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도망친다. 호랑이가 올라올수록 오누이는 더 위로 도망친다. 동아줄이 내려오지 않으면 오누이는 죽는다.

30년 전 사회책에는 대구 사과를 소개했다. 이후 사과 주산지는 청송을 지나 태백까지 올라왔다. 대구는 더워서 사과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지구온난화로 강원도 영동지방에서도 바나나를 기르기 시작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자생 식물이 사라지기도 한다. 구상나무가 한꺼번에 고사한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나는 지구온난화, 기후 위기에 관심이 많다. 책도 꽤 읽었다. 그러나 기후 위기로 동물들이 생활 터전을 옮겨야 한다는 생각은 못 했다. 펭귄이 죽는다는 소식을 들었고, 북극곰이 굶주린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많은 동물이 온난화를 피해 서식지를 옮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벤야민 폰 브라켈은 피난하는 자연에서 동물들이 도망칠 피난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온이 올라가면 동물은 거처를 옮겨야 한다. 실제로 동물은 서식지를 옮긴다. 나비와 벌과 모기 같은 곤충부터 파충류, 조류, 포유류까지 모두 살아가기 적당한 곳(지금 서식지보다 시원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산호와 다시마, 대구와 고래까지. 고위도(북극과 남극)로 옮기면 살아남겠지만, 서식지를 옮기는 게 어렵다. 인간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도로와 도시, 경작지가 곳곳에서 동물의 이동을 막는다.

침입종, 외래종의 위협은 각 나라에서 주요 뉴스로 다룬다. 저자는 침입종이 지구온난화를 피해 새로운 서식지를 찾는 과정이라고 한다. 침입종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기존 논리에 맞서 새로운 종이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동식물이 대륙을 옮겨 생태계를 교란하는 건 막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무조건 퇴치하는 태도에는 반대한다. 온도가 올라가면 구상나무는 죽기 마련이고, 지구 온도를 낮추지 않는 한 구상나무를 살릴 방법이 없다는 논리다.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높은 산 아래에 살던 동물은 그야말로 나무 위로 도망치는 오누이 신세다. 더위를 피해 산으로 올라갈수록 동물의 종류와 개체수가 많아진다. 다른 동물과 싸워야 한다. 또한 산은 정해진 높이가 있다. 지구가 더 뜨거워지면 산꼭대기에 온갖 동물이 모여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기만 기다릴 것이다. 동아줄이 내려올 리 없으니 남은 건 하나뿐이다. 멸종. 실제로 2020년 호주 산불에서 30억 마리의 동물들이 불에 타거나 질식해서 죽었다. 코알라들은 불길을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동아줄은 내려오지 않았고 코알라들은 모두 불에 타서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피난하는 자연은 학자들이 조사한 내용을 가득 담았다. 수십, 수백 km를 이동한 동식물을 증거로 자연이 피난할 통로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호구역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보호구역이 더워지면 그곳에 살던 동식물도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보호구역이 도시와 도로로 둘러싸였다면 남은 건 멸종뿐이다. 저자와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학자들은 보호구역에 살던 동식물이 북쪽으로 이동하도록 통로(거점)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호주, 에콰도르, 싱가포르 등에서는 정부가 땅을 사들여 피난 통로를 마련한다.

피난하는 자연을 읽으며 지구온난화가 정말 심각하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자연이 피난한다면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자연이 무너지는데 어디에 선단 말인가! 중고등학교에서, 교사 모임에서, 환경에 관심있는 분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추천한다.

 

2014년 11월 좋은교사에 소개한 글입니다.
글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있어 공개합니다.

왕의 재정, 김미진, 규장

벼랑 끝에 서는 용기, 로렌 커닝헴, 예수전도단

<왕의 재정> 강의가 유튜브 조회 합계 천만 건을 넘어섰다. 교회마다 앞다투어 강사로 초청한다.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가 50억 이상 빚을 지고 자살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빚을 다 갚고 다시 부자가 된 사람 이야기라면 듣고 싶어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재정관리에 대해 말한다고 권하는 사람도 있고, 성도가 돈에 눈이 먼 거라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도 강의하러 왔기에 <왕의 재정><벼랑 끝에 서는 용기(이하 벼랑 끝)>를 함께 읽었다.

로렌 커닝햄은 YWAM(국제 예수 전도단)의 설립자이며 열방대학 설립자 겸 총장이다. 김미진은 YWAM 간사였다. 둘은 똑같이 YWAM에서 사역했으며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재정을 채워주신 이야기를 한다. 로렌 커닝햄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필요한 재정을 채워주는 예화를 통해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과정을 알려준다. <왕의 재정>도 비슷한 이야기를 통해 청지기로 믿음의 삶을 사는 원리를 알려준다. 두 저자가 말하는 내용과 간증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기복주의나 물질만능주의를 말하지 않을까 경계하며 읽었다. 그러나 돈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저자의 생각을 성경 말씀으로 뒷받침하려고 애를 쓴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만 강조하지 않고 신구약에서 골고루 인용한다. 감당도 못 하면서 나눠주라고 하지 않으며 잘 관리하고 절제하라고 권한다. <벼랑 끝>에선 기복주의 생각도 못 했고 <왕의 재정>은 저자가 경계하며 썼다고 느꼈다.

책에 나온 증인들은 평범하게 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마련해 준다고 믿으면서 미련하게 벼랑 끝에 선다. 무조건 하나님께서 주신다 믿고 기다리라고도 하지 않는다.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되, 필요할 때 기다리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이 공급하신 일을 증거한다.

 

두 책이 다른 점

<벼랑 끝>은 재정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성도가 생각해야 할 다른 태도를 줄곧 말한다. 달란트 비유가 반드시 재정적인 부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격이 성숙하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하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말한다.(83) 주님은 우리를 먹이는 일보다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바꾸어 가시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지신다(205)고 말한다.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210)고 고백한다.

<왕의 재정>은 맘몬을 경계하라고 말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돈 이야기를 한다. 씨 뿌리는 이야기를 돈으로 해석한다. 달란트 비유도 돈으로 해석한다. 재정이야기를 하는 책이므로 돈 이야기를 하는 게 맞지만 <벼랑 끝>에서 느껴지는 하나님 중심의 삶보다는 이 자꾸 중심으로 치고 올라온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다면 지극히 작은 것, 재물, 남의 것에 충성해야 한다(154)는 말도 하나님보다 재물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느껴진다. 인용한 성경 구절도 모두 돈과 관련짓는다.

물론 성경에 돈과 관련된 구절이 3000개나 된다고 하니 많이 인용할 수도 있다. 저자가 성경을 100번도 넘게 읽었으니 엉뚱하게 인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는 성경을 사랑하고 꾸준히 읽는다. 저자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읽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든 성경으로 해석하려 한다. 중요한 일이건 사소한 일이건 모두 말씀으로 해석하려 한다. 저자는 나보다 성경을 많이 읽었으니 어떤 문제가 생기면 성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 문제가 이다.

<벼랑 끝>은 돈을 흘러가야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AB에게 10만원 주는 것보다는 AC에게 주고, CD에게 주고, DB에게 다시 주는 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고 한다. B가 하나님께서 필요한 돈을 채워주신 경험을 하는 동안 A만이 아니라 CD도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게 복이라 한다. , 돈에 관한 기도가 얼마나 자주 이루어졌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참여했느냐를 귀하게 여긴다.

<왕의 재정>에선 계속 돈만 말한다. 하나님께 맡기면 이자율이 3000%라고 한다. 저자가 성경을 잘 알기에 돈을 경계하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돈이 하나님께서 일하는 통로라고 한다. 엘리야, 베드로, 청지기…… 모두 돈으로 해석한다. <왕의 재정> 부제는 내 삶의 진정한 주인 바꾸기이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진짜 주인으로 바꾸어야 할 영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돈만 말한다. 20년 전에 쓰인 <벼랑 끝>에 지금 인기를 끄는 자기계발’, ‘긍정의 힘을 덧붙인 듯하다.

 

<왕의 재정>은 왜 돈 이야기만 할까?

결혼하고 아이를 갖지 못한 친구가 얼마 전에 아이를 입양했다. 행복해 보였다. 예전에 같은 처지에서 하나님 은혜로 아이를 낳은 다른 사람 간증을 나누었다. 그분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아이가 들어가는 낱말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자녀가 없는 부부 눈에는 아이성아이성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는 내용을 눈여겨 본다.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은 주신다. 성공한다, 잘 된다를 읽는다. 이게 심해지면 조엘 오스틴처럼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긍정의 힘을 가진 좋은 예로 바꾼다. 성경에서 무엇을 읽어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말한다. 김미진은 계속 재정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논리를 비약해서 돈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많이 나눠주고 돈에 매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더구나 책으로 낼 때는 신중해야 한다. 로렌 커닝햄은 돈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전해주었다. <왕의 재정>은 돈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생각을 갖게 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고 싶다면 왕의 재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외친 이야기를 간증해야 한다. 그럼 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선지자는 백성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외쳤으니까.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두 책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누구에게 5달러를 주라는 말씀, 돈이 없는데 집을 사거나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기다리라는 말씀 등을 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화장품을 설화수로 갖다주라는 말씀도 듣는다. 구한다고 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합리적인 내 생각과 다르게 일하는 분이라고 믿기에, 하나님이 하셨다고 받아들였다.

나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을 어렵게 한다. 잠깐 떠오른 생각이나 느낌, 우연히 들은 설교나 성경 말씀, 갑자기 생긴 사건을 하나님 음성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정말 하나님 음성일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묻는다. 두 저자는 하나님 음성을 자주 듣는다. ‘나도 들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하나님 음성을 그렇게나 자주 들을 수 있을까? 하나님 음성일까?’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김미진은 우리 교회에서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 가운데 암 환자가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낫는 환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낫지 않아도 나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어하고 받아들인다. 진지한 뜻으로 말했다면 암 환자가 나았어야 한다. 가볍게 한 말이라면 공적인 장소에서 강의하며 다니지 말아야 한다.

김미진이 로렌 커닝햄 정도만 말했다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는 걸 보면서 내 믿음이 부족하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인데 내가 합리적 판단을 앞세워 믿음을 놓쳤다고 돌이켰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정해진 레일로만 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이 아닌지 돌아봤을 것이다. <벼랑 끝>만 읽었다면, <왕의 재정> 감수의 글 제목이 한국교회의 부흥의 열쇠는 재정에 있다가 아니라 부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썼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네 소유를 다 팔고 나를 따르라하시면 이거 다 팔면 30, 60, 100배 주신다!’ 하며 따를까? 돈으로 하나님 영광을 사려는 짓이 아닐까? 교회에서 지나치게 돈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서 차라리 나처럼 주어진 범위 안에서 신중하게 사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한다. <재정 강의>는 마치 돈이라 쓰고 하나님이라 읽는 것 같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돈을 사랑하면 괜찮다고 바꿔 버렸다. 왕의 재정이 아니라 돈에서 해방된 교회가 읽힌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정 강의>에 대한 내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 편견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의 열쇠는 재정에 있지 않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하나님이 땅을 고치는 일은 하나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겸손하게 기도하며 - 돈이 아니라 - 하나님 얼굴을 구할 때 온다.(대하 7:14)

#책_소개합니다

앞서 근무한 학교에 간 첫해, 2학년을 맡았다.
6학년이나 1학년이 아니라 2학년만 남았다니 의아했다. 2학년은 군대로 말하면 꿀 보직인데.
(자폐 아이보다 여자아이들 관계가 복잡해서 힘든 반이었다.)

자폐 남자아이는 까끌까끌한 느낌을 참지 못했다. 상표를 다 떼어야 했고, 실밥 하나만 있어도 옷을 벗었다.
아이가 옷을 벗으면 여자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루는 아이가 갑자기 바지를 벗었다. 속옷까지 다 벗겨졌다. 얼른 아이를 가로막고 옷을 끌어올렸다.

10명 내외의 아이들이 6년 내내 같은 반을 했다. 아이들은 6년 동안 자폐 아이와 같은 반으로 지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장애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워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잘 달래며 함께 지냈다.
아이들은 다르게 행동하는 아이를 이해하는 마음을 배웠다. 이건 황금을 주고도 배우지 못하는 훌륭한 태도다.

경쟁, 효율성, 경제적 가치를 따지면 00이는 어떻게 될까?
신자유주의는 약하고, 느리고, 불편한 이웃을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장애인, 세월호, 강제로 수용된 아이들…… 예수님이 말한 고아와 과부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도 그냥 사람인데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 말아야 했다.

                           자폐 아이는 사진을 찍으면 늘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도 우리반이고, 친구들 곁에 있다.

『A가 X에게』와 『그냥, 사람』은 이에 맞선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구조에 반대한다.

『A가 X에게』는 연인에게 쓴 편지로 이에 맞선다.


2008년 부커상 수상 후보작이다. 사실처럼 쓰인 독특한 소설이다.
약국을 운영하는 ‘아이다’가 감옥에 갇힌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쓴다. 사비에르는 편지 뒷면에 메모하며 편지를 모아둔다.
정권은 국민을 위협하며 국가를 이끌어간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국민은 세계화의 파도, 자본의 폭력에 희생당하면서 몸부림친다.
도망자를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막아서고, 약국을 찾아온 사람을 살리고, 각자의 사연을 들어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라며. 
감옥에 갇힌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성의 편지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작가의 능력이 정말 뛰어나다.

『그냥, 사람』은 고통당하는 이웃을 그대로 보여준다.
장애인 곁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냥, 사람』은 한겨레 신문에 5년 동안 쓴 칼럼이다.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의 이야기가 많다.
한없이 약한 사람들이 거대 권력, 거대 자본 앞에서 억눌리고 억압당하고 괴로워하며 고통당한 사연이 많다.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그냥 사람이라고 외쳤다.

자폐 아이에게 ‘괜찮아!’ 말한 2학년 아이들은 자폐 친구를 화장실에 데려갔고, 몸을 가려주었다.
걸어갈 때 기다려줬고, 운동회에서 손을 잡고 뛰었다.
난 다달이 5만원씩 장애인야학 후원금을 보낸다. 곁에서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보다 돈 보내는 게 쉽다.

 

책 놀이를 하며 아이들이 책으로 <봄> 글씨를 만들었다.

나를 꽤 힘들게 한 아이들이었는데 이 아이들에게도 봄이 왔다.

『A가 X에게』와 『그냥, 사람』에 나오는 분들에겐 언제 봄이 오려나?

독서 모임에서 예언자들을 읽었습니다. 제가 발제한 내용입니다.

 

Ⅰ 들어가며

1. 저자와 역자 소개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인터넷 서점 저자 소개)
  유대인 학자이며 사상가로서 온 인류를 사랑한 경건한 랍비로서,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의 지도자였고, 소련에 사는 유대인을 돕자고 세계에 호소한 최초의 유대인이었으며, 기독교-유대교의 대화를 재촉한 강력한 에큐메니스트였다. “내 중심된 관심사는 인간의 정황이다라는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190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명한 랍비 가문에서 태어나, 1927-33년 독일의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7년 마르틴 부버로부터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레르 하우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나치의 폴란드 학살이 있기 두 달 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0년 미국 신시내티 히브리 유니온 대학에 초빙받아 5년간 철학과 랍비 문학 강의, 1945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아메리카 유대교신학교에서 신비주의와 유대교 윤리를 가르쳤다. 1965-66년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최초로 해리 에머슨 포스딕 객원강좌를 맡았다. 미네소타, 아이오와, 스탠포드대학교 등에서도 강의했다. 1965년 봄, 알라바마의 셀마에서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민권행진을 하였다.
  주요 번역서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 사람을 찾는 하느님,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누가 사람이냐,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안식이 있다.

. 이현주
  관옥(觀玉)이라고도 부르며, ‘이 아무개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목사이자 동화작가이자 번역가이며, 교회와 대학 등에서 말씀도 나눈다.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드는 글들을 쓰고 있으며,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과 함께 노자 이야기를 펴냈다. 바보 온달

2. 머리말 (10쪽 분량) / 예언자는 사람(언어, 몸짓, 감정 표현 등)이다. 확성기가 아니다.
  머리말 뒤에 <1940~45년의 순교자들에게>라는 글과 시편 44편이 있다. 1940~45년 사이에 유대인 600만 명이 죽었다. 랍비인 헤셸은 하나님께서 왜 홀로코스트를 허락하셨는지, 유대인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 고민했을 것이다. 예언자들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친구와 이웃을 잃은 유대인 랍비의 고뇌가 담겼다.

3. 우리 시대의 예언자
  1990~2000년대는 예언과 예언자가 다수 출현했다. 1992년 다미 선교회가 재림 날짜를 예언한 이후 다수의 예언자(미국 중심)가 대한민국이 위험하다고 예언했다. 성적인 범죄 때문에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국가적 예언부터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말하는 개인적 예언까지 넘쳐났다. 그들이 유명해지고 부자가 될 동안 가나안 신자가 늘어났고 교회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신자들은 자신을 위한 예언을 듣기 위해 기도원으로, 집회로 찾아갔고 그 결과 우리나라 기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로 바뀌고 말았다. 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외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소리 없는 울음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대에 예언자가 있다면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애통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Ⅱ 『예언자들』 내용

1: 예언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 악에 민감한 사람
 세상의 아름다움은 보지 않고 분노에 가득 차서 온 세상이 더러운 시궁창이라도 된 듯 고함을 치르는 사람이다. 별것 아닌 일에 고함치는 사람, 남들이 괜찮게 생각하는 것에 흥분하는 사람, 우리가 에피소드로 여기는 것을 세상의 끝장으로 보는 사람이다.
 - 예언자는 철저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그의 영혼에 무거운 짐을 지워주셨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인간의 무모한 탐욕에 망연자실해 있다. 인간의 아픔은 실로 끔찍하다. 그 어떤 인간의 말로도 넘치는 두려움을 전달 못 한다. 예언이란 하느님이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라고 빌려주신 말이며 착취당한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불경스런 부자들에게 내리신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는 접촉점이다. 하느님은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당신의 분노를 드러내신다. (36) 예언자의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의 신음을 지나치지 않는다.

. 인간의 역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
- 혼자 떨어져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듣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다. 말뿐만 아니라 삶으로 더욱 예언한다.

. 다른 것을 보는 사람
- 사람들이 위대한 도시를 선망하며 칭송하는 반면, 예언자는 건물과 도시의 장엄함 대신 폭력과 억압, 도덕적인 문란을 보았다.
- 사람들이 죄에 잠시 분노하다가 안일과 진정과 위안으로 돌아가는 반면, 예언자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처럼 밤이고 낮이고 끝없이 넌더리를 치면서 살아간다.
- 졸지도 자지도 않는 하나님처럼 예언자는 언제나 진지하게 괴로워한다.

. 우상을 부서뜨리는 사람
- 사람들이 성전과 사제직과 분향을 종교로 받아들이는 반면, 예언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조차 우상 숭배로 보았다. 거룩한 성전과 제사를 공격하며 예언자들은 자신이 먼저 부서지는 사람이다.

. 현실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는 사람
- 개인의 목숨을 파멸시키는 자를 온 세계를 파괴하는 자로 대하며, 한 사람을 구원하는 자를 온 세계를 구원하는 자로 대우한다. 별것 아닌 이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 소수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모두에게 묻는 사람
- 백성의 도덕적 상태를 계속 상기시켜 준다. 세상이 편히 누워 잠자는 동안 예언자는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하늘에서 불어오는 동풍을 본다. 재앙과 역병, 고통, 파멸을 외치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 외로움 가운데 고뇌하는 사람
- 예언자들은 외톨이가 되어 고통을 겪었다. 쓰고 불쾌한 일을 감당해야 했다. 동시대인들에게 미친 자라고 낙인찍혔다. 그래도 예언자들은 외쳐야 했다. 듣든지 안 듣든지.

. 분석자, 전달자, 증인
- 야훼의 회의에 참석해서 하느님과 함께 의논하며 하느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증인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을 말하는 자다. 하나님의 증인이다.

2~8: 사례로 살펴본 예언자

. 배경 설명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90)
  선지자는 일어날 일을 선포하지만 점치는 사람이 아니다. 선지자란 말은 선포하는 자, 몸으로 뒹굴다는 뜻이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몸으로 뒹굴며 외치고 반응하는 사람이다. 선지자는 마이크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하나님께 묻고 따지기도 했다. ‘외침은 급할 때 부르짖는 소리다. 선지자는 심판과 징계를 외치며 하나님께 돌아와 멸망을 피하라 했으나 백성은 듣지 않았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고백하지만 이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아무리 말해도 외면당할 줄 알면서 외쳤다.
  선지서는 특정한 시대에 부름을 받아 당대 사람에게 외친 기록이다. 선지자가 외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바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에 따라 4가지로 나눈다.

시간 당시 강대국 주요사건 활동한 선지자
BC 8세기 앗수르 북이스라엘 멸망 요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BC 7세기 바벨론 남유다 멸망 위기 나훔, 스바냐, 오바댜, 요엘, 예레미야, 하박국
BC 6세기 바벨론 바벨론 포로 에스겔, 다니엘
BC 6-5세기 페르시아 포로 귀환 학개, 스가랴, 말라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헤셸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활동한 예언자 중 6(이사야를 1, 2로 나누면 7)을 시대순으로 다룬다. 예언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난 예언자를 주로 다루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 미가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하박국은 남 유다에 외쳤다.

. 아모스
- 유다 왕국 베들레헴 남쪽 드고아 출신으로 북 왕국에 관해 예언함. 북 이스라엘은 남쪽에서 온 예언자의 말을 들을까? 북 왕국 통치자들에게 남쪽 출신 목자의 말이 들렸을까?
- 헤셸이 하느님의 무서운 침묵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바탕에 두고 아모스를 생각한 것 같다. 양을 치면서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아모스는 하느님의 힘찬 음성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작고 조용한 음성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대신 목자와 양떼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아모스는 성실성의 결여와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을 저주한다. (72)
- 하느님이 당신의 모든 적들 위에 군림하시어 온 세계를 친히 다스리실 야훼의 날이 오고 있다는 믿음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은 이스라엘이 무슨 형편에 있든 관계없이 그날에 구원받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야훼의 날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대한 심판과 형벌의 날이 아니라 이교도 나라들에게만 형벌이 떨어지는 그런 날이었다. (78) 아모스는 이를 뒤집습니다.
- 야훼가 진노하고(73), 백성의 잘못으로 구원자가 고통받으나(75), 이스라엘은 우상을 버리지 않았다.(77) 아모스가 전하려 했던 하느님의 혐오감과 아모스의 절망감은 무시되었다. 이스라엘이 살 길은 하느님을 찾는 길밖에 없었으나 이스라엘이 그럴 가망이 없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으면(81) 구원(82)은 불가능하다.
- 헤셸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아모스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낙심하고 심히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아모스는 하나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백성을 향한 연민을 품는다. 북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보시는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남 유다 사람으로 북쪽 형제를 동정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과 백성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짓눌리면서 외쳤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을 만날 채비를 하라고 권면한다. 멸망으로 끝내지 않고 희망을 내다보게 한다.

. 호세아.
- 솔로몬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갈라진다. 유다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다. 남쪽 유다는 유다 지파 단일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서 반란의 위협이 적었고 줄곧 다윗 왕가에서 왕이 이어진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잘 섬겨 왕조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유다는 8명이 선한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부터 모두 우상을 섬겼으며 단 한 명도 선한 왕이 없었다. 유다가 섭정(아달랴) 포함 20명이 344년을 다스린 반면 이스라엘은 19명이 208년을 다스렸다. 10지파 연합 체제인 이스라엘은 지파 사이에 세력 다툼이 자주 일어나 왕권이 약하고 왕이 자주 바뀌었다. (성경을 돌려드립니다, 75)
- 호세아는 앗수르 제국의 상황에 따라 격랑에 휘말리는 시대에 살았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반란과 찬탈이 계속되는 모략과 음모의 온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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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가 미완으로 남겨둔 것을 호세아가 처리해야 했다. 아모스는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했고 공의를 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그분의 강철 같은 의지를 전달하였다. 호세아는 인간에게 쏟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왔다. 하느님은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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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는 사랑만 선포하지는 않았다. 하느님의 분노가 무시무시하게 터져 나온다고 외쳐야 했다. 호세아도 아모스처럼 진노와 동정 사이의 긴장(94) 가운데 선포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은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음란한 여인을 다시 데려와서 결혼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모습이었다.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이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알았을까? 이해하지 못하고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에 따랐다면 호세아는 확성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온전한 감정적 일체를 경험하기 원했고, 이스라엘이 이를 배반하자 호세아가 이 마음을 느껴야 했다.
- 헤셸은 고멜이 창녀가 아니라 바람 피우는 여인으로 묘사한다. (700, 각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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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잘못 인용하는 호세아 61~3절 말씀에 대해 여호와는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6:6)” 라고 말씀하신다.

. 이사야
- 아모스와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번영의 시대에 살았다. 이사야는 솔로몬 다음으로 명성을 떨치며 국력이 절정에 이른 우찌야(웃시야)가 죽었을 때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 아시리아가 약소국을 약탈하고 삼키며 사마리아를 멸망시켰고 유다의 장래도 불투명해졌다. 아시리아가 동쪽에서 전쟁하는 틈을 타서 유다와 아시리아 사이의 소국들이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고 유다를 압박했다. 아하즈 왕은 아시리아 왕의 아들과 종이 되기로 했다. 이때 여호와께서 반아시리아 동맹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아시리아의 종이 되라는 말도 아니었다.
- 예언자는 <역사란 하느님의 일이 실현되는 무대로서 그 위에서 숱한 왕국과 제국들이 일어섰다가 사라진다고 아는 예언자는, 한순간의 안개와 그림자들 너머에 있는 섭리를 내다보았다.>라는 말을 이해한다. 단기간에 아시리아가 전성기를 맞았다가 몰락하는 상황에서 이사야는 왕과 백성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을 때도 섣불리 나서지 않고 기다렸다. 당시 상황에서 이사야처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거대한 제국 사이에 낀 작은 나라는 외교술로 줄타기를 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예언자는 이를 거절한다. 예언자는 아시리아가 무너지고 에집트도 의지할 바가 아닌 줄 알았다.
- 그렇다고 이사야가 아는 척하거나 냉소하지 않았다. 이사야는 깨닫지 못하는 백성에게 깨달으라고 외치며 기진맥진했다. 왕족과 귀족이 자기 배를 불리려고 백성을 등치는 모습을 참지 못했으며, 하나님께서 격렬하게 진노하신다고 외쳤다. 그러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슬픔은 의미없이 사라져버렸다. 오직 예언자만 이를 느낄 뿐이다.
- 예언자는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에 젖어들었고,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대상인 백성에 대해서도 동정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마음과 하나가 되었고, 백성에게 외치며 백성의 마음과도 하나가 되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사야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 미가
-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처음으로 예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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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고독한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너무 높고 그의 덩치는 너무 크고 그의 관심은 너무 치열해서 보통 사람이 그것을 더불어 나눌 수가 없다. 맨꼭대기 봉우리에 살고 있는 그의 하느님밖에는 상대가 없다. (175)

. 예레미야
- 유다 말기 왕들(요시아부터 시드키야까지)이 다스리던 때에 하나님 마음을 전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리라 예언했고 실제로 멸망을 지켜보았다. 유다 말기 진노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때와 징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그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았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타오르는 분노와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을 말해야 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슬픔과 분노를 온몸으로 느끼고 한탄, 비탄, 슬픔, 애곡으로 표현했다.
-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은 야훼께서 영원히 거하리라 약속한 거처를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스라엘이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듣지 않는 백성에게 심판과 회복을 말했다. 하나님이 화난 줄 모르는 백성에게 심판과 회복을 말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한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몸소 체험했다.
- 예레미야는 천성이 부드럽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은 극단적으로 하기 싫은 일이었다. 이것이 그를 호전적이며 참을성 없고 성 잘 내는 사람이 되게 했다. 그가 위하여 기도해 준 사람들은 그의 적이 되었다. (211) 그러나 예레미야도 다른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예언이 실제 재난으로 닥쳤을 때,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울부짖는 백성에게 희망과 위로의 말을 들려준다. 앗시리아가 무너지고 바벨론이 일어섰으며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 하박꾹
- 여호야킴 시대(느부갓네살이 승승장구할 때)에 활약한 유다 출신 예언자였다.

. 2이사야 (40~66)
- 유대인 랍비로 헤셸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고난받는 종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이나 메시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으므로 만민이 해방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2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을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고난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에는 하느님의 고통이 포함된다. 그래서 이사야는 야훼를 해산하는 여인으로 비유한다. 이는 어느 예언자도 감히 하지 못한 표현이다.
- 이스라엘의 죄악을 닦달하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표현하신다. 이스라엘을 만국의 빛으로 삼으시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에게 장엄한 현존을 드러내신다. 2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만민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기대를 보여준다.

. 결론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과 백성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짓눌리면서 외쳤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에서 쫓아내라고 말하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이사야는 혼란한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 하느님의 진노와 슬픔을 느끼라고 선포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이 시온을 회복하리라 기대했다. 미가는 영원한 도성,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는 곳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해야 했다. 예레미야는 이사야 자신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외쳐야 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혀진 매듭을 풀어보려고 했다. 하박꾹은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인간의 잘못에 대해 진노를 퍼붓는 하나님의 방법이 옳지 않다고 따졌다.

예언자들은 외쳐야 하는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박국은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며 덤벼들었다. 예언자들은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하나님 마음을 이해해야 했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공감하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했다. 하나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선포는 예언자의 몸짓과 표현으로 드러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예언자들은 단순하게 들은 대로, 본 대로 외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백성의 잘못을 보며 분노했고, 그들은 심판하는 하나님께 섭섭했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잇닿아야 했다. 전망, 분노, 수용, 슬픔 사이를 오갔다. 예언자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느꼈던 감정(파토스)이 곧 예언이었다.

예언자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견디며 백성들 가운데서 살아야 했다.

9~11. 역사, 징벌, 정의
. 역사
- 권력은 물리적인 힘을 내세워 백성을 강압으로 지배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는 강한 힘으로 제국을 이루어 주위 나라를 지배하고 백성을 괴롭혔다. 그들은 정의를 무너뜨리고 평화를 빼앗았다. 권력에 희생당하는 대중도 권력의 편에 선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에집트는 백성을 위협하며 악을 자행했다. 그들은 백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 그러나 예언자는 권력에 대항한다. 예언자들은 제국이 힘을 내세우는 걸 악이라고 보았다. 그 누구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는 제국의 지배자와 왕들을 신의 호의를 받은 자들로 보았다. 오직 예언자만이 하느님께서 약한 자의 편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역사가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 손을 들어주었으나, 오직 하느님만이 비천한 자, 짓밟힌 자, 나그네와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에게 마음을 두신다.
- 따라서 역사는 하느님이 도전받으시는 장이며 정의가 패배를 맛보는 곳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좋은곳이었으나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하느님은 좋다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인간이 힘을 이루는 것이 역사이기에 심판을 외칠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인간의 사건(지배자의 권세와 힘이 이루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경험을 본다.
- 그렇다고 예언자가 세상을 증오하거나 문명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예언자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만 문명의 불안정성을 말하고 거짓됨을 폭로했다. 하느님께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했다.
- 역사는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맞도록 모양을 이루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주 인간사에서 떨어져 계신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역사에 임재하셔서, 하느님 뜻이 실현되기를 바랐다. 개인의 신비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의를 배우는 계시가 임하기를 바랐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면 백성은 범죄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며 이는 무서운 형벌로 나타난다. 그러면 예언자는 백성이 당하는 재난에 당황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본질적인 역설이다.
- 예언자들은 역사 현실을 경험하고 관찰하면서 하느님께 받은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이른다. 사람들이 개량(개선)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개입하는 역사는 개량이 아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며 고통당한 뒤에 비로소 구원이 임한다. 이후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임할 것이다.
- 하느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역사가 이룬 것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권력에 취해 오만방자한 니느웨가 아니라 조용한 거주지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하느님의 도와 그분의 길을 걷는 법을 배우고자.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예언자만이 확신한다.
- 전쟁과 죄악이 가득한 역사에서 예언자들을 구한 건, 그들이 본 메시아에 대한 환상과 인간이 회개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언자는 인간이 이루는 역사를 보면서 낙담하지만, 낙담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다른 날을 기대한다.

. 징벌
- 예언자들은 형벌을 외치면서도 회의를 품었다. 하느님의 목적은 앙갚음, 저지, 교정이라기보다 순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고통이 순결을, 형벌이 교정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마주 대하여도 백성들은 계속 그들을 등졌다. 예언자가 하느님께 들은 말씀을 백성은 전혀 듣지 않았다. 예언자에게 바위를 부수는 망치 소리가 백성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백성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다.
-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로 인간은 죄악에 빠져 형벌을 불러왔다. 마음이 굳어진 백성을 치유하는 길은 굳어진 마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마음이 완전히 굳어버리면 절망으로 바뀌고 자만심이 끝장난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다. 이때 하느님께서 형벌로 말씀을 끝내시면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 어느 말도 그분의 마지막 말씀은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이 변하면 하느님의 심판도 변한다. 구원의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

. 정의
- 예언자가 희생제물보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건 역설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희생제에 인간의 행동을 함께 요구하지 않았다. 제물을 드리며 만족하고 기쁘게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원시 종교의 신들은 기도와 제물을 바치면 만족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지는 신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정의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예언자는 왜 백성에게 공의(즉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외쳤을까?
- (쩨다카)는 정의를 넘어선다. 정의는 법률상 의이며 의는 박애, 친절, 관용을 포함한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며 억압받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느님은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수립하기를 바라신다. 이를 민감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예언자다. 예언자는, 무력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착취당하기만 하는 사람을 위해 나선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인간)에게 관심을 갖는 것처럼 우리도 관심을 이웃에게 옮기며 사랑하라 하셨다.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남에게 그대로 해야 한다(의무). 이것이 미쉬팟이다. 미쉬판과 쩨다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 하느님은 그의 자손과 후손들이 의와 정의를 실현하여 야훼의 도를 지키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의와 정의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뜻이다. 의와 정의가 훌륭한 가치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 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기림을 받는다고 했다.(341)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면 하느님의 의가 역사를 이끄신다.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이 정의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로 구원받는다. 하느님께서 역사에 참여하시려면 예언자들이 하늘의 정념에 참여해야 한다. 예언자는 인간이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선포해야 했다. 고아와 과부를 측은하게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을 의로 선포하는 일이다.

2.
1부에서 예언자 개인의 사상에 하느님의 정념이 차지한 자리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2부에서는 그것의 보편적인 특성을 예언자 신학의 중심되는 범주로 여겨 신중하게 살펴보겠다. (352)
예언 행위의 내용을 정념과 예언자의 동정으로 설명한다(1~4). 14장에서 예언자가 어떤 형식으로주장하는지 밝힌다.

1. 정념의 신학
- 예언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론이나 가치관이 없었다. 그저 이해할 뿐이다. 공부하고 연구해서 깨달은 관점이 아니라 보고 겪으며 이해한 하느님의 태도이다. 사변을 통해 얻은 지식과 달리, 하느님의 현시를 통해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했다.
- 예언자들은 계시의 순간을 통하여, 역사 속에 하느님이 임재하신다는 표징을 느껴 알았다. 분석, 연역법이나 귀납법 따위로 얻어내는 결론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삶으로 얻는 소득이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지만 또한 반사적인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었다.
- 정념의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다. 단순히 명령하고 복종을 기대하는 분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동요되고 영향을 받으며 반응하신다. 인간의 행실과 사건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분노한다. 멀리 떨어진 심판관이 아니다. 인간사에 긴밀하게 반응하신다. 이를 보며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정념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인간과 역동적인 관계를 이루신다.
- 헤셸은 하느님께서 유대인 600만이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분, 세상을 만드시고 멀리 떨어져서 간여하지 않는 무심의 제1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수용소에서 하느님을 버렸지만, 또한 많은 유대인이 하느님을 함께 고통당한 분으로 이해했다. 유대인 랍비가 하느님을 함께 사는 배우자요 파트너며 대리인이라고 고백했다. , 범죄, 고통은 인간의 실패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낙심(358) 표현했다. 인간의 행실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향한 행실인 한 하느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1장을 읽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며 우리를 깊이 사랑하신다고 느꼈다.
- 정념이 무엇일까? 격정(감정적인 흥분, 무모한 감정)이 아니다. 기질도 아니다. 하느님은 전적 타자가 아니다. 인간과 계약(언약)을 맺고 백성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이 백성과 함께 나누며 이루는 무엇이다.
- 하느님의 정념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의미와 신비, 형이상학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하나됨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호작용,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대화에 진정한 바탕이 된다. 예언자의 예언자 됨은 미래를 내다보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하느님의 정념을 꿰뚫어보는 데 있다.

2. 비교와 대조 (타 종교와 하느님의 정념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 만물을 창조하신 분, 당신이 창조한 것들 가운데 보잘 것 없는 한 분자가 저질러놓은 일에 영향을 받는단 말인가?
- 하느님의 정념은 에피쿠로스, 그리스, 힌두, 자연신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다르다.
- 노자의 도, 유교, 힌두 철학, 불교와도 다르다.
- 그리스의 운명, 메소포타미아의 필연, 에집트의 예정된 운명, 점성학과도 다르다.
- 원시 종교의 신들은 인간에 대해 악의적이며 질투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르다.

3. 정념의 철학
- 그리스 사상에 뿌리를 둔 철학의 전제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신학자들은 2천 년이 넘도록 하느님의 정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전제는
- 인간이 감정 또는 열정에 빠지는 것은 외부의 영향에 휘둘리는 것이므로 약자라는 증거였다. 신은 이러지 말아야 한다. 신은 물질처럼 피동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신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동자이므로 감정과 거리가 멀었다. 신은 열정, 즐거움과 슬픔, 사랑과 미움, 덕행과 악행과 상관없는 존재라 생각했다. 오히려 냉정(감정을 억압함)이 신의 속성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냉정하며, 감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화를 내지도 않고, 겁내거나 불쌍한 마음을 품지도 않는다고 믿었다. 서양 도덕론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방관자, 느끼지 못하는 분일까? 성경은 예언자들의 하느님이 피조물을 돌보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영원한 하느님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관점이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이 자기 때문에 존재하는 존재물들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절대자임을 부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신을 고정된 존재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본재의 변화는 타락이라는 가치관에 반대하며) 하느님이 인간을 보시며 다양한 감정을 보이는 분이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역사에 관심을 보인다고 알았으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일이 하느님 뜻이라고 생각했다. 예언자의 하느님은 멀리 떨어져서 무심하게 바라보는 신이 아니었다. 창조주, 구원자, 역사의 주인이라고 선포했다.

4. 신인동감동정설 (예전에 많이 공감했으나 다시 읽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 고대 사상가들은 신인동형동성설을 싫어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신이 인간이나 동물처럼 몸과 지체를 가진 것도 싫어했고, 감정이나 열정을 지닌다는 것도 견디지 못했다. 또한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는 개념이어서 싫어했다. 결국 그들은 신이 인간의 감정을 느낀다는 생각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 성경은 신상을 배격했다. 인간이 신을 그려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을 완전하게 설명해봐야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길, 하느님이 기뻐하는 길을 말할 뿐이다.
- 하느님의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지 못한다. 예언자들도 하느님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현존을 나타냈다. 이를 위해 추상 언어가 아니라 장엄하고 격렬한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말해야 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념이라는 뜻 같다.

5. 진노의 의미와 신비 (434쪽 질문과 해바라기(시몬 비젠탈)
-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말했다. 인간사에서 분노는 좋은 감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언자가 외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 분노는 신성한 정념의 표현 방식이다. 성경이 말하는 분노는 죄악을 볼 때 솟구치는 감정이다. 분노는 하느님의 관심을 드러낸다. 예언자는 무관심을 폭로한다. 하느님의 분노는 무관심을 끝장낸다. 하느님은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때로는 분노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잔혹함에 상처입은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분노로 폭발시킨다.
- 그러나 분노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분노는 잠깐이요, 자비는 무궁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기 위해 분노하신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신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에 힘을 넣어주는 것이 분노다.
- 신인동감동정설과 연관해서) 분노는 하느님의 속성이나 기질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상태 중 하나다. 인간이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면 하느님은 분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분노를 보고 인간이 돌이키면 분노를 거두신다.

6. 이라 데이(신의 분노)
- 구약에서 자주 보이는 진노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반대 :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의 의로운 창조주, 자신의 분노를 특히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애정을 강조하는 조물주의 불완전함을 공격했다.
- 영지주의로부터 시작되어 테르툴리아누스, 아르노비우스, 락탄티우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하느님이 무감각하시다는 이론이 일반화된다.
-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잔혹하게 벌하는 파괴자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는 하느님이 과연 선하신지 묻는다. 이는 정념을 지닌 하느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 하고 특별히 정념의 한 형태로서의 분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신음 소리가 당신의 귀에 닿을 때, 하느님의 분노가 폭발한다.

7. 동정(sympathy, 동정, 공감, 위로)의 종교
- 정념으로 볼 때 인간은 신성에 동정으로 반응한다. 예언자는 스토아의 현인인 냉정한 인간과 반대로, 동정하는 인간이다. 하느님의 정념에 휩싸이면 예언자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으로 동정한다. 동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현존에 자기를 열어놓는 상태를 말한다. 예언자들의 거의 모든 말에는 동정이 메아리쳤다.
- 예언자는 백성을 회개하게 하여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한다. 백성이 하느님의 분노를 두려워할 때 예언자는 하느님의 분노가 곧 아픔인 줄 안다. 괴로워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백성에게 전해 뉘우치고 회개하게 한다.
- 동정은 하느님과 함께 동정함, 하나님에게 동정함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전자는 둘이서 한 느낌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후자는 하느님의 정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정념을 이해하고 반응한다. 예언자는 하느님이 느끼는 대로 인도받는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념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예언자다.
- 정념으로서의 영(루아흐)
- 예언자의 동정은 철학자들이 말한 우주의 공감과는 다르다. 종교적 열광과도 다르다. 신이 수난을 겪고 부활하거나 힘을 되찾는 것과도 다르다. 예언자가 말하는 정념의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최고 지배자로서 인간의 행실에 관심이 깊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분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정념에 가까이함으로 같은 감정을 느낀다.


8. 예언과 무아경
- 헤셸은 무아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8~10장에서 135(42, 65, 28)의 참고 자료를 인용해서 학자들이 예언자들의 경험을 무아경으로 보는 이론에 반박한다.
- 무아경은 영혼이 육신을 이탈하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혼이 더 이상 제자리에 있지 않고 육체를 떠난 혼수 상태 혹은 신과 합일된 상태로 이해했다. 신접(광신)은 신이 인간의 몸에 거하는 상태이고 무아경은 혼이 몸을 이탈한 상태이다.
- 그리스, 소아시아,로마, 셈족, 신플라톤주의 등 여러 가지 무아경을 소개한다.

9. 무아경 이론
-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시작한 무아경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단으로 정죄받은 몬타누스와 그를 변호한 테르툴리아누스 외에 교부들은 무아경 이론을 거부하였다.

10. 무아경 이론의 검토
- 구약 예언자들은 무아경은 경험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응하고, 대화하고, 질문하고, 때론 거절한다.
- 예언자들은 광란에 빠지지 않았다. 신과의 신비스러운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인격이 소멸되지도 않았다. 예언자는 인격체로서 하느님과 만나 대화했다. 무아경에 들어가려는 의지도 없었다. 예언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뜻밖에, 미리 기대하거나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또한 예언자는 자의식의 상실 혹은 정신력의 일시 중단을 겪지 않았다. 또렷한 의지로 하느님을 만났다. 예언자는 경험한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여 전달한다. 무아경과 달리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다. 또한 예언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개인적 구원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민중의 삶에 관심이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무아경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나 예언은 예언할 메시지가 목적이다. 무아경은 이 세상을 떠나 천상의 신비를 경험하는 게 목적이나 예언자는 하느님이 관심을 두는 세상, 당대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둔다. 무아경은 내면에서 경험하는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나 예언은 인격자를 만나 메시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 예언자들이 얻은 모든 통찰의 바닥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뜻과 영속성이 흐른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느님와 계약과 그 계약을 지키라는 하느님의 요구가 들어있다. 따라서 예언의 말을 선포하게끔 고무시킨 예언자들의 일상생활은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거대한 드라마의 부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11. 예언과 시적 영감
- 8~10장에서 예언이 무아경과 다르다고 반박한 뒤에, 11~13장에서 예언을 시인과 예술가들이 창작의 순간에 맛보는 경험, 황홀한 정신에 사로잡히는 시인과 같다는 견해에 반박한다. 180개의 참고 자료를 들어(81, 51, 48)
- 오랫동안 성경은 율법, 기도서, 교리서로 읽혔다. 문학이나 역사로 읽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17세기 자연신론자들은 이성을 진리 탐구와 판단의 유일한 도구로 주장했다. 이에 따라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비판당했고 예언자의 계시라는 개념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 18세기 계몽 철학이 일어나면서 신의 문서가 인간의 문서로 바뀌었다. 스피노자, 로크 등은 이성을 진리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 그러나 이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가치관에 반대가 일어나서 합리주의 자들이 멸시하던 종교적 요소가 작품에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성으로 차갑게 대하는 태도와 감성으로 열광하는 태도 사이를 오가며 성경은 문학 비평의 대상이 되어갔다. 헤셸은 이 과정으로 설명한다. (545-553)
- 19세기에는 예술 작품이 오랜 숙고와 정신적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했으며, 예술 작업을 성욕의 표현으로 설명한 프로이트까지 다양한 견해가 등장했다.
- 이 과정에서 신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언자를 단순한 도구와 그릇으로 설명하여 인간의 자발성을 없애버리거나, 심리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감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설명하며 초인간적인 영감을 없애버렸다.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방식으로는 예언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 예언자는 영감을 받는 순간 수동적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예언자 자신이 영감의 근원을 알고, 영감으로 받은 메시지가 일관성을 유지하며, 다른 예언자와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예언자 또한 이를 안다). 따라서 예언과 시적 영감은 다르다.

12. 예언과 정신 이상
- 고대부터 위대한 시가들은 영감을 받고 사로잡혀 등장했다고 했다. 헤셸은 시의 창조가 광기에서 나오는 신비라고 말한 역사적 증거를 보인다.
- 이 문제는 천재가 정신이상에 결부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며
- 예언자가 영감을 받는 것은 노이로제가 될 수도 있는 뒤틀린 경험에서 파생되는 마음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는 견해로 발전되었다.
- 그러나 문헌에 남은 흔적만으로 한 인간의 잠재의식을 해부하는 것은 위험하다.
- 헤셸은 문서 예언자들의 병리학적 증상들을 검토한(570~580) 뒤에
- 행동 양태들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인식하는 상대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눈으로 예언자를 노이로제나 정신이상에 걸린 사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신 착란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예언자들한테는 더 높은 영적 질서에서 오는 현상일 수 있다. 예언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반응하는 건 당연하다. 예언자들의 삶에서 질병의 흔적이 보여도 그들이 주장한 바를 거부하지는 말아야 한다.
- 나비의 어원을 설명하며 어원과 용례가 모호하다고 말한다.
- 예언은 앞에서 설명한 광기, 정신 이상, 노이로제의 발작이 아니라 초월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 이런 설명을 통해 헤셸은 심리학적 분석, 사회학적 또는 인류학적 이론 작업이 예언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13. 예언자의 영감에 대한 해석들
- 예언자가 하느님에게 직접 말씀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비한 요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예언자의 주장을 해석했다. 이런 해석을 살펴보자.
- 예언자들은 시대 정신에 영감을 받아 말했다, 즉 예언은 시대 정신의 발현이라고 주장했다.
- 예언자가 하늘의 소명을 받았다는 주장을 문학적 장식으로 보았다.
- 예언자들이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사색 또는 직관으로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전달하고자 계시받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 예언자의 주장은 그들이 내면의 삶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한 결과로 자기 느낌을 외부에서 온 관념으로 잘못 해석했다고 한다.
- 예언은 위대한 인물이나 영웅한테서 볼 수 있는 대로, 인간의 심성 안에 잠재된 힘이 특수하게 밖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예언자들을 외국의 앞잡이 또는 선동 전문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이와 반대로 예언자들을 애국자로 보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몸을 바친 자들이라는 견해도 있다.
- 그러나 예언은 참으로 단순한 것이다. 신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이다.

14. 사건과 경험 (예언자가 경험하는 영감이란?)
- 자기가 하느님한테서 영감을 받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며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 받았다는 확신이 예언자 의식의 근본이다. 다른 사람들은 경험을 확신의 근거로 보는데 예언자만은 유독 경험의 근거를 확신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예언자 메시지의 타당성과 특이성은 그의 경험의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기원에 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의 의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자기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 확신이다. 에제케엘, 이사야, 예레미야 모두 그랬다.
- 예언자는 자신을 바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결심을 말하지 않는다. 부름받은 결정적인 순간을 그대로 서술할 뿐이다. 심지어 예언자가 전한 메시지 내용이 자신의 희망이나 기대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때도 종종 있었다.
- 예언 행위는 통화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메시지 내용을 예언자가 충분히 이해하느냐, 그것이 자기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아느냐, 그리고 그와 하느님 사이의 교합 또는 만남, 즉 메시지가 그에게 전해지는 형식이 예언자의 통화 행위를 결정짓는다.
- 예언자의 생각에, 예언 행위는 하나의 경험 이상이다. 객관적인 사건이다. 이것이 예언의 본질적인 형식이다. 사건은 정한 때 없이 돌발한다. 우연히 간간이 터진다. 그런즉 영감은 모든 시대에 계속되는 과정이 아니라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하느님은 간절히 열망한다고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때로 하느님은 부재하신다. 예언자가 만나는 것은 발언된 말, 표현된 말, 현존자로부터 솟구치는 말, 시간 속의 말, 말씀 속에서 흘러넘치는 정념이다. 지속되는 상황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발생하는 행위(사건)를 인식하는 것이다.
- 예언자가 의식하는 영감은 그의 내부가 아니라 너머에서 발생하는 신성한 행위를, 인간의 심성이 아니라 시야에 발생하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그것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대면한다.
- 예언자의 영감 받음은 그냥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탄원하고 반발하기도 한다.
- 하느님은 당신의 본질을 드러내어 계시하지 않는다. 당신의 정념만을, 당신의 의지만을 밝혀주신다.
- 전환(결단)과 지향 : 대체로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그분의 의도와 계획은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고요와 초연의 상태로부터 이탈이 일어나 하느님이 숨어계시던 곳에서 계시 행위로 옮겨지는 전환이 발생한다. 이 변화가, 영속하고 영원할 것만 같은 상태 또는 상황에서 언제나 시간 속에서 특이하게 발생하는 만남의 순간으로 옮겨가는 전이를 초래한다. 영원이 순간에 들어간다. 이게 전환이다. 전환은 사건의 태동이고 지향은 그것의 실현이다.
- 성경이 보여주는 인류의 전 역사는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역사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을 추구한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발견하셨다. 성경은 인간에게 접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기록이다.
- 향인간성과 향신성 : 예언자가 경험하는 영감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향하여 돌아서시는 향인간성이라고 하겠다. 하느님한테서 먼저 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향신성 행위로 이루어진다.
- 예언자의 의식의 관점에서 본 영감의 두드러진 특징은 632~633쪽에 요약되었다.

15. 세계 도처의 예언자들
- 이스라엘의 예언과 유사하다고 보이는 현상들을 설명한다.
- 비교 종교학은 인류 경험의 공통점을 보여주지만, 특수성은 밝히지 않는다. 본질적인 차이를 보려면 다른 종교들의 특수성을 드러내야 한다.
- 헤셸은 낡은 견해들을 시작으로 마나(외부에서 인간과 자연의 생명에 침투하는 신비한 힘, 오렌다, 마니투, 와칸다)와 타부(접근 금지), 점술, 예언과 점, 황홀경과 점쟁이들, , 소크라테스의 수호신, 함무라비 법전, 에집트의 예언자들, 인도와 중국의 계시와 예언, 마리의 예언자들을 설명하고 성경의 예언자의 독특성을 밝힌다.
- 독특성 1. 성경의 예언자는 스스로 예언자임을 주장한다. 초월자의 결단과 지향(14)이 그에게 임한 사건(14)을 스스로 의식한다. 조로아스터는 분명히 영감을 받은 자였다. 발람도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불꽃이었다. 세상에는 어디든 영감을 받은 자가 있었고 이웃에게 영감을 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천지의 창조주가 자신을 보냈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언자밖에 없었다.
- 독특성 2.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신의 세계로부터 오는 안내와 도움을 찾고 환상적인 체험과 초자연적 능력을 동경하며 꿈과 환상 속에서 평범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비를 보려고 갈망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그런 환상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부르는 소명에 항거하였다. 묵시적 환상을 보는 자들과는 반대로,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은 하늘의 영광보다 땅의 혼란을 본다. 그들이 일반 사람과 다른 점은 인간의 상황을 신의 비상사태로 감지한 것이었다. 성경의 예언은 꿈, , 추리, 주문과는 다른 유일하게 독특한 현상이다.

16. 예언자, 사제 그리고 왕
- 유사 이래 백성은 왕을 신으로 여겼다.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파르티아, 일본, 로마에서 왕은 신 또는 신의 아들로 신격화되었다. 심지어 18세기까지 유럽에서도 왕은 법을 초월하여, 법이 제한하는 범위를 벗어난 자였다.
-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왕의 신격화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에게 신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공포와 재난을 초래할 따름이었다. 사회 질서의 핵은 왕도 아니고 사제도 아니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이 핵심이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계약을 어긴 왕과 사제를 비난했다. 왕의 죄, 거짓 예언자와 사제들의 죄악이 재난을 불러온다고 선포했다.

17. 결론
- 하느님의 정념은 사랑과 노여움, 슬픔과 기쁨, 자비와 분노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표정들의 공통분모, 즉 정념의 궁극적 의미는 하느님의 돌보심과 관심이다. 인가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 사람들을 건져보려고 애쓰는 예언자의 활동의 뿌리가 된다. 그런즉 예언 신학의 궁극적 범주는 간섭, 돌봄, 관심이다.
- 예언자들이 이해하려 한 것은 하느님의 본질과 신비가 아니라 그분이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의 신비다. 예언자는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을 숙고하지 않는다. 그분을 생각하는 예언자의 사유 속에는 언제나 이 세계가 들어있다. 그의 메시지는 신의 존재를 밝혀내거나 신의 존재에 관계되는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언자가 하느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의 정념, 이스라엘과 인류와 맺으시는 그분의 관계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절대 존재로가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과 연관지어서 말한다. 그의 말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인간과 하느님의 상호작용에 대한 해석이다.
- 인간이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아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은 인간을 아는 하느님의 지식 안에서 초월된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기본이 되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에게 보여지고 알려진다는 것이다. 성경의 사람에게는 너 자신을 알라보다 하느님을 알라(대상 28:9)’가 지상 명령이다. 하느님 이해 없이 자기 이해 없다.

 

성경이 바뀌면 하나님이 바뀌나?

개역성경, 쉬운 성경,현대인의 성경, 표준새번역

개역개역 4, 북한어성경,메시지』……

3때 성경을 처음 읽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고등학교 졸업 전에 한 번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학 동안 생각 없이 읽었습니다. 그 뒤로 줄곧 개역 성경을 읽습니다. 사람이 습관의 동물인지라 처음 읽었던 그 말투가 제 입맛에 맞습니다. 하지만 개역 성경이 모두에게 정답은 아니지요. 한글 성경 10여 종류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원뜻을 가장 잘 담은 성경은 무얼까요?

 

성경번역 : 취향의 문제, 시대의 요구, 교단의 자존심……

우리나라에 성경이 처음 들어온 때는 사람들이 경전을 굉장히 고귀한 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가장 고귀한 말투인 궁중체(궁궐에서 쓰는 말투)로 성경을 썼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 운행하시니라는 말은 정말 어렵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오래, 자세히 들여다봐야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혼돈, 공허, 흑암, 운행하시니라가 어떤 뜻인지 모르면 쇠 귀에 경 읽기입니다.

점점 평신도들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커져 직접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자의 해석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읽으려고 하니 너무 어렵습니다. 참고자료가 있지만 거기까지 손대기엔 벅찹니다. 번역할 때 실수한 곳도 간혹 있어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권위만을 내세워 교회가 잘못된 판단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개역 성경을 고집하는 태도 역시 권위주의로 치부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성경은 새로운 번역을 필요로 했죠.

게다가 지금은 오래, 자세히 보는 시대가 아니라서 성경이 쇠 귀에 경 읽기가 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쉬운 번역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학자들과 보수주의 목회자들이 반발했습니다. 어린애들 장난도 아니고 소설처럼 읽는 성경은 수준이 안 맞는다는 말이죠. 절충안으로 내놓은 것이 표준새번역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본을 사용하여 93개월 동안 번역해서 1993년에 완성했고 2001년에 개정판을 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를 많이 했죠. 권위와 친밀감을 갖추고 생생함이 커질 거라구요.

정말 친밀하고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특히 시편과 아가서는 완전히 새롭습니다. 시가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는 시에 어울리게 편집해야 하지만 분량을 줄이기 위해서인지 개역 성경은 의미 구분 없이 줄줄이 인쇄했습니다. 그러다가 표준새번역을 보니 느낌이 살아나고 의미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제 어머니는 아가서를 읽으며 이게 원래 이런 뜻이었구나! 정말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 마음이 이렇구나!’ 하시며 여러 번 우셨습니다.

하지만 표준새번역은 보수주의 진영에 의해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가서를 보고 누가 하나님을 생각하겠느냐며 호통을 치는 분도 있었습니다. 감히 하나님 말씀을 속되게 표현하는 걸 참을 수 없어 교단별로 다시 번역을 하겠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각 교단 입맛에 맞는 성경 번역본이 필요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을 취향대로 고르겠다는 말이라 느꼈습니다. 복음보다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마음은 아닐까요? 하나님 말씀이 믿는 자들을 나누어버리는 도구가 되다니요!! 다행히 다급한 마음에 일단 다시 번역하겠다는 말을 던진 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달리하셨는지 개역개정판으로 일단 성경 번역 논란은 가라앉았습니다.

 

성경번역본을 분류하면

저는 개역 성경, 쉬운 성경,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개역 개정판, 공동번역 성경을 읽었고 북한어 성경도 읽습니다. 종류가 많지만 정리하면 두 가지입니다.

개역 : 낱말 하나의 의미가 강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할 때 묵시와 방자함이 무엇을 말하는지 뜻이 명확합니다. 하지만 묵시, 방자함을 모르는 사람은 자왈, 유붕이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아라는 논어 구절을 읽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가깝지만 그걸 듣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번역입니다. 처음 읽으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기 때문에 성경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물론, 깊이, 오래 생각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그 외의 성경 : 그야말로 쉽게 풀어 쓴 성경입니다. 개역 성경 내용을 쉬운 말로 풀었기 때문에 한 구절 한 구절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현대인의 말투에 맞아서 읽기 쉽습니다. 쉽게 내용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한 내용이 당시 시대에 어떤 뜻인지, 지금은 어떻게 적용되는지, 하나님이 왜 그 말씀을 하시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쉽게 이해되기 때문에 고민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읽을 때는 알겠지만 성경을 덮으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역시 어려워합니다. 뭔가 알 것 같지만 사실은 모르는 글을 읽는 셈입니다.

 

메시지

성경을 어려워하는 마음은 어디나 똑같은지 미국 역시 번역본이 많습니다. 미국판 개역 성경(:KJV)을 읽으면 너무 어렵고 쉬운 성경을 읽으면 깊이가 없습니다. 우리와 똑같습니다. 유진 피터슨도 갈라디아서를 공부할 때,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성도들 말을 듣고 현대에 맞는 이야기로 바꾸었습니다. 공부할 본문을 미리 현대에 맞는 상황으로 바꿔쓰고 나중에 묶어 'Traveling Light'라고 불렀습니다. 말투와 낱말을 바꾸고 완전히 의역했습니다. 10년 뒤에 냅프레스 출판사에서 편집을 맡고 있는 존 스타인이 신약 전체를 의역해 달라고 요청해서 메시지가 나왔습니다.

메시지는 개역 성경도, 쉬운 성경도 아닙니다. 말투와 낱말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손을 본 번역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예수께서 여기서 가르치신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말씀하실까?’라는 생각으로 번역을 했답니다. 목사님의 초점은 여기서입니다. 현대성을 크게 고려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이해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안 읽던 사람들이 메시지 덕분에 성경을 읽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비판도 있습니다. 번역이 너무 작위적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그때부터 예수께서 선포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셨다.”그분은 요한의 마지막 말을 이어받으셨다. 너희 삶을 고쳐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로 번역했습니다. 회개가 삶을 고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약성경에 ‘Lord Jesus’115번 나오는데 이걸 ‘Master Jesus’로 썼습니다. Master라는 말이 뉴에이지에서 대가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말을 비롯한 여러 낱말을 증거로 들어 유진 피터슨이 뉴에이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대하는 마음, 읽어내는 능력이 약해진다.

신앙의 형태, 신앙에 도움을 주는 도구들은 개인적인 적용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개인들의 모습이 모여 시대를 이루고 다음 세대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메시지를 선택한 건 우리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메시지처럼 현대성을 고려해서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해주는 성경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메시지는 원래 말씀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뜻에서 하신 말씀인지 모르고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지만 생각하면 곡해하기 쉽습니다. 원류를 아는 사람이 지류를 찾으면 전체를 이해하지만 원류를 모르고 지류에만 발을 담그는 사람은 편협해지기 쉽습니다. 지류를 원류로, 심지어는 대양으로 착각하는 거지요.

성경 저자들은 문화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문화에 맞서지만 예화, 비유, 상징, 설명, ……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에 두고 썼습니다. 그걸 알면 정말 풍성하지요. 여리고 성을 왜 돌라고 하셨는지 알면 사고 싶은 건물이나 땅 주위를 도는 행위가 쓸데없는 짓이란 걸 압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수준이 떨어지면서 진리를 깨닫는 수준도 떨어지는 건 아닐까요? 에라스무스의 말입니다.

나는 농부가 쟁기질을 하면서 성경을 흥얼거리는 날이, 직공이 실을 짜면서 성경을 흥얼거리는 날이 여행자가 여행의 피곤함으로 지칠 때 성경의 이야기들과 함께 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열망한다.“

어떤 성경을 읽어야 삶에서 성경을 흥얼거리게 될까요? 제 수준에서 대답하라면 메시지를 읽되, 개역 성경도 읽어낼 수 있어야겠지요.”

자기를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도 돌아보아 (2012년 8월 좋은교사 책 소개글 중 일부)

나이트, 엘리 위젤, 예담

학교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걸 보면 유치 찬란하기 그지없습니다. 대략 순서는 이렇습니다. 길동이가 동길이를 똥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동길이는 길똥이라고 맞받아칩니다. 길동이는 똥길이 주제에 까불지 말라 하고, 동길이 역시 길똥이 주제에 무슨 말이 그리 많느냐고 합니다. 이때 동길이가 길동이 머리카락을 슬쩍 치는 도발을 감행합니다. 이를 폭력으로 인식한 길동이는 왜 치느냐며 동길이 어깨를 밉니다. 이때부터는 밀리면 진다는 생각으로 상대방보다 강하게 맞받아칩니다.

5분만 지나면 이 싸움은 철천지원수끼리의 싸움으로 변해서 도구가 동원되기도 하고 각종 미사여구(?)가 작렬합니다. 구경하던 애들까지 엉겨서 집단 패싸움 양상을 띠기도 합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괜히 두 사람 사이에 앉은 경민이는 책상도 뒤집히고 가방도 사라지고 공책이 찢어집니다. 행여나 두 사람에게 반항이라도 했다가 공동의 적으로 찍히면 집단 따돌림까지 당합니다. 애꿎은 경민이는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경민이는 한때 동길이와 친했습니다. 함께 운동하고 게임도 같이 했으며 어려울 때 도와주는 절친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싸움 때문에 이유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다툼의 흐름을 타고 길동이와 친해져서 안전해지기도 하지만 동길이와 친했던 과거가 들통나거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다시 고통 길에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서 경민이 자리에 앉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고통 당한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돈이 많아서’, ‘수전노라서’,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서’, ‘그저 유대인이라서고통을 당했습니다.

나이트

지은이 엘리 위젤은 15살 때 가족과 함께 강제수용소에 잡혀갔고 가족을 잃었습니다. 아유슈비츠를 비롯한 포로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이야기가 다 그렇듯이 이 책은 무겁고 슬프고 암울합니다. 실상을 모르고 유대인 학살 이야기를 소식으로 들은 사람에게 나이트는 밤에 악몽을 꾸게 할 겁니다. 저는 고통이나 고난을 감싸안고 끙끙대며 고민하는 사람이라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무겁습니다. 책의 서문과 뒷표지에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내 인생이 일곱 겹으로 봉해진 하나의 긴 밤으로 되어버린 그날 밤, 수용소에서 맞은 첫날 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연기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몸뚱이가 고요한 하늘 아래 연기로 화해버린 어린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내 믿음을 영원히 불살라버린 그 불꽃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내 영혼을 죽이고 내 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만큼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결코 잊지 않으리라.”

위젤은 수용소에서 아버지가 곤봉에 맞아 죽어갈 때 곁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엘리 위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럽게 굴어 나치 친위대의 분노를 산 아버지에게 속으로 화를 내기까지 했답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엘리는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마음 먹습니다.

수용소에서 한 소년이 교수형을 당합니다. 너무 가벼운 아이라 밧줄에 목이 매여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죽어가야 했습니다. 엘리 위젤은 그걸 지켜봐야 했지요.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고 누가 물자 위젤은 속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굴 용서하고,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거기 달려 있었다고 감상적으로 쓸 마음조차 들지 않습니다. 나이트는 불편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속을 뒤집습니다. 그래서 읽어봐야 합니다. 책 줄거리와 제 생각을 쓰는 것도 불편합니다.

 

나는 고발한다. 누구를?

2차대전 패전국 독일과 일본은 나쁜 나라였습니다. 그럼 연합군은 좋은 나라였을까요?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아닙니다. 프랑스는 박애, 평화, 자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12시간 만에 위그노 3만 명을 죽인 건 약과입니다. 20세기에도 여전히 아프리카의 자유를 짓밟았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빛나는 미국은 지금도 온 세상에 억울한 사람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분노가 치밉니다. 그들이 싫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억울하게 여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국가를 세웁니다. ‘내가 억울하게 당했으니, 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면 팔레스타인의 억울함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논리입니다. 에밀 졸라가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며 나는 고발한다를 다시 써야 할 지경입니다. 물론, 유대인 입김이 강한 미국은 입을 다물 것이고 각나라들은 저마다의 논리로 자기 입장을 표명하겠죠.

같은 감정을 한국에 대해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동남아에서 꿈을 안고 온 노동자를 어찌나 괴롭혔는지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모조리 고발하고 싶습니다. 이들에 비해 내가 받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별것 아니기 때문에 괴리감까지 느낍니다. 나는 부유하게 살면서 피상적으로 생각의 사치를 누리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멀리 볼 것 없이 내 안에 있는 죄가 가증스럽습니다.

역사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감상에 빠져 교수대에 하나님이 달려계셨어!’할 수도 없습니다. 억울한 죽음, 인간이라 생각할 수조차 없는 행동을 한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작은 죄악 하나조차 고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함…… 이 모두가 더해져서 저를 짓누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들도 돌아보라 하셨는데 너무나 큰 짐을 지려다 보니 작은 짐조차 지기 어렵습니다. 이런 책은 읽지 말아야 했는데……

 

용서, 나를 위해서라도 (2011년 5월 좋은교사 책 소개글)

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뜨인돌
용서, 치유를 위한 위대한 선택,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양철북

참고 :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난 작가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습니다.
         그 중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책입니다.

일본에서 지진이 났습니다. 마음이 어떠신지요? 대부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여러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이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모금 운동을 하고 인터넷에 응원 글을 올립니다. 파견된 구조대도 다른 나라 구조대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우리처럼 온 나라가 나서서 도와주는 나라가 없습니다. ‘, 우리나라가 이정도 마음을 갖고 있구나!’하는 감격이 솟습니다. 물론 고소하다고 하는 분도,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목사님들도 계십니다. 진주만 공습의 대가라는 사람도 있고 속이 시원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 심판과 대가를 말하는 이유는 과거 때문입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과거 역사에 쿨하게 반응하는 미국도 진주만을 잊지 않습니다. 여기엔 용서라는 거대한 복병이 기다립니다. 내가 아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일에 대해 용서해야 하나?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할 수 있나?

해바라기는 나치가 세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유대인 이야기입니다. 지은이 시몬 비젠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나치에 의해 89명의 일가친척이 학살당하고 겨우 살아남습니다. 렘베르크의 야노프스카 집단수용소에 갇혀있던 어느 날 독일 병사의 요청으로 한 병실에 들어갑니다. 부상당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자기 고백을 들어줄 유대인을 찾은 병사를 만납니다.

병사는 러시아 도시인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위장 폭탄에 독일군 30명이 죽자 유대인 300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 죽였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을 죽였다며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아이를 안고 뛰어내리는 아버지를 향해 총을 쏘았는데 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제 눈앞엔 그들이 보여요. 그 아이하고 부모가 보여요

하며 죄를 자백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시몬 비젠탈은 손을 놓고 나와 버렸습니다. ‘용서는 피해 당사자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가 정말 용서를 구한 것이라면 들어주어야 하지 않았나?’는 생각에 고민합니다. 수용소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용서에 대해 토론합니다. 수용소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유대인들이 용서를 토론합니다. 수용소에서 벗어난 뒤에 시몬 비젠탈은 철학자, 종교 지도자, 이름난 석학……에게 편지를 보내 묻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했습니까?”

아브라함 헤셀, 신시아 오지크, 자크 마리탱, 허버트 마르쿠제, 프리모 레비 등이 답신을 보냈고 한국판에는 달라이 라마, 데스먼드 투투, 해리 우(인권 운동가)를 비롯해 홍세화, 윤미향(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총장), 김태헌(5. 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사무총장)씨의 답신도 들어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처음 답장을 보낸 32명 중에 용서해야 했다는 대답이 6명뿐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응답자 대부분은 용서하지 않은 채 뿌리치고 나온 게 당연하다고 답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며 철학자들 대부분이 잘못을 고백하는 독일 병사를 용서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신학자들조차 용서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고백한 그는 용서받을 자격이 있나요?

일본은 죄를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독립기념관에 있는 고문실을 보고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안중근, 윤봉길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친일파에 대해 분노하며 이토 히로부미는 죽는 게 마땅하다고 외칩니다. 독도는 어떡하지요? 일본이 만주철도부설권을 받고 팔아버린 간도는 어쩝니까?

 

용서, 치유를 위한 위대한 선택

시몬 비젠탈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난 이후 미국전쟁범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1100명 이상의 나치 범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습니다. 용서보다는 죄의 대가를 치르는 일을 했습니다. 용서, 치유를 위한 위대한 선택을 지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세운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손자로 대가를 치르는 일이 아니라 용서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단순한 삶, 공동체, 비폭력을 실천하는 국제 공동체입니다. 이곳에서 아놀드는 복수가 아닌 용서를 말합니다. 복수는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허탈함과 분노만 안겨줄 뿐입니다. 책에는 끔찍한 배신과 학대, 테러에 이해할 수 없는 용서로 대응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와 상관없이 하나님 때문에 용서한 사람도 있고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용서할 힘을 얻은 분도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오른쪽 뺨을 맞고 나서 왼뺨도 돌려대는 일을 말합니다. 심지어 용서할 뿐만 아니라 회복시켜주는 일까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에 나오는 용서의 용사들을 보면서 저는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이런 일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대단한 용기, 고귀한 행동에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서하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날마다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면서 뻔뻔하게 다른 아이 핑계대는 우리 반 아이를 어떻게 용서합니까?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도 징계는 불가피합니다. 교사인 나 자신은 전혀 아이에게 불만이 없으며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징계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상처받기 쉬우며 그만큼 용서하기 더 힘듭니다. 부부 사이에서, 학대하는 부모를,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치유를 위해서라도 용서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죄의 사악성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용서의 조건은 이해배려’, ‘용서하는 자의 좋은 성품이 아니라 겸손을 꼽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답니다. 그러고 보면 용서할 수 없다고 외치는 순간의 자신은 항상 옳고 정당합니다. 나는 의로우며 하나님도 내 편을 드실 거라 생각하죠. 결국, 용서는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위대한 선택인가 봅니다.

 

용서, 사마리아를 넘는 필수조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전도하자는 말로 이해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먼 곳까지 가서라도 복음을 전하자고 말합니다. ‘땅 끝까지, 끝 날까지 증인이 되자!’ 그래서 이프카니스탄에도 가고 요르단과 시리아에도 갑니다. 말씀을 자세히 봅시다. 땅끝이 목표이지만 단번에 땅끝까지 가라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 땅 끝에 이르려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미워하며 경멸한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바댜서는 딱 한 장으로 쓰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난당할 때 구경하며 이스라엘을 괴롭힌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오바댜는 가시 같은 이웃에 대해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시 같은 이웃이 바로 사마리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끔찍하게도 싫어한 사마리아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을 용서하고 품지 않으면 땅끝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한국의 사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을 용서하지 않고 우리가 땅끝까지 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일본이 지진으로 힘들어할 때 기꺼이 구호품을 보냅니다. 유명인들이 큰 돈을 선뜻 내놓으며 언론의 칭찬을 누립니다. 독도는 정부 간의 문제이지만 어려움 당한 이웃을 돕는 일은 사람 사이의 일이라며 아량을 베풉니다. 왜 이렇게 행동할까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주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하면 받는 사람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허세와 우월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해야 할 일은 받는 사람의 자립심을 일깨울 수 있는 작은 뭔가를 가르쳐주는 일이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일본을 돕는 건 아니겠지요. 용서까지 나갈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게 주는 걸 즐기는 건 아니겠지요.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돕는 일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내게 피해를 준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하신 것처럼 이웃에게 그대로 행하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운지요! 하필 왜 일본일까요?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 가시렵니까?

 

거룩한 문장 속으로의 여행 (2009년 6월 좋은교사 책 소개글)

하나님을 향한 여정, 요단 - 프레드릭 뷰크너 
통쾌한 희망사전, 복 있는 사람- 프레드릭 뷰크너

 

원래 뜻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낱말을 읽고 싶어요.

예수님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는 바리새인이 되었을 겁니다. 곧이곧대로 규정을 들이대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은혜를 받아, 규정을 주로 제게 들이댑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그 규정을 많이 들이댔습니다. 물론, 소심하고 용기 없는 성격 탓에 다른 사람에게 버거운 짐을 지운 적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성격은 어떤 면에서는 좋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낱말이 가진 본래 뜻에 대한 집착입니다. 낱말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집사를 살펴봅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집사와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집사는 다릅니다. 저는 지금 이 시대에서 살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집사에 해당하는 뜻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뜻 그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교사도 그렇게 보고 좋은 교사도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 저는 집사 수준도 못 되고 좋은 교사와는 거리가 멀지요.

낱말이 가진 본래 의미를 따지다 보면 세상이 삐딱해 보입니다. 세상에 쓰이는 낱말 중에 원래 뜻을 가진 낱말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필립 얀시는 은혜(grace)’가 본래 뜻이 겨우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낱말 중 하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은혜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은혜를 받은 경험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는 선물이라는 낱말의 본래 뜻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제 성향에 맞는 책은 낱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사용한 사람들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딱 맞게 설명했다는 건 아닙니다. A=B라고 말하기보다는 A, B의 뜻을 정확하게 설명함으로 차이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작품입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설명을 한다면

모세의 율법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이 돼버렸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느냐는 질문은 안식일에 틀니를 끼는 것이 적법하냐로 바뀌어 버렸다.”

라고 쓰는 경우죠. 동시에 행간에 내용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이 문장은 통쾌한 희망사전이라는 책에서 메시아를 설명하는 곳에 나와 있습니다.

 

삐딱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프레드릭 뷰크너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입니다. 관계대명사를 줄줄이 이어 글을 쓴다는데 저는 영어 실력이 안 돼서 잘 모릅니다. 여러 낱말의 뜻을 잘 살리지 않으면 그렇게 이어지는 문장을 통해 의미를 전하기 어렵겠죠. 퓰리처상을 비롯한 여러 작가상에서 수상하였거나 후보로 올랐다니 문장 실력은 대단한가 봅니다. 한글로 번역한 내용만으로도 탁월한 문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중에서도 한 문장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게 만드는 분이 있는데 뷰크너가 그렇습니다.

통쾌한 희망사전이라는 제목 앞에는 <삐딱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그분처럼 되기로 애쓰는 사람들인데 지금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부르는 낱말이 되었습니다. 뷰크너가 삐딱한 그리스도인이라 지목한 사람들은 생각이 어긋나서 삐딱한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민하기 때문에 삐딱하게 보이는이 아닐까요? 낱말의 본래 뜻을 살아내기 위해 고민하기 때문에 생각이 삐딱하게 보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책은 낱말을 해설한 사전입니다. 그렇다고 A=B라고 설명하는 사전은 아닙니다. 뷰크너가 생각하는 낱말의 뜻을 자기 경험과 생각으로 풀어 쓴 사전입니다. 예를 들어 기쁨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행복은 대개 우리가 예상한 곳에서 등장한다. 멋진 결혼, 좋은 직장, 즐거운 방학 등. 한편 기쁨은, 그것을 유산으로 남긴 분을 닮아서인지 못 말릴 정도로 예측불허다.”

이런 식으로 160여 개 낱말에 관한 생각을 적어놓았습니다. 찬양이 무엇인지 창조는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은 누구이고 목사는 무얼 하는 사람인지 고민한 분이라면 이 책이 정말 재미있을 겁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자주 웃었습니다. 동의한다는 뜻이죠. 같은 고민을 이렇게 풀어놓은 분께 대한 존경이죠. 웃음이 존경일 수 있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느꼈습니다. 또한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읽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웃은 문장 중에서

뷰크너, 즉 이름” -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말씀하신다. 그 후로 하나님은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다.

성경” - 성경을 문학으로 읽는 것은 모비딕을 고래잡이 지침서로 읽거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구두법 때문에 읽는 것이나 다름없다.

되풀이해서 읽은 문장 중에서

우상숭배” - 우상숭배는 상대적 가치를 지닌 대상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다.

탐식” - 탐식하는 자는 영적인 영양실조를 치료하기 위해 냉장고를 덮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향한 여정

뷰크너의 또다른 책으로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진실을 의심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세상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이끌어가는 중심문장입니다. 이 문장에서 경이로움은 어떤 사실을 말할까요? 대단한 영적 체험은 당연히 경이로움이지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거나 병을 고치는 것도 경이로움일 겁니다.

그러나 삐딱한 그리스도인에 속하는 저는 그런 것을 보면서 경이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치유 집회에 가면 저는 치유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이 있다면 며칠, 몇 달을 두고 관찰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고쳐주셨는지! 이런 모습에는 경이로움이 없습니다. 경이로움을 느낀 그분들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하나님이 고쳐주신 그 암으로 죽는 걸 여러 번 봤기 때문입니다.

뷰크너가 말하는 경이로움은 당연히 급하고 강하게 일어나는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놀라움’, ‘기적을 정확하게 적은 카드를 보여주는 걸 경이로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뷰크너는 자기 삶에 편만한 하나님의 모음, 흔적을 세어보았고 그걸 적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원래 없었는지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자음뿐입니다. 하나님이 자음만을 주신 까닭은 자음이 정확한 뜻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음을 우리가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뷰크너는 이것을 은혜의 알파벳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정확하게 낱말 뜻을 알려주는 설명처럼 드러나지 않고 우리 삶과 어우러져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알파벳은 모음이 없어서 언제나 장막에 싸여있고 신비하고 비밀스럽답니다. 우리가 모든 믿음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의미를 탐구하고 모음을 채워야 한답니다. 하나님은 늘 이런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모음을 채워넣는 수고를 하는 사람만 그 은혜를 알 수 있겠죠.

하나님을 향한 여정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자음이 어떻게 뷰크너에게 모음을 채워 넣은 온전한 낱말로 다가왔는지 설명합니다. 이 책은 세 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시간 이전, 시간 이후, 시간 너머입니다. 한 번 읽는 것으로 뷰크너의 책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 시간 이전과 이후, 너머의 의미를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다만 뷰크너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떠올리는 모든 사건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음이라고 합니다. 적절하게 자신이 모음을 채워 넣어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요.

아버지가 자살하고 삼촌이 자살한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사실적인 묘사로 써도 은혜가 되겠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써냅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신 것이었고 은혜였다는 쉬운 결론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읽은 책과는 전혀 다른 맛입니다. 문장과 낱말을 사용하는 방식이 전혀 달라 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맛을 설명하기엔 제 설명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서혜미 선생님께 이 책을 소개했더니

소개해주신 책, 주님의 은혜가 강물 되어 흐르네요!”라고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제게도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경험을 하고 싶으시다면 읽어보세요. 책 소개만 읽지 마시고 책을 읽어보세요.

이 글을 소개한 뒤에 나온 세 권도 너무너무 좋습니다.
얇지만 묵직~~~~~한 책입니다.

1. 주목할만한 일상
2.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3. 일상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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