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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몸은 피로하고, 마음은 공허하고, 영혼은 곤핍하다. 저 혼자는 가슴을 후벼파는 외로움에 절절매면서도, 이웃을 향해 이유 없는 적개심을 드러내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서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그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허기와 분기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니 분기탱천하고, 결국 먹은 것이 없으니 헛헛한 속을 달랠 길 없다. 그러다 보니 슬픔, 자조, 분노, 원망과 불편의 감정이 충만하다.>
『글 쓰는 그리스도인』에 나오는 내용이다.
현대인은 피로하고 외로워한다. 해결 방법을 찾지만, 아픈 마음이 찾은 방법은 잘못된 방법일 때가 많다. 그 방법을 따르면 허기와 분기를 돋운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아무리 먹어도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이럴 때 드는 마음을 저자(김기현)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산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나,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미친 듯이 헤매도 어쩌지 못하는 내가 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정당한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도 상처받는다. 마음이 공허함을 느낀다.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한다. 그래도 아픔이 낫지 않는다. 많은 어른이 아이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
내 마음에 상처가 있다. 상처를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잘 살폈다. 20대에 심리학 책, 슬픔과 고통에 관한 책을 마구잡이로 읽었다. 이런 책들이 내 허기를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 마음에서 관계가 어떻게 왜곡되는지, 관계가 상처를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아이들 상처가 보였다. 낫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글쓰기이다. 김기현 목사님도 『글 쓰는 그리스도인』에서 글쓰기가 회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앞서 밑줄 그은 내용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감추고 싶고, 덮고 싶고, 지우고 싶고, 잊고 싶은 옛 기억들을 살려내 일기장을 채우면서 흐트러진 내면을 정돈하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용서한다. 하나님을 경험한다.>
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글의 치유 효과를 누리는 사람은 일부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싸워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이때 『싸움의 기술』이 필요하다. 제목도, 내용도 모두 싸움하는 기술을 말한다. 몸으로 때리고 피하는 기술이 아니다. 몸보다 마음을, 말을, 상황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글 쓰는 그리스도인』도 그랬지만 『싸움의 기술』도 남다른 통찰력이 드러난다. 상황 분석이 탁월하다. 인간의 심리 중에서 ‘싸움에만’ 초점을 맞춰 재미있다. 심리나 상담 책을 읽지 않은 분이 읽으면 놀랄 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분이 읽으면 ‘이렇게도 보는구나!’하며 재미날 것이다. 한 구절만 예로 들겠다.
<치약을 아래서부터 짜느냐 위에서부터 짜느냐 하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고는 한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가 치약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 것이다.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는 내가 내 삶을 통제하는 방식이 상대방이 그의 삶을 통제하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각자의 오래된 습관이 건드려지기 때문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각자의 오래된 습관이 건드려지기 때문이며, 그 싸움이 점점 커져서 급기야 서로의 인격에 대한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기 방도 하나 못 치우면서 무슨 큰일을 한다고!” “밖에서는 그렇게 고상하게 굴면서 옷장 상태는 그게 뭐야? 어떻게 그렇게 겉 다르고 속 달라!” 이런 종류의 말을 주고받으며 싸우고 있다면, 이것은 집 안 정리나 청소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리나 청소 여부를 서로의 인격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정리나 청소 여부가 상대방의 성실함이나 됨됨이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면, 이들 사이에서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어떻게 함께 쓰는 공간을 정리하고, 청소할 것인가)를 협의하기는 더 이상 어렵게 된다. 그러니 집 안 정리나 청소 상태로 싸우게 되더라도 그것이 인격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98~99쪽)
아무튼 정말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다. 참, 위 인용문에서 ‘습관’이 나온다. 그래서 지금은 HABIT(습관)을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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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고, 세바시 이슬아 편을 봤다.
뛰어나고, 창의성이 넘치고, 성실하고, 글을 쓰는 마음을 잘 안다.
무엇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이슬아 작가가 소개하는 아이 글이 좋다. 참 잘 썼다.
그래도 난 내가 만난 아이들 글이 더 좋다.
‘누가 더 잘 썼느냐, 어떤 글이 더 좋은가?’ 라고 묻는 건 천박한 질문이다.
내가 만난 아이들 글을 더 좋아하는 까닭은, 내가 아이를 알기 때문이다.
내 글쓰기는 이슬아 작가의 글쓰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슬아 작가는 자기가 이렇게 유명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명해지는 건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이슬아 작가가 실력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맥락을 읽으시라.)
이곳저곳 구석구석에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실력자가 참 많다.
방송은 그들 중 일부에게 그들 모두의 영광을 돌린다.
그 영광 모두가 자기 거라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엉터리가 된다.
오늘 당근을 뽑았다.
마트에 파는 크기의 당근은 거의 없다. 당근 소인국이다.
주황 당근은 작고, 자주 당근은 이상하게 생겼고, 노랑 당근은 ~ 하~~
풀 썩혀서 만든 거름만 줘서 그런가? 비가 안 와서 그런가?
비료를 줘야 했나? 초보 농사꾼이라 그런가?
소인국 당근을 거저 준다 해도, 귀찮아서 집에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기른 당근, 오가며 살피고 들여다본 당근은 소인국 당근도 예뻐 보인다.
아이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글이 곧 아이다.
이슬아 작가가 가르친 아이가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이슬아 작가가 아이를 아끼지 않는다면 이렇게 소개하지 않는다.
아이가 글을 잘 쓰게 하려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에게 기대하고, 성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기다리면 글이 나온다.
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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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8일 아침에 사울의 실패를 묵상하다가 쓴 글.
나를 알고,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나를 모를 때는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우쭐댔고, 내가 못 하는 일을 하면서 좌절했다. 나로 살지 못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했다. 학부모가 보는 나, 동료 교사가 보는 나,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는 나로 살아가려 했지만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는 내가 결정했다. 내가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고 발버둥 쳤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는 노력조차 온전한 내가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이름으로 나를 내세우려는 시도였다. 정말 자기 자신으로 살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내 생각, 내 기준도 의식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연스레 살아간다. 조금씩 이렇게 되어간다. (이렇게 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어느날 문득 내가 변했음을 느낀다.)
지금은 누군가를 의식하는 태도가 많이 줄었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독서 모임을 인도할 때 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아직도 몸에 밴 습관이 드러나서 신경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우쭐대지 않고, 못 하는 일을 해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좋은 책의 가치를 몰라보고, 인기에 영합하는 책을 좋아해도 그러려니 한다. 나는 나로 살아간다.
오랜만에 책뜰안애 독서 모임을 했다. 노자의 도덕경 81장을 ‘가르침과 배움’으로 풀어 쓴 책인 『배움의 도』를 나누었다. 참여한 분이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했더니 친구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했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는 친구에겐 <배움의 도>가 보이지 않았다.
첫째가 책 내용이 마음에 들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했다. <배움의 도>로 이끄는 사람,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가르쳐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했다. 함께 한 분들이 첫째에게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두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배움의 도』를 나누면서 첫째 눈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첫째도 나를 바라봤다. 가끔은 눈물이 맺힌 채 나를 보았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았다. 첫째도 세상의 흐름, 10대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
난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다. 나처럼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 없어서 우쭐댔지만 사실 외로웠다. 주장과 자랑은 한순간이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면서 느끼는 외로움은 길~고 끊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이들도 외로움을 느낄 것 같았다. 책 이야기는 집에서나 하고, 학교에서는 자기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친구들이 가볍게 조사해서 발표할 때 얘들은 깊게 생각하고 발표했다. 학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감탄하며 다가온 친구가 있었지만 잠시뿐이었다. 가치관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둘째는 아이돌도 좋아하고(카이사르와 살라하딘보다 좋아하진 않지만)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그러나 진짜 친구는 언니밖에 없었다. 둘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몇 시간씩 이야기하며 노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첫째는 조용히 혼자 지냈다. 외롭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만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으로 사는 아이에게 외로움을 이길 방법을 말하기 어려웠다. 그건 자신이 직면해서 ‘이겨내거나’, ‘함께해야’ 한다. 넘어서든지 친구가 되든지 해야 한다.
10달 전에 『배움의 도』를 나누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제야 모였다. 모임하다가 책을 볼 필요가 있어서 내가 가진 책을 건넸더니 핸드폰을 보여준다. 책 전체 내용을 전부 컴퓨터에 입력했다고 한다. 고3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며 『배움의 도』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아이라니~!
‘너답다.’ 고3학년 때도 공부보다 글쓰기에 더 신경 쓴 아이! 자기 자신으로 살면 좋겠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길을 가느라 외롭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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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은 동화작가이다. 강아지똥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몽실언니는 백만 부 넘게 팔렸다. 의외다. 동화는 꿈과 소망을 주는 이야기라야 잘 팔린다. <이오덕일기, 양철북>에서 사람들이 권정생선생님께 왜 슬픈 이야기만 쓰느냐고 묻는다. 모름지기 동화란 밝은 면, 희망을 갖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몽실언니는 슬프다. 다른 작품도 대부분 슬프다. 선생님은 줄곧 슬픈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선생님이 써내는 슬픈 이야기에 빠져든다. 아이들에게까지 자기계발서를 파는 시대에 슬픔과 눈물을 담은 책이 백만 부 넘게 팔리다니 왜 그럴까?
<강아지똥별>은 권정생선생님의 삶을 쓴 동화다. 저자 김택근은 1990년 권정생을 인터뷰한 인연을 깊이 새기고 있다가 일대기를 이야기로 엮었다. 선생님이 쓴 책과 글을 뒤져 선생님이 살아온 모습을 전기문처럼 엮었다. 편하게 읽을 수 있지만 슬픈 이야기가 많다. 몽실언니를 읽는 기분이다.
선생님은 1937년 도쿄 혼마치 빈민가에서 태어나 2007년 안동 빌뱅이 언덕 흙집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아픔과 슬픔을 벗하고 살았다. 태어나자마자 한국에 남은 형이 죽는다. 광복하면서 두 형을 제외한 가족이 귀국했으나 너무 가난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끝내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 아버지 모두 돌아가신다. 두 형은 조총련계라 딱 한 번 한국에 왔지만 분단의 비극만 더 느끼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늑막염, 폐결핵, 신장결핵, 방광결핵, 부고환결핵으로 한쪽 콩팥과 방광을 들어냈다. 평생 오줌주머니를 차고 살았다. 형 죽고 친구 죽고 줄곧 죽음과 고통을 보며 괴로워한다. 평생 슬픔과 아픔을 끌어안고 살았고,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늘 곁에 있었다. <강아지똥별>에는 가난과 병에 시달린 선생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고통과 슬픔이 끊이지 않는다. 선생님 눈에는 아파하고 울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보였다. 그때 만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책을 써냈다.
선생님 어머니가 돌아가신 1964년에 온 국민을 울린 이윤복의 일기가 책으로 나왔다. 1966년에 나온 일기 <저 하늘에도 이 소식을, 산하, 이윤복>에서 동생 이윤식은 “형은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기에, 고달프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형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터라, 나 또한 슬픔을 아는 사람이 더 큰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썼다.
저자는 <강아지똥별>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는다. “왜 평생 슬픈 얘기만을 썼을까.” 슬픔을 아는 사람에게는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 보인다. 슬픔의 사람 권정생은 너무 힘들어 슬퍼하는 이웃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몽실언니를 보여준다.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했다. 시궁창에 떨어져 썩어가는 똘배, 거지, 바보, 깜둥 바가지, 늙은 소, 외로운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썼다. 모두 힘 없고 소외된 것들이다.(지식채널 e 正生 참고)
권정생선생님은 슬픔을 겪었고 슬픔을 동화로 썼지만 마음에는 불을 담고 살았다. <우리들의 하느니/녹색평론>으로 중학생들과 토론할 때 아이들이 “이분, 많이 화난 사람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오덕 일기, 양철북>에도 화내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손 내밀지 않고 도리어 등 떠미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어쩜 그리 슬픈 이야기로 보여주실 수 있는지……
2005년 5월에 쓴 유언장에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이 있다. 사람들이 점점 슬픔을 무시하고 돈과 편안함만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화를 내신 것 같다. 인세 모두 아이들을 위해 쓰라고 주고 가신 마음에 담긴 불을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어서 이 책이 더 반갑다.
마음에 불을 담고 사신 면까지 드러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여러 곳에서 자료를 모아 일대기를 써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20세 이전 내용은 많지만 이후의 내용은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가 드문드문 나온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이오덕 일기, 양철북>를 참고해서 선생님이 쓴 동화 이야기를 더 담으면 어떨까 싶다.
이 제안을 담아 글을 다시 쓴다고 해도, 더 뛰어난 사람이 쓴다 해도 선생님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선생님은 별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똥별! <강아지똥별>을 읽고 앞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눈을 바라보며 ‘그냥 읽어보세요’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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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수용소』, 랭던 길키
『수상한 아이가 전학 왔다』, 제니 롭슨
1940년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뒤에 중국에 있는 백인들을 산둥지방 위현수용소에 보냈다. 일본의 포로가 되었지만 백인들은 우리 선조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죽거나 고문당하거나 위안부로 보내지지 않았다. 수용소 안에 갇혀 살았지만 생명의 위협은 당하지 않았다. 물론 불편하게 지냈다. 기상시간, 취침시간이 있고 개인공간은 사라졌다. 좁은 방에 여럿이 함께 지내야 했다. 평소에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던 물건 대부분을 쓰지 못했다. 좌변기는 당연히 없고 먹을 것도 부족했다.
술집 주인과 회장, 선교사와 천주교 신부, 백인과 결혼한 타국 여성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야 했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이 점호를 받고, 똑같이 지저분한 화장실을 썼다. 대기업 회장이 결코 겪지 않을 문제를 마약중독자, 노동자와 함께 해결해야 했다. 화를 돋우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그런데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저마다 달랐다. 누구를 화나게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겐 아무 일도 아니었다. 자라온 환경, 개인의 성품과 기질, 사회적 지위, 지금까지 누리던 것에 따라 화를 내는 순간이 달랐다.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사람들의 개인 영역을 정해주는 숙소업무는 충돌하는 이기심을 조정하는 일이어서 힘들었다. 개인 공간을 더 차지하려는 마음은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았다. 음식, 난방도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남성과 여성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일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화장실이었다. 남자 화장실 청소는 미국인 선교사와 영국인 은행가가 맡았다. 그들은 화장실에 들어오는 ‘손님’과 웃고 떠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남자들에겐 화장실 청소가 다른 일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여성은 달랐다. 화장실 청소를 계속 하려는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며칠씩 돌아가며 청소했다. 그런데도 자기 차례가 되면 화장실을 청소한다는 티를 냈다. “이번 주에 제가 무슨 일을 맡았는지 아세요?” 라는 식으로 크게 희생한다는 표시를 했다. 특히 영국 사업가 아내들과 두 명의 러시아 여성이 보여주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영국 사업가 부인들은 화장실 청소를 즐겁게 했다. 화장실 청소가 귀부인으로 살아온 자신들에게 지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화장실 청소를 공공 봉사로 생각했다. 화장실 청소를 피하는 것이 오히려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러시아 여성들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화장실 청소를 피했다. 러시아 여성들에게 화장실 청소는 과거 자신들의 삶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부자와 결혼해서 영국 사업가 부인들보다 지위가 높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었다. 화장실 청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 자신들을 돌려보냈다. 자신들이 화장실 청소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화가 났다. 러시아 여성에게는 귀부인으로 살아온 영국 여성들처럼 공공 봉사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백인 남성의 아내가 되기 전에 했던 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너무 컸다.
영국 여성과 러시아 여성은 화장실 청소를 다르게 판단했다. 같은 일이지만 영국 여성은 봉사의 기회로, 러시아 여성은 아랫사람이나 하는 지저분한 일로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부를 하찮게 여기고 판사는 괜찮게 여긴다. 청소부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직업이 아니라 못 배운 사람이 하는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고귀한(noble)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증거이다. 사람이 하는 일을 사람의 가치와 동일하게 여기는 태도는 차별을 불러온다. 한 사람의 진짜 가치를 올바로 보기 전에 선입견을 갖고 회피하게 만든다. 차이를 차별로 보는 태도가 쌓이면 분노가 끓어오른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초등학교에 독서캠프를 하러 갔다. 첫 날 3시간 동안 『수상한 아이가 전학 왔다』의 내용을 알아보았다. 토미는 전학 오던 날부터 방한모를 쓰고 얼굴을 가렸다. 눈만 내놓고, 밥 먹을 때도 코 위로는 보여주지 않았다. 화상이나 흉터가 있을 거라는 추측부터 외계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그래도 토미는 방한모를 벗지 않았다. 일곱 번이나 전학을 다닌 토미는 결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그럴수록 반 친구들은 더욱 궁금해했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토미가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방한모를 뒤집어쓰고 다닌다. 다음 4가지 중에서 어디까지 해도 괜찮을까?”
1) 방한모를 왜 쓰고 다니는지 묻는다.
2)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묻는다.
3) 얼굴을 보려고 시도한다. 단, 강제로 벗기지는 않는다.
4) 강제로 방한모를 벗기고 얼굴을 본다.
<주장-왜냐하면-예를 들어-다시 말해>로 한 문장씩 써서 발표하라고 했다. “(주장)방한모를 왜 쓰고 다니는지 묻는 건 괜찮다. (왜냐하면) 비밀이나 약점을 찾아내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친구가 모자를 쓰고 올 때 왜 모자를 썼는지 묻는 건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방한모를 벗기려는 게 아니라 그저 물어보는 것이므로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는 건 괜찮다고 생각한다.
한 모둠이 의견을 발표할 때마다 다른 모둠 아이들에게 질문하라고 했다. 다섯 모둠의 발표와 반대 질문이 비슷했다. 방한모를 쓰는 까닭과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토미가 대답한다면, 토미가 질문에 상처를 받지 않은 셈이다. 비록 싫다고 거절하는 대답일지라도 자신을 감추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다면 상처 받은 표시일 수 있다.
사람들이 상처 받았을 때 어떤 특징을 보이는지 발표하라고 했다. 아이들 의견을 정리하면 두 가지이다. 조용히 혼자 지낸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거나 슬픈 표정을 한다, 화장실이나 자기 방에 가서 운다 등의 소극적인 표현을 보인다. 또한 욕한다, 다른 곳에 화풀이한다, 뒷담화를 한다, 대놓고 말한다 등의 적극적인 표현도 말한다. 상처를 받으면 침울해지며 혼자 조용히 지내기도 하지만 소리를 지르고 욕하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억울할 때,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 공격당할 때, 공평하지 않을 때…… 인간은 분노한다. 그 분노를 해결하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분노를 표출한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알아본 뒤에 아이들에게 물었다.
“대상도서에서 가장 상처 받은 인물은 누구일까?”
아이들이 토미, 응포, 체리스, 벤터 선생님을 꼽는다. 토미는 얼굴을 가리고, 응포는 말을 하지 않으니 상처 받은 게 맞다. 그러나 아이들이 체리스를 상처 받은 아이로 생각해서 놀랐다. 체리스는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 친구가 없기 때문이라는데 나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벤터 선생님은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무시당한다고 생각할 거라 한다.
러시아 여성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지 않으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러시아 여성들을 비난하면 태도를 바꿀까? 러시아 여성은 부유하다. 체리스는 공부를 잘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그들은 보기와 달리 상처가 있다. 자신들의 아픔과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행동을 바꾸라고 강요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강제하는 건 오히려 분노만 일으킬 뿐이다. 의무, 윤리, 법규, 도덕으로 러시아 여성이 화장실을 청소하게 만들지 못한다. 토미의 방한모를 강제로 벗기면 친구가 되지 못한다.
친구들이 토미의 얼굴을 보려고 토미를 힘들게 했지만 토미가 5학년들에게 공격당할 때 지켜준다. 그때 배웠는지 모르지만, 친구들은 토미가 자연스럽게 방한모를 벗어버리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말을 하지 않고 창문 밖만 바라보기 때문에 ‘우주 미아’라는 별명이 생긴 응포가 말을 한다.
우리나라를 ‘분노 사회’라 한다. 화장실 청소하는 분들이 떳떳하게 얼굴 내놓고 다니지 못하는 사회 인식이 분노 사회를 만드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상대의 아픔과 상처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태도가 계속되는 한 여전히 분노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분노사회에서 벗어나는지 모르겠다.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바라보자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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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좋은교사> 책소개 119번째
학부모 문학 기행에서 김용철 작가 작업실에 가기 전에 선사박물관에 들렀다. 학부모와 아이들은 선사시대 사람들을 ‘우가우가’ 외치는, 유인원과 우리 사이 어디쯤의 생명체라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우리보다 능력이 많았을 거라고 썼다. 집 짓기, 짐승 잡기, 곡식 기르기, 도구 만들기 등 온갖 일을 손수 다 했으니 더 능력이 많다는 주장에 동의가 되었다. 컴퓨터 고치고 핸드폰 칩을 다루는 능력이 야외에서 생존하는 능력보다 낫다는 말을, 왜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박물관 들어가기 전에 유발 하라리의 설명을 알려줬다. 학부모와 아이들 견학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우가우가’와는 먼, 실제 능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승자는 역사를 왜곡한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패자를 나쁘게 기록한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로 알려졌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한 짓은 신사와 거리가 멀다. 미국 영화에 비친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은 사실과 너무 달라 전체를 다 바꾸어야 할 지경이다. 패자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쓴다. 일본이 자신들을 피해국가라고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는 이야기처럼, 우리가 잘못 아는 역사가 얼마나 많을까? 의심조차 하지 못한 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모든 국가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면 반드시 피해자가 생긴다.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공동체가 있다.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에서 우리가 피해를 입는다. 피해자는 억울하다. 가해와 피해의 범위가 어찌나 넓은지, 역사 기록의 가해자와 피해자 목록을 작성한다면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나라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이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 나라도 많다.
난 책을 좋아한다. 역사책을 꽤 읽었다. 그런데도 중앙유라시아 지역과 동남아시아 산악지역 역사는 전혀 몰랐다. “돌궐, 말갈, 여진이라는 오랑캐가 살았대!” 정도만 안다. 동남아시아 산악지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남은 기록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방 중의 변방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류 국가에서 변방일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주류와 생각이 달랐다.
실크로드 하면 유럽과 중국을 오가던 대상들이 만든 길을 떠올린다. 이 길을 만든 사람, 다닌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중국과 유럽을 오가며 물건을 실어날랐을까? 농경민이 다녔을까, 유목민이 다녔을까? 중국은 말이 살찌면 야만적인 유목민들이 몰려와서 곡식을 빼앗아 간다고 가르쳤다. 글씨를 모르고, 야만적이고, 거친 사람들이라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도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이는 정착 국가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침략해서 빼앗고 파괴하는 건 오히려 정착 국가인 중국, 러시아, 로마가 유목민에 대해 한 짓이다. 아틸라, 칭기스칸, 티무르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기록했지만 사실 그리스-로마, 페르시아, 중국이 더한 만행을 저질렀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로마와 중국이었고 자국에게 유리한 기록만 남겼다.
중앙유라시아에 속한 돌궐, 선비, 몽고, 여진, 거란, 훈족 등에 대해 우리는 야만족, 문화가 없고 남의 것을 약탈하는 떠돌이 민족이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중국은 문화 수준이 높고 이방 민족을 침략하지 않는데 오랑캐 야만족들이 쳐들어왔을까? 그래서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저자는 이런 생각이 중국의 기록에 의존한 역사의 오류라고 말한다.
유목민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문화를 전파한다. 실제로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은 실크로드를 통해 가는 곳마다 문화가 꽃피게 했다. 반면 정착 민족은 한곳에 정착해서 자기들 문화 안에 갇힌다. 정착민은 유목민이 교류를 위해 다가오면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문화교류가 고유의 정체성을 무너뜨릴 거라는 두려움이 더해지면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정복하고 지배하려고만 했지 교류하며 배우려 하지 않았다. 저자는 만리장성 역시 오랑캐로부터의 위협을 막는 방벽이 아니라 중국에서 세금 내다 지친 농민들이 탈출하지 않게 하기 위한 벽이며, 외부의 이민족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 같은 역할이었다고 설명한다.
‘조미아’는 동남아시아 산악지역을 일컫는 낱말이다. 넓은 평지, 농사짓기 좋은 곳을 두고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일까? 옛이야기에서 이런 곳은 산적, 반란군, 도망자들이 살았다. 인근 국가의 지배자들은 이런 곳을 싫어했다. 경계하고 토벌하려 했다. 글을 모르는 무식한, 문화를 만들지 못하는, 싸그리 없애버려야 하는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식한 놈들, 산적과 반란자들이었을까?
역사를 배울 때, 수렵과 채집하던 사람들이 정착해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문화가 더욱 발전했다고 한다. 『조미아~』의 저자는 수렵과 채집하던 사람들이 안정을 찾아 농사를 지은 게 아니라 주장한다. 산악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정착 민족의 억압을 피해, 쉽게 말하면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변방으로 이주했다고 주장한다. 위계질서를 싫어하고, 체제와 법률에 매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간 변방이 산악지대였다고 한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지도자를 세우지 않았다. 고정된 역사도, 사당도, 유적도,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그들은 ‘기억’ 대신 현재를 유연하게 살아내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내가 읽고 배운 역사는 국가의 지배구조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착실하게 세금을 내어 국가를 운영하는데 도움이 되는 신민을 양성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다. 이 역사는 ‘우리는 우수한 문화 민족이고, 산에 숨어 지내는 사람들은 야만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갇혀 사는 사람이고, 그들이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무식하고 짐승 수준이어서 산속에 들어간 게 아니다. 변방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그곳에 갔다.
역사에는 탐관오리가 백성을 수탈해서 백성이 신음하는 이야기가 많다. 세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자식까지 팔아먹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를 견디지 못해 도망한 사람들은 어디에 갔을까? 산으로 도망갔다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조금만 생각하면 역사의 기록을 다시 생각했을 텐데, 왜 역사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정주 국가와 이동하는 민족은 선후 관계가 아니라 함께 공존했다고 주장한다. 책의 부제가 <동남아시아 산악지대 아나키즘의 역사>이다. 주류에 맞선, 무정부주의자들의 선택지가 산악지대였다.
★ 두 권 모두 새로운 눈으로 역사를 보게 해주어서 좋다.
★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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