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도 돌아보아 (2012년 8월 좋은교사 책 소개글 중 일부)

나이트, 엘리 위젤, 예담

학교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걸 보면 유치 찬란하기 그지없습니다. 대략 순서는 이렇습니다. 길동이가 동길이를 똥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동길이는 길똥이라고 맞받아칩니다. 길동이는 똥길이 주제에 까불지 말라 하고, 동길이 역시 길똥이 주제에 무슨 말이 그리 많느냐고 합니다. 이때 동길이가 길동이 머리카락을 슬쩍 치는 도발을 감행합니다. 이를 폭력으로 인식한 길동이는 왜 치느냐며 동길이 어깨를 밉니다. 이때부터는 밀리면 진다는 생각으로 상대방보다 강하게 맞받아칩니다.

5분만 지나면 이 싸움은 철천지원수끼리의 싸움으로 변해서 도구가 동원되기도 하고 각종 미사여구(?)가 작렬합니다. 구경하던 애들까지 엉겨서 집단 패싸움 양상을 띠기도 합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괜히 두 사람 사이에 앉은 경민이는 책상도 뒤집히고 가방도 사라지고 공책이 찢어집니다. 행여나 두 사람에게 반항이라도 했다가 공동의 적으로 찍히면 집단 따돌림까지 당합니다. 애꿎은 경민이는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경민이는 한때 동길이와 친했습니다. 함께 운동하고 게임도 같이 했으며 어려울 때 도와주는 절친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싸움 때문에 이유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다툼의 흐름을 타고 길동이와 친해져서 안전해지기도 하지만 동길이와 친했던 과거가 들통나거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다시 고통 길에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서 경민이 자리에 앉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고통 당한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돈이 많아서’, ‘수전노라서’,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서’, ‘그저 유대인이라서고통을 당했습니다.

나이트

지은이 엘리 위젤은 15살 때 가족과 함께 강제수용소에 잡혀갔고 가족을 잃었습니다. 아유슈비츠를 비롯한 포로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이야기가 다 그렇듯이 이 책은 무겁고 슬프고 암울합니다. 실상을 모르고 유대인 학살 이야기를 소식으로 들은 사람에게 나이트는 밤에 악몽을 꾸게 할 겁니다. 저는 고통이나 고난을 감싸안고 끙끙대며 고민하는 사람이라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무겁습니다. 책의 서문과 뒷표지에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내 인생이 일곱 겹으로 봉해진 하나의 긴 밤으로 되어버린 그날 밤, 수용소에서 맞은 첫날 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연기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몸뚱이가 고요한 하늘 아래 연기로 화해버린 어린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내 믿음을 영원히 불살라버린 그 불꽃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내 영혼을 죽이고 내 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만큼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결코 잊지 않으리라.”

위젤은 수용소에서 아버지가 곤봉에 맞아 죽어갈 때 곁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엘리 위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럽게 굴어 나치 친위대의 분노를 산 아버지에게 속으로 화를 내기까지 했답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엘리는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마음 먹습니다.

수용소에서 한 소년이 교수형을 당합니다. 너무 가벼운 아이라 밧줄에 목이 매여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죽어가야 했습니다. 엘리 위젤은 그걸 지켜봐야 했지요.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고 누가 물자 위젤은 속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굴 용서하고,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거기 달려 있었다고 감상적으로 쓸 마음조차 들지 않습니다. 나이트는 불편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속을 뒤집습니다. 그래서 읽어봐야 합니다. 책 줄거리와 제 생각을 쓰는 것도 불편합니다.

 

나는 고발한다. 누구를?

2차대전 패전국 독일과 일본은 나쁜 나라였습니다. 그럼 연합군은 좋은 나라였을까요?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아닙니다. 프랑스는 박애, 평화, 자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12시간 만에 위그노 3만 명을 죽인 건 약과입니다. 20세기에도 여전히 아프리카의 자유를 짓밟았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빛나는 미국은 지금도 온 세상에 억울한 사람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분노가 치밉니다. 그들이 싫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억울하게 여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국가를 세웁니다. ‘내가 억울하게 당했으니, 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면 팔레스타인의 억울함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논리입니다. 에밀 졸라가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며 나는 고발한다를 다시 써야 할 지경입니다. 물론, 유대인 입김이 강한 미국은 입을 다물 것이고 각나라들은 저마다의 논리로 자기 입장을 표명하겠죠.

같은 감정을 한국에 대해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동남아에서 꿈을 안고 온 노동자를 어찌나 괴롭혔는지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모조리 고발하고 싶습니다. 이들에 비해 내가 받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별것 아니기 때문에 괴리감까지 느낍니다. 나는 부유하게 살면서 피상적으로 생각의 사치를 누리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멀리 볼 것 없이 내 안에 있는 죄가 가증스럽습니다.

역사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감상에 빠져 교수대에 하나님이 달려계셨어!’할 수도 없습니다. 억울한 죽음, 인간이라 생각할 수조차 없는 행동을 한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작은 죄악 하나조차 고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함…… 이 모두가 더해져서 저를 짓누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들도 돌아보라 하셨는데 너무나 큰 짐을 지려다 보니 작은 짐조차 지기 어렵습니다. 이런 책은 읽지 말아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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