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에 나온 박진영

사람들은 하나님 얘기를 싫어한다. ‘질렸다는 표정을 보이거나,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며 무시하거나, ‘너나 잘하세요하며 피한다. 이성은 하나님 자리에 인간의 현실을 세웠다. 도킨스, 해리스를 비롯한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 신경쓰지 마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지워버리려 한다. ‘만들어진 신이나 종교의 종말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이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대학, 취업, 전세, 생계유지, 노후 문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더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본받을만하지도 않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가수 박진영이 라디오 스타에 나와서 왜 사는지’, ‘죽음이 무엇인지고민하는 과정을 이야기하자 기독교인들이 환영했다.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만한 증인으로 그를 세우려는 사람도 있고 전도집회 강사로 만들려는 사람도 있다. 삶과 죽음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 돈이 아닌 가치로 고민하는 사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사라지는 세상에 박진영처럼 유명한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니 멋지다고 반응한다.

라디오 스타는 연예프로그램이다. 기독교인들이 환영할만한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유독 박수를 보낸 까닭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박진영이 고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꺼내면 또 교회 나오라는 소리냐?”로 들릴 이야기를 박진영은 그 사람 생각 있네. 그거 정말 생각해볼 문제네라고 들리게 한다. 우리가 성급하게 결론부터 말하며 강요하듯 접근한 문제를 진솔한 고백으로 들려준다.

박진영의 고민, 이병철의 고민

사람들은 누구나 영혼의 문제, 신의 존재, 선과 악, 삶과 죽음을 두고 고민한다. 이야기할 상대가 없거나,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꺼내지 않지만 누구나 박진영처럼 고민한다. 삼성그룹을 창건한 이병철 회장도 이런 고민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1987년 죽기 직전 천주교 정의채 신부에게 네 쪽짜리 질문지를 보낸다. 쪽지에는 이병철 회장이 궁금하게 여긴 24가지 질문이 적혀있었다. 철학자들이 수천 년 답을 찾으려고 고민한 내용이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나?’, ~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나?’,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과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백만 장자의 마지막 질문>은 철학자 김용규가 24가지 질문에 답하는 내용을 담았다. 김용규는 기독교 철학자이다. 이 책은 기독교인의 변증이지만 우선 철학자의 변증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신은 당연히 있고, 예수님이 고통과 죽음을 이겼으며, 악인은 영원한 형벌을 받고, 종말이 오는 날 하나님 안 믿은 사람은 모두 지옥 간다고 외치지 않는다. 이건 변증이 아니다. 이런 식의 대답은 이병철 회장도 이미 들었을 것이다. 만족했을 리도 없다.

철작자 이용규의 대답 - 오류 분석

저자는 철학자답게 증거를 들어 합리적으로 대답한다. 도킨스를 비롯한 무신론자들이 쓴 책을 꼼꼼하게 반박한다. 무신론자들 역시 합당한 증거가 아니라 자기들만의 믿음, 불완전한 논리로 주장한다는 걸 증명한다. 대표적인 예가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이다. <눈 먼 시계공>에서 도킨스가 공격한 시계공 이론은 이신론자들의 논리다. 성경에 없는 내용이고 기독교계에서 인정하는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 교리와 과학을 상식적 수준으로 이해하고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 기독교인 양 공격해서 무너뜨린 뒤에, 기독교 전체를 논박한 것처럼 말한다. 종교를 선택적 관찰의 오류라고 공격하는 그들이 도리어 같은 함정에 빠져있다.

이회장도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에 해당하는 질문을 한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신이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등이다. 이회장은 신과 교회(기독교)를 고통과 불행과 죽음과 악인의 문제를 일으킨 원인으로, 적어도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하나님과 교회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정치 체제 등 사람의 문제라고 논증한다.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지만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과 교회에 두는 건 옳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성경을 증거로 사용하지만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주장, 문학작품,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쓴다.

철학자 이용규의 대답 - 양립주의

저자는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지도 않는다. 지적설계가 하나님을 증명한다고 무조건 믿지도 않을뿐더러 진화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이론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양립주의다. 진화와 창조 모두 인정한다.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모두 인정한다. 기독교인은 의인이지만 또한 죄인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어 의인으로 인정받지만 회심하는 즉시 거룩한 사람이 되어 죄악에서 떠난 모습으로 살지 않는다고 한다. 질문의 결론부에서는 내 생각은 그렇다. 당신 생각은 어떤가?’,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주었듯 종교를 망상이라고 몰아붙여 없애버리려는 것인가? 당신은 어찌 생각하는가?’ 하며 되묻는다. 질문에 앞서 변증을 꼼꼼하게 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내 생각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니다. 생각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고민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도킨스를 필두로 무신론 전도사들이 책을 쏟아낼 동안 한국 기독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체 문제만으로도 허덕이며 세상의 외침에 귀를 막았다. 지금이라도 이런 책이 나와서 반갑다. 박진영처럼 고민하면서도, 기독교를 편협하게 전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인들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이 책을 읽으면 적어도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를 찾아 고민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들려줄 말을 찾는 사람에게도 알맞은 내용이다. 우리 믿음이 산에 아무렇게나 쌓은 돌무더기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이회장이 대답을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답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을 거라는 뜻은 아니다. 저자는 회심을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말한다. 흔들리는 사람에게 논증으로 다가가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증명하라고 외치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논박하기 위해 내용을 모조리 외워 반박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마음이 움직이려면 다른 게 필요하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은 다시 반대논리를 찾을 것이다. 성경을 중심에 두지 않고 자기 생각에 따라 사는 사람은 변증뿐만 아니라 믿음의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확신에 들어갈 생각조차 않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대답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불어, 지나친 자기 확신과 감정적 반응으로 기독교를 편협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읽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할만한 증거를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나는 11장을 다시 읽어야겠다. ‘교회 밖의 사람이라도 신의 진리를 알고 실행하면 구원받는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찾아봐야겠다. 내가 적은 한 구절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읽어보시라! 저자도 요한복음 851-59절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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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9월 24일 기준 149권) 중 가장 좋았던 책
1. 외국 작가 : 『성경 지리 주석』, 『환영과 처형 사이에 선 메시아』
2. 우리 작가 : 『오늘을 위한 레위기』(김근주), 『그 틈에 서서』(박윤만)
위의 4권을 뛰어넘는 책을 만났다.
『지혜란 무엇인가』(송민원)
잠언-욥기-전도서를 연결해서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해설했다. 30년 전, 박영선 목사님의 책 『하나님의 열심』을 읽고 눈이 번쩍 뜨였던 때의 느낌이 다시 생각났다. 이분이 신학교 교수가 아니라 일반인을 만나는 강사로 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사실과 다를 수 있음) 참 멋지다.
잠언-욥기-전도서를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로 설명한다. 잠언은 규범적 지혜를 보여준다. 잠언을 읽는 방법과 문법을 소개하고 몇 구절에 대한 해석을 다룬다. 잠언은 전체를 읽는 관점을 찾기 어려운 책이다. 그래서 ‘히브리어 해석’ 분량이 많다.
욥기와 전도서 해설이 굉장하다. 욥기 전체를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의 대립으로 해설한다. 이것만으로도 정말 탁월하다. 특히 욥기 1~2장, 38~42장 해설이 특별하다. 책값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 읽으며 책값 다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설명하던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다.(궁금하면 읽어보시라!) 읽는 부분마다 좋아서 줄을 너무 많이 그었다.
전도서도 정말 탁월하다. 나이만큼 성경을 읽었고, 꾸준히 공부하고 묵상했는데도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잠언과 전도서를 비교하는 부분은 상상도 못 한 내용이 계속 나와 계속 감탄하며 읽었다. 정말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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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떤 집단을 막론하고 지도자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지도자의 수준은 집단의 수준을 보여준다. 부패한 지도자가 많으면 시대가 암울해진다. 종교 지도자가 부패했던 중세 시대는 당연히 암흑기였다. 부패한 왕조는 무너졌으며 무능한 지도자는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과학과 첨단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지도자가 부패하면 백성은 고통 당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목자로 나타내신다. 여호와는 참된 목자이고 이스라엘은 양이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맡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선한 목자보다는 악한 목자가 더 많았다. 선지자들은 양떼를 파멸의 구덩이로 몰고 가는 지도자를 꾸짖고 질책하며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23:1) 말씀하셨다. 양을 먹이고 돌보며 풍성하게 해야 하는 이스라엘 왕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배를 불리며 양떼를 고통에 빠뜨렸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삯꾼이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10:12)“

절판되었다. 안타깝다.

목자는 고상하지 않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이다. 우리는 목자를 아침에 양떼 데리고 풀밭에 나갔다가 저녁에 우리로 데려오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초록빛 풀밭에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 나무 아래에서 하프를 타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렇게 양을 돌보는 목자도 있다. 미국에선 넓은 풀밭에 울타리를 하고 양들이 자유롭게 노닌다. 목자가 편안하게 기타 치며 쉴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선 이렇게 하지 못한다.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서 목자는 전혀 고상하지 않다.

유다 광야와 주변 지역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목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우기에만 잠깐 흐르는 와디는 평소에는 말라 버린다. 비가 쏟아지면 홍수가 난 듯 물이 흐르지만 잠시뿐이다. 광야는 그야말로 광야다.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풀을 찾아 계속 움직인다. 푸른 초장을 찾아 떠도는 목자는 해마다 2400km를 옮겨다니기도(94) 한다.

광야에는 이리와 늑대가 호시탐탐 양을 노린다. 목자는 밤에도 깨어 가축을 지켜야 한다. 울타리 없는 광야 한가운데에서 약탈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목자가 잠들면 이리와 늑대뿐만 아니라 도둑도 양을 훔쳐간다. 저자는 목자가 애써 기른 양떼를 한꺼번에 훔쳐간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려준다. 저자가 만난 80여 세 된 예멘 목자 모쉐는 도둑들이 개들을 독살하고 양떼를 세 번이나 훔쳐 갔다고 말했다.(202) 그중 한 번은 250마리를 한꺼번에 도난당했다. 사법체계가 작동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이렇다면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에는 얼마나 더했을까!

목자를 알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목자로 설명하는 까닭을 안다. 진짜 목자가 어떤지 모르고 함부로 상상하면 잘못된 지도자상을 갖게 된다. 홀로 앞서가는 독단을 추진력과 리더십으로 착각하면 양떼는 흩어진다. 잘못된 지도자를 뽑으면 못된 짐승과 도둑이 올 때 양떼는 도적질당하고 죽고 멸망당한다(10:10)

목자가 되는데 필요한 자격조건은 무엇인가?

디모데 래니액은 하나님이 말하는 진짜 목자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목자를 직접 찾아 나섰다. 21세기를 이끈 지도자에게 있는 자질을 찾아 <양떼를 잘 이끄는 목자의 7가지 특징>을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요르단, 팔레스타인 주변 지역에서 베두인 목자를 만나 목자에게 필요한 자격조건을 묻는다. 양떼를 몰고 사막과 광야를 오가며 이리와 맞서고 푸른 초장을 찾아다니는 진짜 목자를 만난다.

우리는 양떼를 보지 못한다. 대관령 양떼목장이나 삼양목장에서 방목하는 양떼와 소떼를 본다고 해도 실제를 알지 못한다. 사진에 담을만한 멋진 풍경의 일부로 양떼를 보고 올 뿐이다. 저자는 광야에서 꼴을 찾아다니며 온갖 위험을 이겨내는 진짜 목자를 만난다. 그만큼 당시 문화에 충실하다. 요르단 목자 아부-자말은 목자가 되는데 가장 필요한 자격조건은 목양을 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아들이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걸 보고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광야)에 남겨 두라고 요청한다. 자기가 양 200마리와 아내를 주겠다며(64). 이야기를 들으면 모세가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모습이 이해가 된다. 이드로는 모세에게서 목양을 위한 마음을 보았던 모양이다.

양은 시력이 나빠서 9-13m정도밖에 보지 못한다. 길을 잃으면 스스로 주인을 찾지 못한다. 불가능하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현장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광야에서 우물의 중요성을 말하고 지팡이, 막대기, 양떼를 지키는 목양견, 이름을 붙인다는 의미, 약탈자와의 맞대결, 주무시지 않는다는 의미……을 말해준다. 읽으며 , 그랬구나. 이런 뜻이구나!’ 하는 이야기가 많다.

교과서로 배우지 않고 직접 겪어내는 사람이 목자다.

저자는 실제를 경험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추위를 견디며, 굶주린 이리 떼와 싸우며, 졸음을 떨쳐내고 양떼를 지키는 목자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교회 운영 매뉴얼, 지도자 자격시험이나 지도자 양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목자를 말한다. 양떼를 이끄는 원리나 지도자가 되는 비결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자가 어떻게 양떼를 이끄는지 읽으면서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저자는 목자를 찾아 나섰다가 고대 암몬과 모압 지경을 나누는 산등성이 근처에서 양떼를 찾아냈다. 그때 만난 목자 아부-야스민에게 목양에 관해 배우기 원한다며 내가 댁의 양 일부를 구입하기 원하며 그래서 양떼를 돌보는 데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달라고 질문하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부-야스민은 저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통역사와 판매 흥정을 시작했다. 저자가 자기 입장을 설명해도 목자는 저자가 무얼 원하는지 몰랐다. 이때의 깨달음을 아부-야스민의 세계에서 사람은 목자로서 자라납니다. 베두인은 교과서를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필요가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저녁 화롯가에서 그들의 풍부한 교훈 가운데서 목양 기술을 전수합니다. 가르쳐 배우기보다는 터득하는 것입니다.(323)” 라고 적었다.

양떼를 이끌고 가르는 기술은 직접 양떼를 기르면서 배운다. 이 책 역시 양떼 기르는 기술을 말하지 않는다.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직접 양을 기르며 목자로서의 마음을 보여준 사람을 말한다. 광야에서 박사학위를 보고 목자를 선택하는 어리석은 주인은 없다. 진짜 목자는 양떼를 돌보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한다. 지도자가 되는 비법이나 기술은 전혀 말하지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참된 목자가 양떼를 이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교회 지도자를 생각하며 읽자.

이 책은 40개의 장(chapter)으로 되어있다. 이스라엘과 근동 지역에서 양떼를 치는 목자를 찾아다닌 저자가 목자의 모습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를 보여준다. 목자 지도자는 편하고 돈 많이 벌고 박수 받는 자리가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힘겹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양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귀한 사람이다.

각 장은 관찰-탐구-적용으로 되어있다. 현장에서 관찰한 내용을 성경에서 더 깊이 탐구하도록 이끈다. 성경이 말하는 목자의 뜻과 역할, 하나님이 원하는 목자, 선지자들을 통해 질책하는 목자의 모습……을 말한다. 정확한 관찰에서 나온 탐구내용이어서 깊이 다가온다.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말씀을 탐구한 뒤에 적용을 실천으로 이어간다. 당장 무엇을 하자는 내용은 아니다. 목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목양을 위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내용이다.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도 참 좋다.

한국 교회 지도자는 광야에서 진짜 양떼를 이끄는 목자를 닮지 않았다. 그럼 책을 읽으며 한국교회 지도자를 비판하거나 한탄만 해야 할까? 저자는 목자를 담임목사로 한정하지 않는다. 목사, 전도사, 사역팀장에게 멋진 지도자가 되라는 말은 전혀 없다. 우리 모두 목자의 마음을 알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돌보신다는 걸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목자의 마음으로 돌보고 사랑하라고 책을 쓰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책을 읽으며 한국 교회 지도자가 이런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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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인격이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관계가 틀어지면 힘들어한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힘들게 하면 재수 없다고 내뱉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날마다 봐야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해석을 해야 한다. 오래도록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가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진주로 만들고 싶어도 너무 아프다. 가족이라 더 아프다. 곁에서 봐도 힘들고 멀리 떠나도 괴롭다. 도저히 해석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하나님께 해석을 들으려 한다. “왜 이러시느냐고……

아버지와 엄마

저자는 엄마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느낀다.(268)”고 말한다. 엄마는 사랑, 희생, 따뜻함을 나타낸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있으나 마나 한 느낌이 많다. ‘끔찍한 괴물, 차라리 없어지면 좋을 사람일 때도 있다. 잊고 돌아서면 그만인 남남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석하려 한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이해한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서 그럴 거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까이 대하면 힘들고 어렵게 산 게 무슨 대수야? 왜 나를 힘들게 하는데……한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비슷한 상황에서 살았다면 갈등이 적을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쉬울 테니까. 그러나 부모가 살아온 시대와 자녀가 사는 시대는 다르다. 부모세대는 가난을 몸으로 겪어냈다. 사랑을 표현하는 세대도 아니었다. 밥만 먹여줘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녀세대는 밥이 아니라 이해와 존중을 원한다. 말로 해도 이해하는데 왜 소리 지르고 때리는지 몰라 답답해한다. 주려는 것과 받으려는 것이 다르니 다툼이 생긴다.

대화로 다툼을 해결하면 좋겠지만 아버지는 대화를 어려워한다. 가난을 몸으로 부딪쳐 이겨내며 자식을 위해 희생했는데 머리 컸다고 또박또박 말대꾸 한다고 받아들인다. 집안의 기둥에서 점점 뒷방어른으로 바뀌어 가면서 화를 낸다. 자책하다가 자녀에게 폭발한다. 자기를 무시한다고 분노한다. 세파를 견디며 묻어둔 분노를 자녀에게 쏟아버린다. 소리치고 윽박지르고 때리고 집 밖으로 쫓아낸다. 이해하려고 시작한 대화는 분노와 좌절로 끝나기 일쑤다. “하나님, 왜 이러세요?”

무작정 떠나다.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단 한 번의 여행이다.” 표지 귀퉁이에 적힌 말이다. 자전거 타고 세계를 돌거나 히말라야 구석진 곳을 여행하고 쓴 책 같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여행기 같기도 하지만 저자는 다른 여행을 한다. 23살 아가씨가 아버지를 피해 옷장 안에 숨었다가 들켜 두들겨 맞고 한밤중에 맨발로 쫓겨나서 시작한 여행이다. 무조건 한국을 떠나려고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 찾다가 태국에 간다. 아는 사람도, 잘 곳도 없으면서 아버지 싫다고 비행기에 오른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가난하고 무더운 태국에 덜컥 가서 어쩌자는 건지……

머물 곳도,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에 여행사 직원이 전화번호를 하나 준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지라 늦게 가서 놓치고 태국에서는 전화도 안 된다. 우연히 만난 한국 사람이 저자가 가진 번호를 안다고 한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태국 우돈타니 선교사 집이다. 바쁜 여름 동안 선교사 자녀 둘을 돌봐줄 보모 겸 한국어 선생으로 지낸다. ‘우연일까? 극적인 안내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으로 병이 낫거나 실패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선 이야기가 아니다. 가정폭력에 시달린 아가씨가 태국으로 도망가서 버티며 지낸 이야기다. 하나님이 안내원을 보내지 않았다면 비극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찾는 단 한 번의 여행이 맞다. ‘하나님의 놀라운 우연을 보여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상처와 위로가 부딪치며 생각에 생각을 낳는 이야기다.

여행과 사람

가슴에 암덩어리가 있는 사람도 피부에 가시가 박히면 가시와 씨름하느라 암을 잊는다. 가시가 빠지면 암이 느껴진다. 저자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상처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가시에 찔리지 않아도 되는 곳에 오자 암덩어리가 느껴진다. 고통스러운 지난날이 자꾸만 생각난다. 힘들어하는 엄마, 어색해진 동생과의 관계를 되짚는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단번에 막힌 담이 뚫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낫지 않는다.

여행은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문제에서 떠나 생각하게 한다. 여행하면서 계속 아픈 상처를 떠올린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고는 태어나던 때를 생각한다. 아이 지우고 아빠와 헤어지라며 병원까지 데려간 고모를 피해 도망간 엄마가 남해 어느 시골에서 방바닥을 긁으며 수 시간의 산고를 견디고 자기를 낳았다. 홍콩 게스트하우스에서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운다. 태국에서 달을 보며 아빠와 가족 여행한 일을 기억한다. 행복했던 날 지나고 아빠가 사업에 망하고 쫓기고 도망하고…… 20살 되면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수면제를 모았는데, 예수가 죽음을 이겼다는 말이 좋아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다시 절망하고…… 아파하고 떠올리고 쏟아내고 무작정 걷고 사람을 만난다.

이보다 더한 아픔을 겪은 사람도 있다. 이만큼은 아니지만 버티고 견뎌내며 살지 않은 사람 없다. 그러나 낯선 타국,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거나 시험 받는 공간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자는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과정을 기록한다. 내면의 변화 과정을 기록한 글을 만나서 반갑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셨다. 기가 막힌 때에 만난 안내원 외에도 저자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다.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으면서도 맑은 웃음을 보이며 사는 아이들! 베트남전에서 미국을 도왔다가 라오스에서 쫓겨나 태국에 난민으로 쫓겨 온 몽족 난민을 만난다. 오갈 데 없는 그들은 돌아가면 죽는 곳으로 다시 쫓겨 간다. 태국이 그들을 추방하기 때문이다. 방콕의 유명한 매춘거리에서 만난 16살 까니카! 에이즈 고아원에서 죽어가는 아이,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 견뎌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일어선다. 과거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일어나 현실을 직면할 용기를 얻는다. 딱 한 명을 고르라면 여행사 직원을 최고의 안내원으로 뽑겠다. 무작정 떠나는 상처 받은 영혼에게 선교사 전화번호를 줬다.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지 비행기 티켓도 왕복으로 끊어줬다. 저자가 돌아올 때를 딱 맞춘 6개월 오픈 티켓!

변화

저자는 지금 태국에서 산다. 우돈타니에 선교활동 하러 온 정환(저자의 이름처럼 가명일 것이다.)과 결혼하고 태국에 왔다. 남편은 번역하고, 저자는 인터넷 소설을 쓰고 있다. 정환과 결혼하고 아빠 곁을 도망쳐 나온 건 아니다.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 견디며 싸우고 싸웠다. 아버지가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면 예전처럼 옷장에 숨지 않고 맞섰다. 또 때리면 그 길로 나가버릴 거라고도 했다. 자기 생각만 하며 안으로 가라앉을 때는 아빠에게 맞서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상처는 곪아 자신을 죽이고 상대에게도 악취를 풍겼다.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생각을 말하면서 오히려 아버지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의견이 달라 싸우지만 미워하진 않는다. 다시는 아버지 만나지 않으면서 나는 용서했다. 안 보니 편하다하거나 나는 용서 받았다. 당신도 용서 받아라.’라고 해도 사실은 용서하지 못해서 끙끙대는 거다.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죽이고도 태연히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말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혼자 적을 쓰러뜨리거나 적 앞에 엎드리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십자가를 대가로 치러진 선물이다.

이 책은 <복음과 상황>에 연재되었다. 잡지 받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읽었다. 책으로 읽을 때보다 좋았다. 다음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생각을 할지 두근거리며 한 달을 기다렸다. 책 한 권으로 단숨에 읽으니 긴장감이 덜하다. 저자가 오래도록 견디며 진주로 만든 고민을 단숨에 읽어서 그런가 보다. 영화 한 편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휘리릭 본 것 같다. 천천히 읽어야 한다. 소설 읽듯 읽지 말고 나라면 어땠을까?’ ‘나도 이런 생각 하는데……’ ‘, 이랬구나!’ 하면서 읽어야 한다.

용서를 고민하는 분에게 추천한다.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존재에게 상처 받고 배신당하고 관계가 깨져 몸부림치는 분에게 추천한다. 맞서 싸우지 못해서 속으로 끙끙대며 괴로워하는 문제를 가진 분에게 추천한다.

글은 억울한 사람이 쓰는 거다. 무서워서 말할 수 없었던 사람, 두려워서 숨어야만 했던 사람, 감정이 체한 사람, 가슴이 곪아 고름을 품고도 뽑아내지 못했던 사람이 기어이 쓴다!’”(202-203)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그가 한 일을 잊어주거나 덮어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일그러졌던 관계를 다시 바로 세우는 과정이다. 포기하지 않고, 뒤돌아서지 않고, 사랑을 향해 같이 걸어가는 일이다.

아버지와 씨름한 만큼 나도 변했다. 우리 사이에 억눌린 분노가 서로를 괴물로 만들었다면, 상처를 이야기하고, 아프고 화난 만큼 울어버리고, 다시 사랑하고 싶다고 말한 순간들이 서로의 가슴 안에 박혔던 독기와 가시를 하나씩 빼주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버지도 나도 고집스럽고 한심한 인간들이다.”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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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생각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일컬었다. 이슬람에 넘어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무슬림과 싸우는 사람을 말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절에 다니는 사람을 불교인이라고 말하듯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사람조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 그래요?’ 한다. ‘, 그래요?’너도 그놈들이랑 똑같은 거 아냐?’일 수도 있고, ‘거길 왜 다닐까?’일 수도 있다. ‘나도 교회 다니지만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이기도 하다. ‘의외인데요. 교회에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있네요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2천 년 전 그리스도인은 미친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미쳤는지 죽는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믿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일 양식이 없으면 금식해서라도 가난한 사람을 먹였다. 지금은 , 그래요?’의 대상이 되었다.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도 많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양보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금한다. 선교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가난한 나라 아이와 일대일 결연을 맺어 후원한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직장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참는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다.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으로 괜찮게 살아간다. 이런 사람이 되자고 설교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괜찮은 교회라고 칭찬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그리스도인이 정말 이런 모습일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규정했기 때문에 말씀을 오해한 건 아닐까?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의 저자인 쉐인 클레어본은 우리가 괜찮게 보는 모습이,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 모습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버리고 나를 따르라한 말씀을 그대로 행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하셨으니 노숙자와 함께 자고 창녀를 집에 데려와 환대한다.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나를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성경 공부와 찬양을 하며, 기독교 문화에 젖어 살았다. 스스로 기독교적인 것들로 피둥피둥 살이 쪘다고 말한다. 그만 하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박살내셨다. 물론 그도 단번에 소유를 다 팔아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진 않았다. 친구가 노숙자를 찾아갈 때 두려워하며 따라갔다. 친구가 노숙자와 잠을 잔다고 말할 때 턱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친구를 따라갔다. 두려워하며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걸 안 뒤에는 돌아서지 않았다. 복음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그들의 짐을 나눠지는 거라고 믿었고 믿은 대로 행동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쉐인 클레어본은 이를 증명하고 증거한다.

그는 폐쇄된 성당에 기거하던 40명가량의 노숙자들을 퇴거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해 싸웠다. 믿음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찾아 테레사 수녀가 있는 캘커타에 가서 나환자를 돌보았다. ‘여러분의 캘커타를 찾으라는 테레사 수녀의 말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형제를 위해 수고하는 고귀한 대의도 좋지만, 부유함에 찌들어 가난한 이웃을 이웃으로 두지 않는 미국에서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은 쉽지 않다. 편안하게 살면서 가끔 노숙자를 찾아가고 휴가 기간에 캘커타와 같은 곳을 찾으면 굉장히 만족스럽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들을 멸시하며 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쉐인 클레이본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꺼리는 곳까지 나간다.

심플웨이 - 소박한 길

예수님과 선지자들이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행동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병자를 고치는 선에서 멈췄다면 환영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에 일하셨다. 쉐인 클레어본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따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자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심플웨이라는 무소유 공동체를 설립한다. 노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놀아준다. 여기서 멈추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복음을 좀 더 나은 삶, 양보하는 삶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법정에 출두하고 공항에서 보안요원에게 심문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자신에게만 적용하고, 복음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축소하지 않았다. 그에게 공동체는 내 집, 내 교회, 내가 함께 하는 노숙자 모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적당한 크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칭찬과 박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더욱 지나치게 행동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바그다드에 가서 미군이 폭격하는 동안 가정과 병원을 방문한다. 그는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전쟁을 거스르기 위해 이라크에 갔다. 법률에 대항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을 계속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행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정치와 사형제도, 국가 정책에 반대해서 불편한 일을 겪더라도 복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라고 한다.

저항할 수 없는 혁명

책의 원제는 <irresistible revolution>이다. 쉐인 클레어본이 예수님을 믿어온 행적을 주로 다루었으나 자서전은 아니다. 원제처럼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을 다룬 책이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복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말한다. ‘내가한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말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나처럼 행동하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함께 이 일을 행하자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 나서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릴 적에 위인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대단하게 태어나서 3살에 천자문 끝내고 7살에 호랑이 잡고 10살에 과거에 합격한 영웅 앞에서 느낀 기분을 다시 느낀다. 예수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된 것 같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서 이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라거나 이 사람 괜찮다고 말하기 부담스럽다. 이럴 때 찾아내는 괜찮은 도피처는 교리의 오류이다. 쉐인 클레어본처럼 행동하면서도 잘못된 교리를 전한 이단을 들먹이며 위험하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면 공격해서라도 무너뜨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그가 죄인이라고 몰아세워야 한다. 교리나 신학으로 따지면 저자도 걸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고 싶지 않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이 자꾸만 떠올라서 따질 수가 없다. 그만큼 저자의 삶과 말과 생각이 혁명적이다. 예수님이 역사에 일으킨 사랑의 혁명이 다시 생각난다.

쉐언 클레이본은 자신을 영웅으로 말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이며, 이 혁명은 행함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제자는 행하면서 배운다.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정말 귀하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귀하다.

모든 책은 읽는 이의 생각에 무언가를 더해준다. 삶의 방향과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꿔주는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성경 외에 내 전부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책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그런 요구를 한다. 그청년 바보의사, 난 당신이 좋아, 지금, 행복합니다처럼 강한 충격을 준다. 지금까지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모습이 정말 괜찮은지 묻는다. 지금이라도 내 소유를 다 팔고 쉐인 클레어본처럼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흔든다. 동시에 책을 소개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마음이 나를 뒤흔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무뎌지기 전에 무언가 덜컥 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제국의 모순논리에 현혹되지 않는 더 많은 바보들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힘보다 더 지혜롭다고 우기는 거룩한 바보들이 필요하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가 미쳤다고 할 것이다.(365)”

어쩌면 우리가 약간 미쳤는지도 모른다.(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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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 《오스 기니스의 저항》, 난이도 ★★★★
오스 기니스, 《소명》, 난이도 ★★★
오스 기니스, 《오스 기니스, 고통 앞에 서다》, 난이도 ★★

전 백만장자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페이지가 백만 쪽이 넘거든요. 역사, 정치, 사회, 문화, 환경 가리지 않고 읽습니다. 성경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소설과 동화책도 꽤 읽습니다. 사람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습니다. 고민이 생기면 제 안에 있는 글과 생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20대에 해결하고 싶었던 고민은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교사로의 부르심을 확인한 뒤에는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소명

30대에는 고통을 끌어안고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고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통받는 아이들을 만났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홀로코스트, 순교자, 질병과 역경을 끌어안고 끙끙대는 사람들 이야기를 끊임없이 읽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끝내지 못할 고민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 앞에 서 본 사람의 말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고통 앞에 서다

40대가 되어서는 불의로 자기 배를 채우는 기득권층,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조, 자기들이 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엉뚱한 해결책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보는 게 힘듭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생각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방송매체가 심어 주는 기준을 왜 그대로 따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잘생기고 예쁜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이 잘 팔리는 까닭을 모르겠네요. 그 제품을 써서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가진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받는 광고비 때문에 제품 가격만 오르는데도 사람들은 연예인들이 광고한 제품을 찾습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세상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가정생활, 자녀교육, 직장생활, 이웃관계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하다가 예배당에서만 하나님 말씀 내세우면 되는 건가요? 세상 문화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종교 행위에만 몰두하는 게 불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의 영적 상황에 대해 갖는 관심의 10분의 1이라도 세상에 만연한 시대정신을 깨닫는데 기울인다면, 사회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저항

오스 기니스가 세 가지 고민에 대해 대답합니다. 1998년에 소명, 2005년에 고통 앞에 서다, 2016년에 저항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

오스 기니스는 소명을 궁극적인 존재 이유(1장 제목)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신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소명은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사제와 수도사, 수녀들에게 한정된 말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소명이 평범한 일상에 정통한 사람들의 것으로 돌아왔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소명이 점점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일상적이고 비천한 일에 평범함의 광채를 주는 것(304)이라는 뜻이 희미해지고 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방에서 돈 얘기다. 시급, 월급, 전세, 월세, 여행비, 학원비, 통신비……. 돈이 점점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평범한 일에서 특별해야 하고 더러운 거리, 비천한 사람들 중에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314).”는 말은 의미를 잃고 희미해진다. 더구나 이런 태도는 5분 내에 배울 수 없다고 하니 더욱 마음이 멀어진다. 그래서 좁은 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생각하기 어려운 길.

소명에는 소명으로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가 많다.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했던 본회퍼, 국가 재정 수익의 3분의 1을 충당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윌리엄 윌버포스, 고든 장군, 아브라함 카이퍼, 아더 번즈……. 이들을 사례로 들어 감정을 자극하는 가벼운 책은 아니다. 생각보다 읽기 어렵다. 그렇지만 지금이야말로 부르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이다.

고통에 대한 민감성

고통 앞에 서다에서 오스 기니스가 인용한 책은 대부분 히틀러가 만든 포로수용소에서 겨우 살아난 유대인들이 썼다. 30대에 그 책들에 빠져 살았다.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2장 제목), 재난과 인생(3), 우리의 가장 큰 원수(4)인 인간의 존재를 고민하며 살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5),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6),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7)는 지금도 나를 짓누르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고통을 다룬 책에서 빠지지 않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이라면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니까.

악과 고통의 이유를 묻는 시도가 그릇된 비판으로 발전하는 순간, 우리는 마녀사냥과 비슷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즉 우리가 처한 상황의 이유를 탐구할 때, 우리는 그릇된 설명의 방법을 찾다가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 또는 하나님을 비난하는 데로 귀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366).” 고통의 원인을 사람이나 하나님께 돌리고 비난으로 화를 푸는 게 자연스럽다.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이다. 그런다고 고통이 해결되지 않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한다.

오스 기니스는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의화단 사건 때 귀신이 붙었다고 알려진 다락방에 숨었다. 바퀴벌레와 쥐가 득실대고 숨이 막힐 정도로 더운 곳에서 6일을 숨어 지냈다. 횃불을 든 폭도들이 지붕에 올라가 불을 지르려 했고 다락문을 칼로 쑤셔댔다. 칼날이 조금만 기울어도 할아버지는 죽었을 것이다. 오스 기니스의 부모는 강도 떼를 피해 달리고, 공산주의 폭도에게 친구들이 죽는 걸 보고, 일본군의 포탄 공격을 피하고, 난징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기억을 함께 나누었다. 사람들이 고통의 원인이 된 사건들. 그러나 오스 기니스의 부모가 겪은 가장 잔인한 고통은 허난성의 기근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킨 것 같은 고난.

오스 기니스는 고통에 대한 일곱 가지 질문으로 책을 썼다. 다섯 번째 질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이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문제(13), 용서의 문제(14), 저항의 용기(15)로 질문에 대답한다. 여섯 번째 질문에서 인간의 한계를 논한 뒤에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악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이 존재하지 않을까?”

고통에 대해 고민하는 분에게 꼭 읽어 보라고 권한다. 더불어 고통 앞에 서다에서 언급된 책이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

저항이라 하면 보통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 잘못된 권위나 사회 구조에 맞서는 행동을 생각한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나서거나 1인 시위를 하는 행위를 생각한다. 오스 기니스는 그리스도인이 먼저 사상의 저항, 사고 체계의 저항,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스 기니스는 우리가 사는 시대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한다고 진단한다.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해서 평안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자체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현대 사회가 내세우는 소리가 불편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얄팍한 지식으로 세상을 얕보며 손쉽게 승리를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단순하지만 유일한 논리를 내세운다면 모를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승리를 선포한다. 세상이 듣고 비웃을 논리로 자기들끼리 만족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는 세상이 주입하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 건 승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끼리 모인 곳에서, 우리끼리 하는 활동에 제한되지 않는다. 날마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세속주의, 현대주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는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시대 정신에 맞서야 한다.

저항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 이것이다.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을 때, 사람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고수했다. 하지만 유대인으로 사는 게 쉬워지자 사람들은 유대인이기를 포기했다. 전 지구적으로 이 시대 유대인의 중대한 문제가 이것이다(25).”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살아갔다. 그러나 물질이 풍부해지고 누릴 것이 많아지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진다. 주일에 어디에 있느냐만 다를 뿐 그 외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진다. 이렇게 살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

저항하려면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에서 싸워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오스 기니스는 신앙의 박해보다 현대성의 유혹이 더 위협적이라 말한다. 지금 세상은 세속주의, 과학주의, 자연주의 세계관, 기술 발달, 정보화 시대, 상대주의에 끌려가고 있다. 권위는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고 선택은 그저 선호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홀로 떨어진 개인이 되어 서로에게 무관심해졌다. 또한 초자연적 영역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온통 세속적 영역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선택하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면 하나님을 전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온통 이 땅에서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사는 데만 관심을 갖는다면 하나님 나라가 귀에 들릴 리가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역은 다름 아니라 현대성에 대한 저항이어야 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 시대정신으로 다가온다. 21세기의 우상은 금은동철로 만든 형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는 사고방식이라 생각한다. 우리 생각과 몸이 현대주의에 푹 젖어 있으면서 어렴풋하게 사단과 우상을 생각한다면 싸움이 안 된다. 이 책은 읽기 어렵다. 시대 정신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글로벌 세상의 하늘에 몇 개의 태양이 있는지(3장 소제목)’ 소개하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끙끙대야 한다. 특히 2~4, 교회를 공격하는 악의 정체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낯선 내용이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우리 아이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종교 언어가 통하는 곳에서 종교 언어로 말하며 우리끼리 감상에 젖는 한순간의 활동이 아니다. 날마다, 우리가 걷는 모든 곳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시대정신에 맞서며 살아야 한다.

신인류의 출현

신규 교사일 때 예수님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마음이 앞섰지만 복음을 제대로 몰랐던 때라 내가 전한 복음은 이원론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어요. 나를 싫어하는 아이도 복음에는 진지하게 반응했죠.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은 복음을 더 쉽게 설명합니다. 학급을 잘 이끌어 나를 싫어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복음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치 대형마트에서 물건 담듯 하나님을 자기 가방에 담아 필요할 때 꺼내는 분으로 인식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신인류입니다. 제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고체계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명확한 부르심, 감당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하나님 뜻으로 이해하고 견뎌내는 마음,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소명으로 고통 앞에 서저항하며 살아야겠죠.

모임에서 함께 읽고 나눠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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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싸여 (Von guten Mǟchten)

독일 여행을 하다가 시골 교회 뒷마당에 덩그러니 놓인 종에 쓰인 글씨를 봤다. 성문, 시계탑, 동상 따위에 쓰인 글이 아무리 좋아도 지나쳤지만 여기서는 종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었다. 유명한 관광지에 적힌 글씨보다 더 궁금했다. 쓰여진 글씨를 검색하고 뜻을 찾아보았다. 그 글로 만든 찬양곡을 찾고는 여러 번 들었다. 아래쪽에 Bonhoeffer라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이 찾지 않는 작은 마을, 쉴러(윌리엄 텔을 지은 독일 작가)의 고향 사람들은 본회퍼의 어떤 말을 기억하고 싶었을까?

신실하신 주님 팔에 고요히 둘러싸인 보호와 위로 놀라워라. ~ 지나간 날들 우리 마음 괴롭히며 악한 날들 무거운 짐 되어 누를지라도 주여, 간절하게 구하는 영혼에 이미 예비하신 구원을 주소서. ~ 주님의 강한 팔에 안겨 있는 놀라운 평화여! 낮이나 밤이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다가올 모든 날에도 변함없으시니 무슨 일 닥쳐올지라도 확신 있게 맞으렵니다.”

www.youtube.com/watch?v=aN7dGz6NH5M (독일어로 부르는 노래)

약혼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싸여라는 시이다. 처형 당하기 4달 전에 본회퍼가 감옥에서 썼다. 이 편지는 약혼녀와 부모님, 형제자매, 제자들에게 전한 본회퍼의 마지막 성탄인사가 되었다. 자신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한 듯 본회퍼는 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싸여 주님 곁으로 돌아갔다. 독일 작곡가 지크프리트 피츠가 찬양곡으로 만들어 지금도 부르고 있다.

 

제자도의 표본 본회퍼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그로 하여금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본회퍼가 한 말이다. 독일교회가 히틀러의 뜻을 하나님 뜻으로 착각했을 때, 목숨을 내걸고 반대했다. 지하교회, 비밀리에 하는 방송으로도 모자라 히틀러 암살계획에도 가담한다. ‘부르심죽을지라도로 받아들였고 194549일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회퍼는 행동하는 신앙인,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는 사람에게 빛나는 별이다.

너무 멋져서 본회퍼처럼 살고 싶었다. 21살에 쓴 박사학위 논문이 성도의 교제라는 책으로 나왔다고 해서 읽었다. 어렵다. ‘나를 따르라도 어려워 에버하르트 베트케가 지은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을 읽었지만 역시 어렵다. 평신도로서 나는 본회퍼를 저 멀리 홀로 솟은 별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본회퍼를 읽고 따르고 본회퍼처럼 살 수는 없다.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멋모르고 존경한 영웅이다.

 

신학자 본회퍼가 아니라 연인이 쓴 편지

<옥중연서>는 본회퍼가 감옥에서 마리아와 주고받은 편지모음집이다. 편지 대부분은 본회퍼가 테겔 형무소에 있을 때 썼다. 본회퍼의 외숙 파울 폰 하제는 육군 준장으로 당시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이었다.(디트리히 본회퍼-복있는사람) 덕분에 본회퍼는 편안하게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교회를 걱정하며 편지를 쓴 바울보다는 나은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연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님을 따르라고 강하게 썼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쓴 책만큼이나 깊고, 어렵고, 복잡하리라 생각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위해 죽읍시다라고 쓸 줄 알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본회퍼가 36살일 때 마리아는 18살이다. 김회권 목사님의 해설에 따르면 본회퍼와 마리아는 서로 알고 있었다. 본회퍼는 마리아 오빠의 견신례를 맡아 교육했고 마리아의 외할머니에게 후원을 받았다. 19428월과 10월에 마리아의 아버지와 오빠가 러시아전선에서 전사한 일도 둘이 연인으로 만나는데 영향을 주었다. 마리아는 자상한 아빠와 오빠의 빈자리를 본회퍼를 통해 위로받았다고도 한다. ‘이건 뭐지?’ 싶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제자도의 표본,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사람이 18세 연하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다니…… <나를 따르라>를 쓴 사람이 한 여인에게 사랑하는 마리아, 보고 싶구려!’ 라고 쓰는 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편지도 지극히 평범하다. 편지를 읽고 내가 생각한 본회퍼를 찾기 어려웠다. 그가 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회퍼를 전혀 몰랐다.

 

옥중연서

본회퍼와 마리아는 다정하고 편안하게 일상을 이야기한다. 무엇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적는다. 서로를 그리워한다. 편지 내용만으로는 18살의 나이 차이를 찾지 못하겠다. 편지는 줄곧 곧 만날 거다, 재판은 금방 끝나고 당신을 만나러 갈 것이다라는 희망으로 넘친다. 본회퍼는 감옥에서도 즐겁고 활기찼다고 동료 죄수들이 증거한다. 감옥에 갇혔지만 별 탈 없이 석방되어 마리아와 함께 결혼할 거라 믿었다. 편지에는 결혼식에 관한 자세한 계획도 나온다. 마리아는 결혼식에 쓸 물건을 보러 다녔고 본회퍼도 그러리라 기대했다.

편지를 주고받는 시간이 6개월을 지나면서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리아가 읽은 책을 말하면 본회퍼는 다른 책을 소개한다. 본회퍼는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책을 보내달라고도 한다. 마리아는 본회퍼가 지은 책, 읽으라고 소개한 책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편지에서 본회퍼가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그리스도교의 훈련’,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으라고 하자(236) 마리아는 재치있게 답장을 보낸다. “이제부터 저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수줍어하며 당신에게 물어보아야 하고, 결국 공포와 전율로 병들어 죽을 때까지 키르케고르를 읽어야 하겠군요.(248)”라고 말했다. 본회퍼의 고민이나 신학의 깊이는 마리아의 재치와 애교 앞에서 스르르 녹아내렸다.

편지를 주고 받은지 1년이 지나면서 마리아는 실망하고 힘들어한다. 금방 석방될 줄 알았던 본회퍼는 나오지 않고 주변 사람들도 본회퍼와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했다. 19446월 이후에는 본회퍼의 편지만 남아있다. ‘내 사랑 마리아를 외치며 편지를 쓰고 또 썼다. 이때의 편지에는 본회퍼가 마리아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더욱 잘 드러난다. 그리고 19441219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싸여를 성탄 선물로 보내고 편지왕래가 끝난다. 히틀러 암살계획에 관한 중요한 서류가 발각되었고 편하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뛰어난 신학자, 영웅적인 행동, 제자도를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또한 한 여인을 사랑하며 마음을 바친 남자다. 영웅을 기대하며 책을 읽다가 당황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남달랐던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 모습을 보여주어 더욱 좋았다.

 

사랑이란 사람이 손으로 잡을 수 있거나,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은 외부에서 와서, 오직 한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로 가며, 그저 그 사람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사랑에 빠져서 그 사람 가까이 가고 싶어도 멀리 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 마리아가 보낸 편지 중 일부(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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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집회 강사로 이만한 사람은 드물다. 극적이고 대단하다. 강력한 반전도 있다. 저자는 레즈비언이었다. 레즈비언 파트너와 살면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트레스젠더) 권익을 위한 활동을 했다. 영문학 종신교수였고 프로이트, 마르크스, 다윈의 철학과 정치적인 세계관에 기반을 둔 19세기 문화와 문학을 가르쳤다. 특히 퀴어이론(정상적인 성 행위를 당연시하는 전제에 저항하는 이론)을 주로 연구했다. 교회에서 죄라고 부르는 음란한 행위가 정당하며, 죄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편견이고 혐오스러운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라는 단어가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았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에 온다면 우리가 그녀를 목구멍에 걸린 가시로 볼 것이다. 음란의 화신이라며 악수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녀는 회심했다. 예수님을 만났다. 목사와 결혼했다. 종신교수가 대학을 떠나 평범한 목사 아내로 살아가는 것도 대단한데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을 입양해서 홈스쿨로 양육했다. 적의 심장부에 있던 사람이 아군으로 귀순한 경우와 같다. “예수님을 모를 때는 죄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예수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구원 받았습니다. 이젠 이전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간음하지 마세요. 음란하지 마세요……이런 식의 간증을 하면 대박나겠지만 아니다. ‘극적인 회심이 아니라 뜻밖의 회심이다. 사울이 한 방에 쓰러져서 바울이 된 것처럼 회심하지 않았다. 뭔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우리의 간증이 크리스천들의 삶의 여정이라는 전체적인 지평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만약 내 간증이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었나”를 말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마치 지금은 죄와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구원을 받은 후 지금 느끼는 안도의 감정이나 사람들이 내 간증을 듣고 흔히 보이는 반응을 전한다거나 내가 얼마나 훌륭한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에게 공을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머리말에서)

예기치 않은 회심

저자는 공공연한 레즈비언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페미니즘 교수이다. 하나님, 성경, 기적……을 달나라 토끼처럼 생각한다. 지역신문에 PK(남성회복운동 단체)의 성차별적인 논리를 비판하는 글을 싣고 편지를 엄청나게 받는다. 상자 두 개를 준비해서 한쪽에는 증오의 편지를, 다른 쪽엔 공감의 편지를 담았다. 시러큐스 개혁장로교회 담임목사 켄 스미스가 보낸 편지도 받았다. 목사는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외치지 않고 질문을 했다.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나?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걸 어떻게 검증할 수 있나?” 저자는 편지를 어느 통에 담아야 할지 몰라 책상 위에 두었다, 쓰레기통에 던졌다. 다시 꺼내 읽었다.

그의 질문은 내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그의 질문은 언제나 그랬다.) (50쪽)

저자는 편지에 쓰인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에 응해 캔을 만난다. 켄이 자신을 존중해 주었다(35)고 한다. 교회로 나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간음에 대한 율법, 음욕이 불타는 것 같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대로 하는(1:26-27) 바울의 경고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구속을 강의했다. 저자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마치 신선한 피 냄새를 찾는 상어처럼 그 성경말씀(16:31)을 들려줄 사람, 특히 나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매기 마련이다.(53)” 라고 생각했지만 캔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정죄하지 않고 존중하지만 할 말은 했다. 할 말은 하지만 존중했다고 해야 할까? 켄은 구약에서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숨겨져 있는지 신약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 설명했다. 레즈비언인 저자를 받아들이지만 그런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저자는 2년 동안 성경을 읽으며 켄과 그의 아내 플로이와 대화를 이어갔다. 켄과 플로이가 사람들을 먹이고 재워주고 도와주는 모습도 지켜봤다. 저자가 예수님께 점점 마음이 열려가는 동안 게이 공동체 친구들은 걱정하며 마음을 돌이키라고 했다.

오래도록 한국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 구원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나눴다. 이후에는 구원받은 의인, 구원받지 못한 죄인에 구도자가 더해졌다. 이 기준에 의하면 저자는 구원을 찾아가고 있는 구도자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저자를 어떻게 도와주어야 어리석은 생각(예수를 믿는 것)을 버리고 돌아올까 고민하는 레즈비언 파트너는 당연히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다. 그럼 목사이지만 게이로 살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괴로워하는 사람은 어디에 속할까? 자기들 생각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모두 죄인 취급하는 종교인은 어디에 속할까? 책에는 더 많은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켄이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존중하는 태도로 대답을 들어준 것처럼, 이 책 역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다린다.

저자는 합리성으로 무장했기에 질문과 대화로 하나님을 찾아갔다. 모든 사람에게 질문이라는 방식이 통하지는 않는다. 합리성보다 감정, 소속감, 기복주의가 뿌리 내린 우리나라에선 선포와 체험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상대를 존중하며 질문하고 꾸준히 들어주는 태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기독교를 답답하고 일방적이며 자기들만의 잔치에 빠진 사람들의 종교로 받아들이는 오늘날은 더욱 그러하다.

회심에도 과정이 있다.

19994월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다고 적었다. 동성애 파트너와는 헤어졌고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동성애가 왜 죄인지는 몰랐다고 한다. 자만심이 죄라고 깨달아서 그것부터 시작했다.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동성애에 대한 응징보다는 자만이라는 걸 발견했다.(16:48-50, 11:23-24) 계속 성경을 묵상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행동(동성애)이 아닌 사고의 패턴에 죄가 뿌리를 내린다는 걸 깨닫는다.(78) “내 삶을 주님께 바치겠다는 결심은 단순히 철학적인 노선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번에 끝날 수 있는 절차도 아니고 내 표면적인 편견들과 변하기 쉬운 충성됨을 다시 조정하는 일도 아니다. 회심은 내 삶을 조율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 영혼과 인격을 샅샅이 조명하는 고되고도 치열한 과정이었다.(80)”

회심을 단번의 선택으로 받아들인 간증을 꽤 들었다. 이전에는 완전 죄인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전도자가 되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단번의 회심은 멋져 보인다. 간증하기도 쉽다. 끙끙대며 몇 년씩 고민하다가 예수님 믿으면 회심의 순간을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낱낱이 적어놓지 않는다면 고민한 과정을 전달하기도 어렵다. 구원파에선 이를 빌미로 구원 받은 정확한 일시를 물어온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단번의 회심은 진짜 회심 같다. 오래도록 끙끙대며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은 찜찜한 회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번에 회심한 간증을 듣고 더 극적일수록 하나님 은혜가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회심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아니었고 어떤 상투적인 행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침묵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때까지 내가 들어봤던 간증들은 모두 에고와 자만이 가득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 내가 정말 장하지 않나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내 결정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내 삶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단했어요. 아직 길을 발견하지 못한 저 이방인들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겠어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런 식의 생각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만다. 나는 지독한 경험주의자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았다. 아니,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사람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응답을 해야 한다. 응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이야기의 전부이다.(165쪽)”

하나님의 선택은 단번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걸 단번에 깨달을 수도 있고 오래도록 깨달아 갈 수도 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이 사울을 단번에 꺾으셔서 감사하다. 또한 레지비언 교수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비하면 우리가 어떻게 회심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이러고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과정을 거친다. 고민하고 돌아보고, 따져보고 끙끙대며 서서히 변해갔다. 그러면서 자신의 편견을 깨뜨리는 작업을 했다. 자기 주관성과 경험 위에 성경을 덧바르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깨달을 때마다 돌이키고 또 돌이켰다. 레즈비언 교수의 간증집에 어울리지 않게(?) 성경말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많이 나온다. 교회에서 말하는 정답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얼 말씀하실까 고민하며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라 절절하게 다가왔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을 듣고 잘 믿어지지 않는 사람, 계속 튀어나오는 의심에 내가 믿음이 적은 건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밑줄 그어가며 읽을 것이다. 이 고민은 정식 교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저자는 회심을 결단의 순간이 아니라 과정으로 겪어간다. 그러므로 의인, 죄인으로 양분하는 사람이 읽으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회심 이후의 삶도 과정이다.

저자는 2000년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한 선서를 한다. 책에는 19998, 시러큐스 대학교 대학원 신입생 입학식 축하 강연 전문이 실려 있다. 스스로 현실적이고 무난한글이라 생각한 연설이지만 자신이 더 이상 레즈비언 공동체에 함께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레즈비언 공동체의 비난은 예상했겠지만 이후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저는 죄를 떠났고 하나님은 제게 축복을 주셨습니다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사람과 결혼을 약속하고 약혼했지만 결혼을 몇 주 앞두고 파혼했다. 늘 복음을 말하며 자신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도록 도와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교회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스스로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기 쉽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초자아는 우리의 의식 중에서도 타인들이나 단체들의 기대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자 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즉 교회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113쪽)”

저자는 이미 마음이 하나님께 기울었다. 경험주의, 합리성, 패미니즘 시각,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으로 해석하던 모습에서 떠났다. 세계관이 바뀌자 해석이 바뀌었다. 또한 저자에겐 삶과 기도로 에워싸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정든 집과 대학을 떠나지만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과 선한 공동체를 만나게 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은 뒤에 고민이 더 많아졌다. 이 고민이 <선한 사람들, 선한 공동체>라는 제목의 장에 나온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밑줄을 좍좍 그었다. 여기 50쪽 분량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다.

성적인 존재인 내가 그리스도에게 응답을 하는(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것은 과거 이성애자였던 내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77쪽)

저자는 켄트와 결혼한다. 남성이 권위를 내세우는 낌새라도 보이면 덤벼들던 페미니즘 교수가 하나님 안에서 남자의 권위를 인정하며 가정을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 창조의 과정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197)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결혼과 부부의 관계가 무엇을 말하는지 밝힌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지 않다면 일어날 수 없는 변화이다. 개척교회로, 캠퍼스 사역을 하면서도 고민한다.

4장에서 갑자기 입양 이야기가 나온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을 입양해서 홈스쿨로 키워간다. 고민은 사라지고 아이들을 어떻게 입양했는지 들려준다. 입양과 홈스쿨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부모로서 아이를 기르는 일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처럼 돌보는 게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결혼과 입양 이야기를 허탈하게 읽었다. 이것만으로도 강력한 간증거리지만 저자의 고민이 어떻게 드러나고 해결되는지 더 듣고 싶었다. 저자의 생각이 바뀌는 과정을 읽으며 속이 다 시원했다. 회심을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 있는 이야기로 읽어가는 게 너무 좋아서이다.

뜻밖의 회심이 계속되면 좋겠다.

저자가 힘들어하며 고민해서 고맙다. 저자의 고민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내 고민이 얼마쯤은 해결됐다. ‘이 사람은 정말 고생했는데 내 고민은 사치구나!’ 라는 관점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하게 여겨온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다른 질문과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까?’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갈 때 복음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그들이 귀 기울일만한 질문을 들고 가야 한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질문 말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떠밀면 대화를 시작조차 하지 않을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한국 교회엔 켄목사가 필요하다. 질문하고 고민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준비 되지 않은 사람에게 당장 결단하세요라고 강요하지 말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질문은 켄목사가 했지만 저자는 선한 사람들과 선한 공동체로부터 대답을 들었다. <선한 사람들, 선한 공동체>가 많아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켄의 태도를 배운다면 뜻밖의 회심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뜻밖의 회심>은 혼란과 좌절, 갈팡질팡하는 과정이 담겨있어 귀하다. 저자는 이전 세계관으로 질문하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그 세계관을 깨뜨리고 하나님 생각을 알려줄 사람을 계속 보내셨다. 바리새인의 공동체가 아니라 고민하는 사람을 돕는 공동체가 많아진다면 뜻밖의 회심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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