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서부터 교인, 신자, 성도로 살았다. 교회는 놀이터였고 추억의 공간이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들, 나를 아끼는 사람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였다. 학교보다 교회가 더 좋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교회가 배경이다. 나는 교회에서 먹고 놀고 자랐다. 교회는 늘 좋고, 목사는 늘 옳고, 나는 계속 교회 품에서 지낼 줄 알았다.

대학생일 때 중고등부 교사를 했다. 그때 교회 내부 문제로 청년부 회장이 목사에게 대들었다. 목사가 청년부 회장을 고소했다. 교회가 둘로 갈라졌다. 돈 문제가 얽히고 비난과 협박이 오가는 모습을 보며 환상이 깨졌다. 그즈음 폴 스티븐스가 쓴 책을 읽었다.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을 읽고 목사를 의지하지 않는 신앙을 생각했다.

성경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며 묵상했다. 20년 동안 중고등부 교사로 지내며 말씀을 나누었다. 내가 고민하며 끙끙댔던 말씀, 몇 시간 지내는 주일날 교회가 아니라 아이들과 지내며 적용하려고 했던 말씀이었다. 학생들과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그럴수록 목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예배가 예배로 다가오지 않았다.

5년 전에 제도 교회를 떠났다. 평신도 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같이 책을 읽고 신자가 누구인지, 목회자 없이 교회를 이룰 수 없는 건지, 평신도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나누었다. 송인수 선생님은 책을 꼼꼼하게 읽고 평신도 모임에 온 마음을 쏟았다. 치열하게 사는 분인지라 평신도 교회에 대한 고민도 치열하게 다루었다.

송인수 선생님이 교회와 신자에 관해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평신도 교회가 온다가 나왔다. 폴 스티븐스 이후에 평신도 신학을 다룬 책을 다시 만났다. 특히 3(부모가 아이 앞에서 성경을 들어야 한다)가 가장 좋았다. 선생님은 교사였다. 입시와 학업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떠났으나 선생님 마음에는 늘 아이(학생)가 있다. 이 책에서도 아이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자라는 모습을 소개한다.

한국 교회가 욕을 많이 먹지만,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존 교회와는 다른 교회도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작은 모임들이 교회됨을 기뻐하며 각 가정마다 교회로 살아가는 때가 올 것이다. 이 책이 그런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 교회를 이루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방향을 보여주며, 선생이 되리라 생각한다.

손양원 목사 막내딸이 썼다. 저자는 막내딸로 손양원 목사에게 무척이나 사랑을 받았다. 목마를 태워주고 사랑을 표현하던 아빠가 4살에 죽었다. 사람들은 순교자라고 했지만, 저자는 두 오빠도 데려가고 아빠도 데려간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 손양원 목사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사는 것보다 순교하는 걸 바랐다. 타협하지 않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손양원 목사님이 돌아가신 뒤에 교회 일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교회를 세우는 일에 마음을 더 쏟았다.

광복하고 나서 신사참배를 두고 교회가 분열되었다. 신사참배하지 않고 고통당한 분들이 신사참배한 사람들을 비난하며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양순 사모님은 신사참배하지 않은 소수 고려파에 속했다. 옳은 길을 따르다 고통을 당한 소수가 가는 길이 편할 리가 없다. 저자는 엄마와 같이 살지 못하고 친척 집, 친구 집에서 지내야 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빠와 오빠를 데려가고, 엄마까지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절망감, 상실감을 피아노에 쏟아부었으나 마음의 상처는 치료되지 않았다.

책은 3부로 쓰였다. 1부는 저자가 본 가족들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과 두 오빠의 죽음을 지켜본 분들을 만나면서 완성한 기록이다. 2부는 어머니 정양순의 삶을 소개한다. 아버지가 죽음으로 순교했고, 어머니는 삶으로 순교했다. 지금 시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이다. 3부는 저자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썼다. 치유가 없었다면 이 책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점점 힘을 빼고 산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줄어든다. 여유가 많아져서 좋다. 그러나 믿음에도 힘이 빠진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믿었던 분들 이야기를 읽으면 심란해진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지?’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생각한다. 책 내용이 1940~70년대 일어난 일이라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부모의 헌신 때문에 상처 받은 자녀, 상처가 준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발버둥치는 모습, 하나님 은혜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똑같다. 우리의 삶은 결국 사랑을 찾는 발버둥 아니던가!

책이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쿰란출판사 - <손양원의 유산>

프레드릭 비크너

  소제목 한 챕터를 멈추지 않고 읽어야 한다. 중간에 멈추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1장에 나오는 두 단락 <고통의 문><시간 이후>에는 좋은 문장이 가득하다. 2장은 비크너가 기억하는 할머니, 동생 이야기가 많다. <방 이름, ‘기억하라’>, <기억의 마법>, <기억의 고투>, <기억의 소망> 모두 기억을 다룬다. 내용은 아주 쉽다. 읽기는 쉬운데, 저자가 이걸 왜 썼는지 알기 어렵다. 딸은 2장이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독서모임에 온 선생님은 2장을 왜 썼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2장은 짧은 단상이 이어진다. 하나하나 음미하기 좋은 내용이다. 소리 내서 읽으면 마음이 충만해진다.

  비크너는 쉬운 듯 어렵다. 원제가 A crazy, holy Grace.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 않는다. 미친 듯한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 모습 가운데 거룩함이 있다고 한다. 그걸 볼 눈이 있다면 일상은 은혜로 가득하다. 비크너는 할머니와 동생을 기억하며 A crazy, holy Grace를 만난 것 같다. 읽고 또 읽을 책이다.

<<책에 나오는 문장들입니다.>>

잃은 것은 찾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
지금까지 있었던 죽음을 다 더해도
생명 옆에 놓으면 잔 하나 채우기에도 부족한 것일게.

좋은 청지기로 살아오셨네요. 고통의 좋은 청지기로 살아오셨어요.

여러분이 누구이든, 운이 좋든 나쁘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황이 어찌됐든,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다는 말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쉼이 무슨 뜻이든지 여러분에게는 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고통을 틀어막고, 쳐다보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데는 대가가 따릅니다. 자신의 일부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머니 안에 성장하지 못한 부분이 제대로 성장했다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네가 네 인생을 살지 않으면, 네 고통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너의 삶은 매일 줄어들 것이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제가 들을 수 있는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볼 수 있는 일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삶이라는 판 자체를 완전히 날려버리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계시다는 놀라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어떻게든 <햄릿> 속으로 들어가 연극의 연극다움을 다 망쳐버리지 않으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죄다 하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저는 하나님이 격렬하게 자제하면서 숨죽이고 계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제가 상상하듯이 하나님은 개입해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삶의 본질을 파괴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상황을 바로잡기 시작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더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더는 받은 달란트로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체스판의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격렬한 자제를 느꼈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고요했지만 무언의 웅변으로 가득했습니다. (33-34)

망가진 삶의 회복에 관한 한, 종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영혼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의 최선은 거룩하신 분의 최선과 상충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의 잔혹함과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며 최선을 다해 스스로 뭔가 해 보려는 바로 그 행동 때문에 더 놀라운 역사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현실의 가혹함에 맞서 스스로 모질게 무장할 때의 문제는, 삶이 파괴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그 강철 같은 무장 때문에 생명의 근원인 거룩한 능력이 마음을 열어 변화되게 하는 것까지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누구나 혼자서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혼자서 인간답게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슬픈 비유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부자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신용카드로 자신을 위해 뭐든지 다 살 수 있기 때문에 정작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설령 좋으신 하나님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신다고 해도 주먹을 꼭 쥔 손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잊지 않으며, 모든 과거는 그저 우리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 도사린 채 자기를 다시 표면에 떠오르게 할 풍경이나 냄새나 자그마한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54)

아버지의 죽음은 내 안에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도 아시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많이 도와준 것도, 그런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그러기엔 너무 소심하고, 믿음도 연약하며,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알게 된그 고통을 통해 대단한 도움의 손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내 눈이 열렸다. 그래서 어느 인생에나, 가장 운이 좋아 보이는 인생에도 고통이 있으며, 묻어버린 슬픔과 상처 입은 기억이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
  한 번에 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것들, 단번에 깨닫기에는 너무나 작은 것들, 아마 우연히 일어나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이러한 순간들. 나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마음도 열어 주는 이러한 순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것을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라고 불렀다. 기이한 까닭은 아무도 그 은혜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상실과 고통 한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서 솟아오르는 이 기이한 은혜의 방식과 때와 장소를 누가 예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거룩한 까닭은, 이런 은혜의 순간들이 궁극적으로 오즈보다 더 먼 곳에서, 그리고 운명보다 더 깊은 곳에서 찾아오기 때문이다. 우리를 치유하고 깨끗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았거나, 기억되거나 잊혔거나 주님이 베푸신 모든 복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고 하는 옛날 기도문처럼, 거의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과 거의 잊힌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인생의 여정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그들의 존재 덕분에 우리 각 사람의 인생이 거룩한 여정이 되기 때문이다.

행여나 과거를 만날까 봐 현재에 매달립니다. 수면 아래 숨어 있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수면 위로 나온 것에 매달립니다.

사정은 다들 다르겠지만, 저는 심장이 돌로 변하게 만들 만한 슬픔과 고통을 겪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적이 많고, 바른 길이라도 잘못된 이유로 선택한 적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들에게나 저에게나 유익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과하게 사랑한 경우도 많고,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경우도 많습니다.

과거와 미래, 기억과 기대, 기억하고 소망하십시오. 기억하고 기다리십시오. 그분을 기다리십시오. 우리 모두 그분 얼굴을 압니다. 과거 어디선가 그 얼굴을 희미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생명을 갈망합니다. 과거 어디선가 누군가 그렇게 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 순간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기억하십시오. 옆에서 죽은 강도를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친히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소망함을 통해 소망의 내용이 우리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시기, 또는 큰 전쟁이 없는 시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상태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평화에 해당하는 단어 샬롬은 온전함을 뜻하고, 온전하고 행복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음을 뜻한다.

교회를 생각하면 필립 얀시가 쓴 책 제목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 떠오른다. 한때는 교회가 최고의 공동체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있었다. 교회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추억이 참 많다. 그때는 참 행복했다. 나이가 들고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면서 점점 실망이 커졌다. 목사에 대한 실망이 가장 컸고, 몇몇 장로와 집사도 실망스러웠다.

그분들은 탐구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강원도 시골에서 몇 되지 않는 성도를 섬기는 좋은 목사님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보다 더 많은 목사가 성도를 실망시켰다. 밀리고 밀려서 시골까지 온 목사 중에 사기꾼도 있었고 알콜 중독자도 있었다. 법적인 처벌을 받은 범죄자도 있었다. 잠언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멸망 받을 악인이었다.

(내 서재에서 묵어가는 분 중 절반은 목사님이다. 어떤 분은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계셨고, 어떤 분은 설거지를 다 하셨다. 그분들은 탐구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목사에 대한 실망이 희미해졌다.)

 

사람이 싫어서 교회가 싫어졌다.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의 첫 인물 김호준처럼 지냈다. 그때 나는 잠언의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직분자는 직분자다워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에는 두 번째 인물 박세직 집사 같은 사람도 있었다. 2000년이 되면서 박세직 같은 사람의 목소리가 교회에서 점점 커졌다. 교회를 사업체처럼 운영하고, 목사가 리더십을 발휘해서 강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주로 목사들이 그랬다. 성공했다는 교회의 방법을 시골 교회에 적용하고 자기 뜻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했다.

 

나는 박세직 집사 같은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말렸다. 비난하지 않고 차분하게 설득했지만, 그분들은 내가 비난한다고 느끼기도 했다. 현지우 권사 같은 분은 드물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헌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 언젠가 그런 분을 만난다면 마음이 어떨지 모르겠다.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는 참 잘 쓴 책이다. 실망한 30대 교인, 열심히 하려는 50대 교인, 지난날을 돌아보는 70대 교인을 통해 교회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분들의 고민을 성경 말씀으로 대답한다. 실망한 30대 교인은 믿음이 바뀌는(신앙의 여정) 과정이라고, 비전과 성공을 내세우는 50대 교인에겐 교회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삶을 돌아보는 70대 교인에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곳이 교회라고 말한다. 욥기, 바울 서신, 마태복음을 새롭게 풀어가는 과정에 매료되었다. 주위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있다.

 

다만, 목사를 주인공으로 한 장을 더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곳에서 목사의 책임도 크니까. 그러나 목사인 저자가 목사를 대상으로 삼기엔 고충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저자가 폭넓은 독서와 깊은 성서 해석으로 의미있는 책을 쓴 분이라 CHAPTER 4가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

영성 고전 20권을 10쪽 분량으로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10쪽으로 소개하면? 나는 한 권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써야 만족하는데 10쪽이라니! 줄거리와 책의 가치, 논쟁점만 다루어도 30쪽은 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책을 펴고 멈추지 못했다. 신학자이며 독서광인 김기현 목사님 눈으로 읽은 책이라서 누구나 알던 그 책이 아니었다. 새로웠다. 독서광인 저자가 관련 책을 비교, 분석하고 쓴 글이라 읽는 내내 즐거웠다.

 

1부는 하나님을 찾고(고백록), 나를 찾고(팡세), 죽음을 넘어서(이반 일리치의 죽음), 영적인 삶을 찾아서(영적 발돋움)~ 기도(무명의 수도사의 기도)로 끝난다. 2부는 사람을 찾고(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어머니 하나님을 찾고(침묵),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찾아(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 정체성의 영성(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끝난다. 순서가 참 좋다. 하나님을 찾는 일이 기도로 마무리되고, 사람을 찾는 일은 정체성의 영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렇지!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 읽고 싶은 책이 많아진다. 읽었던 영성 고전을 다시 읽고 싶어지고, 읽지 않았던 고전뿐만 아니라 관련 책들도 죄다 읽고 싶다. 혼자 읽을 책, 모임에서 나누고 싶은 책 목록도 생겼다. 읽어봐야지!

그리고 목사님께서 나를 간서치라고 불러주셨다. 진짜 간서치는 내가 아니라 김기현 목사님이다. 10년 전, 부산 갔을 때 김기현 목사님 집에 갔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 집에 가보자고 조른 건 지금까지 딱 한 번밖에 없다. 책이 엄청 많다는 소문 때문에. 내가 가진 책 분량뿐만 아니라 책을 읽고 깊이도 견줄 수 없었다. 집구경 참 좋았다. 책구경도 참 좋다.

 

예수의 어려운 말들 (에이미질 레빈, 202) / 성경 해석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 신학자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어려운 말씀을 골라 해석했다.
기독교인이 한두 번은 궁금해한 내용을 다루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신학자, 남성이 아닌 신학자라서 그런가 생각하는 게 완전히 다르다.
부모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눅 14:26)을 정체성으로 해석한다.
특히 천당과 지욱, 악마에 대한 해석이 새롭고 좋다.
여기 저기서 읽고 들었는데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한꺼번에 정리해놓았다.

1.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막 10:21) - 경제 문제의 중요성
2. 부모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눅 14:26) - 정체성에 대한 질문
3.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4) - 종의 은유는 적절한가
4.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마 10:5) -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구분
5.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마 25:30) - 내세에 대한 해석은 유익한가
6.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요 8:44) - 매도와 악마화를 극복하려면

이 책은 성경 공부에 도움이 된다. 히브리어의 뜻을 밝히고, 같은 히브리어가 쓰인 사례를 소개하고, 몇 가지 해석 사례를 소개하고, 올바르지 않은 해석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질문하고, 찾고, 토론하고, 또 찾고, 하나하나 따지며 뜻을 찾아간다. ‘예수님 말씀이 이런 뜻이니 이렇게 살아라!’ 하는 내용은 별로 없다. 일반인이 읽으면 딱딱하고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태도,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기에 딱 좋은 책이다.

다만 딱 부러지는 내용을 원하는 분은 읽으면서 화가 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신자들이 궁금해 하는 5,6장과 1장 위치를 바꾸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가끔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데 참 좋다.
129
쪽에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9:36)’ 하는 내용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나는 회중을 으로 보는 은유가 썩 내키지 않는다. “바리새인 되기 싫어. 바리새인은 부당해. 난 그냥 양이 될 테야.” 어렸을 때 이 노래를 부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양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회중은 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림 속에서야 귀엽지만 양은 고분고분하고, 말이 없고, 상상력도 없어 생각하지 않는다. 회중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다음 세대 자녀들이 양이 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사선과 의사, 회계사, 전기 기술자, 배관공, 도서관 사서, 호텔 지배인 등 무엇이 되어도 좋지만 양만은 안 된다.>

199 <굳이 성경학자가 아니어도 문제의 본문들과 씨름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아무런 문제점도 보지 못할 때가 더 걱정되고 제기되는 의문조차 무시할 때는 더욱더 걱정된다. 본문의 의미를 묻지 않거나 본문의 내용과 씨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회중과 특히 젊은층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다. 제자도란 고분고분한 양처럼 된다는 뜻이 아니다.>

2023년 첫 책으로 비크너를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비크너.

. 저자
: 비크너는 독특한 사람이다. 고개를 기울여서 본다. 사람들이 보는 방식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삐딱한 그리스도인을 위한통쾌한 희망사전이라는 책 제목에 드러나듯이 꽤나 삐딱한 사람이다. 무뎌진, 뻔한,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낯선, 새로운, 뒤통수를 탁 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독자
:진리를 말하다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한다. 이 책에서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설교자라고 해석했지만,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면 누구나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학생을 만나는 교사, 자녀를 기르는 부모, 누군가를 만나는 다른 누군가 말이다. 진리를 말하고 싶은 소명을 가진 사람 중에서 책을 좀 읽은 분에게 알맞다. 헨리 워드 비처(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해리엇 스토우 비처의 남동생) 이야기로 시작해서 리어왕, 선지자, 예수님을 넘나들다가 오즈의 마법사와 나니아 연대기로 이어지며 글을 썼다. 독특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하는 이야기라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 내용
: 비크너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복음을 비극으로, 희극으로, 동화로 읽으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복음은 비극이고, 희극이고, 동화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필요로 하는 세상에는 비극이 있다. 리어왕의 공허한 외침처럼 외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이때 복음은 웃음을 준다. 예수님의 비유도 하나님의 농담에 가깝다. 무엇보다 복음은 동화에 가깝다. 꿈꾸는 듯한 이야기, 모든 시대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말이다.

진리를 말하다마지막 문단이 책을 요약하는 내용이다.

--- 설교자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 설교자는 소리 버튼을 꺼서, 세상이 전하는 침묵의 소식이 우리 귀에 들리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비극적 진실을 들을 수 있는데, 그 진실이란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세상은 소리가 되울리는 어두운 허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희극적 진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재의 심연 속으로 스스로 임재하시되 있을 법하지 않은 방식으로, 늙은 사라와 아브라함 같은 가능성 없는 사람들에게 임재하시며, 때가 오면 어쩌면 빌라도와 욥, 리어왕, 헨리 워드 비처, 그리고 여러분과 나 같은 사람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포복절도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희극이라는 수단으로써 압도적 비극을 설교해야 하며, 빛으로써 어둠을, 특별함으로써 평범함을 설교해야 한다. 너무 좋아서 사실일 수 없는 이야기로 말이다. 이건 사실일 리 없다고 일축해 버린다면 이는 그 이야기의 숨결, 눈물에 가까운 아니 눈물과 동반되는 그 가슴 뜀과 가슴 벅참까지 놓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숨결, 그 가슴 뜀, 그 가슴 벅참이야말로 진리에 대해 우리가 지니는 가장 심원한 직관이다. ---

 

. 문장

얼굴에 거품을 잔뜩 바른 채 면도칼을 들고서 호텔 방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비처가 본 것은 자기 자신의 수치와 공포,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모습, 하나님의 심판보다 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게 분명한 심판, 곧 자기가 자신에게 내린 심판이었다. 이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데 비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보이는 일에 그다지 능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우리는 다 자기 칼에 베인다. 우리는 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아니 바라건대 적어도 인간으로 존재하는 길에 있다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수고한다.(12)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침묵이다. 이는 귀 기울여 들으라고 우리에게 제시된 침묵이기 때문이다. (45)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건 대부분 하나님의 부재 때문이다. ~ 하나님의 부재는 폭풍우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아니, 하나님의 부재가 곧 폭풍우다. 폭풍의 눈이 하나님의 눈이고, 폭풍의 중심에 있는 그 고요와 텅 빔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 긴장해서 들어야 하는 세미하고 작은 목소리기 때문이다. (75)

동화에서는 절대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지는 않으며,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이들은 자기 안에 있는 최상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이들이다. (131)

세상의 벽 너머에 있는, 슬픔보다 통렬한 기쁨이라니. 교회에서도 이 기쁨을 얼핏 보게 될 때가 있다. 비록 우리가 교회에서 기쁨을 너무 열심히 찾고 있는 탓에 오히려 교회가 도무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법하지 않은 곳이 되긴 하지만 말이다. (138)

믿음은 이들의 최고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끌어냄으로써, 믿음은 그 자체가 목표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목표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153)

 

. 비크너 문장을 내 문장으로 바꾸기

유대인들은 아무 사고 없이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신중하게 처리한답시고 한 일이 빌라도에게 책임을 전가한 짓이다. 우리도 이렇게 한다.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예수는 메시아일 필요가 없이 그저 예수 자신으로 있어도 되었고, 가끔 술도 한 잔 나누며 그저 예수 자신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사로는 예수의 친구였고, 예수는 나사로를 사랑했다. 당신 곁에 이런 사람이 있나?

요한계시록의 천사는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각 사람에게 주는데, 이는 창세 전부터 붙여진 참되고 감춰진 이름이다. 한 사람의 진짜 모습, 자기 자신이 되는 모습을 담은 온전한 이름 말이다.

 

2014년 11월 좋은교사에 소개한 글입니다.
글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있어 공개합니다.

왕의 재정, 김미진, 규장

벼랑 끝에 서는 용기, 로렌 커닝헴, 예수전도단

<왕의 재정> 강의가 유튜브 조회 합계 천만 건을 넘어섰다. 교회마다 앞다투어 강사로 초청한다.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가 50억 이상 빚을 지고 자살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빚을 다 갚고 다시 부자가 된 사람 이야기라면 듣고 싶어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재정관리에 대해 말한다고 권하는 사람도 있고, 성도가 돈에 눈이 먼 거라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도 강의하러 왔기에 <왕의 재정><벼랑 끝에 서는 용기(이하 벼랑 끝)>를 함께 읽었다.

로렌 커닝햄은 YWAM(국제 예수 전도단)의 설립자이며 열방대학 설립자 겸 총장이다. 김미진은 YWAM 간사였다. 둘은 똑같이 YWAM에서 사역했으며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재정을 채워주신 이야기를 한다. 로렌 커닝햄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필요한 재정을 채워주는 예화를 통해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과정을 알려준다. <왕의 재정>도 비슷한 이야기를 통해 청지기로 믿음의 삶을 사는 원리를 알려준다. 두 저자가 말하는 내용과 간증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기복주의나 물질만능주의를 말하지 않을까 경계하며 읽었다. 그러나 돈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저자의 생각을 성경 말씀으로 뒷받침하려고 애를 쓴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만 강조하지 않고 신구약에서 골고루 인용한다. 감당도 못 하면서 나눠주라고 하지 않으며 잘 관리하고 절제하라고 권한다. <벼랑 끝>에선 기복주의 생각도 못 했고 <왕의 재정>은 저자가 경계하며 썼다고 느꼈다.

책에 나온 증인들은 평범하게 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마련해 준다고 믿으면서 미련하게 벼랑 끝에 선다. 무조건 하나님께서 주신다 믿고 기다리라고도 하지 않는다.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되, 필요할 때 기다리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이 공급하신 일을 증거한다.

 

두 책이 다른 점

<벼랑 끝>은 재정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성도가 생각해야 할 다른 태도를 줄곧 말한다. 달란트 비유가 반드시 재정적인 부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격이 성숙하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하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말한다.(83) 주님은 우리를 먹이는 일보다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바꾸어 가시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지신다(205)고 말한다.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210)고 고백한다.

<왕의 재정>은 맘몬을 경계하라고 말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돈 이야기를 한다. 씨 뿌리는 이야기를 돈으로 해석한다. 달란트 비유도 돈으로 해석한다. 재정이야기를 하는 책이므로 돈 이야기를 하는 게 맞지만 <벼랑 끝>에서 느껴지는 하나님 중심의 삶보다는 이 자꾸 중심으로 치고 올라온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다면 지극히 작은 것, 재물, 남의 것에 충성해야 한다(154)는 말도 하나님보다 재물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느껴진다. 인용한 성경 구절도 모두 돈과 관련짓는다.

물론 성경에 돈과 관련된 구절이 3000개나 된다고 하니 많이 인용할 수도 있다. 저자가 성경을 100번도 넘게 읽었으니 엉뚱하게 인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나는 성경을 사랑하고 꾸준히 읽는다. 저자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읽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든 성경으로 해석하려 한다. 중요한 일이건 사소한 일이건 모두 말씀으로 해석하려 한다. 저자는 나보다 성경을 많이 읽었으니 어떤 문제가 생기면 성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 문제가 이다.

<벼랑 끝>은 돈을 흘러가야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AB에게 10만원 주는 것보다는 AC에게 주고, CD에게 주고, DB에게 다시 주는 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고 한다. B가 하나님께서 필요한 돈을 채워주신 경험을 하는 동안 A만이 아니라 CD도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게 복이라 한다. , 돈에 관한 기도가 얼마나 자주 이루어졌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참여했느냐를 귀하게 여긴다.

<왕의 재정>에선 계속 돈만 말한다. 하나님께 맡기면 이자율이 3000%라고 한다. 저자가 성경을 잘 알기에 돈을 경계하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돈이 하나님께서 일하는 통로라고 한다. 엘리야, 베드로, 청지기…… 모두 돈으로 해석한다. <왕의 재정> 부제는 내 삶의 진정한 주인 바꾸기이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진짜 주인으로 바꾸어야 할 영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돈만 말한다. 20년 전에 쓰인 <벼랑 끝>에 지금 인기를 끄는 자기계발’, ‘긍정의 힘을 덧붙인 듯하다.

 

<왕의 재정>은 왜 돈 이야기만 할까?

결혼하고 아이를 갖지 못한 친구가 얼마 전에 아이를 입양했다. 행복해 보였다. 예전에 같은 처지에서 하나님 은혜로 아이를 낳은 다른 사람 간증을 나누었다. 그분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아이가 들어가는 낱말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자녀가 없는 부부 눈에는 아이성아이성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는 내용을 눈여겨 본다.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은 주신다. 성공한다, 잘 된다를 읽는다. 이게 심해지면 조엘 오스틴처럼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긍정의 힘을 가진 좋은 예로 바꾼다. 성경에서 무엇을 읽어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말한다. 김미진은 계속 재정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논리를 비약해서 돈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많이 나눠주고 돈에 매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더구나 책으로 낼 때는 신중해야 한다. 로렌 커닝햄은 돈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전해주었다. <왕의 재정>은 돈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생각을 갖게 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고 싶다면 왕의 재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외친 이야기를 간증해야 한다. 그럼 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선지자는 백성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외쳤으니까.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두 책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누구에게 5달러를 주라는 말씀, 돈이 없는데 집을 사거나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기다리라는 말씀 등을 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화장품을 설화수로 갖다주라는 말씀도 듣는다. 구한다고 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합리적인 내 생각과 다르게 일하는 분이라고 믿기에, 하나님이 하셨다고 받아들였다.

나는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을 어렵게 한다. 잠깐 떠오른 생각이나 느낌, 우연히 들은 설교나 성경 말씀, 갑자기 생긴 사건을 하나님 음성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정말 하나님 음성일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묻는다. 두 저자는 하나님 음성을 자주 듣는다. ‘나도 들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하나님 음성을 그렇게나 자주 들을 수 있을까? 하나님 음성일까?’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김미진은 우리 교회에서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 가운데 암 환자가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낫는 환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낫지 않아도 나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어하고 받아들인다. 진지한 뜻으로 말했다면 암 환자가 나았어야 한다. 가볍게 한 말이라면 공적인 장소에서 강의하며 다니지 말아야 한다.

김미진이 로렌 커닝햄 정도만 말했다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되는 걸 보면서 내 믿음이 부족하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인데 내가 합리적 판단을 앞세워 믿음을 놓쳤다고 돌이켰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정해진 레일로만 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이 아닌지 돌아봤을 것이다. <벼랑 끝>만 읽었다면, <왕의 재정> 감수의 글 제목이 한국교회의 부흥의 열쇠는 재정에 있다가 아니라 부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썼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네 소유를 다 팔고 나를 따르라하시면 이거 다 팔면 30, 60, 100배 주신다!’ 하며 따를까? 돈으로 하나님 영광을 사려는 짓이 아닐까? 교회에서 지나치게 돈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서 차라리 나처럼 주어진 범위 안에서 신중하게 사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한다. <재정 강의>는 마치 돈이라 쓰고 하나님이라 읽는 것 같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돈을 사랑하면 괜찮다고 바꿔 버렸다. 왕의 재정이 아니라 돈에서 해방된 교회가 읽힌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정 강의>에 대한 내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 편견으로 오해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흥의 열쇠는 재정에 있지 않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하나님이 땅을 고치는 일은 하나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겸손하게 기도하며 - 돈이 아니라 - 하나님 얼굴을 구할 때 온다.(대하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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