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_글의_저작권을_인정해_주세요.
#자녀나_학생에게_읽어줘도_되지만_딱_거기까지만!!!

이틀 전에 소개한 방과후 글쓰기 반에서 만난 글이다.
설명하는 글을 쓰자고 말하며, 몇 가지 예를 들었다. 그리고 쓰라고 했다. 난 가끔 격려하기만 했다.
12월 7일에 쓰다가 멈추었고, 14일에 마무리했다. (방과후 수업-월요일)
(나는 띄어쓰기만 고쳤다.)

-------------동생 사용 설명서
6학년

안녕하세요. 전국의 남매, 자매가 있어서 불행하신 분들. 동생을 부려먹고 싶은데 말을 듣지 않는다고요? 괜찮아요! 오늘 제가 알려드릴 방법은 동생 녀석들을 아주 쉽게 부려먹을 수 있는 방법이에요. 모든 동생들한테 이 방법이 먹히죠. 다만 초딩이고 사춘기가 오지 않은 동생들에게만 써먹을 수 있다는 게 단점이지만요.

동생 사용설명서 첫 번째, 약간의 거짓말을 더하세요. 예를 들어
“야! 김동생! 물 좀 떠와! 떠오면 내가 00하고 △△ 해줄게.” 이런 식으로요.
이때 가장 중요한 건 ‘△△해줄게!’는 나에게 손해가 없을 만한 것, 00은 엄청난 무언가를 해줄 거라고 하세요. 손해 같다고요? 괜찮아요.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것이니까요. 동생을 더 골려주려면 △△도 주지 마세요. 단점! 엄마나 아빠한테 이를 수 있습니다.

동생 사용설명서 두 번째, 약점을 잡으세요. 동생이 뭘 잘못했다구요? 이르지 말고 증거를 잡으세요. 이 방법이 첫 번째 방법보다 좋아요. 증거를 잡아놓고 “너, 이것 안 해주면 엄마한테 말할 거임!” 이러면서 계속 부려 먹어요. 계속 부려 먹다가 슬슬 말을 안 들을 때쯤 일러바쳐 버리는 거죠. 사소한 잘못도 넘어가지 마세요. 더 크게, 더 거대하게 부풀려서
“넌 엄마한테 100% 혼날 거다!” 이런 식으로 압박을 주면 되니까요. 단점! 유통기한 있음. 3년 6개월 전에 약점 잡아놨는데 깜빡하고 부려 먹지 못함.

세 번째, 월급을 주세요. 네? 아직 학생이라 돈이 없다구요? 괜찮아요. 월급은 돈뿐만이 아니니까요. 동생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게임 아이템을 동생에게 주세요. 네? 너무 손해라구요? 더 많이 부려먹고 더 어려운 심부름을 시키면 되죠. 어느샌가 말을 듣지 않으면 “어? 너 게임 아이템 다시 돌려줘!” 라고 하면
“안돼!” 라며 더 열심히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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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 전에 담임으로 만났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아이다.
아이가 한 번 폭발하면 엄마도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했다.
화풀이하러 산에 데려가면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욕하던 아이다.
악을 써가며 소리 지르고 욕해서 친구들이 ‘허걱!’ 하게 만든 아이!

글은 마음을 털어놓게 만든다. 글을 쓰면서 아이가 화를 풀었다.
이젠 크게 화낼 일이 없다고 한다. 동생 머리 꼭대기에 앉아 부려 먹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이에게 “동생한테 잘해줘야지!”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했다.

동생이 우리반이다. 명랑 쾌활하고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는 아이다.
“언니가 괴롭히지?” 하면 “때려주면 돼요!” 하는 아이다. 언니보다 힘이 세서 위축되지 않는다.
언니는 이런 동생을 이기려고 머리를 쓴다. 그게 이 설명문이다.

막내 동생(2학년 남자아이) 글도 보고 싶은데, 우리 반이 아니다.
남매, 자매 관계가 참 오묘하다.

학교에서 월요일마다 방과후 글쓰기 반을 한다. 5학년 4명, 6학년 3명이 온다. 전학생 1명을 빼고 모두 담임으로 가르친 아이들이다. 글도 쓰고, 토론도 하고, 가끔 강가에도 나간다. 12월 14일, 설명하는 글을 써보자고 했다. 6학년 아이가 <사는 법>을 설명했다.

----------- 사는 법

6학년

인생을 사는 방법은 4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물 흐르듯 살기이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을 것이다. 그때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사는 법이다. 어떻게 보면 생각 없이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방법을 쓰면 나타나는 단점은 그 순간만 생각하지 않아 편하지만, 나중에 굉장히 곤란해질 때가 많을 것이다. 이 방법은 딱히 좋아 보이지도 않고 추천하지도 않는다.

두 번째 방법은 뭐든지 신중하게 사는 법이다. 신중하게 사는 방법은 위에 방법과 정반대로 사는 법이다. 그래서 위의 단점이 이 방법의 단점이다. 이 방법의 너무 큰 단점은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매순간 진지하고 신중해서 볼 때마다 답답해서 사람들이 떠날 확률이 높다. 하지만 혼자가 되어도 상관없으면 추천한다. 운이 좋으면 사는 방법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있다. 인간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현명한 선택만 잘한다면 최고의 방법 같다.

세 번째 방법은 긍정적으로 밝게 사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살아서 가장 큰 단점은 다른 사람이 얕잡아 본다는 게 크다. 하도 밝고 긍정적이다 보니 약간 멍청해 보이기도 해서 더욱 그러는 것 같다. 나는 저렇게 사는 게 부럽기도 하다.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이고 내가 아는 방법 중 가장 행복해 보인다. 물론 속마음에 담아놓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볼 때만큼은 밝아서 남에게 힘을 주기도 하다.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방법이다. 내가 다시 태어나 살고 싶은 방법이다.

마지막 방법은 부정적이게 사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모든 걸 비판적으로 본다. 그래서 물건 살 때 효율적이게 살 수도 있지만, 그 물건의 단점만 보기 때문에 물건 사기에 힘들다. 어쩌면 두 번째 방법과 비슷한 방법이기도 하다. 모든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 번 실패를 하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기에 좋지 않다.

(아이에게 한 조언 : 글 마지막에 결론이 있으면 좋겠다.)

아이 겉모습은 아주 시크하다. 대부분의 일을 별 것 아닌 듯 대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혼자 고민한다. 이런 모습을 나는 알지만, 친구들은 모른다. 그래서 이 아이를 무서워한다. 약간 싫어하기도 하지만 내색은 안 한다. 이 아이는 친구들이 자기들을 대하는 태도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쿨하게 반응하면서도 마음에 남는 게 있다.

친구 관계에 고민하지 않고 정말 시크하게, 쿨하게 생각하는 아이는 이런 글을 쓰지 못한다. 아이가 쓰는 글을 잘 읽으면 <진짜 모습,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이 보인다.

참고로, 나는 신중하게 물 흐르듯 산다. ‘신중하게’를 기본으로 살아왔고, 나이가 들면서 ‘물 흐르듯’이 더해진다. 긍정은 잘 안 되고, 부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이_글의_저작권을_인정해_주세요.

#자녀나_학생에게_읽어줘도_되지만_딱_거기까지만!!!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고, 세바시 이슬아 편을 봤다.
뛰어나고, 창의성이 넘치고, 성실하고, 글을 쓰는 마음을 잘 안다.
무엇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이슬아 작가가 소개하는 아이 글이 좋다. 참 잘 썼다.

그래도 난 내가 만난 아이들 글이 더 좋다.
‘누가 더 잘 썼느냐, 어떤 글이 더 좋은가?’ 라고 묻는 건 천박한 질문이다.
내가 만난 아이들 글을 더 좋아하는 까닭은, 내가 아이를 알기 때문이다.
내 글쓰기는 이슬아 작가의 글쓰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슬아 작가는 자기가 이렇게 유명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명해지는 건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슬아 작가가 실력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맥락을 읽으시라.)
이곳저곳 구석구석에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실력자가 참 많다.
방송은 그들 중 일부에게 그들 모두의 영광을 돌린다.
그 영광 모두가 자기 거라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엉터리가 된다.

오늘 당근을 뽑았다.
마트에 파는 크기의 당근은 거의 없다. 당근 소인국이다.
주황 당근은 작고, 자주 당근은 이상하게 생겼고, 노랑 당근은 ~ 하~~
풀 썩혀서 만든 거름만 줘서 그런가? 비가 안 와서 그런가?
비료를 줘야 했나? 초보 농사꾼이라 그런가?

소인국 당근을 거저 준다 해도, 귀찮아서 집에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기른 당근, 오가며 살피고 들여다본 당근은 소인국 당근도 예뻐 보인다.
아이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글이 곧 아이다.
이슬아 작가가 가르친 아이가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이슬아 작가가 아이를 아끼지 않는다면 이렇게 소개하지 않는다.

아이가 글을 잘 쓰게 하려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에게 기대하고, 성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기다리면 글이 나온다.

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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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시골길을 따라 자전거 타고 학교에 간다. 굽이굽이 오십천 강물 따라가는 길이 아름답다. 봄에는 황어 떼를 만나고, 여름에는 새 소리가 화려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백로가 날아와 먹이를 찾는다. 낙엽 지고 어둡게 변한 배경에 새하얀 백로가 눈에 띈다. 꼼짝 않고 물을 바라보며 먹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자전거를 저으며 다리 위로 지나가자 백로가 겁을 내며 날아갔다. 날개 펼친 모습이 멋졌다.

다음부터는 백로가 있는 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조용히 지나간다. 백로가 나를 보지 않게 하려고 몸을 웅크리고 페달을 젓는다. 오랫동안 물을 바라보며 먹이를 기다린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백로가 날아가는 우아한 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나 때문에 놀라 도망가지 않아서 좋다. 백로를 헤칠 마음이 없다는 걸 백로는 모른다. 사람을 보면 두려워 움찔대는 백로의 마음을 이해한다. 백로에게 상처받을 일 없는 내가 맞춰주어야 한다.

학교에서도, 일상에서도 특정한 말이나 행동에 움찔대는 사람이 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건들지 마라. 아프다!' 하는 신호를 보낸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표시다. 아픈 아이가 많다. 아프게 한 사람이 부모여서, 가족이어서 참아야 했다. 자기가 참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견디는 아이도 있다. 아픈 아이를 만날 때마다 ', 참 이상하구나!' 하지 않고 아프구나! 아파서 그러는구나! 네가 아프면 내가 조심할게.’ 해줬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글로 보여주었다.

제목 : 개울가 내 얼굴 
** (5학년)

어렸을 때 사람들이 나보고 엄마를 많이, 무지하게 닮았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가 떨어져 살고 나서 엄마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지금 나는 12살이다.
", 엄마 많이 닮았다!“
그 생각이 나면 엄마가 보고 싶어 개울가로 달려가 본다.
개울물 위로 얼굴을 들이대 본다.
내 얼굴이 보인다. 두 개로 보인다.
한 쪽은 엄마 얼굴 같고 한 쪽은 약간 비슷한 내 얼굴이다.
사람들이 나보고 엄마 닮았다는 게 약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 얼굴이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른다.
아프다. 울고 싶다.
개울 속 내 얼굴을 보며 상처 나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아이 마음을 읽는 게 좋았다. 시를 읽으며 기뻤고, 슬펐고, 놀랐고, 안심했다. 일기에 댓글을 써주며 마음을 나누었다. 다달이 문집을 만들며 아이들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외계인 같던 아이들이 점점 사랑스러워졌다. 아이들이 준 글 선물을 학교에서 외계인을 만나다1부에 담았다.

2016, 오랜만에 1학년 담임을 했다. 얘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아이들 마음을 살피며 지내왔는데 이번에는 정말 외계인을 만난 것 같았다.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아이 한 명 한 명을 이해하게 되었다. 1학년과 1년을 보내면서 외계인을 알아내는 방법 10가지와 외계인을 다루는 방법 10가지를 깨달았다. 이 내용을 학교에서 외계인을 만나다2부에 담았다.
외계인을 알아내는 첫 번째 방법을 소개한다.

외계인을 알아내는 방법 1. 외계인은 순간을 산다.

수학 시간입니다. 수학책을 가져오세요.”
선생님, 수학책이 없어요.”
어제도 없었잖아. 집에 가서 찾아보라 했는데 찾아봤니?”
아니오. 잊어먹었어요.”
~

다음 시간이다.
국어 시간입니다. 국어책을 가져오세요.”
선생님, 국어책이 없어요.” 수학책 집에 두고 온 그 아이다.
어제 도서관에 가서 공부할 때 가방에 꼭 넣으라고 했지요.”
.”
그런데 책이 어디 갔어요?”
귀찮아서 그냥 놔두고 왔어요.”
~

국어 시간이 끝나고 우유를 먹었다.
여기 우유는 누가 먹다 남긴 건가요?”
이거 네 우유잖아.”
나 아니냐. 다 먹었는데……또 그 아이다.
딱지치기 구경하면서 네가 여기서 먹었잖아.”
, 맞다.”

외계인은 자주 잊는다. 솔깃한 일이 생기면 자기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완전히 잊는다.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외계인에겐 현재 이 순간만 있다. 과거를 모르고 미래도 모른다.
어제도 그러고, 그전에도 그러더니 계속 왜 이래?”(과거)
계속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뭐가 될래?”(미래)
과거와 미래를 들먹여도 소용없다. 외계인의 귀에는 바로 이 순간외에는 들리지 않는다.
지구인은 외계인의 이런 습성을 이해하지 못해 화를 낸다.
내가 우유 다 먹으라고 했지?”
책을 가방에 넣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그럼 외계인은 왜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화를 내는 모습이 무서워서 일단 미안한 표정을 보인다. 그러나 내일 우유 먹을 때 또 똑같이 행동한다.

탄광마을 학교에서 외계인 34명을 가르쳤다. 외계인들이 날마다 내게 묻는다.
선생님, 우유 먹어도 돼요?”
나한테 묻지 말고 그냥 먹어. 알았지?”
다음날 또 묻는다. “선생님, 우유 먹어도 돼요?”
얘들아, 잘 들어. 우유 먹어도 되는지 묻지 말고 그냥 먹어. 이제부터는 묻지 말고 먹어라!”
또 묻는다. “선생님, 우유 먹어도 돼요?”
그래서 우유를 가져오자마자 칠판에 크게 썼다.

우유 먹어!”

한 외계인이 다가온다. “선생님 우유 먹어도 돼요?”
손가락으로 칠판을 가리켰다.
~ 그렇구나!”
다른 외계인이 다가온다. “선생님 우유 먹어도 돼요?”
또 손가락으로 칠판을 가리켰다.
~ 그렇구나!”
다른 외계인이 다가온다. “선생님 우유 먹어도 돼요?”
, 여기 서서 우유 먹어. 그리고 친구들이 우유 먹어도 되는지 물으면 칠판에 써놨으니 우유 먹으라고 알려줘!” 했다.

외계인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선생님, 우유 먹어도 돼요?”
내 옆에 서 있던 외계인이 대신 말한다. “칠판을 봐. 우유 먹으라고 써놨잖아.”
다른 외계인이 묻는다. “선생님, 우유 먹어도 돼요?”
또 다른 외계인도, 다른 외계인도 계속 묻는다.
옆에 선 외계인이 폭발했다.
, 선생님이 아까 전부터 우유 먹으라고 했잖아. 칠판에 있잖아. 우유 먹으라고 했는데 왜 자꾸 물어?”
오잉!”
아까 자기도 나한테 우유 먹어도 되는지 물었으면서 친구를 외계인 취급하고 있다. 이 외계인은 조금 전에 자기가 무얼 했는지 잊었다.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난 외계인을 오랫동안 연구했기 때문에 이걸 알고 있다. 그래서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누가 우유 쏟았어요?” 하고 묻는다. 혼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 많은 외계인이 고백한다.

한두 개 남은 우유가 누구 것인지 밝히는 건 더 어렵다. “누가 우유 안 먹었어요?” 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외계인은 자기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순간을 산다. 그래서 각오해야 한다. 우유 먹어도 되느냐고 물을 때, 외계인이 또 우유를 쏟을 때, 우유를 안 먹고 남길 때, 화를 내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교사로 산다는 것』, 조너선 코졸, 양철북

『1984』, 조지 오웰, 민음사

 

대학에 들어갈 때, 철학책 읽고 토론하며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제가 아이들 앞에 설 때 본으로 삼을만한 교수님을 강의실에서 만나기 원했습니다. 삶을 나누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할지 함께 고민하는 진짜 스승을. 하지만 제가 대학에서 만난 교수님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저 권위만 내세우는 직업인이었습니다. 윤리의식이 모자란 사람, 고등학교 때보다 못한 수업을 하는 사람, 편협한 생각으로 사람을 옥죄며 학점으로 위협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지 않고 강요하면 아예 무시했습니다.

교사가 되고나서 본받기 싫은 교사를 많이 만났습니다. 본받을만한 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는 10년도 더 지나 좋은교사를 만나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교육과정과 교과서도 권위에 도전하는 제 마음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가끔 만나는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내용을 핑계 삼아 교과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재구성했습니다. 말이 재구성이지 내 멋대로가르쳤습니다. 그때 아이들과 좋은 추억이 많지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미안한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권위를 의심하는 제 성향 때문에 저는 국가가 요구하는 내용은 일단 내 가치관을 통과하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육과정이 편협하기 때문에 편협한 생각을 가진 제 판단이 오히려 올바를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잘못된 제 생각과 태도를 고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타성과 무기력을 가르치지 말자.

조너선 코졸은 권위에 대한 반항아입니다. 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통찰과 분석으로 교육계의 촘스키로 불립니다. 미국의 차별적인 교육과 사회 불평등에 맞서 싸워온 교육자이며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 비판 지성인입니다. 그는 학교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르침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생각을 주입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권위를 계속 유지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교과서를 만들었다는 증거를 밝힙니다. 학교가 진실, 아름다움, 위대한 영혼의 추구, 인간적인 가치……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 말하지만 실상은 포장만 요란하지 내용은 주는 대로 받아들이라고 주입한다는 겁니다.

미국 교과서 역시 적당한 사실만 알려주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 식으로 기술되었나 봅니다. 코졸은 올바른 가치를 위해 정부에 대항했던 인물들이 사라진 교과서를 비판합니다.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가졌던 링컨의 발언은 삭제하고 정직한 에이브만 보여줍니다. 파업참가와 단식, 투옥을 마다하지 않은 도로시 데이처럼 비범한 의지를 가진 여성들은 전복적인 인물로 취급해서 교과서에 싣지 않습니다. 헬렌 켈러가 열심히 노력해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이야기는 실으면서 노동착취가 일어나는 빈민가를 방문하고 탐욕스러운 지도자와 기득권층에 대해 도전한 내용은 싣지 않습니다. 역사, 경제, 정치, 철학, 사회질서, 도덕적 가치 모두 취사 선택하고 적당히 편집해서 그들이 알려주고 싶은 내용만 교과서에 남습니다.

교사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은 저자가 30년 전에 썼습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도로시 데이나 헬렌 켈러가 교과서에 실릴 수 있지만 미국 우월주의와 사회질서 유지 위주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교과서로 배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히틀러의 명령을 철저히 따른 아돌프 아이히만의 순종적인 태도는 독일 공립학교에서 길러졌다고 합니다. 잘 통제된 공립학교에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면, 아이히만처럼 지배자들이 요구하는 낮은 사고력과 높은 애국심을 갖춘 시민이 된다고 합니다. 코졸은 교사가 물들지 말고 올바로 가르치라고 합니다. 상처 받기 싫어 세운 보호막에서 내려와, 생각을 바꿔주는 수업을 하라고 합니다. 언제나 중도에 가까울수록 진실하다는 믿음을 버리고 올바른 것이라면 극단을 선택할 줄 아는 학생을 길러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당시 사회에서는 극단주의자였다면서……

저자는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라고 말합니다. 정말 공감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교사가 수업 시간에 눈빛으로 메시지를 뿜어내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며 금권을 독점한 지배세력에게 순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사가 이런 모습으로 가르치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지배자의 극단적인 모습

1984를 읽기 전에 저는 조지 오웰을 유명한 작가로만 생각했습니다. 이 책 역시 동물농장처럼 미래사회를 재미난 우화로 표현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1984빅 브라더로 불리는 절대권력을 가진 통치자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을 표현합니다. 곳곳마다 텔레스크린(감시도구로 CCTV 기능에 스피커 역할도 하는 도구)이 있어 사람들을 감시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말도 흘러나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다가 잠시 다른 일을 위해 일어선다면 ○○선생, 어디 가는 거야! 마저 다 읽고 가야지!”라는 말이 곧바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인공 윈스턴은 과거 기록을 조작하는 부서에서 일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매달려 있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1112월까지 주가를 3000으로 만들겠다고 대통령이 말했는데 1700밖에 안 된다고 가정합시다. 주가 3000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으면 1700인 지금은 문제상황입니다. 그래서 3000이라고 말한 기록을 1700이라고 말했다고 조작합니다. 과거의 모든 기록(신문, 방송자료, 논문, ……)을 주가 1700으로 바꿉니다. 지금이야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당장 온 나라가 들끓으며 대통령 탄핵을 말하겠지만 그 사회는 이런 마음조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나친 통제와 감시, 조직화된 조작으로 사람들이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조작인지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득권층이 가장 원하는 모습이지요.

조지 오웰의 천재성이 드러난 부분은 3부입니다. 윈스턴이 왜곡과 조작으로 세워진 나라를 뒤엎기 위해 과거의 진실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발각되어 잡힙니다. 고문과 회유, 협박과 위협에 갈등하는 윈스턴이 결국 신념을 포기하고 사회에 적응하는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윈스턴을 고문한 오브라이언과 윈스턴이 대화하는 내용이 절묘합니다. 오브라이언은 적대자를 무조건 고문해서 죽이지 않습니다. 단순한 위협과 고통은 순교자를 만들어 반대자들을 더 격렬히 타오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극렬히 반대하다 죽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합니다.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여전히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으로 놔두지도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의심하고 결국은 자신이 믿었던 진실이 한순간의 몽상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조지 오웰이 극단적으로 표현한 사회는 사실 기득권층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전략을 과장해서 보여준 겁니다. 기존질서를 의심하지 말고 순응하여 살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것을 믿으면서 무엇이 잘못인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의심할 능력마저 빼앗아 갑니다. 시험 잘 보고 좋은 성적 받아서 돈 많이 버는 직장에서 여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 다른 건 신경쓰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

조너선 코졸 역시 정부가 교육과정을 통제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충실한 일꾼들만을 길러내려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위험한 매체는 방송입니다. 2-3살 아기일 때부터 텔레비전을 보며 수많은 광고와 이미지에 노출된 아이들이 결국은 방송의 노예, 방송의 제자, 방송의 아들딸이 됩니다. 사라는 물건을 사고, 하라는 행동을 하며,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충실한 노예들이 됩니다. 가끔씩 이상한 과거 경험에 의해 저처럼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생길지 모르지만 대세를 거스르긴 어렵습니다.

제가 하는 독서모임에서 중학생들과 1984로 독서토론을 했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부르키나파소를 궁핍으로 몰아넣은 프랑스 지배층의 음모를 살폈습니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한 미국의 행동을 따져봤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두려움과 우리가 살아갈 미래사회가 좋아질지 나빠질지 토론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빅 브라더인지 물었더니 아이들은 성적, 경쟁, 경제논리, 부모, 방송, 국가를 꼽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말했죠. “너희들처럼 생각하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1984를 바꾼다. 이 작은 독서모임에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두 책 읽으시고 같은 소망을 품기를 바랍니다.

2020년 2월에 토론하고 덧붙인 생각

『교사로 산다는 것』을 처음 읽었을 때, 들리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9년만에 다시 읽으며 <자기만의 수업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전부터 나라는 인격에서 나와, 아이라는 인격을 만나는 나만의 수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멋진 아이디어, 감탄을 자아내는 도구를 사용해서 아이들을 사로잡는 수업은 아닙니다. 아무 도구 없이, 온전한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수업입니다. 조금씩 배우고, 변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만의 수업을 방해하는 세 가지 걸림돌이 생각납니다.

시선.
전 동네 곳곳, 골목과 언덕과 개울을 다니며 수업합니다. 우리 반만 뒷산에 가고, 운동장에서 비 맞으며 수업하면 주위 분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 눈치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반만 다달이 문집을 내고, 우리 반만 현장학습 가고, 우리 반만 책상 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전 그게 좋아서 선배들이 주는 눈치를 이겨냈습니다. 그때 시키는 대로 했다면 제 수업의 큰 부분이 사라졌을 겁니다.

교과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교과서대로 해!” 사실 시키는 대로 하면 편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시킨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면 됩니다. 교과서만으로 가르치면 안전합니다. 그러나 저는 코졸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코졸의 책을 읽기 전부터 교과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국어 글쓰기 내용은 많이 바꿔서 가르쳤습니다.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주제를 버리고, 아이들 삶에 바탕을 둔 글감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이야기’를 쓰게 했습니다.

막연한 생각.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교과서를 무시하면 무얼 할까요?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 수업을 분석하고 비판할 점을 찾기는 쉽지만 나만의 수업을 만드는 건 어렵습니다. 막연한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지 찾는 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게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찾습니다.

교사로 산다는 건, 아이들이 자기만의 길을 걷도록 안내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정해진 길, 사람들이 성공이라 부르는 길만을 따르게 하는 교육이라면
학원에만 다녀도 되지 않을까요?

3. 2011-11월 좋은교사 소개 글 중의 한 문단
저자는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라고 말합니다. 정말 공감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교사가 수업 시간에 눈빛으로 메시지를 뿜어내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며 금권을 독점한 지배세력에게 순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사가 이런 모습으로 가르치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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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 《오스 기니스의 저항》, 난이도 ★★★★
오스 기니스, 《소명》, 난이도 ★★★
오스 기니스, 《오스 기니스, 고통 앞에 서다》, 난이도 ★★

전 백만장자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페이지가 백만 쪽이 넘거든요. 역사, 정치, 사회, 문화, 환경 가리지 않고 읽습니다. 성경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소설과 동화책도 꽤 읽습니다. 사람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습니다. 고민이 생기면 제 안에 있는 글과 생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20대에 해결하고 싶었던 고민은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교사로의 부르심을 확인한 뒤에는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소명

30대에는 고통을 끌어안고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고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통받는 아이들을 만났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홀로코스트, 순교자, 질병과 역경을 끌어안고 끙끙대는 사람들 이야기를 끊임없이 읽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끝내지 못할 고민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 앞에 서 본 사람의 말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고통 앞에 서다

40대가 되어서는 불의로 자기 배를 채우는 기득권층,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조, 자기들이 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엉뚱한 해결책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보는 게 힘듭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생각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방송매체가 심어 주는 기준을 왜 그대로 따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잘생기고 예쁜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이 잘 팔리는 까닭을 모르겠네요. 그 제품을 써서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가진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받는 광고비 때문에 제품 가격만 오르는데도 사람들은 연예인들이 광고한 제품을 찾습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세상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가정생활, 자녀교육, 직장생활, 이웃관계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하다가 예배당에서만 하나님 말씀 내세우면 되는 건가요? 세상 문화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종교 행위에만 몰두하는 게 불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의 영적 상황에 대해 갖는 관심의 10분의 1이라도 세상에 만연한 시대정신을 깨닫는데 기울인다면, 사회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저항

오스 기니스가 세 가지 고민에 대해 대답합니다. 1998년에 소명, 2005년에 고통 앞에 서다, 2016년에 저항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

오스 기니스는 소명을 궁극적인 존재 이유(1장 제목)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신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소명은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사제와 수도사, 수녀들에게 한정된 말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소명이 평범한 일상에 정통한 사람들의 것으로 돌아왔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소명이 점점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일상적이고 비천한 일에 평범함의 광채를 주는 것(304)이라는 뜻이 희미해지고 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방에서 돈 얘기다. 시급, 월급, 전세, 월세, 여행비, 학원비, 통신비……. 돈이 점점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평범한 일에서 특별해야 하고 더러운 거리, 비천한 사람들 중에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314).”는 말은 의미를 잃고 희미해진다. 더구나 이런 태도는 5분 내에 배울 수 없다고 하니 더욱 마음이 멀어진다. 그래서 좁은 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생각하기 어려운 길.

소명에는 소명으로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가 많다.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했던 본회퍼, 국가 재정 수익의 3분의 1을 충당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윌리엄 윌버포스, 고든 장군, 아브라함 카이퍼, 아더 번즈……. 이들을 사례로 들어 감정을 자극하는 가벼운 책은 아니다. 생각보다 읽기 어렵다. 그렇지만 지금이야말로 부르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이다.

고통에 대한 민감성

고통 앞에 서다에서 오스 기니스가 인용한 책은 대부분 히틀러가 만든 포로수용소에서 겨우 살아난 유대인들이 썼다. 30대에 그 책들에 빠져 살았다.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2장 제목), 재난과 인생(3), 우리의 가장 큰 원수(4)인 인간의 존재를 고민하며 살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5),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6),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7)는 지금도 나를 짓누르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고통을 다룬 책에서 빠지지 않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이라면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니까.

악과 고통의 이유를 묻는 시도가 그릇된 비판으로 발전하는 순간, 우리는 마녀사냥과 비슷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즉 우리가 처한 상황의 이유를 탐구할 때, 우리는 그릇된 설명의 방법을 찾다가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 또는 하나님을 비난하는 데로 귀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366).” 고통의 원인을 사람이나 하나님께 돌리고 비난으로 화를 푸는 게 자연스럽다.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이다. 그런다고 고통이 해결되지 않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한다.

오스 기니스는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의화단 사건 때 귀신이 붙었다고 알려진 다락방에 숨었다. 바퀴벌레와 쥐가 득실대고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 곳에서 6일을 숨어 지냈다. 횃불을 든 폭도들이 지붕에 올라가 불을 지르려 했고 다락문을 칼로 쑤셔댔다. 칼날이 조금만 기울어도 할아버지는 죽었을 것이다. 오스 기니스의 부모는 강도 떼를 피해 달리고, 공산주의 폭도에게 친구들이 죽는 걸 보고, 일본군의 포탄 공격을 피하고, 난징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기억을 함께 나누었다. 사람들이 고통의 원인이 된 사건들. 그러나 오스 기니스의 부모가 겪은 가장 잔인한 고통은 허난성의 기근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킨 것 같은 고난.

오스 기니스는 고통에 대한 일곱 가지 질문으로 책을 썼다. 다섯 번째 질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이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문제(13), 용서의 문제(14), 저항의 용기(15)로 질문에 대답한다. 여섯 번째 질문에서 인간의 한계를 논한 뒤에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악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이 존재하지 않을까?”

고통에 대해 고민하는 분에게 꼭 읽어 보라고 권한다. 더불어 고통 앞에 서다에서 언급된 책이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

저항이라 하면 보통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 잘못된 권위나 사회 구조에 맞서는 행동을 생각한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서거나 1인 시위를 하는 행위를 생각한다. 오스 기니스는 그리스도인이 먼저 사상의 저항, 사고 체계의 저항,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스 기니스는 우리가 사는 시대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한다고 진단한다.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해서 평안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체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현대 사회가 내세우는 소리가 불편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얄팍한 지식으로 세상을 얕보며 손쉽게 승리를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단순하지만 유일한 논리를 내세운다면 모를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승리를 선포한다. 세상이 듣고 비웃을 논리로 자기들끼리 만족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는 세상이 주입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 건 승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끼리 모인 곳에서, 우리끼리 하는 활동에 제한되지 않는다. 날마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세속주의, 현대주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는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시대 정신에 맞서야 한다.

저항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 이것이다.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을 때, 사람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고수했다. 하지만 유대인으로 사는 게 쉬워지자 사람들은 유대인이기를 포기했다. 전 지구적으로 이 시대 유대인의 중대한 문제가 이것이다(25).”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살아갔다. 그러나 물질이 풍부해지고 누릴 것이 많아지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진다. 주일에 어디에 있느냐만 다를 뿐 그 외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진다. 이렇게 살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

저항하려면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에서 싸워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오스 기니스는 신앙의 박해보다 현대성의 유혹이 더 위협적이라 말한다. 지금 세상은 세속주의, 과학주의, 자연주의 세계관, 기술 발달, 정보화 시대, 상대주의에 끌려가고 있다. 권위는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고 선택은 그저 선호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홀로 떨어진 개인이 되어 서로에게 무관심해졌다. 또한 초자연적 영역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온통 세속적 영역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선택하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면 하나님을 전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온통 이 땅에서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사는 데만 관심을 갖는다면 하나님 나라가 귀에 들릴 리가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역은 다름 아니라 현대성에 대한 저항이어야 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 시대정신으로 다가온다. 21세기의 우상은 금은동철로 만든 형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는 사고방식이라 생각한다. 우리 생각과 몸이 현대주의에 푹 젖어 있으면서 어렴풋하게 사단과 우상을 생각한다면 싸움이 안 된다. 이 책은 읽기 어렵다. 시대 정신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글로벌 세상의 하늘에 몇 개의 태양이 있는지(3장 소제목)’ 소개하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끙끙대야 한다. 특히 2~4, 교회를 공격하는 악의 정체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낯선 내용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우리 아이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종교 언어가 통하는 곳에서 종교 언어로 말하며 우리끼리 감상에 젖는 한순간의 활동이 아니다. 날마다, 우리가 걷는 모든 곳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시대정신에 맞서며 살아야 한다.

신인류의 출현

신규 교사일 때 예수님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마음이 앞섰지만 복음을 제대로 몰랐던 때라 내가 전한 복음은 이원론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어요. 나를 싫어하는 아이도 복음에는 진지하게 반응했죠.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은 복음을 더 쉽게 설명합니다. 학급을 잘 이끌어 나를 싫어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복음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치 대형마트에서 물건 담듯 하나님을 자기 가방에 담아 필요할 때 꺼내는 분으로 인식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신인류입니다. 제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고체계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명확한 부르심, 감당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하나님 뜻으로 이해하고 견뎌내는 마음,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소명으로 고통 앞에 서저항하며 살아야겠죠.

모임에서 함께 읽고 나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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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수업을 가끔 강원도교육청 블로그에 올립니다. 
<미션 책놀이>로 했던 독서런닝맨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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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놀아요 <독서런닝맨>

#7가지_미션_해결하기 #교직원도_함께해요​​​2학기 독서 주간을 운영했습니다. 미로초등학교 3~4학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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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다니며 했던 미션 책놀이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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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8일 아침에 사울의 실패를 묵상하다가 쓴 글.

나를 알고,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나를 모를 때는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우쭐댔고, 내가 못 하는 일을 하면서 좌절했다. 나로 살지 못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했다. 학부모가 보는 나, 동료 교사가 보는 나,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는 나로 살아가려 했지만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는 내가 결정했다. 내가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고 발버둥 쳤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는 노력조차 온전한 내가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이름으로 나를 내세우려는 시도였다. 정말 자기 자신으로 살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내 생각, 내 기준도 의식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연스레 살아간다. 조금씩 이렇게 되어간다. (이렇게 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어느날 문득 내가 변했음을 느낀다.)

지금은 누군가를 의식하는 태도가 많이 줄었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독서 모임을 인도할 때 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아직도 몸에 밴 습관이 드러나서 신경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우쭐대지 않고, 못 하는 일을 해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좋은 책의 가치를 몰라보고, 인기에 영합하는 책을 좋아해도 그러려니 한다. 나는 나로 살아간다.

오랜만에 책뜰안애 독서 모임을 했다. 노자의 도덕경 81장을 ‘가르침과 배움’으로 풀어 쓴 책인 『배움의 도』를 나누었다. 참여한 분이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했더니 친구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했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는 친구에겐 <배움의 도>가 보이지 않았다.

첫째가 책 내용이 마음에 들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했다. <배움의 도>로 이끄는 사람,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가르쳐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했다. 함께 한 분들이 첫째에게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두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배움의 도』를 나누면서 첫째 눈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첫째도 나를 바라봤다. 가끔은 눈물이 맺힌 채 나를 보았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았다. 첫째도 세상의 흐름, 10대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

난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다. 나처럼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 없어서 우쭐댔지만 사실 외로웠다. 주장과 자랑은 한순간이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면서 느끼는 외로움은 길~고 끊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이들도 외로움을 느낄 것 같았다. 책 이야기는 집에서나 하고, 학교에서는 자기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친구들이 가볍게 조사해서 발표할 때 얘들은 깊게 생각하고 발표했다. 학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감탄하며 다가온 친구가 있었지만 잠시뿐이었다. 가치관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둘째는 아이돌도 좋아하고(카이사르와 살라하딘보다 좋아하진 않지만)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그러나 진짜 친구는 언니밖에 없었다. 둘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몇 시간씩 이야기하며 노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첫째는 조용히 혼자 지냈다. 외롭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만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으로 사는 아이에게 외로움을 이길 방법을 말하기 어려웠다. 그건 자신이 직면해서 ‘이겨내거나’, ‘함께해야’ 한다. 넘어서든지 친구가 되든지 해야 한다.

10달 전에 『배움의 도』를 나누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제야 모였다. 모임하다가 책을 볼 필요가 있어서 내가 가진 책을 건넸더니 핸드폰을 보여준다. 책 전체 내용을 전부 컴퓨터에 입력했다고 한다. 고3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며 『배움의 도』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아이라니~!

‘너답다.’ 고3학년 때도 공부보다 글쓰기에 더 신경 쓴 아이! 자기 자신으로 살면 좋겠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을 가느라 외롭더라도.

#바보온달을_쓴_이현주_목사님이_번역한_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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