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탄광마을 지역아동센터 15명과 수업한 첫날, 책 놀이를 4시간 했다.
아이들이 정신 나간 듯 좋아했다. 언제 또 오느냐고 물었다.
다음 시간에 책을 읽고 만났다. 내용 파악 활동을 할 때까지는 좋아했다.
그러나 독서 토론은 어려워했다. 아직 토론할 수준이 아니었다.
1. 토론 수업
2020년 1월 10일, 서울에서 온 지역아동센터 다섯 아이와 독서토론 수업을 했다.
(독서 수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재능기부를 했다.)
아이들이 내용을 잘 알지만 책을 깊이 읽거나 토론한 적이 없다.
적당히 쉬운 토론을 해도 되겠지만 굳이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가게 하려고 조심스레 질문했다.
기다리고, 묻고, 대답을 듣고, 다시 물었다.
2. 책 내용과 연결하기
『빨강 연필』에서 재규는 엄마의 도움을 의지해서 글을 쓴다.
재규는 계속 글쓰기로 상을 받았고, 상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민호는 부모가 별거 중이다. 의지할 대상이 없다.
글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아이에게 빨강 연필이 나타난다.
‘나를 의지해라. 그럼 성공하게 해줄게~’
민호는 빨강연필로 글을 쓴다. 놀라운 성공이 뒤따른다.
그러나 민호는 불편하다. 빨강연필이 거짓을 쓰게 하기 때문이다.
3. 아이들 마음에 말하기
스스로 글을 쓸 마음을 갖기까지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
아이들이 의지하는 것이 글을 계속 쓰게 하는지 방해하는지,
글을 쓸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려고 했다.
그냥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토론을 통해 깨닫게 하려고 했다.
한 마디로 끝날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질질 끌었다.
토론하는 내내 (마음속으로) 돌파구가 될 질문을 썼다 지웠다 했다.
4. 수업하고 나서
몇 년 전이라면 ‘이런 토론’을 하고 실망했을 것이다.
나를 질책하거나, 아니면 아이들을 탓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 반, 다른 학년, 다른 학교, 부모와 자녀, 곳곳에서 수업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알맞은 속도가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아이들이 자기 입으로 말한 내용이 마음에서 곰삭으면 언젠가~
내가 하려던 말을 깨닫는 날이 오겠지.)
그래서 독서감상문은 5학년(남자아이는 적어도 6학년)이 되기 전에는 쓰지 말라고 말한다.
차라리 독서논술이 쉽다. 자기주장은 어린아이도 하니까.
5. 하루 뒤에 든 생각
내 수업을 보고 ‘독서전문가라더니 별로네~’ 해도 괜찮다.
부모나 교사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내 눈에는 보이니까.
아이가 자라는 속도에 맞는 영양분을 주어야 하니까.
책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면
지금 쓴 글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지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아이와 같은 속도, 아니 더 빨리 크게 하려는 분이 많기에
아이가 자라는 속도에 맞는 영양분을 주어야 한다는 글을 남긴다.
책으로 놀이를 해줘야 할 때가 있고,
내용 파악을 좋아하는 나이가 있고,
토론하고 글을 써야 하는 때가 있다.
그걸 함부로 판단하고 강요하거나, 학원에 맡기면 망친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한 작품을 망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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