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많이 힘들었다. 많이 참았다.
희망 학년을 쓰지도 못하고 6학년 받아 고생했으니 올해는 원하는 학년을 할 수도 있었는데
양보하는 고약한 병 때문에 올해도 희망 학년을 쓰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이 없던 6학년인데, 의외로 보상 같다.
아이들이 착하고 순진하다.
잔소리 많이 해야 하고, 한 말 또 하고 또 해야 하지만 똑같은 말 되풀이하는 건 초등학교 교사의 숙명 아닌가!
아이들과 마음이 맞아 장난치며 지냈다.
 
“얘들아, 난 37000살이야. 거의 산신령급이지!”
 
애들이 맞장구를 쳐준다.
1학년 애들에게 ‘우리 선생님 37000살이라고’ 외쳐댄다.
지난주 저녁에 학교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다.
학교 텃밭에서 상추 따서 씻었다. 우리가 심은 감자 캐고 피망도 따왔다.
삼겹살 굽고, 삼겹살 기름에 김치 구워먹더니 감자까지 구워 먹는다.
맛있다고 아주 호들갑이다. 
 
실컷 먹고 쉴 때 애들 몇이 체육관에서 귀신 놀이를 했다. 한참 놀다 뛰어나오더니
 
“선생님, 체육관에 귀신 있어요. 피아노에서 소리가 나요.”
 
“아~ 피아노에 사는 애! 걘 3800살이야. 아직 어린 녀석이라 시끄러워!”
 
“선생님, 체육관 창문 위에 얼굴이 4개 보였어요.”
 
“걔들은 더 어려. 350살밖에 안 돼.”
 
“아~ 맞다. 선생님은 37000살이잖아!”

 

삼겹살 파티하고 며칠 뒤, 급식에 블루베리가 나왔다. 블루베리에 하얀 벌레가 있다고 한 녀석이 호들갑이다. 
1mm밖에 안 되는 작은 날벌레가 블루베리 위에 붙었다. 그 블루베리 집어서 먹어버렸다.
 
“어~~ 선생님~~~” 하는데
 
“야, 난 37000살이야. 안 먹은 게 없어. 풀뿌리부터 온갖 동물을 잡아먹었어. 이 정도쯤이야~”
오늘 아침에 학교에 갔더니 애들이 몰려나오면서
“선생님, 교실에 마구간 냄새가 나요!” 한다.
병아리가 물통을 넘어뜨리고 똥을 싸서 나는 냄새다.
냄새 때문에 교실에서 치워야겠다고 했더니 점심시간에 병아리 한 마리씩 안고 논다.
사진> 지난 금요일에 했던 전교생 물총놀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행사다.
 

 

6월 2일 : 교실에 부화기를 설치하고 달걀 20개를 넣었다.
6월 9일 : 5학년 아이 할머니가 달걀 15개를 주셨다.
(부화기 고장 났다며 병아리 다섯 마리를 달라 하셨다.)
부화기 두 대에 달걀이 꽉 찼다.
6월 22일 : 두 마리가 부화했다.
우리 반 태*이가 발견해서 병아리 이름이 ‘태돌이’다.
두 번째 부화한 병아리는 죽었다. 묻어주었다.
(한 아이가 죽은 병아리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 학교에 두고 왔다.)
1학년 애들이 병아리 구경하러 와서 내게 조른다.
“선생님, 병아리 통에 넣어줘요!”
“너를 저기 병아리 통에 넣어달라는 거야? 너무 큰데~”
“아이, 작게 만들어서 넣어줘요!”
“지금 축소 기계를 만드는 중이야. 좀 기다려야 해.”
“제발요. 저기 넣어주세요.~~~”

6월 23일 : 한 마리가 더 부화했다.
알에 금이 가는 걸 재*이가 발견해서 이름이 제민이다.
오후에 한 마리가 또 부화했다.
*민이가 가장 먼저 봤기 때문에 민석이다.
1학년 애들이 또 와서 본다. 너무 귀엽다고~
6월 24일 : 달걀 하나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본 아이가 자기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다.
점심 시간에 1학년 애들이 병아리 달라고 한다.
가장 귀엽게 삐약 소리내면 주겠다고 했더니
한 줄로 서서 삐약삐약 소리를 낸다.
하여튼 어린 건 다 이쁘다.
요즘 교실 온도가 30도 넘는다.
에어컨 틀려고 하면 애들이 말린다.
병아리 춥다고.
땀 흘리면서도 에어컨 없이 버티는 6학년 아이들도 참 귀엽다.
체육 끝나고 땀 흘리면서 버티는 아이들 위해 에어컨 틀었다. 잠깐~
나는 오후 내내 에어컨 없이 버텼다.
“태돌이, 제민이, 민석이 잘 커라~!”

------------------ 아빠와 재결합

6 여학생

날씨 : 나는 기쁜데 하늘은 진짜 아빠와 내가 재결합을 해서 감동받았는지 눈물을 흘린 날

615일에 진짜 아빠가 온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614일에 말이다. 그걸 듣고 눈이 동그래져서는 사실인지 아닌지도 구분을 못 했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내 진짜 Dad가 돌아가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아빠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00, 오늘 00 진짜 아빠 만날 거니까, 학원 끝나고 엄마 집 앞으로 와!”

라고 하셨다. 그리고…… 학교에서 몇 시간 동안 수업한 후 …… 학원 갈 시간이 되었다. 난 아침에 엄마가 한 말을 깊이 새겨들었기 때문에 잊어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짜 아빠를 볼 생각에 한층 더 들떠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진짜 아빠를 직접 내 눈으로 본다는 게 신기했으니까.

고되고 고된 시간이 흘러서 영어가 끝나고 수학을 갔다. 수학을 끝낸 다음에 엄마 집으로 가야 해서 기사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까매서 그런지 잊어버렸다. 그렇게 수학하는 도중에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엄마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수학 학원을 빠져나와서 전화를 받았는데 엄마가 금강 프라자 앞에서 아빠와 함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난 급한 나머지 전화를 끊고 수학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급하게 나왔다. 오다 깜빡한 우산을 들고 얼른 뛰어갔다.

드디어! 아빠와 1년만에 재회를 했다!!!

내가 3살 때 엄마와 헤어졌던 아빠가 드디어, 나를 만나러 왔다. 아빠는 무척 기뻐 보였다. 가방도 들어주었다. 그렇게 가까운 식당으로 갔다. 아빠가 식당에서 30000원짜리 삼겹살을 사주셨다. 그 비싸고도 비싼 삼겹살을 말이다. 우린 먹다가 이모를 불렀다. 이모가 왔다. 결국 이모와 함께 먹게 되었다. 다 먹고 난 다음 이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운동 겸 산책을 했다. 산책 마치고 돌아왔는데 엄마와 아빠가 나와 계셨다. 우린 서둘러서 커피숍에 들렀다. 음료도 사 먹고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있다 보니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빠와 나는 헤어졌고 이모와 집까지 택시 타고 갔다. 9시 넘어서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택시비가 6000원이 나왔다. 집에 들어갔는데 어두캄캄했다. 우리 가족은 9시가 되면 자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아빠를 처음 봐서 그런지 부끄럽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일요일에 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매주 아빠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날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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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 학교에 왔을 때 아이가 눈에 띄었다.
손을 턱에 받치고 얼굴을 꽃 모양으로 만들어서 내 턱 아래에 얼굴을 들이밀며 나를 바라봤다.
유치원이나 하는 행동을 5학년 아이가 하기에 사랑이 필요한 아이구나!’ 생각했다.
올해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왜 안 하느냐 물었더니 씩 웃기만 한다.

아이는 가끔 복도에서 소리를 질렀다.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몰라 그러는 거라 달랬다.
4월까진 벌컥 소리 질렀는데 이젠 거의 안 한다.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산다.
아빠는 3살 이후에 못 봐서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엄마는 아이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따로 산다.
할머니가 손에 잡히는 대로(효자손 같은 물건) 아이를 때렸다는데 올해는 안 때린다고 했다.
왜 안 때리실까? 계속 때리면 선생님이 신고하려고 했는데~” 했더니
제가 이제 철이 들어서 안 때린대요.” 라고 대답했다.
뭔가 안정된 모양이다.

(겸손이 아니라) 난 진짜 한 게 없다.
특별하게 다가가지 않았고, 잘해주지도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같이 산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다가가고, 적당히 빠지고~
마음에 힘주고 아이에게 다가갈 때도 있었는데 그것보단 자연스러운 지금 모습이 더 마음에 든다.

아이는 이제 애정을 갈구하는 행동을 안 하고
감정 조절이 안 되어 소리 지르는 일도 멈추었고
할머니 화나게 만들지도 않게 되었다.
엄마와 처음으로 여행도 갔다 왔고 (무려 제주도)
이젠 죽은 줄로 알았던 아빠를 만났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서현숙 선생님 강의를 들었다.
진지한 내 스타일의 단점을 알기에
활발하고 재미난 선생님 모습을 부러워했는데~
역시! 이야기에 쏙 빠져들어 귀를 쫑긋!

소년원에서 가르친 아이들 이야기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1.

2000, 신규 2년차 교사가 도움을 요청했다.
엄마는 안 계시고 아빠는 교도소, 형은 소년원에 간 아이!
선생님은 시장통에 있는 건물 옥탑방에 사는 아이 담임이 되었다.
아이는 아빠와 알고 지내던 건달 같은 사람과 같이 살았다.
아이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담임에게 편지를 보내며 협박도 했다.
어느 날 가출한 아이를 오락실에서 겨우 찾았는데 
집에 보내면 또 가출할 것 같아서
하룻밤 재워 줄 사람 찾다가 아무도 없어서 나한테 전화했다.
집에서 아이 목욕시키고 재워주었다.
이 이야기 완전히 잊었는데 3년 전에 선생님이 알려줘서 기억났다.
욕조가 까맣게 되었던 장면이 기억났다.

이야기 2.
몇 년 뒤에 신문에 내 이야기가 났다.
재소자가 편지를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착한 마음으로 도와주었다.
그림에 있는 교도관 확인 도장을 믿고 돈도 좀 보내줬다.
돈 달라고 사기 치는 거라면 교도관이 제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1년 넘게 편지를 백 통 이상 주고받았는데 어느 순간 소식이 끊겼다.
출소해서 잘 사는지, 미안해서 연락이 없는지~

이야기 3.
최근 2년 동안 소년원 학생들이 쓴 편지를 심사했다.
학생들이 쓴 편지 읽으며 여러 번 울었다.
서현숙 선생님 강의 들으며 그 학생들이 생각났다.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참 많았다.
아이들 사연을 써먹는다는 느낌이 싫어서감춰두었다.
책뜰안애에서 얼굴 맞대고 앉으면 이야기하려나?

오늘 국어 시간에 인물이 추구하는 가치를 공부하다가
너희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이냐?” 물었다.
행복, 기쁨, 재미, 그리고 돈.
소년원에 간 아이들도 돈 많이 벌고, 재미나게 살고 싶었겠지.

그냥 이런 생각이 났다.

 

 아이는 2층 교실, 나는 1층 교실에서 지냈다.
오전에 한두 번 아이를 봤다. 그때마다 글 달라 하면 부담스러워할 테니 씩 웃기만 했다.
가끔 한 번씩 아이에게 졸랐다.

"할아버지 3탄~"   "할아버지 3탄은 언제 줘?"

5학년 초여름,
<할아버지의 눈>을 쓰고 6개월쯤 뒤, <할아버지가 아프니까>를 쓸 즈음에 아이가 글을 써왔다.

------------------------------------ 냉이꽃과 할아버지
***(5학년 1학기)

  1월에 비닐하우스에서 고추 씨앗을 심었다. 고추 씨앗은 황금색에다 반짝반짝했다. 그런 씨앗은 처음 봤는데 아빠가 농약이 묻어 있어서 그렇다고 하셨다. 모종판마다 칸은 각각 200칸이다. 고추 씨앗을 칸 하나하나마다 넣었다. 넣을 때마다 내 손가락에 농약이 묻어 반짝반짝거렸다. 흙을 덮고 물을 주었는데 내가 심은 거 물 주고 싶어서 내가 주었다. 씨앗 몇 개가 물에 밀려서 실종됐다. 아빠가 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이해가 된다. 고추 씨앗이 비싸서 한 알에 110원 정도 한다. 비싸다. 몇 시간 동안 3-4판 정도 넣었는데 씨앗이 떠내려가서 걱정되었다.

(몇 달 뒤에 일어난 일인데 아이가 시간 표시를 하지 않았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셨다. 다른 때보다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비닐하우스에 있는 고추 모종이 바람에 날아가서 죽었나?’ 라고 생각했다. 아빠한테 물어보니 할아버지 병원 갔다 왔는데 고추 모종 3000개가 썩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난 상상도 못 했다. 몇 개만 썩은 줄 알았는데 다~ ~ 죽었다니……

  나랑 아빠랑 방학 때부터 지금 3월 달까지 모종판에 2000개 들어있는 15만 원짜리 고추 씨앗을 조심스레 한 알씩 한 알씩 3000개 정도 넘은 것도, 조심스레 물을 살살 뿌려주던 것도, 큰 모종판으로 살살 뽑아 옮겨주던 것도, 세 달 고생한 것을 헛고생으로 만들어버렸다. 가장 안타깝고 마음 아팠던 것은 다른 칸과 색이 다른 노란색 모종판에 심은, 희망이 없는 고추 모종이다. 뿌리가 없거나 병이 든 모종을 따로 심었는데 그런 것들도 다 죽어버렸다. 애초에 모든 모종판이 희망이 없던 것들은 아닌가, 아예 죽어버릴 운명이 아닌가, 그래도…… 죽어도…… 한 판이라도 살아주지……

(여기까지 써왔다. 아이와 고추 모종 심은 이야기를 한 뒤에
 "글을 이렇게 끝내면 아쉽다." 했는데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 더 하다가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냉이 이야기를 했다.
아이 담임일 때 "글을 잘 쓰려면 평소에 잘 보지 않던 걸 살펴봐라. 콘크리트 사이에 핀 풀 같은 걸 봐야 해!" 했었다.
그때 해준 말을 기억했는지 얼마 지난 뒤에 냉이 이야기를 써왔다.

  이틀 뒤 노인회관에 편하게 올라가라고 있는 경사 있는 곳에서 냉이를 보았다
. 주변에 딱딱한 아스팔트는 냉이가 올라와서 금이 가 있었고 냉이가 올라온 자리에는 아스팔트도 부서져 있고 파여 있었다. 그 냉이는 꽃이 세 개는 피어서, 먹지도 못하는 늙은 냉이였다. 그래도 꿋꿋하게 잘 서 있다. 꽃 하나는 비실비실거렸다. 먹지도 못할 늙은 냉이, 꼭 우리 할아버지 같았다. 할아버지는 요즘 앉아있는 것도 조금 힘들어하고 잠도 많이 주무신다. 우리 할아버지는 냉이에 핀 세 개의 꽃 같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늙은 냉이라도 냉이꽃처럼 고추 모종처럼 쓰러지지 않는 그런 따뜻한 할아버지다.

("냉이 보면서 할아버지 생각이 났구나! 잘 썼어. 그런데 이젠 궁금해진다. <냉이꽃과 할아버지>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다." 했더니 다시 글을 써왔다.)

  냉이꽃과 할아버지 이후, 그곳에 피어있던 냉이가 그 자리에 없었다. 하늘나라에 간 모양이다. 하지만 냉이꽃이 남긴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냉이꽃이 도로를 뚫고 나온 자국이다. 그 자국에 이름 모를 풀때기가 그 자리 그대로 났다. 냉이꽃은 자신의 힘으로 힘들게 올라왔는데 풀때기는 힘을 하나도 안 쓰고 편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냉이꽃은 풀때기가 하나도 밉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이 구멍을 뚫어준 덕에 포기할 또 하나의 생명을 구해서가 아닐까? 냉이꽃이 젊을 때, 꽃이 피지 않았을 때 미리 먹어줄 걸 그랬나 보다. 그냥 쓸모없이 버려지는 것보다 나았을까?

그 냉이꽃은 말했다. 괜찮다고, 그 구멍에 여러 생명이 자라면 좋겠다고……

  아이가 처음에 쓴 세 문단은 연결이 잘 된다. 애지중지 가꾸던 고추가 다 죽은 걸 보고 '한 판이라도 살아주지' 한 마음을 나도 여러 번 느꼈다. 냉이로 이어진 이야기는 자연스럽진 않다. 그래도 냉이를 보며 할아버지 생각해서 좋았다. <냉이꽃과 할아버지 이후> 글은 참 좋았다. 그걸 살펴본 눈이 귀하고, 쓸모없이 버려지는 것보다 나았는지 질문하는 마음도 참 귀하다.

아이에게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시를 썼을 것이다.
냉이를 살펴보고, 냉이가 진 자리에 피어난 풀을 살펴본 눈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 이름 모를 꽃
*** (5학년 가을)

밭에서나 길에서나
아무데나 피어 있는 꽃
오늘도 꽃은 살기 위해 이 풀, 저 풀 밀어낸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결국엔 사람들이 잡초라고 뽑아버린다.

꽃들이 밭에 피해 주지 않기를 바랐다.
밭에 피어봤자 사람들도, 너도 힘들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데나 피어도 사람들에게 쓰레기 취급이나 받을 걸.

그런데 네가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나오니,
정말 고마웠다.
외롭고 쓸쓸한데 혼자 잘 버텨주어서
사랑받지 못했는데도 사랑을 나누며 살아줘서
네가 이런 곳에 나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네가 잘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는 5학년을 마쳐가던 12월 10일에 <할머니의 호박죽>이란 제목으로 글을 써왔다.
글을 읽다가 울었다.
<책뜰안애>에 찾아온 분들에게 세 번인가 읽어드렸다.
함께 울었다.
학교에서 이금이 작가님과의  만남을 가진 뒤에 작가님께 읽어드렸다.
그 뒤로 작가님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할머니의 호박죽>을 전국대회에 보냈는데 장려상(상금 10만원)을 받았다.
상을 취소해달라고 했다.
이듬해에 다른 대회에 내보냈는데 상을 받지 못했다.

내가 아이를 알기 때문에,
나는 아이가 쓴 글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만 보물 같은 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개를 할까 말까 고민한다.
독서 연수를 하면 단골로 나오는 질문이 있다.
"애가 한 권만 주구장창 봐요. 말려야 하나요?"
책벌레 딸이 <글>로 대답합니다.
<아빠 냄새 책 냄새>라는 펀딩을 위해 쓴 글이에요.
-------------------------------- 반복 읽기
--- 책벌레 따님
내가 많은 책을 읽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나는 하나의 책을 여러 번 읽는 편이지, 다양한 책을 읽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반복하여 보면서도 새로운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지금은 예전보다 나아진 편인데도 여전히 그렇다. 어떤 사람은 새 책을 집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과연 내가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빠져들어도 괜찮은 책인지 의심부터 하고 보기도 한다. 뭐가 그리 의심되던지!
한 번은 아빠가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 책을 가져오셨다. 서진이와 아빠가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왠지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이 없다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빠의 강력한 추천에도 책 표지를 노려보기만 했다.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은 왠지 내 눈에 자주 띄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일 년을 버텼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첫 장을 넘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책에 익숙해졌고, 때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책을 읽어치웠고, 급기야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되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는 그냥 읽었지만 나중에는 특이한 방법으로 읽었다. 홀수 쪽만 읽기, 짝수 쪽만 읽기, 뒤에서부터 읽기(장, 페이지, 문단 단위로)....... 그렇게 읽어도 괜찮으냐고? 당연히 괜찮다! 많이 읽은 책이라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도 들고 재미있다. 특히 뒤에서부터 읽는 것은 색다른 느낌이라서 좋다. 살면서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을 느껴볼 기회는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책은 한 번만 읽어도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으면 분명 달라지는 게 있다. 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것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기행을 하더라도 그렇다.
내가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8번쯤 읽었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주제로 한 독서캠프에 참가했다. 캠프에서 조를 정하고 조원들과 인사를 하면서 내가 그 책을 8번 읽었다고 말했다. 사실 정확히 8번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좋아하는 책을 계속 보는 게 내게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늘 그렇게 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그런 나를 놀라워하셨다. 어떻게 한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고 말이다. 모두가 내 말을 감명 깊게 들어준 덕분에 나는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8번이나 읽은 놀라운 아이’가 되었다. 캠프 마지막 시간에 서로 책에 롤링페이퍼를 써주었는데, 내 것에는 온통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8번이나 읽다니 놀랍다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직 그 책을 잘 가지고 있다.
또 내가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서른 번쯤 읽었을 때, 우리는 다시 독서캠프를 했다. 그때 자만심이라는 주제로 독서 감상문을 썼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잘 쓴 것 같았다. 사실 자만심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고 나도 놀랐다.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에는 루스가 손으로 벌을 잡는 장면이 나온다. 첫 번째 독서캠프를 했을 때 우리 스스로 퀴즈를 만들었었다. 나는 루스가 잔디밭에서 벌을 몇 마리나 잡았는지를 묻는 질문을 만들었다. 답은 다섯 마리였다. 그리고 두 번째 독서캠프에서 나는 벌을 잡으며 으스대는 루스를 보고 자만심이라는 주제를 떠올렸다.
책을 8번 읽었을 때는 내용 이해만 하고 숫자나 세고 있었다면, 30번 읽었을 때에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책 속에서 전혀 관계없는 두 사건에서 자만심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책을 한 번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러 번 읽어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물론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도 있다. 아빠가 하나의 주제를 찾아서 글을 쓰는 게 좋다는 것을 알려 주셔서 자만심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30번이나 읽지 않았다면, 절대로 자만심이라는 주제를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을 50번 넘게 읽었다. 이제 나는 책 하면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책벌레들의 책 없는 방학』은 내가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재미있는 책도 아니고, 가장 좋아하는 책도 아니다. 더 깊은 감동 받았던 책과 더 마음에 드는 말이 많이 나오는 책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내 독서 인생에서 이 책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게 내가 가장 처음의 도전이자 처음으로 마음을 연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그만 읽을 수 없다.
책을 한 번만 읽는 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똑같은 책을 다시 읽는 게 아무 쓸모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억울할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더 기대가 된다. 나는 역시 새 책보다 이미 읽은 책이 좋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책만 보는 사람이 답답할 수도 있다. 다른 책 좀 보라고 말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럴 때 새 책을 권해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읽은 책을 계속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그냥 담아두기를 바란다. 그런다고 그만 읽을 거였으면 진작 읽기를 멈췄을 테니 말이다.

저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글을 쓰도록 꼬드깁니다.
30여년 동안 아이 글 6만 편 이상 읽었고, 1만 편 넘게 답글을 써줬습니다.
마음에 남은 글이 참 많습니다. 그 중 셋을 꼽는다면

1. 강원도 산골 분교에서 만난 남자아이
 - 저를 만나 5년만에 처음으로 일기를 쓴다고 했던 남학생.
 - <선생님의 숨바꼭질> 3. 아픈 아이 마음 찾기 - 희망 꽃이 된 산골 소년
   에서 소개했습니다.
 - 전국대회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이전해에 형이 전국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아이가 글을 훨씬 잘 썼어요.)

2.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남자아이
 - <선생님의 숨바꼭질> 3. 아픈 아이 마음 찾기 - 절망에 빠진 아이에게 희망 꽃이 되려면
  에서 소개했습니다.
 - 1번과 2번 아이 보고 싶어서 중고등학교에 찾아가기도 했어요.

3. 마지막 아이는 지난 학교에서 만난 여자아이입니다.
 - 4학년 담임으로 만나, 10월 쯤에 아래 글을 써왔어요.
 - 5학년이 되어서는 방과후 글쓰기 교실에서 같이 글을 썼고, 6학년 때도 글쓰기 교실에 나왔어요.
 - 전국대회 금상, 은상, 동상을 골고루 다 받았던 아이입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글을 두 번으로 나눠 소개합니다.
먼저 4학년 11월에 쓴 글입니다.

------------------------------------------------------- 할아버지의 눈

*** (4학년 여)

  요즘 난 몹시 바쁘다. 엄마는 일하고 아빠는 내일 베트남에서 오는 외삼촌 데리러 인천공항 간다. 내가 동생들이랑 할아버지까지 다 책임져야 한다. 할아버지는 눈이 잘 안 보이신다. 며칠 전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그 뒤로 잘 안 보이신다. 안 보이니까 길을 익히려 자꾸자꾸 나가신다. 나가는 위치도 모르신다. 할아버지가 나가고 스스로 못 들어오신다. 우사 가셨다가 내가 불러서 겨우 들어오셨다.

  할아버지가 하도 안 되니까 내가 창고에 쓰러져 있는 지팡이 하나 들고서 할아버지한테 드렸다. 할아버지는 이제야 좀 덜 불편한 듯 지팡이 짚으면서 겨우 집 안으로 들어오신다. 지팡이 위치랑 신발 위치까지 알아두려고 노력하신다.

  할아버지는 길 외우러 또 한 번 나가신다. 난 별 일 없겠지 하면서 집에 있는데 1분이 넘어도 할아버지가 문 앞에 서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신발이 짝짝이다. 한 짝은 맞는데 한 짝은 작고도 작은 분홍색 내 슬리퍼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이상한 듯 출발하지 않으셨다. 불안한 마음에 할아버지를 따라다녔지만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며 집 못 찾으면 소리 지른다 하시며 우사로 가셨다. 불안하긴 했지만 집으로 들어왔다. 약 1분 뒤에 밖에서 “다인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집 반대편, 쓰레기 태우는 곳에서 “여기가 문이냐?” 하며 계셨다. 나는 아니라고 설명하고 문까지 안내했다.


글에 나오듯 엄마가 베트남에서 오셨다.
아이 집에 가정방문을 갔다. 아이에 대해 묻지 않고 아이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물었다.
"멀리 시골에 와서 살기 어려웠지요?" 하니 엄마가 단독 주택 앞 계단을 가리키며 울었다.
"선생님, 저기 계단에 아직도 제 눈물이 남아있어요. 저기 앉아서 많이 울었어요."
어린 나이에 타국에 와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참 즐겁게 지낼 나이의 엄마가 50을 앞둔 아이 담임교사 앞에서 울 정도로 말이다.
엄마는 시골에서 세 아이 기르며, 양계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시어머니가 엄마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동네가 다 알 정도다.
이듬해(아이가 5학년 때) 봄에 집에 뱀이 나왔다.
엄마가 빗자루 들고 뱀을 때려잡았다.
아이가 이 이야기를 써서 전국대회 초등부 금상을 받았다.

----------------------------------------- 우리 집, 진짜 없는 게 없다.

***(5학년 초)
  오늘 왜 이 일기를 쓰냐 하면 일단 시작부터 말해야겠다. 처음에 마당에서 물총 싸움한 걸 쓰려고 했다. 아주 과격한 물총 싸움을. 솔직히 물총 싸움이 아니라 그냥 물총 통에 물 받아서 통째로 뿌리는 싸움이었다. 그러다가 막내가 춥다면서 먼저 들어가고, 나랑 송*이랑 같이 놀다가 들어가려는데, 우리 집 계단 구석에 커~다란 뱀이 뙇! 있어서 집 청소하는 엄마를 크게 부르고 뱀이 있다고 소리를 꽥꽥 질렀다.

"엄마! 뱀!!! 뱀!!! 뱀! 뱀! 뱀! 뱀!!!!“

하고 소리를 엄청 질렀다. 그랬더니 엄마가 빗자루를 들고, "어디!?" 라고 했다. 내가 더 잘 잡는 아빠를 안 부른 이유가 아빠는 일하고 있어서 집에 아직 안 들어왔다. 그래서 엄마를 그렇게 불렀다. 엄마가 빗자루를 들고 와서 뱀 머리를 막 때렸다. 막 머리에 피가 막 나는데도 꿈틀거리고…… 하, 진짜 더럽게 안 죽네. 내가 계속

"엄마! 더, 더 때려!! 더! 더! 더 때려!!“

막 이랬다. 하, 진짜 머리에 피 많이 났는데. 진짜 더럽게 안 죽네. 그러다가 뱀이 엄마한테 공격 자세를 취했다. 엄마가 그냥 무시하고 머리 엄청 때렸는데 뱀은 안 죽고, 꿈틀거리기만 하고……  
  집에 들어갔다. 엄마가 하는 말이
"뱀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이 너 때문에 놀랐어!“ 그랬더니 동생 송*이가
"맞아. 언니, 언니보다 뱀이 더 놀랐겠다.“
아 놔 진짜. “송*아~ 언니가 구석에 있던 뱀 발견 안 했으면 너 물렸을지도 몰라~”
  하하하! 엄마가 아빠 오면, 깜짝 놀랄 거라고 했다. 엄마가 뱀만 잡고, 안 치워놔서 아빠가 깜짝 놀랄 만도 하다. 그리고 예상은 맞았다. 아빠가 한 두 시간 뒤에 들어와서 엄마가 뱀을 잡았다고 하니 아빠가 놀라서
  "어디! 저거 뭐야!“
라고 했다. 엄마가 아직 더 죽여야 한다고, 아직 살아 있다고 해서 아빠가 쇠막대기를 들고 와서 머리를 때렸다. 아빠가 쇠막대기로 뱀을 들어서 버리러 가는데, 엄청 맞았는데 뱀은 아직 안 죽었나 보다. 뱀 버리러 가다가 때리는 소리가 났다. 진짜 안 죽네. 하긴, 두시간 동안 꿈틀거린 녀석이…… 아빠가 독사는 아니고 밀뱀이라고 했다. 엄청 큰 녀석이~ 아무튼 이렇게 뱀 사건이 지나갔다. 아빠한테 어디다 버렸냐고 물어봤는데 도랑에 흘려보냈다고 한다.

  진짜 내가 설마설마 했던 일이 알아났다. 우리 집 근처에도 뱀이 많다. 막내가 자전거 타다가 꽃뱀을 보고. 어렸을 땐 물뱀이 도랑에서 짝짓기하는 모습도 봤다. 그땐 뱀이 별로 안 무서웠는데, 오늘 뱀의 생명력이 아주…… 어렸을 땐 귀엽고 신기했는데 지금은~ 그래서 난, 오늘부터 뱀을 무서워하기로 했다!

  정말로 우리 집은 없는 게 없다. 처음에는 벌레가 나오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도 나오고, 심지어 독벌레 같은 거도 나왔다. 개구리도 나오고, 길고양이도 우리 집에 많이 오고, 심지어 고양이가 우리 집 축사에 새끼를 낳았다. 그 새끼 고양이가 우리 집 창고에 똥 싸고, 돌아다니고…… 아, 이제 하다하다 뱀까지 나왔다. 뱀은 또 얼마나 큰지. 진짜……

그런데 정말로 나보다 뱀이 더 놀랐을 것 같다.

글쓰기 싫어하는 아이 꼬드기느라 꽤 시간이 들었다.
쓰기 싫다고 버티는 아이를 꼬드기고 꼬드겨서 4학년 헤어지기 전(11월)에  글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때부터 가끔 아이가 글을 '툭' 던져주었다.

뱀 잡는 이야기는 묘사가 탁월한 일기다.
<우리 집 진짜 없는 게 없다>는 제목도 아이가 정했다.
이 글을 만나고 얼마 뒤에 아이가 시를 써왔다.

다리에서 90도 오른쪽으로 꺾어 100미터쯤 가면 왼쪽에 아이 집이다.
그 다리에 현수막이 매달렸다.

--------------------------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 (5학년 초여름)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일본에 시집 간 고모가 오셨다.
하시던 일마저 놔두고.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아빠랑 엄마가 더욱 친절해지셨다.
어차피 소용 없다는 걸 아니까.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집 앞에 있는 다리에 장례식 광고가 떡 하니 붙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니까.

나도 무언가 달라진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만 변화가 없다.
“내가 다 나으면……”

‘의사가 못 고친다고 했는데……’
‘아빠가 80살 넘으면 못 낫는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못 낫는다고 생각하기 싫은데……’

아이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까지 써왔기에
"아쉽다. 아쉬워. 뭐 더 없냐?"
했더니 몇 달 뒤에 두 줄을 더 썼고
"아~ 이거 정말~ 와~ 뭔지 알지? 난 계속 기다린다."
하고 또 몇 달을 기다렸다.

마지막 다섯 줄은 내 기다림과 맞바꾼 글이다.
아이와 복도에서 마주치면 
"할아버지 2탄!!"
했고 글을 받은 뒤에는 두 손을 모으고 세뱃돈 받듯이
"할아버지 3탄 주세요!"
했다. <할아버지가 아프니까> 받고 얼마 뒤에 3탄을 써웠다.

3탄 읽고 울었다.
3탄은 곧~~~
2022년 4월 29일
 
목요일 아침마다 아이들(6학년 우리 반)이 글을 쓴다.
어제 공부하면서 가족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글쓰기 주제를 <우리 가족>으로 했다.
엄마가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아빠 곁에 남은 아이가 쓴 글이다.
(참고로 난 아이들 글에 내 손을 대지 않는다.)
---------------- 술
★★★
우리 아빠는 인격체가 두 개다.
아침에는 정상적이지만
저녁에 마법의 주스를 먹고 오면 도깨비가 된다.
얼굴이 시뻘개져선 나를 꾸짖는다.
이상해진 점이 있다.
아침에는 멸치같이 날씬하고 재빠른데
저녁이 되면 퉁퉁이처럼 배가 볼록해져선 비틀거리며 다닌다.
내가 학습지를 다 하고 노는데
그땐 귀신같이 공부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 마법의 주스는 나쁜 것 같다.
‘그 주스를 왜 먹는 거지?’
아빤 참 바보 같다.
세상에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죽어서도 못 먹을 만큼 맛있는 게 너무 많은데
왜 꼭 마법의 주스만 먹는 거지?
우리 아빠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
엄마는 아이를 두고 고향 베트남으로 가버렸다.
술이 이별의 원인인지, 술이 이별의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보고 싶을 텐데 아이가 아직 엄마 이야기는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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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산다.
지난해 학교 옮겼을 때 가장 눈에 띈 아이다. 사랑해달라고 온몸으로 외쳐대는 아이였다.
아이가 왜 이상하게 행동하는지 짐작만 했는데 오늘 글을 받고 알았다.
 
---------------- 우리 엄마
***
제일 사악한 우리 엄마를 소개한다.
우리 엄마는 능력을 가졌다. 천사가 됐다가 악마가 된다. 도깨비도 됐다가 못된 악령도 된다. 신신당부할 때 잘 들으면 천사, 안 들으면 악마가 된다. 우리 엄마를 도깨비가 되게 하려면 말을 안 들으면 된다. 엄마가 싫어하는 걸 해야 한다.
엄마는 도깨비, 악령이 되면 몽둥이로 때리거나 싸다구, 머리채 잡고 끌어당기거나, 나에게 고아들이 있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린다고 협박을 하기도 한다. 예전엔 진짜 경찰서에 간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가 있었는데. 그땐 너무 어렸을 때라서 안 잡혀갔나 보다. 그때 경찰서에 가면서 울었다. 아빠는 옆에서 엄마 보고
"애가 잘못했다고 하잖아! 좀 봐줘~"
라고 했는데 엄마는 한 마디도 안 했다. 그때 갔던 경찰서가 금강프라자 쪽 큰 경찰서였다. 난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그때의 내 모습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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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이 이혼의 원인인 것 같다.
아이 엄마는 주기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와서 아이를 닦달한다.
그게 아이를 가르치는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아이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겠다.
아빠가 술 먹으면 개가 된다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 아이,
동생 욕을 잔뜩 쓴 아이,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힘들다고 쓴 모범생도 있다.
나를 떠나기 전에 글 쓰면서 속이 시원하게 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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