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나 예언은 인격자를 만나 메시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 예언자들이 얻은 모든 통찰의 바닥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뜻과 영속성이 흐른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느님와 계약과 그 계약을 지키라는 하느님의 요구가 들어있다. 따라서 예언의 말을 선포하게끔 고무시킨 예언자들의 일상생활은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거대한 드라마의 부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11. 예언과 시적 영감
- 8~10장에서 예언이 무아경과 다르다고 반박한 뒤에, 11~13장에서 예언을 시인과 예술가들이 창작의 순간에 맛보는 경험, 황홀한 정신에 사로잡히는 시인과 같다는 견해에 반박한다. 180개의 참고 자료를 들어(81, 51, 48)
- 오랫동안 성경은 율법, 기도서, 교리서로 읽혔다. 문학이나 역사로 읽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17세기 자연신론자들은 이성을 진리 탐구와 판단의 유일한 도구로 주장했다. 이에 따라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비판당했고 예언자의 계시라는 개념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 18세기 계몽 철학이 일어나면서 신의 문서가 인간의 문서로 바뀌었다. 스피노자, 로크 등은 이성을 진리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 그러나 이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가치관에 반대가 일어나서 합리주의 자들이 멸시하던 종교적 요소가 작품에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성으로 차갑게 대하는 태도와 감성으로 열광하는 태도 사이를 오가며 성경은 문학 비평의 대상이 되어갔다. 헤셸은 이 과정으로 설명한다. (545-553)
- 19세기에는 예술 작품이 오랜 숙고와 정신적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했으며, 예술 작업을 성욕의 표현으로 설명한 프로이트까지 다양한 견해가 등장했다.
- 이 과정에서 신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언자를 단순한 도구와 그릇으로 설명하여 인간의 자발성을 없애버리거나, 심리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감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설명하며 초인간적인 영감을 없애버렸다.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방식으로는 예언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예언자는 영감을 받는 순간 수동적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예언자 자신이 영감의 근원을 알고, 영감으로 받은 메시지가 일관성을 유지하며, 다른 예언자와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예언자 또한 이를 안다). 따라서 예언과 시적 영감은 다르다.

12. 예언과 정신 이상
- 고대부터 위대한 시가들은 영감을 받고 사로잡혀 등장했다고 했다. 헤셸은 시의 창조가 광기에서 나오는 신비라고 말한 역사적 증거를 보인다.
- 이 문제는 천재가 정신이상에 결부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며
- 예언자가 영감을 받는 것은 노이로제가 될 수도 있는 뒤틀린 경험에서 파생되는 마음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는 견해로 발전되었다.
- 그러나 문헌에 남은 흔적만으로 한 인간의 잠재의식을 해부하는 것은 위험하다.
- 헤셸은 문서 예언자들의 병리학적 증상들을 검토한(570~580) 뒤에
- 행동 양태들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인식하는 상대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눈으로 예언자를 노이로제나 정신이상에 걸린 사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신 착란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예언자들한테는 더 높은 영적 질서에서 오는 현상일 수 있다. 예언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반응하는 건 당연하다. 예언자들의 삶에서 질병의 흔적이 보여도 그들이 주장한 바를 거부하지는 말아야 한다.
- 나비의 어원을 설명하며 어원과 용례가 모호하다고 말한다.
- 예언은 앞에서 설명한 광기, 정신 이상, 노이로제의 발작이 아니라 초월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 이런 설명을 통해 헤셸은 심리학적 분석, 사회학적 또는 인류학적 이론 작업이 예언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13. 예언자의 영감에 대한 해석들
- 예언자가 하느님에게 직접 말씀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비한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예언자의 주장을 해석했다. 이런 해석을 살펴보자.
- 예언자들은 시대 정신에 영감을 받아 말했다, 즉 예언은 시대 정신의 발현이라고 주장했다.
- 예언자가 하늘의 소명을 받았다는 주장을 문학적 장식으로 보았다.
- 예언자들이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사색 또는 직관으로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전달하고자 계시받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 예언자의 주장은 그들이 내면의 삶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한 결과로 자기 느낌을 외부에서 온 관념으로 잘못 해석했다고 한다.
- 예언은 위대한 인물이나 영웅한테서 볼 수 있는 대로, 인간의 심성 안에 잠재된 힘이 특수하게 밖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예언자들을 외국의 앞잡이 또는 선동 전문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이와 반대로 예언자들을 애국자로 보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몸을 바친 자들이라는 견해도 있다.
- 그러나 예언은 참으로 단순한 것이다. 신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이다.

14. 사건과 경험 (예언자가 경험하는 영감이란?)
- 자기가 하느님한테서 영감을 받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며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 받았다는 확신이 예언자 의식의 근본이다. 다른 사람들은 경험을 확신의 근거로 보는데 예언자만은 유독 경험의 근거를 확신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예언자 메시지의 타당성과 특이성은 그의 경험의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기원에 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의 의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자기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 확신이다. 에제케엘, 이사야, 예레미야 모두 그랬다.
- 예언자는 자신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결심을 말하지 않는다. 부름받은 결정적인 순간을 그대로 서술할 뿐이다. 심지어 예언자가 전한 메시지 내용이 자신의 희망이나 기대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때도 종종 있었다.
- 예언 행위는 통화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메시지 내용을 예언자가 충분히 이해하느냐, 그것이 자기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아느냐, 그리고 그와 하느님 사이의 교합 또는 만남, 즉 메시지가 그에게 전해지는 형식이 예언자의 통화 행위를 결정짓는다.
- 예언자의 생각에, 예언 행위는 하나의 경험 이상이다. 객관적인 사건이다. 이것이 예언의 본질적인 형식이다. 사건은 정한 때 없이 돌발한다. 우연히 간간이 터진다. 그런즉 영감은 모든 시대에 계속되는 과정이 아니라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하느님은 간절히 열망한다고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때로 하느님은 부재하신다. 예언자가 만나는 것은 발언된 말, 표현된 말, 현존자로부터 솟구치는 말, 시간 속의 말, 말씀 속에서 흘러넘치는 정념이다. 지속되는 상황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발생하는 행위(사건)를 인식하는 것이다.
- 예언자가 의식하는 영감은 그의 내부가 아니라 너머에서 발생하는 신성한 행위를, 인간의 심성이 아니라 시야에 발생하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그것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대면한다.
- 예언자의 영감 받음은 그냥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탄원하고 반발하기도 한다.
- 하느님은 당신의 본질을 드러내어 계시하지 않는다. 당신의 정념만을, 당신의 의지만을 밝혀주신다.
- 전환(결단)과 지향 : 대체로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그분의 의도와 계획은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고요와 초연의 상태로부터 이탈이 일어나 하느님이 숨어계시던 곳에서 계시 행위로 옮겨지는 전환이 발생한다. 이 변화가, 영속하고 영원할 것만 같은 상태 또는 상황에서 언제나 시간 속에서 특이하게 발생하는 만남의 순간으로 옮겨가는 전이를 초래한다. 영원이 순간에 들어간다. 이게 전환이다. 전환은 사건의 태동이고 지향은 그것의 실현이다.
- 성경이 보여주는 인류의 전 역사는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역사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을 추구한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발견하셨다. 성경은 인간에게 접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기록이다.
- 향인간성과 향신성 : 예언자가 경험하는 영감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향하여 돌아서시는 향인간성이라고 하겠다. 하느님한테서 먼저 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향신성 행위로 이루어진다.
- 예언자의 의식의 관점에서 본 영감의 두드러진 특징은 632~633쪽에 요약되었다.

15. 세계 도처의 예언자들
- 이스라엘의 예언과 유사하다고 보이는 현상들을 설명한다.
- 비교 종교학은 인류 경험의 공통점을 보여주지만, 특수성은 밝히지 않는다. 본질적인 차이를 보려면 다른 종교들의 특수성을 드러내야 한다.
- 헤셸은 낡은 견해들을 시작으로 마나(외부에서 인간과 자연의 생명에 침투하는 신비한 힘, 오렌다, 마니투, 와칸다)와 타부(접근 금지), 점술, 예언과 점, 황홀경과 점쟁이들, , 소크라테스의 수호신, 함무라비 법전, 에집트의 예언자들, 인도와 중국의 계시와 예언, 마리의 예언자들을 설명하고 성경의 예언자의 독특성을 밝힌다.
- 독특성 1. 성경의 예언자는 스스로 예언자임을 주장한다. 초월자의 결단과 지향(14)이 그에게 임한 사건(14)을 스스로 의식한다. 조로아스터는 분명히 영감을 받은 자였다. 발람도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불꽃이었다. 세상에는 어디든 영감을 받은 자가 있었고 이웃에게 영감을 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천지의 창조주가 자신을 보냈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언자밖에 없었다.
- 독특성 2.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신의 세계로부터 오는 안내와 도움을 찾고 환상적인 체험과 초자연적 능력을 동경하며 꿈과 환상 속에서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비를 보려고 갈망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그런 환상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부르는 소명에 항거하였다. 묵시적 환상을 보는 자들과는 반대로,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은 하늘의 영광보다 땅의 혼란을 본다. 그들이 일반 사람과 다른 점은 인간의 상황을 신의 비상사태로 감지한 것이었다. 성경의 예언은 꿈, , 추리, 주문과는 다른 유일하게 독특한 현상이다.

16. 예언자, 사제 그리고 왕
- 유사 이래 백성은 왕을 신으로 여겼다.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파르티아, 일본, 로마에서 왕은 신 또는 신의 아들로 신격화되었다. 심지어 18세기까지 유럽에서도 왕은 법을 초월하여, 법이 제한하는 범위를 벗어난 자였다.
-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왕의 신격화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에게 신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공포와 재난을 초래할 따름이었다. 사회 질서의 핵은 왕도 아니고 사제도 아니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이 핵심이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계약을 어긴 왕과 사제를 비난했다. 왕의 죄, 거짓 예언자와 사제들의 죄악이 재난을 불러온다고 선포했다.

17. 결론
- 하느님의 정념은 사랑과 노여움, 슬픔과 기쁨, 자비와 분노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표정들의 공통분모, 즉 정념의 궁극적 의미는 하느님의 돌보심과 관심이다. 인가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 사람들을 건져보려고 애쓰는 예언자의 활동의 뿌리가 된다. 그런즉 예언 신학의 궁극적 범주는 간섭, 돌봄, 관심이다.
- 예언자들이 이해하려 한 것은 하느님의 본질과 신비가 아니라 그분이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의 신비다. 예언자는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을 숙고하지 않는다. 그분을 생각하는 예언자의 사유 속에는 언제나 이 세계가 들어있다. 그의 메시지는 신의 존재를 밝혀내거나 신의 존재에 관계되는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언자가 하느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의 정념, 이스라엘과 인류와 맺으시는 그분의 관계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절대 존재로가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과 연관지어서 말한다. 그의 말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인간과 하느님의 상호작용에 대한 해석이다.
- 인간이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아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은 인간을 아는 하느님의 지식 안에서 초월된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기본이 되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에게 보여지고 알려진다는 것이다. 성경의 사람에게는 너 자신을 알라보다 하느님을 알라(대상 28:9)’가 지상 명령이다. 하느님 이해 없이 자기 이해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