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나를 위해서라도 (2011년 5월 좋은교사 책 소개글)

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뜨인돌
용서, 치유를 위한 위대한 선택,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양철북

참고 :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난 작가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습니다.
         그 중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책입니다.

일본에서 지진이 났습니다. 마음이 어떠신지요? 대부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여러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이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모금 운동을 하고 인터넷에 응원 글을 올립니다. 파견된 구조대도 다른 나라 구조대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우리처럼 온 나라가 나서서 도와주는 나라가 없습니다. ‘, 우리나라가 이정도 마음을 갖고 있구나!’하는 감격이 솟습니다. 물론 고소하다고 하는 분도,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목사님들도 계십니다. 진주만 공습의 대가라는 사람도 있고 속이 시원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 심판과 대가를 말하는 이유는 과거 때문입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과거 역사에 쿨하게 반응하는 미국도 진주만을 잊지 않습니다. 여기엔 용서라는 거대한 복병이 기다립니다. 내가 아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일에 대해 용서해야 하나?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할 수 있나?

해바라기는 나치가 세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유대인 이야기입니다. 지은이 시몬 비젠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나치에 의해 89명의 일가친척이 학살당하고 겨우 살아남습니다. 렘베르크의 야노프스카 집단수용소에 갇혀있던 어느 날 독일 병사의 요청으로 한 병실에 들어갑니다. 부상당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자기 고백을 들어줄 유대인을 찾은 병사를 만납니다.

병사는 러시아 도시인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위장 폭탄에 독일군 30명이 죽자 유대인 300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 죽였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을 죽였다며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아이를 안고 뛰어내리는 아버지를 향해 총을 쏘았는데 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제 눈앞엔 그들이 보여요. 그 아이하고 부모가 보여요

하며 죄를 자백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시몬 비젠탈은 손을 놓고 나와 버렸습니다. ‘용서는 피해 당사자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가 정말 용서를 구한 것이라면 들어주어야 하지 않았나?’는 생각에 고민합니다. 수용소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용서에 대해 토론합니다. 수용소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유대인들이 용서를 토론합니다. 수용소에서 벗어난 뒤에 시몬 비젠탈은 철학자, 종교 지도자, 이름난 석학……에게 편지를 보내 묻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했습니까?”

아브라함 헤셀, 신시아 오지크, 자크 마리탱, 허버트 마르쿠제, 프리모 레비 등이 답신을 보냈고 한국판에는 달라이 라마, 데스먼드 투투, 해리 우(인권 운동가)를 비롯해 홍세화, 윤미향(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총장), 김태헌(5. 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사무총장)씨의 답신도 들어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처음 답장을 보낸 32명 중에 용서해야 했다는 대답이 6명뿐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응답자 대부분은 용서하지 않은 채 뿌리치고 나온 게 당연하다고 답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며 철학자들 대부분이 잘못을 고백하는 독일 병사를 용서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신학자들조차 용서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고백한 그는 용서받을 자격이 있나요?

일본은 죄를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독립기념관에 있는 고문실을 보고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안중근, 윤봉길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친일파에 대해 분노하며 이토 히로부미는 죽는 게 마땅하다고 외칩니다. 독도는 어떡하지요? 일본이 만주철도부설권을 받고 팔아버린 간도는 어쩝니까?

 

용서, 치유를 위한 위대한 선택

시몬 비젠탈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난 이후 미국전쟁범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1100명 이상의 나치 범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습니다. 용서보다는 죄의 대가를 치르는 일을 했습니다. 용서, 치유를 위한 위대한 선택을 지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세운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손자로 대가를 치르는 일이 아니라 용서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단순한 삶, 공동체, 비폭력을 실천하는 국제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 아놀드는 복수가 아닌 용서를 말합니다. 복수는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허탈함과 분노만 안겨줄 뿐입니다. 책에는 끔찍한 배신과 학대, 테러에 이해할 수 없는 용서로 대응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와 상관없이 하나님 때문에 용서한 사람도 있고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용서할 힘을 얻은 분도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오른쪽 뺨을 맞고 나서 왼뺨도 돌려대는 일을 말합니다. 심지어 용서할 뿐만 아니라 회복시켜주는 일까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에 나오는 용서의 용사들을 보면서 저는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이런 일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대단한 용기, 고귀한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서하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날마다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면서 뻔뻔하게 다른 아이 핑계대는 우리 반 아이를 어떻게 용서합니까?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도 징계는 불가피합니다. 교사인 나 자신은 전혀 아이에게 불만이 없으며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징계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상처받기 쉬우며 그만큼 용서하기 더 힘듭니다. 부부 사이에서, 학대하는 부모를,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치유를 위해서라도 용서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죄의 사악성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용서의 조건은 이해배려’, ‘용서하는 자의 좋은 성품이 아니라 겸손을 꼽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답니다. 그러고 보면 용서할 수 없다고 외치는 순간의 자신은 항상 옳고 정당합니다. 나는 의로우며 하나님도 내 편을 드실 거라 생각하죠. 결국, 용서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위대한 선택인가 봅니다.

 

용서, 사마리아를 넘는 필수조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전도하자는 말로 이해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먼 곳까지 가서라도 복음을 전하자고 말합니다. ‘땅 끝까지, 끝 날까지 증인이 되자!’ 그래서 이프카니스탄에도 가고 요르단과 시리아에도 갑니다. 말씀을 자세히 봅시다. 땅끝이 목표이지만 단번에 땅끝까지 가라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 땅 끝에 이르려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미워하며 경멸한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바댜서는 딱 한 장으로 쓰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난당할 때 구경하며 이스라엘을 괴롭힌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오바댜는 가시 같은 이웃에 대해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시 같은 이웃이 바로 사마리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끔찍하게도 싫어한 사마리아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을 용서하고 품지 않으면 땅끝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한국의 사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을 용서하지 않고 우리가 땅끝까지 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일본이 지진으로 힘들어할 때 기꺼이 구호품을 보냅니다. 유명인들이 큰 돈을 선뜻 내놓으며 언론의 칭찬을 누립니다. 독도는 정부 간의 문제이지만 어려움 당한 이웃을 돕는 일은 사람 사이의 일이라며 아량을 베풉니다. 왜 이렇게 행동할까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하면 받는 사람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허세와 우월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해야 할 일은 받는 사람의 자립심을 일깨울 수 있는 작은 뭔가를 가르쳐주는 일이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일본을 돕는 건 아니겠지요. 용서까지 나갈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게 주는 걸 즐기는 건 아니겠지요.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돕는 일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내게 피해를 준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하신 것처럼 이웃에게 그대로 행하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운지요! 하필 왜 일본일까요?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 가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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