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잊지 않으며,

모든 과거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 도사린 채

자기를 다시 표면에 떠오르게 할 풍경이나 냄새나

자그마한 소리를 기다릴 뿐입니다.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프레드릭 비크너)

 

내 삶을 가로지르는 기둥이 있다면 과거를 끌어안는 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 권일한이 받았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다.

그때의 상처가 지금의 내 모습이, 나 자신이 되게 했다.

지금까지 나는 상처로부터 달아나며,

영원히 달아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만 달아나는 방법을 찾으며 살았다.

고통, 상처, 인간이란 누구인가, 심리에 대한 책을 읽은 까닭은

상처받는 마음을 이해하고, 이겨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보여주는 책이 참 많았다.

책을 읽으며 사람들이 상처를 다루는 다양한 모습을 알았다.

평범한 인물의 이야기를 읽으며, 밑바탕에 숨겨진 상처를 보았다.

상처받은 마음을 알아주고, 어설픈 동정이나 위로를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울면서 글을 쓰고, 상처 가득한 글을 내게 내보인 것 같다.

 

상처는 우리의 삶을 허구로 만든다.

상처는 한 사람이 아무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허구의 세계를 떠돌게 한다.

거짓으로 다진 반석 위에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게 만든다.

허구의 삶은 상처받은 두 아이 이야기다.

주인공 상만은 사람들이 다 아는 상처를 갖고 산다.

그걸 말하기 싫어 거짓으로 반석을 놓고 거짓 뿌리를 내린다.

다른 주인공 허구(이름)은 사람들이 모르는 상처를 갖고 산다.

자신이 뿌리내려야 할 세상을 등지고 허구라는 이름답게 거짓의 세상을 살아간다.

허구의 삶은 상처받은 우리들 이야기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을 써주셔서 이금이 작가님에게 참 고맙다.

상처 많은 분들과, 책뜰안애에서, 이 책을 토론하고 싶다.

혼자 울지 말고 함께 울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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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뜰안애 서재 앞마당에 작은 텃밭을 일구었다. 닭똥거름 뿌리고 삽으로 뒤집었다. 감자를 심었는데 절반가량이 호두 크기다. 달걀만 하면 큰 편이다. 감자 캔 자리에 배추를 심었다. 자리공 열매로 제초제 만들어 뿌리고 손으로 벌레를 잡았다. 농약과 비료를 자주 뿌린 옆집 배추와 비슷하게 커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한 주일 안 간 사이에 진딧물이 배추를 맛나게 먹었다. 뒤늦게 농약을 한 번 뿌렸지만 소용없었다. 지구를 살리겠다고 풀을 뽑고, 비료와 농약을 거의 쓰지 않은 결과 작은 배추를 얻었다.

 

조금씩 나아지겠지만 농사는 힘들다. 지구를 살리겠다고 거름 만들고, 약을 치지 않으면 더 힘들다. 농부의 인문학은 농부의 생각을 담은 책이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주고, 유행으로 오르내리는 뜻에서의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고, 자연에서 얻은 지혜를 말하는 인문학이다. 인용하는 책이 많지 않고, 이름난 책도 아니어서 그런 인문학을 생각하고 읽으면 안 된다.

 

골치 아픈 집안 문제에다 자식까지 속을 썩여 몇 해째 잠을 못 자고 날마다 죽고 싶은 생각뿐인 어머니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지나가는 자동차만 보면 뛰어들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는 그 어머니를 위해 아내와 나(서정홍 선생님)는 직접 농사지은 녹두로 빈대떡을 부치고, 된장찌개와 감자볶음을 하여 소박한 밥상을 차려 드렸습니다.~ 며칠 뒤에 전화가 왔습니다.(109) ” “몇 해째 수면제 안 먹고는 잠을 못 잤는데, 이젠 수면제 안 먹고도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그때 차려 주신 밥상 덕분입니다. 내내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빨리 읽으면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천천히 읽으면 깊은 이야기를 담았다.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는 농부의 생각이 소박하면서 아름답다. 아내와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들고, 텃밭을 일구며 꿈을 꾸었다. “자급자족하자!” 서정홍 선생님처럼 하긴 어렵겠지만 조금씩 따라 할 생각이다. 책뜰안애에 오는 분들에게 깨끗한 야채로 밥상 차려 주고, 깊은 문장으로 마음을 어루만지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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