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몸은 피로하고, 마음은 공허하고, 영혼은 곤핍하다. 저 혼자는 가슴을 후벼파는 외로움에 절절매면서도, 이웃을 향해 이유 없는 적개심을 드러내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서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그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허기와 분기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니 분기탱천하고, 결국 먹은 것이 없으니 헛헛한 속을 달랠 길 없다. 그러다 보니 슬픔, 자조, 분노원망과 불편의 감정이 충만하다.>

글 쓰는 그리스도인에 나오는 내용이다.

현대인은 피로하고 외로워한다. 해결 방법을 찾지만, 아픈 마음이 찾은 방법은 잘못된 방법일 때가 많다. 그 방법을 따르면 허기와 분기를 돋운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아무리 먹어도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이럴 때 드는 마음을 저자(김기현)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산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나,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미친 듯이 헤매도 어쩌지 못하는 내가 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정당한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도 상처받는다. 마음이 공허함을 느낀다.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한다. 그래도 아픔이 낫지 않는다. 많은 어른이 아이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

내 마음에 상처가 있다. 상처를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잘 살폈다. 20대에 심리학 책, 슬픔과 고통에 관한 책을 마구잡이로 읽었다. 이런 책들이 내 허기를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 마음에서 관계가 어떻게 왜곡되는지, 관계가 상처를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아이들 상처가 보였다. 낫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글쓰기이다. 김기현 목사님도 글 쓰는 그리스도인에서 글쓰기가 회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앞서 밑줄 그은 내용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감추고 싶고, 덮고 싶고, 지우고 싶고, 잊고 싶은 옛 기억들을 살려내 일기장을 채우면서 흐트러진 내면을 정돈하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용서한다. 하나님을 경험한다.>

 

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글의 치유 효과를 누리는 사람은 일부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싸워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이때 싸움의 기술이 필요하다. 제목도, 내용도 모두 싸움하는 기술을 말한다. 몸으로 때리고 피하는 기술이 아니다. 몸보다 마음을, 말을, 상황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글 쓰는 그리스도인도 그랬지만 싸움의 기술도 남다른 통찰력이 드러난다. 상황 분석이 탁월하다. 인간의 심리 중에서 싸움에만초점을 맞춰 재미있다. 심리나 상담 책을 읽지 않은 분이 읽으면 놀랄 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분이 읽으면 이렇게도 보는구나!’하며 재미날 것이다. 한 구절만 예로 들겠다.

<치약을 아래서부터 짜느냐 위에서부터 짜느냐 하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고는 한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가 치약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 것이다.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는 내가 내 삶을 통제하는 방식이 상대방이 그의 삶을 통제하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각자의 오래된 습관이 건드려지기 때문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각자의 오래된 습관이 건드려지기 때문이며, 그 싸움이 점점 커져서 급기야 서로의 인격에 대한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기 방도 하나 못 치우면서 무슨 큰일을 한다고!” “밖에서는 그렇게 고상하게 굴면서 옷장 상태는 그게 뭐야? 어떻게 그렇게 겉 다르고 속 달라!” 이런 종류의 말을 주고받으며 싸우고 있다면, 이것은 집 안 정리나 청소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리나 청소 여부를 서로의 인격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정리나 청소 여부가 상대방의 성실함이나 됨됨이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면, 이들 사이에서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어떻게 함께 쓰는 공간을 정리하고, 청소할 것인가)를 협의하기는 더 이상 어렵게 된다. 그러니 집 안 정리나 청소 상태로 싸우게 되더라도 그것이 인격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98~99)

아무튼 정말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다. , 위 인용문에서 습관이 나온다. 그래서 지금은 HABIT(습관)을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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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생각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일컬었다. 이슬람에 넘어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무슬림과 싸우는 사람을 말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절에 다니는 사람을 불교인이라고 말하듯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사람조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 그래요?’ 한다. ‘, 그래요?’너도 그놈들이랑 똑같은 거 아냐?’일 수도 있고, ‘거길 왜 다닐까?’일 수도 있다. ‘나도 교회 다니지만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이기도 하다. ‘의외인데요. 교회에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있네요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2천 년 전 그리스도인은 미친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미쳤는지 죽는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믿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일 양식이 없으면 금식해서라도 가난한 사람을 먹였다. 지금은 , 그래요?’의 대상이 되었다.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도 많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양보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금한다. 선교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가난한 나라 아이와 일대일 결연을 맺어 후원한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직장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참는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다.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으로 괜찮게 살아간다. 이런 사람이 되자고 설교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괜찮은 교회라고 칭찬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그리스도인이 정말 이런 모습일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규정했기 때문에 말씀을 오해한 건 아닐까?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의 저자인 쉐인 클레어본은 우리가 괜찮게 보는 모습이,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 모습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버리고 나를 따르라한 말씀을 그대로 행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하셨으니 노숙자와 함께 자고 창녀를 집에 데려와 환대한다.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나를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성경 공부와 찬양을 하며, 기독교 문화에 젖어 살았다. 스스로 기독교적인 것들로 피둥피둥 살이 쪘다고 말한다. 그만 하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박살내셨다. 물론 그도 단번에 소유를 다 팔아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진 않았다. 친구가 노숙자를 찾아갈 때 두려워하며 따라갔다. 친구가 노숙자와 잠을 잔다고 말할 때 턱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친구를 따라갔다. 두려워하며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걸 안 뒤에는 돌아서지 않았다. 복음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그들의 짐을 나눠지는 거라고 믿었고 믿은 대로 행동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쉐인 클레어본은 이를 증명하고 증거한다.

그는 폐쇄된 성당에 기거하던 40명가량의 노숙자들을 퇴거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해 싸웠다. 믿음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찾아 테레사 수녀가 있는 캘커타에 가서 나환자를 돌보았다. ‘여러분의 캘커타를 찾으라는 테레사 수녀의 말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형제를 위해 수고하는 고귀한 대의도 좋지만, 부유함에 찌들어 가난한 이웃을 이웃으로 두지 않는 미국에서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은 쉽지 않다. 편안하게 살면서 가끔 노숙자를 찾아가고 휴가 기간에 캘커타와 같은 곳을 찾으면 굉장히 만족스럽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들을 멸시하며 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쉐인 클레이본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꺼리는 곳까지 나간다.

심플웨이 - 소박한 길

예수님과 선지자들이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행동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병자를 고치는 선에서 멈췄다면 환영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에 일하셨다. 쉐인 클레어본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따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자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심플웨이라는 무소유 공동체를 설립한다. 노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놀아준다. 여기서 멈추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복음을 좀 더 나은 삶, 양보하는 삶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법정에 출두하고 공항에서 보안요원에게 심문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자신에게만 적용하고, 복음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축소하지 않았다. 그에게 공동체는 내 집, 내 교회, 내가 함께 하는 노숙자 모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적당한 크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칭찬과 박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더욱 지나치게 행동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바그다드에 가서 미군이 폭격하는 동안 가정과 병원을 방문한다. 그는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전쟁을 거스르기 위해 이라크에 갔다. 법률에 대항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을 계속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행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정치와 사형제도, 국가 정책에 반대해서 불편한 일을 겪더라도 복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라고 한다.

저항할 수 없는 혁명

책의 원제는 <irresistible revolution>이다. 쉐인 클레어본이 예수님을 믿어온 행적을 주로 다루었으나 자서전은 아니다. 원제처럼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을 다룬 책이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복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말한다. ‘내가한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말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나처럼 행동하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함께 이 일을 행하자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 나서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릴 적에 위인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대단하게 태어나서 3살에 천자문 끝내고 7살에 호랑이 잡고 10살에 과거에 합격한 영웅 앞에서 느낀 기분을 다시 느낀다. 예수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된 것 같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서 이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라거나 이 사람 괜찮다고 말하기 부담스럽다. 이럴 때 찾아내는 괜찮은 도피처는 교리의 오류이다. 쉐인 클레어본처럼 행동하면서도 잘못된 교리를 전한 이단을 들먹이며 위험하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면 공격해서라도 무너뜨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그가 죄인이라고 몰아세워야 한다. 교리나 신학으로 따지면 저자도 걸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고 싶지 않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이 자꾸만 떠올라서 따질 수가 없다. 그만큼 저자의 삶과 말과 생각이 혁명적이다. 예수님이 역사에 일으킨 사랑의 혁명이 다시 생각난다.

쉐언 클레이본은 자신을 영웅으로 말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이며, 이 혁명은 행함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제자는 행하면서 배운다.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정말 귀하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귀하다.

모든 책은 읽는 이의 생각에 무언가를 더해준다. 삶의 방향과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꿔주는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성경 외에 내 전부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책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그런 요구를 한다. 그청년 바보의사, 난 당신이 좋아, 지금, 행복합니다처럼 강한 충격을 준다. 지금까지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모습이 정말 괜찮은지 묻는다. 지금이라도 내 소유를 다 팔고 쉐인 클레어본처럼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흔든다. 동시에 책을 소개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마음이 나를 뒤흔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무뎌지기 전에 무언가 덜컥 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제국의 모순논리에 현혹되지 않는 더 많은 바보들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힘보다 더 지혜롭다고 우기는 거룩한 바보들이 필요하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가 미쳤다고 할 것이다.(365)”

어쩌면 우리가 약간 미쳤는지도 모른다.(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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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고, 세바시 이슬아 편을 봤다.
뛰어나고, 창의성이 넘치고, 성실하고, 글을 쓰는 마음을 잘 안다.
무엇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이슬아 작가가 소개하는 아이 글이 좋다. 참 잘 썼다.

그래도 난 내가 만난 아이들 글이 더 좋다.
‘누가 더 잘 썼느냐, 어떤 글이 더 좋은가?’ 라고 묻는 건 천박한 질문이다.
내가 만난 아이들 글을 더 좋아하는 까닭은, 내가 아이를 알기 때문이다.
내 글쓰기는 이슬아 작가의 글쓰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슬아 작가는 자기가 이렇게 유명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명해지는 건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슬아 작가가 실력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맥락을 읽으시라.)
이곳저곳 구석구석에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실력자가 참 많다.
방송은 그들 중 일부에게 그들 모두의 영광을 돌린다.
그 영광 모두가 자기 거라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엉터리가 된다.

오늘 당근을 뽑았다.
마트에 파는 크기의 당근은 거의 없다. 당근 소인국이다.
주황 당근은 작고, 자주 당근은 이상하게 생겼고, 노랑 당근은 ~ 하~~
풀 썩혀서 만든 거름만 줘서 그런가? 비가 안 와서 그런가?
비료를 줘야 했나? 초보 농사꾼이라 그런가?

소인국 당근을 거저 준다 해도, 귀찮아서 집에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기른 당근, 오가며 살피고 들여다본 당근은 소인국 당근도 예뻐 보인다.
아이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글이 곧 아이다.
이슬아 작가가 가르친 아이가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이슬아 작가가 아이를 아끼지 않는다면 이렇게 소개하지 않는다.

아이가 글을 잘 쓰게 하려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에게 기대하고, 성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기다리면 글이 나온다.

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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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산다는 것』, 조너선 코졸, 양철북

『1984』, 조지 오웰, 민음사

 

대학에 들어갈 때, 철학책 읽고 토론하며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제가 아이들 앞에 설 때 본으로 삼을만한 교수님을 강의실에서 만나기 원했습니다. 삶을 나누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할지 함께 고민하는 진짜 스승을. 하지만 제가 대학에서 만난 교수님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저 권위만 내세우는 직업인이었습니다. 윤리의식이 모자란 사람, 고등학교 때보다 못한 수업을 하는 사람, 편협한 생각으로 사람을 옥죄며 학점으로 위협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지 않고 강요하면 아예 무시했습니다.

교사가 되고나서 본받기 싫은 교사를 많이 만났습니다. 본받을만한 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는 10년도 더 지나 좋은교사를 만나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교육과정과 교과서도 권위에 도전하는 제 마음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가끔 만나는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내용을 핑계 삼아 교과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재구성했습니다. 말이 재구성이지 내 멋대로가르쳤습니다. 그때 아이들과 좋은 추억이 많지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미안한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권위를 의심하는 제 성향 때문에 저는 국가가 요구하는 내용은 일단 내 가치관을 통과하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육과정이 편협하기 때문에 편협한 생각을 가진 제 판단이 오히려 올바를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잘못된 제 생각과 태도를 고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타성과 무기력을 가르치지 말자.

조너선 코졸은 권위에 대한 반항아입니다. 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통찰과 분석으로 교육계의 촘스키로 불립니다. 미국의 차별적인 교육과 사회 불평등에 맞서 싸워온 교육자이며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 비판 지성인입니다. 그는 학교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르침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생각을 주입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권위를 계속 유지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교과서를 만들었다는 증거를 밝힙니다. 학교가 진실, 아름다움, 위대한 영혼의 추구, 인간적인 가치……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 말하지만 실상은 포장만 요란하지 내용은 주는 대로 받아들이라고 주입한다는 겁니다.

미국 교과서 역시 적당한 사실만 알려주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 식으로 기술되었나 봅니다. 코졸은 올바른 가치를 위해 정부에 대항했던 인물들이 사라진 교과서를 비판합니다.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가졌던 링컨의 발언은 삭제하고 정직한 에이브만 보여줍니다. 파업참가와 단식, 투옥을 마다하지 않은 도로시 데이처럼 비범한 의지를 가진 여성들은 전복적인 인물로 취급해서 교과서에 싣지 않습니다. 헬렌 켈러가 열심히 노력해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이야기는 실으면서 노동착취가 일어나는 빈민가를 방문하고 탐욕스러운 지도자와 기득권층에 대해 도전한 내용은 싣지 않습니다. 역사, 경제, 정치, 철학, 사회질서, 도덕적 가치 모두 취사 선택하고 적당히 편집해서 그들이 알려주고 싶은 내용만 교과서에 남습니다.

교사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은 저자가 30년 전에 썼습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도로시 데이나 헬렌 켈러가 교과서에 실릴 수 있지만 미국 우월주의와 사회질서 유지 위주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교과서로 배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히틀러의 명령을 철저히 따른 아돌프 아이히만의 순종적인 태도는 독일 공립학교에서 길러졌다고 합니다. 잘 통제된 공립학교에서 복종하는 것을 배우면, 아이히만처럼 지배자들이 요구하는 낮은 사고력과 높은 애국심을 갖춘 시민이 된다고 합니다. 코졸은 교사가 물들지 말고 올바로 가르치라고 합니다. 상처 받기 싫어 세운 보호막에서 내려와, 생각을 바꿔주는 수업을 하라고 합니다. 언제나 중도에 가까울수록 진실하다는 믿음을 버리고 올바른 것이라면 극단을 선택할 줄 아는 학생을 길러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당시 사회에서는 극단주의자였다면서……

저자는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라고 말합니다. 정말 공감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교사가 수업 시간에 눈빛으로 메시지를 뿜어내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며 금권을 독점한 지배세력에게 순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사가 이런 모습으로 가르치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지배자의 극단적인 모습

1984를 읽기 전에 저는 조지 오웰을 유명한 작가로만 생각했습니다. 이 책 역시 동물농장처럼 미래사회를 재미난 우화로 표현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1984빅 브라더로 불리는 절대권력을 가진 통치자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을 표현합니다. 곳곳마다 텔레스크린(감시도구로 CCTV 기능에 스피커 역할도 하는 도구)이 있어 사람들을 감시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말도 흘러나옵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다가 잠시 다른 일을 위해 일어선다면 ○○선생, 어디 가는 거야! 마저 다 읽고 가야지!”라는 말이 곧바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인공 윈스턴은 과거 기록을 조작하는 부서에서 일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매달려 있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1112월까지 주가를 3000으로 만들겠다고 대통령이 말했는데 1700밖에 안 된다고 가정합시다. 주가 3000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으면 1700인 지금은 문제상황입니다. 그래서 3000이라고 말한 기록을 1700이라고 말했다고 조작합니다. 과거의 모든 기록(신문, 방송자료, 논문, ……)을 주가 1700으로 바꿉니다. 지금이야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당장 온 나라가 들끓으며 대통령 탄핵을 말하겠지만 그 사회는 이런 마음조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나친 통제와 감시, 조직화된 조작으로 사람들이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조작인지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득권층이 가장 원하는 모습이지요.

조지 오웰의 천재성이 드러난 부분은 3부입니다. 윈스턴이 왜곡과 조작으로 세워진 나라를 뒤엎기 위해 과거의 진실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발각되어 잡힙니다. 고문과 회유, 협박과 위협에 갈등하는 윈스턴이 결국 신념을 포기하고 사회에 적응하는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윈스턴을 고문한 오브라이언과 윈스턴이 대화하는 내용이 절묘합니다. 오브라이언은 적대자를 무조건 고문해서 죽이지 않습니다. 단순한 위협과 고통은 순교자를 만들어 반대자들을 더 격렬히 타오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극렬히 반대하다 죽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합니다.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여전히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으로 놔두지도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의심하고 결국은 자신이 믿었던 진실이 한순간의 몽상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조지 오웰이 극단적으로 표현한 사회는 사실 기득권층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전략을 과장해서 보여준 겁니다. 기존질서를 의심하지 말고 순응하여 살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것을 믿으면서 무엇이 잘못인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의심할 능력마저 빼앗아 갑니다. 시험 잘 보고 좋은 성적 받아서 돈 많이 버는 직장에서 여유를 누리며 살기 위해 다른 건 신경쓰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

조너선 코졸 역시 정부가 교육과정을 통제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충실한 일꾼들만을 길러내려 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위험한 매체는 방송입니다. 2-3살 아기일 때부터 텔레비전을 보며 수많은 광고와 이미지에 노출된 아이들이 결국은 방송의 노예, 방송의 제자, 방송의 아들딸이 됩니다. 사라는 물건을 사고, 하라는 행동을 하며,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충실한 노예들이 됩니다. 가끔씩 이상한 과거 경험에 의해 저처럼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생길지 모르지만 대세를 거스르긴 어렵습니다.

제가 하는 독서모임에서 중학생들과 1984로 독서토론을 했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부르키나파소를 궁핍으로 몰아넣은 프랑스 지배층의 음모를 살폈습니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한 미국의 행동을 따져봤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두려움과 우리가 살아갈 미래사회가 좋아질지 나빠질지 토론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빅 브라더인지 물었더니 아이들은 성적, 경쟁, 경제논리, 부모, 방송, 국가를 꼽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말했죠. “너희들처럼 생각하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1984를 바꾼다. 이 작은 독서모임에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두 책 읽으시고 같은 소망을 품기를 바랍니다.

2020년 2월에 토론하고 덧붙인 생각

『교사로 산다는 것』을 처음 읽었을 때, 들리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9년만에 다시 읽으며 <자기만의 수업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전부터 나라는 인격에서 나와, 아이라는 인격을 만나는 나만의 수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멋진 아이디어, 감탄을 자아내는 도구를 사용해서 아이들을 사로잡는 수업은 아닙니다. 아무 도구 없이, 온전한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수업입니다. 조금씩 배우고, 변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만의 수업을 방해하는 세 가지 걸림돌이 생각납니다.

시선.
전 동네 곳곳, 골목과 언덕과 개울을 다니며 수업합니다. 우리 반만 뒷산에 가고, 운동장에서 비 맞으며 수업하면 주위 분들이 한마디씩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 눈치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반만 다달이 문집을 내고, 우리 반만 현장학습 가고, 우리 반만 책상 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전 그게 좋아서 선배들이 주는 눈치를 이겨냈습니다. 그때 시키는 대로 했다면 제 수업의 큰 부분이 사라졌을 겁니다.

교과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교과서대로 해!” 사실 시키는 대로 하면 편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시킨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면 됩니다. 교과서만으로 가르치면 안전합니다. 그러나 저는 코졸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코졸의 책을 읽기 전부터 교과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국어 글쓰기 내용은 많이 바꿔서 가르쳤습니다.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주제를 버리고, 아이들 삶에 바탕을 둔 글감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이야기’를 쓰게 했습니다.

막연한 생각.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교과서를 무시하면 무얼 할까요?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 수업을 분석하고 비판할 점을 찾기는 쉽지만 나만의 수업을 만드는 건 어렵습니다. 막연한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지 찾는 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게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찾습니다.

교사로 산다는 건, 아이들이 자기만의 길을 걷도록 안내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정해진 길, 사람들이 성공이라 부르는 길만을 따르게 하는 교육이라면
학원에만 다녀도 되지 않을까요?

3. 2011-11월 좋은교사 소개 글 중의 한 문단
저자는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라고 말합니다. 정말 공감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교사가 수업 시간에 눈빛으로 메시지를 뿜어내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며 금권을 독점한 지배세력에게 순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사가 이런 모습으로 가르치고 있으면 안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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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 《오스 기니스의 저항》, 난이도 ★★★★
오스 기니스, 《소명》, 난이도 ★★★
오스 기니스, 《오스 기니스, 고통 앞에 서다》, 난이도 ★★

전 백만장자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페이지가 백만 쪽이 넘거든요. 역사, 정치, 사회, 문화, 환경 가리지 않고 읽습니다. 성경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소설과 동화책도 꽤 읽습니다. 사람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습니다. 고민이 생기면 제 안에 있는 글과 생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20대에 해결하고 싶었던 고민은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교사로의 부르심을 확인한 뒤에는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소명

30대에는 고통을 끌어안고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고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통받는 아이들을 만났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홀로코스트, 순교자, 질병과 역경을 끌어안고 끙끙대는 사람들 이야기를 끊임없이 읽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끝내지 못할 고민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 앞에 서 본 사람의 말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고통 앞에 서다

40대가 되어서는 불의로 자기 배를 채우는 기득권층,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조, 자기들이 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엉뚱한 해결책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보는 게 힘듭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생각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방송매체가 심어 주는 기준을 왜 그대로 따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잘생기고 예쁜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이 잘 팔리는 까닭을 모르겠네요. 그 제품을 써서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가진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받는 광고비 때문에 제품 가격만 오르는데도 사람들은 연예인들이 광고한 제품을 찾습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세상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가정생활, 자녀교육, 직장생활, 이웃관계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하다가 예배당에서만 하나님 말씀 내세우면 되는 건가요? 세상 문화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종교 행위에만 몰두하는 게 불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의 영적 상황에 대해 갖는 관심의 10분의 1이라도 세상에 만연한 시대정신을 깨닫는데 기울인다면, 사회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저항

오스 기니스가 세 가지 고민에 대해 대답합니다. 1998년에 소명, 2005년에 고통 앞에 서다, 2016년에 저항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

오스 기니스는 소명을 궁극적인 존재 이유(1장 제목)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신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소명은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사제와 수도사, 수녀들에게 한정된 말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소명이 평범한 일상에 정통한 사람들의 것으로 돌아왔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소명이 점점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일상적이고 비천한 일에 평범함의 광채를 주는 것(304)이라는 뜻이 희미해지고 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방에서 돈 얘기다. 시급, 월급, 전세, 월세, 여행비, 학원비, 통신비……. 돈이 점점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평범한 일에서 특별해야 하고 더러운 거리, 비천한 사람들 중에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314).”는 말은 의미를 잃고 희미해진다. 더구나 이런 태도는 5분 내에 배울 수 없다고 하니 더욱 마음이 멀어진다. 그래서 좁은 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생각하기 어려운 길.

소명에는 소명으로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가 많다.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했던 본회퍼, 국가 재정 수익의 3분의 1을 충당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윌리엄 윌버포스, 고든 장군, 아브라함 카이퍼, 아더 번즈……. 이들을 사례로 들어 감정을 자극하는 가벼운 책은 아니다. 생각보다 읽기 어렵다. 그렇지만 지금이야말로 부르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이다.

고통에 대한 민감성

고통 앞에 서다에서 오스 기니스가 인용한 책은 대부분 히틀러가 만든 포로수용소에서 겨우 살아난 유대인들이 썼다. 30대에 그 책들에 빠져 살았다.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2장 제목), 재난과 인생(3), 우리의 가장 큰 원수(4)인 인간의 존재를 고민하며 살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5),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6),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7)는 지금도 나를 짓누르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고통을 다룬 책에서 빠지지 않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이라면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니까.

악과 고통의 이유를 묻는 시도가 그릇된 비판으로 발전하는 순간, 우리는 마녀사냥과 비슷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즉 우리가 처한 상황의 이유를 탐구할 때, 우리는 그릇된 설명의 방법을 찾다가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 또는 하나님을 비난하는 데로 귀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366).” 고통의 원인을 사람이나 하나님께 돌리고 비난으로 화를 푸는 게 자연스럽다.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이다. 그런다고 고통이 해결되지 않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한다.

오스 기니스는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의화단 사건 때 귀신이 붙었다고 알려진 다락방에 숨었다. 바퀴벌레와 쥐가 득실대고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 곳에서 6일을 숨어 지냈다. 횃불을 든 폭도들이 지붕에 올라가 불을 지르려 했고 다락문을 칼로 쑤셔댔다. 칼날이 조금만 기울어도 할아버지는 죽었을 것이다. 오스 기니스의 부모는 강도 떼를 피해 달리고, 공산주의 폭도에게 친구들이 죽는 걸 보고, 일본군의 포탄 공격을 피하고, 난징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기억을 함께 나누었다. 사람들이 고통의 원인이 된 사건들. 그러나 오스 기니스의 부모가 겪은 가장 잔인한 고통은 허난성의 기근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킨 것 같은 고난.

오스 기니스는 고통에 대한 일곱 가지 질문으로 책을 썼다. 다섯 번째 질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이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문제(13), 용서의 문제(14), 저항의 용기(15)로 질문에 대답한다. 여섯 번째 질문에서 인간의 한계를 논한 뒤에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악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이 존재하지 않을까?”

고통에 대해 고민하는 분에게 꼭 읽어 보라고 권한다. 더불어 고통 앞에 서다에서 언급된 책이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

저항이라 하면 보통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 잘못된 권위나 사회 구조에 맞서는 행동을 생각한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서거나 1인 시위를 하는 행위를 생각한다. 오스 기니스는 그리스도인이 먼저 사상의 저항, 사고 체계의 저항,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스 기니스는 우리가 사는 시대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한다고 진단한다.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해서 평안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체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현대 사회가 내세우는 소리가 불편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얄팍한 지식으로 세상을 얕보며 손쉽게 승리를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단순하지만 유일한 논리를 내세운다면 모를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승리를 선포한다. 세상이 듣고 비웃을 논리로 자기들끼리 만족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는 세상이 주입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 건 승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끼리 모인 곳에서, 우리끼리 하는 활동에 제한되지 않는다. 날마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세속주의, 현대주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는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시대 정신에 맞서야 한다.

저항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 이것이다.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을 때, 사람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고수했다. 하지만 유대인으로 사는 게 쉬워지자 사람들은 유대인이기를 포기했다. 전 지구적으로 이 시대 유대인의 중대한 문제가 이것이다(25).”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살아갔다. 그러나 물질이 풍부해지고 누릴 것이 많아지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진다. 주일에 어디에 있느냐만 다를 뿐 그 외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진다. 이렇게 살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

저항하려면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에서 싸워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오스 기니스는 신앙의 박해보다 현대성의 유혹이 더 위협적이라 말한다. 지금 세상은 세속주의, 과학주의, 자연주의 세계관, 기술 발달, 정보화 시대, 상대주의에 끌려가고 있다. 권위는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고 선택은 그저 선호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홀로 떨어진 개인이 되어 서로에게 무관심해졌다. 또한 초자연적 영역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온통 세속적 영역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선택하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면 하나님을 전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온통 이 땅에서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사는 데만 관심을 갖는다면 하나님 나라가 귀에 들릴 리가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역은 다름 아니라 현대성에 대한 저항이어야 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 시대정신으로 다가온다. 21세기의 우상은 금은동철로 만든 형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는 사고방식이라 생각한다. 우리 생각과 몸이 현대주의에 푹 젖어 있으면서 어렴풋하게 사단과 우상을 생각한다면 싸움이 안 된다. 이 책은 읽기 어렵다. 시대 정신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글로벌 세상의 하늘에 몇 개의 태양이 있는지(3장 소제목)’ 소개하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끙끙대야 한다. 특히 2~4, 교회를 공격하는 악의 정체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낯선 내용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우리 아이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종교 언어가 통하는 곳에서 종교 언어로 말하며 우리끼리 감상에 젖는 한순간의 활동이 아니다. 날마다, 우리가 걷는 모든 곳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시대정신에 맞서며 살아야 한다.

신인류의 출현

신규 교사일 때 예수님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마음이 앞섰지만 복음을 제대로 몰랐던 때라 내가 전한 복음은 이원론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어요. 나를 싫어하는 아이도 복음에는 진지하게 반응했죠.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은 복음을 더 쉽게 설명합니다. 학급을 잘 이끌어 나를 싫어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복음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치 대형마트에서 물건 담듯 하나님을 자기 가방에 담아 필요할 때 꺼내는 분으로 인식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신인류입니다. 제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고체계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명확한 부르심, 감당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하나님 뜻으로 이해하고 견뎌내는 마음,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소명으로 고통 앞에 서저항하며 살아야겠죠.

모임에서 함께 읽고 나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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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8일 아침에 사울의 실패를 묵상하다가 쓴 글.

나를 알고,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나를 모를 때는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우쭐댔고, 내가 못 하는 일을 하면서 좌절했다. 나로 살지 못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했다. 학부모가 보는 나, 동료 교사가 보는 나,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는 나로 살아가려 했지만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는 내가 결정했다. 내가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고 발버둥 쳤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는 노력조차 온전한 내가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이름으로 나를 내세우려는 시도였다. 정말 자기 자신으로 살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내 생각, 내 기준도 의식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연스레 살아간다. 조금씩 이렇게 되어간다. (이렇게 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어느날 문득 내가 변했음을 느낀다.)

지금은 누군가를 의식하는 태도가 많이 줄었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독서 모임을 인도할 때 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아직도 몸에 밴 습관이 드러나서 신경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우쭐대지 않고, 못 하는 일을 해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좋은 책의 가치를 몰라보고, 인기에 영합하는 책을 좋아해도 그러려니 한다. 나는 나로 살아간다.

오랜만에 책뜰안애 독서 모임을 했다. 노자의 도덕경 81장을 ‘가르침과 배움’으로 풀어 쓴 책인 『배움의 도』를 나누었다. 참여한 분이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했더니 친구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했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는 친구에겐 <배움의 도>가 보이지 않았다.

첫째가 책 내용이 마음에 들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했다. <배움의 도>로 이끄는 사람,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가르쳐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했다. 함께 한 분들이 첫째에게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두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배움의 도』를 나누면서 첫째 눈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첫째도 나를 바라봤다. 가끔은 눈물이 맺힌 채 나를 보았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았다. 첫째도 세상의 흐름, 10대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

난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다. 나처럼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 없어서 우쭐댔지만 사실 외로웠다. 주장과 자랑은 한순간이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면서 느끼는 외로움은 길~고 끊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이들도 외로움을 느낄 것 같았다. 책 이야기는 집에서나 하고, 학교에서는 자기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친구들이 가볍게 조사해서 발표할 때 얘들은 깊게 생각하고 발표했다. 학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감탄하며 다가온 친구가 있었지만 잠시뿐이었다. 가치관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둘째는 아이돌도 좋아하고(카이사르와 살라하딘보다 좋아하진 않지만)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그러나 진짜 친구는 언니밖에 없었다. 둘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몇 시간씩 이야기하며 노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첫째는 조용히 혼자 지냈다. 외롭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만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으로 사는 아이에게 외로움을 이길 방법을 말하기 어려웠다. 그건 자신이 직면해서 ‘이겨내거나’, ‘함께해야’ 한다. 넘어서든지 친구가 되든지 해야 한다.

10달 전에 『배움의 도』를 나누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제야 모였다. 모임하다가 책을 볼 필요가 있어서 내가 가진 책을 건넸더니 핸드폰을 보여준다. 책 전체 내용을 전부 컴퓨터에 입력했다고 한다. 고3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며 『배움의 도』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아이라니~!

‘너답다.’ 고3학년 때도 공부보다 글쓰기에 더 신경 쓴 아이! 자기 자신으로 살면 좋겠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을 가느라 외롭더라도.

#바보온달을_쓴_이현주_목사님이_번역한_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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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수업》, 하이타니 겐지로, 난이도 ★★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 델핀 미누이, 난이도 ★★★

저는 아이들과 글을 씁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각을 사랑합니다. 어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밋밋하고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눈에 무채색인 세상에 자기만의 색깔을 입힙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새롭습니다. 감탄을 일으킵니다. 마음을 울리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이들 글 덕분에 다르게 생각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 보통의 어른과 다른 태도로 다가가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와 시각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많은 아이가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글을 쓴다고 해도 진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배우는 시는 내용을 잃고 형식이 앞섰습니다. 일기는 보여 주기 위해 꾸며 씁니다. 편지에는 마음이 없고, 독서 감상문에는 줄거리뿐입니다. 논술은 논리를 앞세워, 사려 깊은 고민이 사라졌습니다.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원래 아이들은 이렇지 않습니다.

일본 작가 하이타니 겐지로는 17년 동안 교사로 지내며 아이들과 글을 썼습니다. 저는 난 선생님이 좋아요에서 아이들에게 배우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태양의 아이에서 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사랑하는 어른을 만났습니다. 상냥한 수업에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르침을 만났습니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상냥한 수업에는 초등학교 우리 반 아이에게 읽어 주고 싶은 글, 독서반 중고등학생에게 읽어 주고 싶은 글이 많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저는 중학생 신분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는 한 달도 채 다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끔 결석을 했지만, 중학교는 한 달밖에 안 다녔다고 해도 될 정도로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3년은 저에게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64)

중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않은 아이가 쓴 글이 마음을 울립니다. “저는 너무 지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숙제를 해야 했습니다. 공부 말고,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리보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들에게 배우고 싶은 것은 수학이나 영어만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 어리니까 앞으로 많은 벽에 부딪힐 테고, 어쩌면 산산조각이 나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벽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어른들에게 다시 배우고 싶습니다.”(65~66) 너무 지쳐 학교를 떠나 버린 학생의 마음에 글이 있었습니다. 가게에서 껌을 훔치고 쓴 아이 마음에도, 집이 불 타 버린 아이 마음에도 글이 있습니다. 아이들 글을 보여 주는 선생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에 힘든 아이만 나오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존경하는 선생님의 수업, 저자의 수업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우라기 히데오 선생님 이야기를 읽으며 예전에 했던 다짐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만져 주고, 아이들이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게 만드는 수업을 꿈꿨습니다. 어느새 무뎌져 가는 마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상냥함에 대하여란 수업은 제가 해 보고 싶은 딱 그런 수업이었습니다.

이 책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만큼이나 좋은 책입니다. 선생님이 만났던 아이들 이야기를 해 주는데 따뜻하고 마음이 울렁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 서야지, 계속 아이들과 글을 써야지, 이 글은 아이들에게 읽어 줘야지, 이렇게 수업하고 싶다.’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잔잔하게, 소박하게, 그렇지만 따뜻하게, 울림을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분께 권합니다.

도서관, 우리 선생님

지금도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 독재자 아사드 정권이 다라야를 4년 동안 포위했습니다. 다라야는 사람도 물건도 드나들지 못하는 데다가 사린가스 공격을 받았습니다. 드럼통 폭탄이 떨어져 건물이 무너지고 주변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4년 동안 8,000개가 넘게 떨어진 폭탄을 피해 사람들이 지하로 스며들었습니다. 그곳에 갇힌 사람들이 무너진 폐허에서 건져낸 책을 모아 지하에 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독재자와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 사이에서 책을 모아 분류하고 라벨을 붙이고 지하에 정신의 보고를 세웁니다.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며 토론하고,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은 권력을 가진 독재자에 대항하여 정신으로 맞선 사람들이 보여 주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고립된 도시, 언제 어디에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처지에서 무얼 할까요? 먹을 것이 줄어들고, 환자는 늘어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저는 책을 읽을 겁니다. 우리를 죽이는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독재와 반대편에서 자기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이기는 방법은 그들의 정신에 동의하지 않는 태도’, ‘총과 칼이 아니라 대화’, ‘나와 다르면 모두 적으로 여기는 태도를 벗어 버리게 만드는 토론과 나눔입니다. 이걸 갖추게 해 주는 게 바로 책입니다.

아흐마드는 그렇게 소란한 가운데서도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서 수천 권의 책을 구해 내어 모든 주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곳에 모아 만든 책으로 된 피난처를 만들었습니다. 쉴 새 없이 퍼붓는 폭격에 대한 공포와 허기를 달래기 위해 책으로 만든 수프, 정신을 살찌우려고 미친 듯이 책을 읽습니다. 이 도서관은 포탄에 맞서는 그들만의 은밀한 요새, 대중 교육을 위한 무기였습니다.(13)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친구 오마르는 병참선에 자신의 작은 도서관도 만듭니다. 모래주머니 뒤로 틈을 메워 완벽하게 정렬한 10여 권의 책으로 꾸민 도서관입니다. 폭탄이 잠잠해지면 책을 돌려 가며 읽습니다. (72)

아흐마드와 다라야의 다른 운동가들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그리고 절망감으로 과격화하는 것을 막으려고 혼돈이라는 잡지를 만듭니다.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이동도서관도 만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참호를 지킬 때도, 폭탄이 떨어지는 곳에서도 그들은 증오를 이겨 내는 책의 힘을 붙듭니다.

살아남은 그는 책이 주는 유익함을 믿었다. 몸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고 해도, 마음의 상처를 달랠 권리는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단순한 행위가 아부에게는 엄청난 위로였다. 그것은 도서관을 세우면서 알게 된 감정이었다. 그는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좋았다.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며 훑어보는 것, 마침표와 쉼표 사이에 몰입하여 길을 잃는 것,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는 것.”

책은 지배하지 않습니다. 책은 무언가를 선사해 주죠. 책은 거세하지 않습니다. 책은 성숙하게 합니다.”

언젠가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날이 올 때 그들이 읽은 책이 그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지배하기보다 선사하기를 원한 사람들, 적을 제거하지 않고 함께 성숙해지기 원한 사람들이 시리아를 다스리는 날이 꼭 올 것입니다.

글, 책, 이해와 공감

저는 아이들 글이 좋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여 줍니다. 그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기대하며 글을 씁니다. 또한 저는 책이 좋습니다.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 생각을 편하게 읽는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폭탄이 떨어지는 도시, 폐허가 된 곳 지하에서 책을 모으고 읽는 사람들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칼과 창, 탱크와 폭탄을 막으려면 더 강한 무기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상냥한 수업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꼭 읽어 보세요. 책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실 거예요.

 

 

권정생은 동화작가이다. 강아지똥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몽실언니는 백만 부 넘게 팔렸다. 의외다. 동화는 꿈과 소망을 주는 이야기라야 잘 팔린다. <이오덕일기, 양철북>에서 사람들이 권정생선생님께 왜 슬픈 이야기만 쓰느냐고 묻는다. 모름지기 동화란 밝은 면, 희망을 갖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몽실언니는 슬프다. 다른 작품도 대부분 슬프다. 선생님은 줄곧 슬픈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선생님이 써내는 슬픈 이야기에 빠져든다. 아이들에게까지 자기계발서를 파는 시대에 슬픔과 눈물을 담은 책이 백만 부 넘게 팔리다니 왜 그럴까?

 

슬픔을 아는 사람

<강아지똥별>은 권정생선생님의 삶을 쓴 동화다. 저자 김택근은 1990년 권정생을 인터뷰한 인연을 깊이 새기고 있다가 일대기를 이야기로 엮었다. 선생님이 쓴 책과 글을 뒤져 선생님이 살아온 모습을 전기문처럼 엮었다. 편하게 읽을 수 있지만 슬픈 이야기가 많다. 몽실언니를 읽는 기분이다.

선생님은 1937년 도쿄 혼마치 빈민가에서 태어나 2007년 안동 빌뱅이 언덕 흙집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아픔과 슬픔을 벗하고 살았다. 태어나자마자 한국에 남은 형이 죽는다. 광복하면서 두 형을 제외한 가족이 귀국했으나 너무 가난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끝내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 아버지 모두 돌아가신다. 두 형은 조총련계라 딱 한 번 한국에 왔지만 분단의 비극만 더 느끼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늑막염, 폐결핵, 신장결핵, 방광결핵, 부고환결핵으로 한쪽 콩팥과 방광을 들어냈다. 평생 오줌주머니를 차고 살았다. 형 죽고 친구 죽고 줄곧 죽음과 고통을 보며 괴로워한다. 평생 슬픔과 아픔을 끌어안고 살았고,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늘 곁에 있었다. <강아지똥별>에는 가난과 병에 시달린 선생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고통과 슬픔이 끊이지 않는다. 선생님 눈에는 아파하고 울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보였다. 그때 만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책을 써냈다.

선생님 어머니가 돌아가신 1964년에 온 국민을 울린 이윤복의 일기가 책으로 나왔다. 1966년에 나온 일기 <저 하늘에도 이 소식을, 산하, 이윤복>에서 동생 이윤식은 형은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고달프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형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터라, 나 또한 슬픔을 아는 사람이 더 큰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썼다.

저자는 <강아지똥별>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는다. “왜 평생 슬픈 얘기만을 썼을까.” 슬픔을 아는 사람에게는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 보인다. 슬픔의 사람 권정생은 너무 힘들어 슬퍼하는 이웃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몽실언니를 보여준다.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했다. 시궁창에 떨어져 썩어가는 똘배, 거지, 바보, 깜둥 바가지, 늙은 소, 외로운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썼다. 모두 힘 없고 소외된 것들이다.(지식채널 e 正生 참고)

 

마음에 불을 담아서

권정생선생님은 슬픔을 겪었고 슬픔을 동화로 썼지만 마음에는 불을 담고 살았다. <우리들의 하느니/녹색평론>으로 중학생들과 토론할 때 아이들이 이분, 많이 화난 사람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오덕 일기, 양철북>에도 화내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손 내밀지 않고 도리어 등 떠미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어쩜 그리 슬픈 이야기로 보여주실 수 있는지……

20055월에 쓴 유언장에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이 있다. 사람들이 점점 슬픔을 무시하고 돈과 편안함만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화를 내신 것 같다. 인세 모두 아이들을 위해 쓰라고 주고 가신 마음에 담긴 불을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어서 이 책이 더 반갑다.

마음에 불을 담고 사신 면까지 드러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여러 곳에서 자료를 모아 일대기를 써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20세 이전 내용은 많지만 이후의 내용은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가 드문드문 나온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이오덕 일기, 양철북>를 참고해서 선생님이 쓴 동화 이야기를 더 담으면 어떨까 싶다.

이 제안을 담아 글을 다시 쓴다고 해도, 더 뛰어난 사람이 쓴다 해도 선생님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선생님은 별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똥별! <강아지똥별>을 읽고 앞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눈을 바라보며 그냥 읽어보세요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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