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운전자가 폭주 기관차를 몰며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때는 우선 그를 기관차에서 끌어 내려야 한다.”
본 회퍼는 미친 운전자 히틀러를 암살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탁월한 신학자가 ‘미친 운전자를 기관차에서 끌어 내려야 한다.’는 말을 암살로 실행할 줄 몰랐다. 어떤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한 셈이다. 과연 죽여도 되는 사람이 있을까, 죽여도 되는 대상을 사람이 결정해도 될까?
라스꼴리니코프는 비범한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범인(凡人)에게 폭력과 살인을 저질러도 된다고 논문에 썼다. 이는 히틀러가 주장한 아리안 우월주의를 생각나게 한다. 우월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이 있으며, 우월한 민족이 열등한 민족을 제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라스꼴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도 죄책을 느끼지 못한 것도 같은 마음이다. 전당포 노파에 대한 마음은 놔두고라도, 라스꼴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에게 시달림을 당하며 사는 착한 리자베따를 죽인 죄책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우월감은 고치기 어렵다. 히틀러의 마음을 어떻게 바꿀까? 검사로 대표되는 기득권 권력층의 마음을 바꾸는 방법이 있을까? 그들보다 더 큰 힘으로 눌러 뭉개버리면 힘을 더 길러 복수하려고 하거나, 상대의 우월감에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 그들이 가진 우월감이 교만과 사랑 없음에서 나오는 죄악임을 고백하게 만들 방법이 있을까? 더구나 히틀러가 유대인을 죽일 때 가만히 지켜본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와 다르다. 너희가 죽는 건 안타깝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한 태도도 죄라고 고백하게 만들 수 있을까?
『죄와 벌』이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와 그에 따른 죄책감을 말하는 줄 알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한 죄와 벌은 범죄 행위와 죄책감이 아니다. 죄악의 근원에 가까운 우월감 즉 교만을 말한다. 교만은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에서 나온다. 이는 판단 기준을 자신에게 두어야 가능하다. 교만은 잘난 척을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교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기준이 있다. 사회에서 하찮은 대접을 받는 사람도 잘하는 게 있다. 그것만으로 판단하면 누구나(비록 사람들이 하찮게 여김 받는 사람이라도) 우월감을 가질 수 있다. 라스꼴리니코프는 노파를 죽여도 되는 존재라고 보았다. 노파 역시 라스꼴리니코프를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파는 돈을 쥐는 방식으로, 라스꼴리니코프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내주는 방식으로 우월함을 드러냈다.
『죄와 벌』에는 다양한 사람이 나온다. 귀족과 평민, 부자와 빈자, 부모와 자녀,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귀족의 허세와 이기적인 마음이 평민의 무절제와 충동적인 마음과 대조된다. 부자의 정돈된 모습과 욕심이 빈자의 무질서한 모습과 방탕에 대조된다. 부모가 자녀를 윤택하게 기르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녀의 안쓰러운 모습이 대조된다. 생활비를 술로 탕진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아껴 모은 돈을 생각 없이 써버리는 남성이, 아빠와 오빠가 써버린 생활비를 위해 희생하는 여성이 대조된다. 이웃과 가족을 힘들게 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우월감이다. 이기적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우월감을 가진 사람이 갈등을 일으킨다.
『죄와 벌』에서 귀족은 평민보다, 부자는 빈자보다, 남성은 여성보다, 어른은 아이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부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돈으로 여성을 사고 괴롭힌다. 귀족 루쥔은 결혼마저 자신을 높이는 도구로 이용한다. 아빠 마르멜라도프는 딸 소냐를 창녀가 되게 만든다.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이 죄를 지었으며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죄를 더할 뿐, 용서와 회개와 화해에 다가가지 못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한 이웃, 여성, 아이가 죄의 결과를 감당하며 죄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소냐는 몸을 팔아서 가족을 돌본다. 두냐와 엄마는 생활비를 아껴 오빠에게 보낸다. 리자베따의 죽음은 라스꼴리니코프의 마음을 흔든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깨달은 것도 라스꼴리니코프가 소냐에게 한 고백을 들은 뒤였다. 사랑과 연민에는 희생과 헌신이 따른다. 사랑과 헌신은 우월감과 교만이 만들어낸 상처를 치료한다.
1994년 르완다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종족 갈등으로 100만 명이 학살당했다. 1992년 유고 코소보 지역에서 세르비아가 코소보 지역 주민을 학살했다. 이슬람이 기독교와, 이슬람 수니파가 시아파와 서로를 죽인다. 중국, 인도, 터키, 미얀마, 브라질, 아프리카 곳곳에서 종족이나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를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의 논리는 모두 똑같다. “우리가 옳다. 너희가 잘못했다.” 때론 타협의 여지마저 없앴다. “너희 존재 자체가 잘못이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교묘하게 얼굴을 바꿔 등장할 뿐이다.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비교하고 평가하며 사람을 내려다본다. 술자리에서 국민을 개돼지라고 표현한 교육부 관리, 아이를 두고 싹수가 노랗다고 말하는 교장과 교사의 마음에는 우월감이 자리한다. 아이에게서 아빠를 빼앗고 아이를 조부모에게 맡긴 엄마가 뒤늦게 아이를 데려가서는 이렇게 말한다.
“장애인이 아니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엄마가 백 번, 천 번을 말해도 안 듣잖아. 다음부터 안 한다고 하면 또 하고, 그게 몇 번째야? 다음부터 하지 마! 다음에 또 한다? 그러면 넌 집에서 쫓아낼 거야. 진짜야. 이젠 안 봐줄 거야. 그런 줄 알아. 알았어? 대답!”
이 또한 우월감이다. 자신이 옳다는 마음, 상대가 자기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마음이 죄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줄 모르는 이 엄마의 마음에는 우월감이 자리한다. 우월감은 차이를 만든다. 구별은 차별의 전제조건이다. 조선 시대가 신분제 사회였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과거시험 응시 자격이나 재산 규모를 따지지 않아도 된다. 옷차림만 봐도 차별이 충분히 드러난다. 다름은 쉽게 틀림으로 변질된다.
교만과 우월감에는 벌이 따른다. 감옥이나 벌금이 아니다. 교만과 우월감은 평화를 깨뜨린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분노하게 만든다. 자신 또한 화 난 상태로 살아가게 한다. 라스꼴리니코프가 자백하고 소냐와 결혼한 뒤에 평화를 얻었다. 두 사람을 살해하고도 당시로선 가벼운 벌을 받았다. 교만과 우월감을 드러냈다면 훨씬 큰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한때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아빠, 좋은 교사, 좋은 시민으로 사는 걸 잘남의 증거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힐수록 분노했다. 분노하며 비난했고, 비난하며 우쭐했다. 사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독서를 대접하는 시대에 사는 건 혜택이다. 아이들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 건 내 과거와 성향을 사용하신 하나님 은혜 덕분이다. 토론을 이끄는 능력도 무조건 당신이 옳다고 생각한 아버지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사람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배웠고, 아이들 글을 보면서 겉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고, 토론하면서 다른 의견이 귀하며 다양성이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노파를 죽이거나 이웃을 해하지 않는다 해도 우월감에 사로잡혀 산다면 라스꼴리니코프는 시베리아로 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운이 좋았다. 하나님 은혜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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