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2013년 즈음부터 곤혹스런 면역 이상을 앓아 왔다. 고통스러운 그 기간 동안 많은 이들과의 관계가 질병때문에, 질병에서 오는 내 무능력 때문에 끊어졌고, 그 중 몇몇은 먼저 내쪽에서 정리했다. 고통의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고통스러워하는 이 "곁에" 그저 함께 "서" 있으며, 함께 아파해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에게는 날카로운 상처로 남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고통스러워 하는 이 앞에서조차 무의식적으로 능력 있어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떤 이의 경험, 또는 많은 이들의 정제된 경험이라 하더라도 한 개별적인 고통 앞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럴 때 많은 이들이 하게 되는 흔한 실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유사한 해결책을 고통에 처한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이건 이렇게 하면 돼. 이럴 때일 수록 힘을 내야지 임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같은. 그러나 그렇게 내 해결과 너의 해결, 내 서사와 너의 서사가 같을 것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고 속에서 고통에 처한 이는 또다시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 단순한 일반화가, 조언이, 또 과장된 마음표현이 받는 이에게는 또다른 폭력, 고통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 권일한(형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지극히 작은 조각은 그 힘든 시간 동안 내 곁에. 그저. 서 있어 준, 내 문제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준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과, 진실에 관해서 강박에 가까운 무엇이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면 때문에 나는 내 삶에서 가장 힘겨운 기간 동안 그에게 언제나 전화할 수 있었고, 좀 나아진 때에는 찾아가 밥까지 청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이 두가지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또 다른 책. 곁에.서.를 낸다고 했을 때, 그것이 화재사고로 아파했던 아이들의 이야기임을 듣고서 망설임 없이 책을 주문했다. 그는 그저 고통스러워 하는 이의 곁에. 서.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생각하는 척, 사랑하는 척 페이지를 낭비할 사람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글로 아픈 이들에게 또다른 폭력-헛된 조언이나 부푼 거짓 마음-을 전할 이가 아니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오랫동안 아파하는 이의 곁에서 함께 서 있었던 그의 이야기를, 깊게 듣고 싶어졌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분명 그는 그들 곁에, 그저 서 있었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그가 ‘아팠다’고 썼다면 나는 그가 정말 아팠구나 믿을 수 있다. 그의 마음은 글 속에서 그렇게 투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아이들의, 사람들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그저 서 있어야 했던, 열리고 나서도 그저 자신의 마음을 문지르며 얼얼히 서 있어야 했던 그의 무기력한 마음을, 그러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용기를 나는 읽고 느끼고 배우고자 한다. 오랫동안 고통으로 아파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저 어떤 다른 고통스러운 이들의 곁에. 그저 서. 있는 그 마음을, 시선을 배우지 못했다. 책으로 그런 마음의 길을 함께 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가까운 일상에서 저자 권일한(형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나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아프고 힘겨운 시간을 보낸 이에게, 또는 아프고 힘겨운 이와 함께 있어야 하는 이에게 이 책을 감히 추천드린다. 채 읽기도 전에, 분명 우리 깊은 마음과 함께 해 줄 책이므로
2. 출판사 대표님이 쓴 글
2012년 강원도 삼척 도계읍에 있는 산골 작은 교회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났습니다.
탄광촌 지역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교회에서 무료로 공부방을 열었다가 가스 누출로 인한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이 사고로 목사님 부인이 죽고 9명의 아이가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중 5명은 인근에 소재한 소달초등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전교생이 총 14명인 학교에서 다섯 명이 사고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학교는 초상집 분위기로 돌변했습니다.
인근의 주민들은 자식을 소달초등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소달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교사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예수님의 마음'으로 소달초등학교에 가서 사고를 당한 아이들이 모두 무사히 졸업할 때까지 그들의 '곁에' '서서' 친구가 되어 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예수님의 사랑'을 갖고 갔는데, 막상 그곳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소달초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화재 사고 외에도, 여러 종류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홀부모와 살고 있었고, 흔히 탄광촌을 가리켜 '막장 인생'이라고 부르듯, 경제적으로 어려워 그곳까지 흘러들어온 집이 많았습니다.
이런 아이들과 하루 종일 친구처럼, 동네 형 혹은 오빠처럼, 부모처럼 붙어 살면서, 그들에게 '곁'을 내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까지 적잖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상처 입은 아이들이 다른 상처 입은 아이를 위로하는 법을 함께 배웠고,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습니다.
권일한 선생님과 이 책을 쓰기로 처음 약속한 것은 10년 전인 2014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때, 권 선생님과 소달초등학교에서 만났던 아이들 이야기를 쓰되, 그러나 그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이야기를 풀어보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1. 별명이 ‘책벌레’시고 이 별명을 좋아하시는데요. 일반적인 책읽기와 성경 읽기는 어떤 면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작년에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이라는 책이 기독출판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에는 마법사나 마녀, 마법의 세계가 등장하니까 기독교인은 읽지 말아야 하지 않나” 하는 분위기도 있거든요. 문학서나 인문교양서 읽기와 성경 읽기가 서로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은 읽어봤습니다. 새롭고 날카로운 분석이 좋았고, 책을 덕목(기본 덕목 4권, 신학적 덕목 3권, 천국의 덕목 5권)이라는 기준으로 소개해서 새로웠습니다. 홍종락 님이 번역하셨죠.
홍종락 번역가가 올해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을 출간했습니다. 문학책 24권을 소개했습니다.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에도 나니아 연대기를 소개하지요. 마법사와 마녀, 마법의 세계가 나오니까 나니아 연대기를 읽지 말아야 할까요?
『리어왕』은 질투, 배반, 욕망을 다룹니다. 리어왕과 세 딸 모두 비참하게 죽습니다. 오셀로는 자살하지요. 마법의 세계가 등장하는 걸 기독교인이 읽지 말아야 한다면 『리어왕』과 『오셀로』는 읽지 말아야 합니다. 『햄릿』에는 귀신이 나오니까 안 됩니다. 『죄와 벌』은 살인이 나오고, 루이스가 쓴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는 그리스 신화로 썼으니 안 됩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두목 악마가 졸개 악마에게 쓴 편지니 역시 읽으면 안 됩니다. 『햄릿』을 제외한 책 모두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에 소개되었습니다. 아, 『악마의 눈이 보여주는 것』이라는 제목 자체가 ‘삐~’ 검열 대상이네요. 악마가 나오잖아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제가 무얼 말씀드리려는지 아시죠? 필립 얀시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오염되지 않은 마지막 낱말을 ‘은혜’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이름조차 감탄사로 쓰이다 못해 욕으로 쓰일 지경입니다. 어떤 낱말이 쓰였느냐로 판정하면 글쎄요, 읽을 만한 책을 고를 수 있을까요?
물론 나쁜 책이 있습니다. 읽지 말아야 할 책이 있습니다. 그런 책을 특정 낱말이 쓰였는지 여부로 판단하는 건 순진한 생각입니다. 문학서나 인문 교양서는 생각의 폭을 넓게 해줍니다. 저는 문학책을 좋아합니다. 문학책은 인물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어떤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성격과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줍니다.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에 『위대한 개츠비』가 나옵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려고 허덕일 때 미국은 초유의 호황을 누렸습니다. 졸부들이 탄생했죠. 개츠비도 그 중 하나입니다. 몇 년 뒤에 대공황이 찾아올 줄 모르고 흥청망청댔습니다. 1938년에 나온 『분노의 포도』는 졸부의 시대가 끝나고 대공황이 가정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를 모티브로 합니다. 가난한 소작농들이 66번 도로를 타고 가면서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이야기입니다. 분노의 포도가 무르익어 터질 지경이죠.
문학책은 당시 배경을 알아야 제대로 읽습니다. 배경을 모르고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개츠비 같은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읽어도 됩니다. 다만,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읽기죠. 마음에 드는 한 부분만 골라서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건 성경을 읽을 때도 많이 실수하는 오류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한 구절만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동물이 모두 짝이 있다는 내용을 말씀 짝 찾기로 읽는 겁니다. 신천지에서 사용하는 방식이에요.
문학과 성경 모두 배경 이해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쓴 편지를 뵈뵈가 가지고 갑니다. 뵈뵈는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홈 16:2)가 되었다고 합니다. 보호자는 헬라어로 파트로네스입니다. 파트로네스(후원자, 보호자)와 클리엔테스(고객, 피보호자)는 로마의 문화였지요. 이를 이해하면 뵈뵈가 부유한 귀족이었음을 압니다. 로마에서 편지를 들고 교회를 찾아다니기에 적합한 사람이지요.
바울이 드로아에서 강론하다가 유두고가 떨어져 죽습니다. 로마의 주택은 도무스와 인슐라로 나뉩니다. 바울이 강론한 곳은 인슐라입니다. 주상복합주택 같은 곳입니다. 윗다락은 다락으로 2층이어서 유두고는 3층에서 떨어진 겁니다. 『로마인 이야기』나 『마스터즈 어브 로마』 시리즈를 알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배경, 맥락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이를 사람 사이의 관계로 보여줍니다. 관계가 왜 깨질까요? 인간이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겸손과 오래 참으심을 이용합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이 있지요. 오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편견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 모습이지요.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 마음을 더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 성경만 보면 편협하고 꽉 막힌,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말이죠. 그들은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어서 문자만 강요했습니다. 책읽기와 성경 읽기는 돌비에 새겨진 규정을 읽는 게 아닙니다. 둘 다 이야기를 읽고 마음을 읽는 겁니다. 문학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성경은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안산 선수가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자 페미냐는 주장이 일었다. 국가를 대표해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에게 했던 기자의 질문은 눈과 귀를 의심케 할 지경이었다. 단발머리를 했다고 페미냐는 질문을 받는 것도 우습고, 페미를 무슨 테러리스트 취급하는 것도 이상했다. 2021년에 메카시즘을 다시 만나서 황당했다. 안산 선수가 금메달을 따지 못했으면 논란이 오래도록 불타올랐을 것이다. 안산 선수가 세계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따면서 비난이 가라앉았지만, 이듬해(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새로운 연료를 만나 불타올랐다. 페미니즘 광풍은 통계도 일반적인 정서도 깨뜨릴 정도로 강력했다. 대통령을 바꿀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들이 왜 페미냐고 공격하는지, 페미가 어떻게 문젯거리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맨박스 페미니즘』을 읽고 속이 시원해졌다. 이제 이해가 된다.
저자는 50대 남자 교사로 남학생에게 페미니즘을 알려주기 위해 『맨박스 페미니즘』을 썼다. 남자 교사가 짊어져야 할 페미니즘 교육은 여자들에게 “깨어나라” 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에게 “좀 들어라” 하고 외치는 것(10쪽, 서문)이라며. 나보다 선배인 50대 남자 교사가 페미니즘 교육을 어떻게 말할지 궁금했다. 권재원 선생님이 쓴 책을 세 권 읽었는데 모두 참 좋았다. 선생님 글은 균형 잡힌 생각을 하게 도와준다. 그래도 ‘페미니즘이라니?’ 하며 읽었다.
“감탄했다!” 권재원 선생님은 평소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정당한 논리를 내세워 사람들의 편견과 인식을 깨는 글을 자주 썼다. 이 책은 더욱 그랬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 어느 정도 책 내용을 예상한다. 『맨박스 페미니즘』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을 벗어났다. 트럼프 당선을 성 대결로 해석한 내용,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떠오른 이대남, 이대녀, 페미 사냥 등을 해석한 내용이 참으로 놀라웠다. ‘난 왜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저자는 여성이 지금까지 줄곧 희생하며 살았다고 한다. 스스로 삶을 선택할 자유를 누리지 못한 여성들이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걸 남성이 양보하고 심지어 빼앗기는 걸로 받아들인다고 설명한다. 한두 문장으로 쓴 내 요약은 설득력이 없다.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으면 남자다움으로 포장된 상자를 깨뜨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공감하는 내용이 너무 많아 일일이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다. 특히 남성이 분노하기 전에 감정을 배워야 한다는 부분이 크게 다가왔다. 내가 분노를 참으려 해도 안 되었는데 감정을 살피면서 분노를 다스리게 된 경험이 있다. 하나 더, 공산당 선언으로 본론을 시작한 부분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영성 고전 20권을 10쪽 분량으로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10쪽으로 소개하면? 나는 한 권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써야 만족하는데 10쪽이라니! 줄거리와 책의 가치, 논쟁점만 다루어도 30쪽은 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책을 펴고 멈추지 못했다. 신학자이며 독서광인 김기현 목사님 눈으로 읽은 책이라서 누구나 알던 그 책이 아니었다. 새로웠다. 독서광인 저자가 관련 책을 비교, 분석하고 쓴 글이라 읽는 내내 즐거웠다.
1부는 하나님을 찾고(고백록), 나를 찾고(팡세), 죽음을 넘어서(이반 일리치의 죽음), 영적인 삶을 찾아서(영적 발돋움)~ 기도(무명의 수도사의 기도)로 끝난다. 2부는 사람을 찾고(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어머니 하나님을 찾고(침묵),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찾아(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 정체성의 영성(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끝난다. 순서가 참 좋다. 하나님을 찾는 일이 기도로 마무리되고, 사람을 찾는 일은 정체성의 영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렇지!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 읽고 싶은 책이 많아진다. 읽었던 영성 고전을 다시 읽고 싶어지고, 읽지 않았던 고전뿐만 아니라 관련 책들도 죄다 읽고 싶다. 혼자 읽을 책, 모임에서 나누고 싶은 책 목록도 생겼다. 읽어봐야지!
그리고 목사님께서 나를 간서치라고 불러주셨다. 진짜 간서치는 내가 아니라 김기현 목사님이다. 10년 전, 부산 갔을 때 김기현 목사님 집에 갔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 집에 가보자고 조른 건 지금까지 딱 한 번밖에 없다. 책이 엄청 많다는 소문 때문에. 내가 가진 책 분량뿐만 아니라 책을 읽고 깊이도 견줄 수 없었다. 집구경 참 좋았다. 책구경도 참 좋다.
부모는 자녀가 부모님 뜻을 완벽하게 이루어주기를 바란다. 꾸짖고 타이르고, 공부하라고 시킨다. 그러나 아이가 부모님 뜻을 완벽하게 이루어줄 거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현실은 다르니까.
모드 쥘리앵의 아버지는 완벽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찾아(가난한 집 아이) 공부를 시킨다. 아이를 완벽하게 기를 엄마로 만든다. 아이가 어른이 되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를 완벽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르친다.
루소가 자녀를 방치했다면(루소는 자녀 다섯을 고아원에 버렸다.), 모드 쥘리앵은 오직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가 생각한 완벽한 교육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아버지의 기준은 2차 대전 같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 어떤 악조건에서도 견디는 걸 최고의 교육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모드 쥘리앵은 쥐가 사는 지하실에서 혼자 버티기, 난방 없는 곳에서 겨울 견디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씻은 물로 목욕하기,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같은 것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정서적으로 감금당해 사랑하고 슬퍼하고 위로받을 자유까지 억압당하고 산다. 수용소에서 견디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집이 수용소가 돼버린 곳에서 수용소장 같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특히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생각할 점이 많다. 어머니와 딸 모두 아버지의 폭압적인 권위에 희생당한다. 희생자 어머니가 희생자 딸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경쟁자로 생각한다. 모드 쥘리앵은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다가 자책하고, 어머니에게 보호를 바라면서 실망하고~
그런데도 무너지지 않는다. 넓은 저택에 갇혀 아버지, 어머니 외에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견뎠을까? 말과 개, 도스토예프스키와 레미제라블, 피아노와 악기들이 위로와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 모드 쥘리앵은 동물을 사랑하고, 책을 읽으며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갖춘다. 악기를 연주하며 위로받는다.
‘완벽한 아이’는 자녀를 어떤 존재로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부모와 교사에게 추천한다. 정말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