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반박문을 붙인지 500년이 지났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분기점, 평신도에게 말씀을 돌려준 전환점, 개신교의 출발점이다. 개신교회에서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기념주일로 지킨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반박문을 붙이면서 가톨릭이 개혁되기 원했지만 가톨릭을 떠난 다른 걸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에 통용되던 방식으로 의견을 제시한 뒤에, 하나님께 등 떠밀려 깃발을 들었다고나 할까!

루터가 깃발 들고 앞서자 사람들이 줄 맞춰 함께 행진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종교개혁은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 유럽 각 나라의 상황, 지방 영주(제후) 권한, 인쇄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확장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교황과 지지세력이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맞서는데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은 초기에 뿌리 뽑혔을 것이다. 영주들의 권한이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다면 선제후(황제 선거권을 가진 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지 못했을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흐름과 이야기가 종교개혁을 떠받치고 있다.

 

누구를 기억하는가?

종교개혁 하면 루터와 칼뱅을 생각한다. 둘은 종교개혁의 영웅이다. 사람이 기억하는 영웅은 멋지고 장엄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할 일을 해낸다. 대단한 능력, 탁월한 언변과 지도력, 굳센 의지와 끈기로 세상을 바꾼 사람을 기억한다.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기억에 남지만 조용히 뒷정리하는 사람은 잊혀진다. 멜란히톤이 그런 사람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다. 칼뱅은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이며 개혁을 이끌었다. 멜란히톤은 중도노선을 걸었다. 당시에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중도주의자가 있었다. 천주교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 에라스무스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에라스무스는 온건하게 개혁하기 원한 인격자이다. 온건한 개혁은 과연 가능할까? 교황이 협력하면 가능하겠지만 개혁 대상인 기득권층은 온건한 요구를 듣지 않는다. 점잖게 말할 때 듣는 사람이라면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교황권 아래에서 권력을 누리며 재물을 긁어모으던 사람들을 이기려면 과격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과격한 방법은 자체 내에 모순을 갖고 있다. 폭발력이 있으나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 잘못을 일으킨 가능성도 많다. 루터에게 멜란히톤이 없었다면 너무 멀리 가버려 개혁되지 못하거나 방향이 바뀌었을 것이다.

 

화해주의자 멜란히톤

이 책은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종교개혁 시기에 일어난 일을 말한다. 40개의 짧은 글을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처음 글은 멜란히톤? 그게 뭐죠?’이고 마지막 글은 멜란히톤 깊이 읽기. 멜란히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읽을 가치가 있다고 전한다.

멜란히톤은 일곱 살 때 고향이 적군에게 포위 당한 일을 겪었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 오염된 물을 마시고 투병하다가 죽었다. 이런 경험이 멜란히톤을 화해주의자로 만들었다. 인문주의자들과의 만남도 영향을 주었다. 다투는 무리들 사이에서 중재와 화해를 전했다. 멜란히톤을 만난 수녀는 모든 개신교인들이 멜란히톤 같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멜란히톤은 협상 상대, 조언자, 교사와 교수로 뛰어나서 개신교도뿐만 아니라 가톨릭 측으로부터 전향 제의를 여러 번 받았다. 가톨릭 안에서의 개혁을 원하는 구교 진영 개혁가들은 멜란히톤이 자신들 편이 되면 급진적 종교개혁을 저지하여 교회 내부의 개혁이 지지를 받으리라 기대했다.(100) 루터 곁에는 화해주의자 멜란히톤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루터는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만나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멜란히톤은 자신이 루터에게 모욕을 당한 노예 신분(25)’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버텨냈다. 그에겐 개혁된 세상을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언어학자, 신학자, 교사 ……

멜란히톤은 루터에게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라고 요청했다. 루터보다 그리스어 실력이 좋아서 번역할 때도 참여했다. 루터 성경은 사실 루터-멜란히톤성경이다.(31) 루터보다 먼저 교리문답서를 만들었고 개신교 격언집과 개신교 신학 교과서도 최초로 저술했다.(32) 루터보다 저술을 많이 했으며 교수이자 문헌학자인 친구 카메라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는 900통 이상이나 남아있다, 교육에 영향을 미쳐 독일의 스승으로 불린다. 독일을 넘어 유럽 대부분 지역의 교회사와 교육사에 관여했다. 저자는 멜란히톤이 16세기에 이미 미래 교회를 구현한 사람이라고 한다.

멜란히톤은 언어에 능했다. 또한 신학과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개신교 최초의 교과서인 <신학총론>을 펴냈는데 오직 은혜로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말씀이 핵심내용이다. ‘오직 믿음으로의롭게 된다고 루터가 말한 내용을 멜란히톤은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가톨릭과 루터파, 칼뱅파가 결론 없는 싸움을 계속한 뒤에 결국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555년에 이들은 아우구스부르크 종교 평화회의에서 하나의 원칙적인 합의를 이루었는데 ~ <2천년 동안의 정신, 폴 존슨, 살림, 393>”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톨릭이 주장하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있다고 공개적으로 공표한 문서이다. 멜란히톤이 부드럽게 적었지만 가톨릭의 반대를 받았고,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작성하여 공표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 개신교를 인정하는 문서로 불린다. 이 문서 역시 멜란히톤이 정리했다. 그러나 1530625,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황제와 제국 의원들 앞에서 낭독될 때 멜란히톤은 너무나 지쳐 숙소에 앉아 울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 외에도 다양한 주장이 넘쳐났다.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 내부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자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개신교 내에서도 가톨릭을 대하는 태도, 말씀, 성찬, 세례, 자유의지, 성자 숭배, 예배 의식 등에 대한 반응이 저마다 달랐다.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 사이의 성찬 논쟁은 1973년이 되어서야 로이엔베르크 합의로 중재가 되었다. 이 중재는 멜란히톤이 빵과 함께라는 표현으로 제시한 내용이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멜란히톤이 프로테스탄트 내부의 기독교 통합 운동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멜란히톤은 교사를 칭찬했고 자신도 훌륭한 교사였다. 교육이란 당대 사회에서 떠난 상아탑을 이루면 안 된다고 했으며 자신이 직접 모범을 보였다. 대학을 개혁했으며 사급 인문학 학교(고등학교)를 만들었다. 신학 교과서 <신학총론>을 쓰고 계속 개정했다. 루터는 불을 붙였고 멜란히톤은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심지를 조절하고 연료를 채웠다.

독일 브레텐, 멜란히톤(독일 발음 멜랑크톤) 생가

평신도 멜란히톤

멜란히톤은 사제도 목사도 아니다. 그리스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에 능통해서 성경을 번역하였지만 평신도이다. 1521929, 멜란히톤은 소모임에서 몇몇 대학생과 함께 빵과 포도주로 성찬식을 치렀다. 평신도 제사장직을 수행한 셈이다. 종교개혁가의 후예로 살아가는 한국 개신교회 평신도가 성찬식을 행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멜란히톤은 그보다 더한 반대를 받았겠지만 만인제사장직을 직접 수행했다. 비텐베르크성교회 제단 왼쪽에 멜란히톤이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을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려놓았다. 사제도 목사도 아닌 멜란히톤이 세례를 주는 모습은 평신도 종교개혁 신학자인 멜란히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멜란히톤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다. 유대인에 대해서는 옹호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투르크인은 적으로 규정하고 싸우라고 했다. 헤센 방백 필리프의 중혼을 허락했고, 곤경에 처하자 개신교에 정치적도덕적으로 손실을 끼쳤다고 생각하고는 감당할 수 없어 병에 걸리고 말았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정도였다. 잘못 결정하기도 하고, 지치고 낙망하여 울었다. 그러나 줄곧 강력한 다툼의 자리에서 화해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멜란히톤은 정이 가는 평신도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적어서 안타깝다. 앞장서서 이끌어간 지도자가 아니라서 외면하지만 멜란히톤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더 거칠고 답답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책은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를 말한다. 종교개혁 시대를 모르는 평신도가 읽기에는 조금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막아선 세력에 맞서 분투한 평신도 멜란히톤을 만나면 우리가 대항해야(프로테스트) 하는 장벽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막힌 담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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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인격이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관계가 틀어지면 힘들어한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힘들게 하면 재수 없다고 내뱉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날마다 봐야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해석을 해야 한다. 오래도록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가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진주로 만들고 싶어도 너무 아프다. 가족이라 더 아프다. 곁에서 봐도 힘들고 멀리 떠나도 괴롭다. 도저히 해석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하나님께 해석을 들으려 한다. “왜 이러시느냐고……

아버지와 엄마

저자는 엄마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느낀다.(268)”고 말한다. 엄마는 사랑, 희생, 따뜻함을 나타낸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있으나 마나 한 느낌이 많다. ‘끔찍한 괴물, 차라리 없어지면 좋을 사람일 때도 있다. 잊고 돌아서면 그만인 남남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석하려 한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이해한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서 그럴 거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까이 대하면 힘들고 어렵게 산 게 무슨 대수야? 왜 나를 힘들게 하는데……한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비슷한 상황에서 살았다면 갈등이 적을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쉬울 테니까. 그러나 부모가 살아온 시대와 자녀가 사는 시대는 다르다. 부모세대는 가난을 몸으로 겪어냈다. 사랑을 표현하는 세대도 아니었다. 밥만 먹여줘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녀세대는 밥이 아니라 이해와 존중을 원한다. 말로 해도 이해하는데 왜 소리 지르고 때리는지 몰라 답답해한다. 주려는 것과 받으려는 것이 다르니 다툼이 생긴다.

대화로 다툼을 해결하면 좋겠지만 아버지는 대화를 어려워한다. 가난을 몸으로 부딪쳐 이겨내며 자식을 위해 희생했는데 머리 컸다고 또박또박 말대꾸 한다고 받아들인다. 집안의 기둥에서 점점 뒷방어른으로 바뀌어 가면서 화를 낸다. 자책하다가 자녀에게 폭발한다. 자기를 무시한다고 분노한다. 세파를 견디며 묻어둔 분노를 자녀에게 쏟아버린다. 소리치고 윽박지르고 때리고 집 밖으로 쫓아낸다. 이해하려고 시작한 대화는 분노와 좌절로 끝나기 일쑤다. “하나님, 왜 이러세요?”

 

무작정 떠나다.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단 한 번의 여행이다.” 표지 귀퉁이에 적힌 말이다. 자전거 타고 세계를 돌거나 히말라야 구석진 곳을 여행하고 쓴 책 같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여행기 같기도 하지만 저자는 다른 여행을 한다. 23살 아가씨가 아버지를 피해 옷장 안에 숨었다가 들켜 두들겨 맞고 한밤중에 맨발로 쫓겨나서 시작한 여행이다. 무조건 한국을 떠나려고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 찾다가 태국에 간다. 아는 사람도, 잘 곳도 없으면서 아버지 싫다고 비행기에 오른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가난하고 무더운 태국에 덜컥 가서 어쩌자는 건지……

머물 곳도,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에 여행사 직원이 전화번호를 하나 준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지라 늦게 가서 놓치고 태국에서는 전화도 안 된다. 우연히 만난 한국 사람이 저자가 가진 번호를 안다고 한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태국 우돈타니 선교사 집이다. 바쁜 여름 동안 선교사 자녀 둘을 돌봐줄 보모 겸 한국어 선생으로 지낸다. ‘우연일까? 극적인 안내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으로 병이 낫거나 실패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선 이야기가 아니다. 가정폭력에 시달린 아가씨가 태국으로 도망가서 버티며 지낸 이야기다. 하나님이 안내원을 보내지 않았다면 비극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찾는 단 한 번의 여행이 맞다. ‘하나님의 놀라운 우연을 보여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상처와 위로가 부딪치며 생각에 생각을 낳는 이야기다.

 

여행과 사람

가슴에 암덩어리가 있는 사람도 피부에 가시가 박히면 가시와 씨름하느라 암을 잊는다. 가시가 빠지면 암이 느껴진다. 저자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상처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가시에 찔리지 않아도 되는 곳에 오자 암덩어리가 느껴진다. 고통스러운 지난날이 자꾸만 생각난다. 힘들어하는 엄마, 어색해진 동생이 더 큰 가시였다는 게 느껴진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단번에 막힌 담이 뚫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낫지 않는다.

여행은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여행은 문제에서 떠나 생각하게 한다. 저자도 여행하면서 계속 아픈 상처를 떠올린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고는 태어나던 때를 생각한다. 아이 지우고 아빠와 헤어지라며 병원까지 데려간 고모를 피해 도망간 엄마가 남해 어느 시골에서 방바닥을 긁으며 수 시간의 산고를 견디고 자기를 낳았다. 홍콩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운다. 태국에서 달을 보며 아빠와 가족 여행한 일을 기억한다. 행복했던 날 지나고 아빠가 사업에 망하고 쫓기고 도망하고…… 20살 되면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수면제를 모았는데, 예수가 죽음을 이겼다는 말이 좋아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다시 절망하고…… 아파하고 떠올리고 쏟아내고 무작정 걷고 사람을 만난다.

이보다 더한 아픔을 겪은 사람도 있다. 이만큼은 아니지만 버티고 견뎌내며 살지 않은 사람 없다. 그러나 낯선 타국,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거나 시험 받는 공간에서 완전히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자는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과정을 기록한다. 내면의 변화 과정을 기록한 글을 만나서 반갑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셨다. 기가 막힌 때에 만난 안내원 외에도 저자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다.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으면서도 맑은 웃음을 보이며 사는 아이들! 베트남전에서 미국을 도왔다가 라오스에서 쫓겨나 태국에 난민으로 쫓겨 온 몽족 난민을 만난다. 오갈 데 없는 그들은 돌아가면 죽는 곳으로 다시 쫓겨 간다. 태국이 그들을 추방하기 때문이다. 방콕의 유명한 매춘거리에서 만난 16살 까니카! 에이즈 고아원에서 죽어가는 아이,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 견뎌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일어선다. 과거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일어나 현실을 다시 직면할 용기를 얻는다. 딱 한 명을 고르라면 여행사 직원을 최고의 안내원으로 뽑겠다. 무작정 떠나는 상처 받은 영혼에게 선교사 전화번호를 줬다.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지 비행기 티켓도 왕복으로 끊어줬다. 저자가 돌아올 때를 딱 맞춘 6개월 오픈 티켓!

 

변화

저자는 지금 태국에서 산다. 우돈타니에 선교활동 하러 온 정환(저자의 이름처럼 가명일 것이다.)과 결혼하고 태국에 왔다. 남편은 번역하고, 저자는 인터넷 소설을 쓰고 있다. 정환과 결혼하고 아빠 곁을 도망쳐 나온 건 아니다.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 견디며 싸우고 싸웠다. 아버지가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면 예전처럼 옷장에 숨지 않고 맞섰다. 또 때리면 그 길로 나가버릴 거라고도 했다. 자기 생각만 하며 안으로 가라앉을 때는 아빠에게 맞서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상처는 곪아 자신을 죽이고 상대에게도 악취를 풍겼다.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생각을 말하면서 오히려 아버지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의견이 달라 싸우지만 미워하진 않는다. 다시는 아버지 만나지 않으면서 나는 용서했다. 안 보니 편하다하거나 나는 용서 받았다. 당신도 용서 받아라.’라고 해도 사실은 용서하지 못해서 끙끙대는 거다.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죽이고도 태연히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말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혼자 적을 쓰러뜨리거나 적 앞에 엎드리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십자가를 대가로 치러진 선물이다.

이 책은 <복음과 상황>에 연재되었다. 잡지 받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읽었다. 책으로 읽을 때보다 좋았다. 다음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생각을 할지 두근거리며 한 달을 기다렸다. 책 한 권으로 단숨에 읽으니 긴장감이 덜하다. 저자가 오래도록 견디며 진주로 만든 고민을 단숨에 읽어서 그런가 보다. 영화 한 편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휘리릭 본 것 같다. 이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소설 읽듯 읽지 말고 나라면 어땠을까?’ ‘나도 이런 생각 하는데……’ ‘, 이랬구나!’ 하면서 읽어야 한다.

용서를 고민하는 분에게 추천한다.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존재에게 상처 받고 배신당하고 관계가 깨져 몸부림치는 분에게 추천한다. 맞서 싸우지 못해서 속으로 끙끙대며 괴로워하는 문제를 가진 분에게 추천한다.

글은 억울한 사람이 쓰는 거다. 무서워서 말할 수 없었던 사람, 두려워서 숨어야만 했던 사람, 감정이 체한 사람, 가슴이 곪아 고름을 품고도 뽑아내지 못했던 사람이 기어이 쓴다!’”(202-203)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그가 한 일을 잊어주거나 덮어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일그러졌던 관계를 다시 바로 세우는 과정이다. 포기하지 않고, 뒤돌아서지 않고, 사랑을 향해 같이 걸어가는 일이다.

아버지와 씨름한 만큼 나도 변했다. 우리 사이에 억눌린 분노가 서로를 괴물로 만들었다면, 상처를 이야기하고, 아프고 화난 만큼 울어버리고, 다시 사랑하고 싶다고 말한 순간들이 서로의 가슴 안에 박혔던 독기와 가시를 하나씩 빼주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버지도 나도 고집스럽고 한심한 인간들이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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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독서모임에서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를 나누고 쓴 글이다.
쓰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어제 30분만에 휘리릭 썼다.
빨리 썼기 때문에 내 마음을 더 잘 담은 것 같다. 오늘 아침에 몇 문장 고쳤다.

난 인생이_무거운_짐이라_생각한다. 삶이란 저만치 보이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거다. 얽매이고 얽매여 어찌하지 못한 채 견디는 게 인생이다. 즐거움도 있다. 기쁨도 있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웃는 날도 많다. 돌아보면 감사가 넘친다. 지금도 나쁘지 않다. 앞으로 즐거운 기억을 만들며 괜찮은 삶을 살 거라 기대한다. 그래도 삶은 무겁다. 죽음의 순간이 기다려지는 건, 인생의 무거운 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을 때 고통스럽지 않으면 참 기쁠 것 같다.

삶을_가볍게_대하는_사람을_보면_답답하다. 고민이 없나? 걱정되지 않나? 생각은 할까 싶다. 단순해서 잘못 선택하고,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해서 일을 그르친다. 그런데 부럽다. 그들은 인생의 짐을 가볍게 진다. 잘 웃고 얼굴이 환하다. 상처를 덜 받고, 아픈 기억을 남겨두지 않는다. 지금 겪는 고통이 오래가지 않으며, 과거의 고통을 어두운 기억으로 붙잡아 놓지도 않는다. 과거보다 지금이 중요하며, 미래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난 아니다.

비크너는_고통의_좋은_청지기로_살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면서. 기쁨과 감사를 잃으면 쉼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면 좋은 청지기가 아니다. 인생을 고통이라 생각하면서도 이웃에게 쉼을 주고, 그만치 고통을 겪었지만 위로하고 치유한다. 고통을 되새기고 되새기고 되새기다 씁쓸함을 즐기게 놔두지 않는다. 고통을 달란트 삼아 제대로 열매가 맺히게 한다. 인생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삶을 즐긴다고 생각한다. 벼랑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책에 나온 문장 3개 간접 인용함)

난_안다. 고통이 하는 일, 고통을 다루는 방식, 고통을 당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하는 말 … 내 기억이 남겨놓은 것, 내가 넘어서야 할 기억도 안다. 고통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배웠다. 내가 왜 인생을 짐이라 생각하는지 이해했고, 고통에 갇힌 사람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난 여전히 기억에 갇혀, 과거를 만날까 봐 현재에 매달린다. ‘그래, 알아! 나도 알아.’ 하며 기억을 수면 아래 그대로 잠기게 하지만 불쑥불쑥 올라와 나를 불안하게 한다.

“행여나 과거를 만날까 봐 현재에 매달립니다.
수면 아래 숨어 있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수면 위로 나온 것에 매달립니다. (본문 85쪽)”

기억을_치유하는_사람(『주목할 만한 일상』에 나오는 표현)이 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다. 가끔 치유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내 반응에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난 돈보다, 인기보다 한두 사람의 기억을 치유하는 게 더 좋다. 아이들이 글을 쓰다 울면, 나도 울면서 기뻐한다. 내 일을 잘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전히 내 기억은 치유되지 않는다. 인생이 무거운 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짐을 지듯 일을 한다.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주로 책 읽기, 문집 만들기였다. 지금은 정원 만들기, 나무 심기가 더해지면서 글쓰기가 줄었다.

다행인_건_책이_내_기억을_꽤_치유해주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피면서 나를 살피고, 고통받는 이웃을 살피게 해주었다. 아이들이 글을 통해 기억을 치유하기 바랐다. 아픈 기억이 상처를 남기듯, 아이들을 돌보고 치유한 기억이 독특한 나이테를 만든 모양이다. 아이들이 내게 아픔을 내보였다. 글을 쓰며 울었고 독서 활동하면서 울었다. 그럴 때면 고통의 청지기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같은 일을 하며 살려고 준비한다. 1문단에 쓴 무거운 짐의 무게가 10년 전, 20년 전보다는 가벼워졌다. 책 덕분이고, 아이들 덕분이고, 가족 덕분이다.

다만_한_가지_걱정이_된다.
내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열심히 사느라 지쳐버리는 건 아닌지,
어느 순간 한꺼번에 무너져내리지는 않는지~

각_문단을_300자로_쓰다가_이런_모습을_깨뜨리려고_마지막_문단을_짧게_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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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알아야 이해하는 책이 있다.

당시 문화와 어휘를 모르면 명작도 단순한 줄거리만 남는다.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소선지서는 성경을 읽는 사람도 뒤로 미뤄두는 부분이다.

즉 소선지서를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 아주아주 적다는 뜻이겠지.

 

소선지서를 읽지 않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

시대를 모른 채 읽으려면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소선지서는 그런 문장이 별로 없다.

십일조 내라고 말라기 일부, 교회 건물 지을 때 학개 일부를 인용하는 정도다.

미가와 하박국과 요엘 일부가 노래로 만들어져 약간 친해졌지만

선지자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른다.

그들이 왕족인지, 몰락한 귀족인지, 가난한 농부인지 모르니까.

체념해서 망하라고 외쳤는지, 망할 리 없다고 확신하며 외쳤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요나만 남았다. 요나가 바로 나~ 라고.

 

성서를 읽다의 부제, ‘역사학자가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법

그동안 내가 성서를 묵상한 방식이다.

난 말씀을 들었던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고 싶었다.

역사를 잘 아는 학자가 선지서를 보면 역사를 바탕으로 읽는다.

선지서 전체를 50번 넘게 읽었고, 꾸준히 묵상했고

선지서를 해설하는 책도 읽었지만

성서를 읽다에서 소선지서를 새롭게 만났다.

 

소선지서 해설에 앞서 소개하는 출애굽기와 민수기 내용도 좋고

부록으로 넣은 김교신 선생 이야기도 좋다.

(저자가 김교신 선생을 무척이나 존경하나 보다.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줄 알면서도 부록으로 넣은 걸 보면...)

추천한다. 소선지서를 이해하는데 빛을 비춰주는 책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한 권으로 꿰뚫는 소예언서

(소선지서 전체를 교차대구로 분석해서 소개하는 책이다.)

 

시인과 평론가, 두 사람 중 누가 시의 본질을 제대로 읽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같은 사물을 각자의 내적 성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읽어 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미국 역사가 칼 베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을 명료하게 밝혀 주는 책, 그들의 동기를 잘 표현해 주는 책, 그들의 마음이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던 바로 그 사상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는 책에 영향을 받는다.” (11-12)

 

민중의 예언자 미가는 수도 예루살렘 주민보다 시골 사람들에게 더 큰 애정을 보였다. 시골 출신인 그는 고향 마을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예언자 이사야가 주로 도시와 궁정의 타락과 음모를 풍자비판한 데 비해, 미가는 농민을 학대한 지주들의 탐욕과 불의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상인 집단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38)

 

자연보호 사상을 설파한 예언자 하박국의 사상 또한 대단히 현대적입니다. 그는 레바논 숲을 마구잡이로 벌목해 각종 건축 재료로 사용한 바빌로니아인을 비판합니다. ~ 하박국은 자연을 고갈시킨 바빌로니아인을 규탄하며, 숲이나 짐승 같은 자연계마저 일정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환경론자, 생태주의자들이 귀감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주장입니다.(39-40)

 

기독교 신앙은 이 땅의 터줏대감을 버리고 서아시아 모래밭의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신을 떠나 역사의 신을 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서 서아시아로의 지리적수평적 이동이 아니라 자연종교에서 역사종교로의 수직적 비약입니다.(61)

 

존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라는 질문을 포기하고, 오로지 어떻게라는 문제에만 집착하는 특징을 갖습니다. 현대의 교육과 학문은 대부분이 같은 경험주의와 실증주의의 틀 속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정규교육을 받은 오늘날 교양인들의 의식 역시 그 같은 사고의 틀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현대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선뜻 기독교적 관점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최근 3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이 같은 사고에 있지 않을까요. (78)

 

만일 그들이 어떤 사건을 경이롭고 의미심장하게 느꼈다면, 그 이유는 그 사건이 자연법칙을 깨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신이 임재하고 활동하고 있음이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81)

 

→ 『구약성서저자가 민족 형성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동요 또는 철저한 불신을 대단히 솔직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모세마저 불신에 빠진 나머지 약속의 땅에 들어감을 허락받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기 민족의 첫 출발이 보잘것없음을 이토록 솔직하게 털어놓은 민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야훼의 백성이요, 종교 민족으로 자처하는 이들에게 조상들이 품은 불신은 인간적으로 커다란 수치였을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민족적 자긍심을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었을 테지요. (87-88)

 

야곱의 아들들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가지 않은 많은 수의 히브리인이 있었으며, 출애굽 사건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이미 상당수의 히브리인이 모세의 영도를 받지 않고 이집트를 빠져나왔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영도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의 오아시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곳에서 다른 경로를 통해 이집트에서 먼저 빠져나온 히브리인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이미 그 지역에 체류하고 있던 다른 히브리인 집단을 만나게 됩니다. 모세 영도하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야훼 신앙은 도망 나온 히브리 노예들과 아무런 사회적 기반 없는 부랑 집단에게 강한 흡입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신앙은 그들이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공동체적 유대감과 동질성을 느끼게 해 주었을 겁니다. 그 결과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해 모세 휘하에 들어가는 자가 속출하게 됩니다. (113-114)

 

뽕나무 재배 농민 아모스 : 뽕나무는 해발 300미터 이상에서는 생장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뽕나무 밭이 그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5)

 

아모스는 거의 모든 주변 민족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과시합니다. 이렇게 보면 아모스는 토머스 칼라일이 말한 거룩한 농부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에 괭이를 들었으되 마음에 우주의 진리를 품은 사람이란 뜻이지요.(133)

 

고난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아모스를 비롯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구약의 예언자는 대부분 척박한 유다 땅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북왕국 이스라엘이 산출한 비중 있는 예언자로는 호세아 한 사람밖에 들 수 없으니, 인물 배출이란 점에서 보면 북방이 단연 남방보다 열세에 놓인 셈이지요.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나사렛(북왕국)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질문했는데, 이 말에는 은연중 이스라엘에 대한 경멸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곳 이스라엘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나고 베드로, 요한, 야곱 등 대사도가 출현했으니 이것이야말로 경박한 인간의 의표를 찌르는 신의 섭리라 할 것입니다. (160-161)

 

아모스는 여로보암이 사망하기 5년 전(기원전 746), 늦어도 기원전 752년경에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가 앗시리아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까지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치닫던 위난의 시기에 그는 거의 30년이란 세월 동안 야훼의 예언자로서 조국의 멸망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163)

가난한 농민들 틈에 섞여 살았던 미가는 이웃 농민들이 당한 어려움과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괴롭힌 세력가들에게 누구보다 큰 분노를 느꼈습니다. (201)

 

스바냐가 예루살렘에 살았다는 증거 : (1:10-11) ‘물고기 문에서는 곡성이, ‘둘째 구역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산 위의 마을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막데스에 사는 너희는 슬피 울어라. 장사하는 백성은 다 망하고, 돈을 거래하는 자들은 끊어졌다.

- 둘째 구역은 예루살렘 부유층 거주 지역을, 막데스는 상인 구역을 가리킨다. 예언자가 수도 예루살렘의 지리는 물론, 주민 각 계층의 생활을 세세하게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예루살렘 주민들이 행한 종교적사회적 관행을 상세히 묘사한 부분(1:4-8, 1:12)은 예언자가 예루살렘에 살며 주민들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고 관찰했음을 드러냅니다. (218)

 

스바냐가 왕족이라는 증거는 그가 이방 풍습을 모방하는 왕족들을 비판한 것이나(1:8), 그 하인들의 모모한 횡포를 꾸짖은 점에서도(1:9)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스바냐는 요시야를 도와 개혁에 참여한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스바냐는 돈과 권력을 가진 유한계급을 질타했으나 결코 빈민의 입장에는 서지 않았고, 아모스나 미가처럼 빈민의 고통에 동정을 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같은 경향은 스바냐가 왕실 가문에 속했기 때문에 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다고 설명하면 쉽사리 납득할 수 있습니다. (220-221)

 

학개가 예언을 시작한 것은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11절에는 6월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6월은 오늘날의 8월 말, 9월 초에 해당합니다. 백성이 생활고에 시달리며 빈약한 수확을 거두어들이던 때였습니다. (287)

 

말라기의 예언 방식은 대단히 특이한데, 이를 그의 개인적인 특징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마치 교사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스바냐에 의해 예언이 묵시적 성격을 취했고, 하박국에 의해 예언이 지혜서의 성격을 취했다면, 이제 말라기에 이르러 예언은 교육적논증적 형태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317)

 

앞서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냈지만 이번에는 박 넝쿨이 멸망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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