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 폭발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싸우고 싸우고, 욕하고 욕했다.
  화를 내지 않았다.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덜덜 떨리기도 했다.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고, 다 때려치고 휴직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화를 내지 않았다.
  화 내지 않는 게 무슨 큰 일이냐 생각하겠지만, 폭발하는 아이들에게 화 내는 건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2021년 내내 참고 또 참았다.

2. 참고 참으며 상담했다. 싸우면 상담하고, 욕하면 상담했다.
  우리 반 아이가 5학년을 때리면 5학년을 달랬다. 때린 아이는 또 상담했다.
  4학년을 달랬고, 3학년과 2학년을 달래기도 했다. 
  폭발하는 아이는 학년을 가리지 않고 욕하며 싸웠으니까~
  졸업식을 앞두고 폭발하는 녀석들 사이에서 고생한 아이가 상담 때문에 견뎠다고 했다.
  상담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했는데 소용이 있었다.

3. 폭발하는 힘을 달래려고 이것저것 많이 해줬다.
  산에 가고, 볼링장에 가고, 해양레일바이크 타고, 자전거 타면서 놀고, 삼겹살 구워먹고~
  살모사 보고는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녀석들 말리고,
  일본 음식, 이슬람 음식, 쿠키, 머핀을 만들고~
  이러면서 1년을 버텼다.

졸업식하는 날, 아이보다 학부모가 더 많이 울었다. 
난 속이 시원했다. 좀 울컥하기도 했다.

 

2020년

1. 비대면수업(우리 학교는 8주) 전부 실시간 쌍방향 수업했다.
대면수업 할 때는 학교 앞 강에 데려가서 물놀이를 했고, 마을 이곳저곳을 찾아가는 현장학습을 세 번 했다.
틈날 때마다 학교 앞산(5~10분 거리), 강가(5분 거리)에 데려갔다.

애들도 내가 자기들 사랑하는 줄 안다.

2. 1학기 세 번, 2학기 세 번 문집을 만들었다. 일기 안 쓰는 아이들 달래고 꼬드기며 만든 문집이다.
(아이들이 이제 글을 쓸 만해지니 헤어져서 아쉽다.)

3. 오늘을 마지막으로 아이들 집에 열한 번 찾아갔다.


다음 주도 비대면 수업이라 주간예고, 학습지와 함께 
미술 준비물로 기성품 만들기를 준비했다.
(9시 딱 되면 수업에 들어오고, 5교시 내내 열심히 참여한 선물!)
그리고 아이스크림 한 통씩 배달했다. (학교 예산으로)
언젠가 수업 시간에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나왔는데 
31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한 번도 못 먹은 아이가 있었다.
마지막 가정방문 가는 기념으로 작은 거 한 통씩 나눠주었다.
(아이 기다리면서 사진 찍어봤다.)

2주일 더 수업하고 나면 4년 정든 학교를 떠난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학교 떠나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선생 노릇 할 만해질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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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대로 글이 되는 우리 아이 첫 글쓰기』 책 소개합니다.
나명희 씀, 양철북 출판, 220쪽, 13000원, (1~3학년 대상 글쓰기 지도)

내가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그대로 쓰였다.
책을 읽으며 내 수업, 내가 만난 아이를 보는 줄 알았다.
이분은 내가 하는 말을 한다.
『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글쓰기』에 쓴 내용을 저학년에 맞춰, 쉽게 이해하도록 썼다.
아이들 글도 내가 만난 아이들 글 같다.
『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글쓰기』를 읽은 분들이 책 내용이 좀 어렵다고 말했는데, 이 책은 쉽고 재미있다.
『말하는 대로 글이 되는 우리 아이 첫 글쓰기』를 먼저 읽고 이어서 행복한 글쓰기를 읽으면 좋겠다.

책 내용은 글쓰기 시작하기, 글감 찾기, 글 쓰는 방법 알려주기, 아이 글을 바라보는 눈, 시 쓰기, 일기 쓰기, 아이가 책을 읽게 하는 방법을 순서대로 썼다. 내가 책을 쓰는 순서와 비슷하다.
저자는 지난해에 내가 읽은 『나에게 시가 왔습니다』를 엮은 분이다. 이 책도 참 좋았다.

<책에 나온 내용>
아이들은 저마다 시의 씨앗들을 품고 있습니다. 착한 마음, 순진한 마음, 거짓 없는 솔직한 마음, 엉뚱한 마음,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밝은 눈, 반짝이는 호기심, 세상의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 이런 마음들이 다 시의 씨앗들입니다.
‘어린이시’는 존재 자체가 시인인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쓴 시를 말합니다. 그냥 ‘시'라고 해도 좋습니다.

양철북에서 나온 책 몇 권 같이 소개한다.
<교육>을 생각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1. 가르친다는 것 (윌리엄 에어스)
--- 만화판과 에세이판 두 권이 있다.
--- 책 좀 읽은 분에게는 만화판을 추천한다. (난 만화판을 더 좋아한다.)

2. 교사로 산다는 것 (조너선 코졸)
--- 이 구절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핵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그것이야말로 평생 잊히지 않는 교훈이 될 것이다."

3.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 아이를 가르치는 분이라면 하이타니 겐지로는 읽어야 한다.
--- 아! 내가 만난 데쓰조들이여~

<현대인의 몸은 피로하고, 마음은 공허하고, 영혼은 곤핍하다. 저 혼자는 가슴을 후벼파는 외로움에 절절매면서도, 이웃을 향해 이유 없는 적개심을 드러내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서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그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허기와 분기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니 분기탱천하고, 결국 먹은 것이 없으니 헛헛한 속을 달랠 길 없다. 그러다 보니 슬픔, 자조, 분노원망과 불편의 감정이 충만하다.>

글 쓰는 그리스도인에 나오는 내용이다.

현대인은 피로하고 외로워한다. 해결 방법을 찾지만, 아픈 마음이 찾은 방법은 잘못된 방법일 때가 많다. 그 방법을 따르면 허기와 분기를 돋운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아무리 먹어도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이럴 때 드는 마음을 저자(김기현)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산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나,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미친 듯이 헤매도 어쩌지 못하는 내가 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정당한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도 상처받는다. 마음이 공허함을 느낀다.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한다. 그래도 아픔이 낫지 않는다. 많은 어른이 아이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

내 마음에 상처가 있다. 상처를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잘 살폈다. 20대에 심리학 책, 슬픔과 고통에 관한 책을 마구잡이로 읽었다. 이런 책들이 내 허기를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 마음에서 관계가 어떻게 왜곡되는지, 관계가 상처를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아이들 상처가 보였다. 낫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글쓰기이다. 김기현 목사님도 글 쓰는 그리스도인에서 글쓰기가 회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앞서 밑줄 그은 내용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감추고 싶고, 덮고 싶고, 지우고 싶고, 잊고 싶은 옛 기억들을 살려내 일기장을 채우면서 흐트러진 내면을 정돈하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용서한다. 하나님을 경험한다.>

 

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글의 치유 효과를 누리는 사람은 일부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싸워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이때 싸움의 기술이 필요하다. 제목도, 내용도 모두 싸움하는 기술을 말한다. 몸으로 때리고 피하는 기술이 아니다. 몸보다 마음을, 말을, 상황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글 쓰는 그리스도인도 그랬지만 싸움의 기술도 남다른 통찰력이 드러난다. 상황 분석이 탁월하다. 인간의 심리 중에서 싸움에만초점을 맞춰 재미있다. 심리나 상담 책을 읽지 않은 분이 읽으면 놀랄 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분이 읽으면 이렇게도 보는구나!’하며 재미날 것이다. 한 구절만 예로 들겠다.

<치약을 아래서부터 짜느냐 위에서부터 짜느냐 하는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고는 한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가 치약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 것이다. 그들이 싸우는 진짜 이유는 내가 내 삶을 통제하는 방식이 상대방이 그의 삶을 통제하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각자의 오래된 습관이 건드려지기 때문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각자의 오래된 습관이 건드려지기 때문이며, 그 싸움이 점점 커져서 급기야 서로의 인격에 대한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기 방도 하나 못 치우면서 무슨 큰일을 한다고!” “밖에서는 그렇게 고상하게 굴면서 옷장 상태는 그게 뭐야? 어떻게 그렇게 겉 다르고 속 달라!” 이런 종류의 말을 주고받으며 싸우고 있다면, 이것은 집 안 정리나 청소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리나 청소 여부를 서로의 인격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정리나 청소 여부가 상대방의 성실함이나 됨됨이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면, 이들 사이에서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어떻게 함께 쓰는 공간을 정리하고, 청소할 것인가)를 협의하기는 더 이상 어렵게 된다. 그러니 집 안 정리나 청소 상태로 싸우게 되더라도 그것이 인격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98~99)

아무튼 정말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다. , 위 인용문에서 습관이 나온다. 그래서 지금은 HABIT(습관)을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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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의 글을 사랑했다.


(하긴, 내가 사랑한 글이 얼마나 많았나!)

옆집 할아버지 돌아가시자 고무줄을 때려친 아이다.
(고무줄 하는 거 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이가 겨울 방학 때 나한테 편지를 썼다.
(이 편지 찾으려고 몇 번이나 주변을 뒤졌다.)

눈이 온 날, 나 주려고
눈사람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놓았다고 했다.
(오늘도 편지 찾으려고 편지함 뒤졌는데 못 찾았다.)

 

오늘 아내가 우연히 내 책에서 찾았다며 엽서를 줬다.
(찾던 편지가 아닌 다른 편지다.)
와~ 7년이면 지영이가 고 2학년일 때인데,
내가 지영이에게 무얼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이때 지영이 만나서 무언가 한 것 같은데... 어렴풋이...)

내가 무얼 했기에 자기를 기억해줬다고 하는 걸까?

지영이는 오늘 어떤 크리스마스를 기다릴까?

언젠가 퇴직하면 아이들 글 읽으며 그리워하면서 시간 보내겠지.

#여러분_모두_즐거운_성탄_맞으시기를_

 

아래 글을 쓴 아이가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상금 30만원)을 받았다.
한 아이는 최우수상(50만원), 또 한 아이는 장려상(10만원)을 받았다.
상금 받은 날, 우리 반 세 아이에게 말했다.
상금에서 1/10은 너희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줘라다른 사람 도와주는 단체에 보내도 되고, 직접 찾아가 줘도 된다.”

세 아이 부모에게 전화했다. 1/10을 후원하시라고돈만 보내지 말고, 아이와 후원할 곳을 같이 결정하시라고.
그게 상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세 아이 모두 1/10보다 더 후원했다. 아깝다고 말한 아이도 있지만, 이렇게 배워가는 거라 생각한다.

2년 뒤에 아이가 방과후 글쓰기하면서 글을 보여주었다내게는 보여주지만. 엄마에게는 보여주지 않겠다고 했다.
괜찮다. 네 마음 안다. 글로 표현했으니 됐다.” 하며 다독였다.

000

-- 아빠하고 나는 떨어져서 산다. 원래는 아빠하고 같이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계속 떨어져 사는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주말마다 가도 아빠가 회사에 가서 잘 만나지도 못한다. 만나면 실컷 놀아주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해주시는데 자주 만나지 못한다. 아빠는 우리를 위해 충주까지 가서 일하신다. 나는 이게 싫다. 아빠가 충주에서 지위가 높지만, 그냥 우리랑 같이 살면서 낮은 지위로 같이 쭉~ 있으면 좋겠다.
-- 나는 아빠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우리하고 같이 있는 게 더 좋다. 아빠가 안 놀아주고 혼나도 아빠하고 같이만 있으면 좋겠다. 언제 엄마가 크게 우신 적이 있다. 우리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겨서이다. 우리가
엄마, 괜찮아요?” 라고 물어보면
괜찮아, 괜찮아!” 그러는데 아빠하고 영상통화를 하면서 갑자기 울기 시작하셨다.
-- 엄마를 위로해줄 사람은 아빠밖에 없다. 엄마가 슬픔을 마음에 넣어 두었다가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보다 아빠 위로를 받으면서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다시 얼마 뒤에 아이가 엄마에게 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상 받은 기쁨을 나누며, 도와줄 곳을 찾던 엄마와 아들이 감추어둔 아픔과 외로움을 이야기하며 함께 울었을 거다.
가족이란 기쁨만 아니라 아픔과 외로움도 나누는 사이 아니겠나!

코로나로 힘들지만, 기쁜 성탄절! 기쁜 연말이 다가온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이 #가족과_화해하고__기뻐하고__함께_하면__좋겠습니다.

 

아이 마음에서 좋은 글을 길어내려면 기대하고 기다려야 한다.

아이 집에 가정방문을 갔었는데, 할아버지가 계신 줄 몰랐다.
아이 마음에 슬픔이 차있는 줄 알았지만, 이런 마음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이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지만, 난 아이 글을 사랑했다.
2018년 담임을 하면서 12월에 이 글을 만났다.
그 뒤로 가끔 네 글을 보여줘!” 하며 기대하고 기다렸다.

2019년에 할아버지의 침대를 만났고, 올해엔 할머니 호박죽을 만났다.
아이는 해마다 한 번씩, 삼 년 동안 나를 글로 울렸다.
내년에 중학생이 된다. 가끔 연락해서 글 달라고 졸라야겠다.
어쩌면 아이가 작가가 될 수도.
난 작가가 된 아이 글 읽을 때까지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다.

----------------------------할아버지의 눈
변다인

요즘 난 몹시 바쁘다. 엄마는 일하고 아빠는 내일 베트남에서 오는 외삼촌 데리러 인천공항 간다. 내가 동생들이랑 할아버지까지 다 책임져야 한다. 할아버지는 눈이 잘 안 보이신다. 며칠 전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그 뒤로 잘 안 보이신다. 안 보이니까 길을 익히려 자꾸자꾸 나가신다. 나가는 위치도 모르신다. 할아버지가 나가고 스스로 못 들어오신다. 우사(소 외양간) 가셨다가 내가 불러서 겨우 들어오셨다.

할아버지가 하도 안 되니까 내가 창고에 쓰러져 있는 지팡이 하나 들고서 할아버지한테 드렸다. 할아버지는 이제야 좀 덜 불편한 듯 지팡이 짚으면서 겨우 집 안으로 들어오신다. 지팡이 위치랑 신발 위치까지 알아두려고 노력하신다.

할아버지는 길 외우러 또 한 번 나가신다. 별 일 없겠지!’ 하면서 집에 있는데 1분이 넘어도 할아버지가 문 앞에 서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신발이 짝짝이다. 한 짝은 맞는데 한 짝은 작고도 작은 분홍색 내 슬리퍼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이상한 듯 출발하지 않으셨다. 불안한 마음에 할아버지를 따라다녔지만,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며, 집 못 찾으면 소리 지른다!’ 하시며 우사로 가셨다. 불안하긴 했지만 집으로 들어왔다. 1분 뒤에 밖에서 다인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집 반대편, 쓰레기 태우는 곳에서 여기가 문이냐?” 하며 계셨다. 나는 아니라고 설명하고 문까지 안내했다.

하나님을 당황스럽게 하자.

나치는 유대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일을 시키거나 죽였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도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먹고 죽을 정도로 일했다. 조금만 잘못해도 맞고, 사냥당하는 동물처럼 죽어갔다. 유대인 600만이 죽었다는 사실이 무덤덤하게 숫자로만 들린다면 홀로코스트를 겪은 작가들(엘리 위젤, 시몬 비젠탈, 빅터 프랭클 등) 책을 읽어보라. 상상할 수 없는 내용에 할 말을 잃는다. 다하우 수용소에 다녀왔지만, 부헨발트 수용소에 갔을 때도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끝없이 들었다.

유대인들은 1년에 한 번씩 욤키푸르(대속죄일)를 지낸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날은 금식한다. 일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말하고 천천히 걷는다. 텔레비전을 켜도 기도합시다라는 정지화면만 나온다고 한다. 환자, 노약자는 금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최대한 적게 먹는다. 수용소에서 욤키푸르를 지킨 유대인들이 있다. 나치가 욤키푸르라고 강제노동을 쉬게 해주지 않는데도, 하루 안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가 아닌데도 금식했다. 땅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라도 감사하게 먹는 사람들이 왜 하루종일 금식했을까?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동안, 가족들이 가스실에서 죽는 동안 하나님이 무얼 하셨는지 묻고 또 묻다가 대속죄일에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금식을 선택했다.

약함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는 존재

약함의 자리에 자살한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견뎌내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죽음으로 해결하려 했다. 한 사람은 저자인 마이클 호튼의 친구로 목사이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청년이다. 친구 목사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 자폐증 딸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살했다. 청년은 동성애 성향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

저자도 고통당했다. 아버지가 뇌종양에 걸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비되었다. 아버지를 간호하던 어머니는 뇌졸중에 걸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했다. 아내는 수차례에 걸친 유산에서 겨우 회복하는 중이었다. 이후에 임신한 세 쌍둥이에게 문제가 생겨 20주를 겨우 넘기고 500g 조금 넘는 태아를 조기 분만했다.

제목과 1장을 읽으며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필립 얀시나 저자도 언급하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 헤롤드 쿠쉬너같은 책일 거라 생각했다. 저자가 세상의 포로 된 교회를 쓴 사람이니 고통의 문제/C. S 루이스처럼 고통의 의미를 따져보는 무거운 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고통당했으나 지금은 승리와 축복과 기쁨만 가득하다는 아니길 바랐는데 뛰어넘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정도가 아니다. 저자는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만 하지 않는다. 죄 짓고 아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장소라 설명한다. 질병과 고통슬픔과 아픔죄와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진 인간 존재를 위한 책이다.

약함(연약한 자)를 위한 장소

1장에서 저자는 고통을 겪으면서 신학을 지식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고통에 대한 책을 쓴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고통의 좋은 면을 살핀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과 다르다. 저자는 우리가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약함을 벗어나 강하고 축복받고 높아지는 게 아니라 고통과 연약과 낮아짐이라고 한다. 부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지 말고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붙들라 한다. 소망을 가장한 탐욕과 기쁨을 구하는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죄와 슬픔 가운데 십자가를 찾으라고 한다. 삶의 목표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타까운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3장을 지나면서 점점 어려워진다. 스토아철학, 실용주의, 현대철학을 넘나들고 교부들과 니체를 인용한다. 철학과 인문학 지식으로 풀어가기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성경으로 돌아와서 약함의 자리가 곧 십자가의 자리이며 우리가 거할 자리라고 논증한다. 천천히 읽어야 할 책이다. 4-하나님은 과연 크신 분인가?, 5-거기 위에 누가 계신가요, 6-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만 있다면, 장제목 하나만으로도 책 한 권을 써낼만한 내용이다.

2부는 강해서 같다. 7장은 욥기를 해설한다. 저자는 우리 믿음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욥을 위한 구속자이다. 또한 우리를 위한 구속자이다. 욥보다 더한 고통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셨다. 8장은 로마서 5-8장을 해설한다. 우리를 고소하는 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심 앞에서 깨진다. 9장은 에베소서 6장과 이사야 59장을 통해 진리의 허리띠를 비롯한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말한다. 10장은 요한복음 11(죽은 나사로)을 해설한다. 나사로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을 이긴다. 욥을 통해 고통을, 로마서에서 죄를, 에베소서와 이사야를 통해 영적 전쟁을, 나사로를 통해 죽음을 말한다. 모두 약함의 자리다.

약함을 위한 장소(책의 원제)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이 약함을 이기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약함의 장소에 오셨다. 그래서 이 책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고통의 의미를 쓴 책이라기보다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신학책 같다. 우리가 약함의 자리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축복과 번영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약함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까닭을 예수님의 모범과 성경으로 설명한다.

약함의 자리에 계시는 예수님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아이가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나이트에 적어놓았다. 소년은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형을 당했지만, 너무 가벼워 단번에 죽지 않았다.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1만 명의 포로가 강제로 지켜보았다. 뒤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때 위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라는 대답이 자기 안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고 적었다. 가볍게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쓰는 예화로 보지 말자. 마이클 호튼이 전하는 약함의 자리가 바로 그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약하고 고통당하고 아파하는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는 의무규정이 아니라 내가 아파할 때, 고통당할 때, 죽을 수밖에 없을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친구 목사인 스티브의 자살에 대해 스티브는 우리의 약함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다(167)”를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자살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맥락은 아니지만, 물음표를 써놓았다. 자살한 청년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의심이 없다라고 써서 또 물음표를 치게 한다. 전체 내용을 보면 자살이 초점이 아니라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뜻이지만 나도 아직 약함의 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이 부분에 대해 물음표가 생긴다.

 

- 삶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이다. (42)

- 기독교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지는 못한다. 기독교는 우리의 개인적 치료를 위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극복하셨다는 진리다. (166)

- 새로운 창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 는 이미 도래했으며, 이미 우리를 놀라운 빛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약함 가운데 있으며, 아직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193)

 

괜찮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생각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일컬었다. 이슬람에 넘어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무슬림과 싸우는 사람을 말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절에 다니는 사람을 불교인이라고 말하듯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사람조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 그래요?’ 한다. ‘, 그래요?’너도 그놈들이랑 똑같은 거 아냐?’일 수도 있고, ‘거길 왜 다닐까?’일 수도 있다. ‘나도 교회 다니지만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이기도 하다. ‘의외인데요. 교회에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있네요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2천 년 전 그리스도인은 미친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미쳤는지 죽는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믿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일 양식이 없으면 금식해서라도 가난한 사람을 먹였다. 지금은 , 그래요?’의 대상이 되었다.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도 많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양보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금한다. 선교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가난한 나라 아이와 일대일 결연을 맺어 후원한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직장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참는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다.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으로 괜찮게 살아간다. 이런 사람이 되자고 설교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괜찮은 교회라고 칭찬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그리스도인이 정말 이런 모습일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규정했기 때문에 말씀을 오해한 건 아닐까?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의 저자인 쉐인 클레어본은 우리가 괜찮게 보는 모습이,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 모습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버리고 나를 따르라한 말씀을 그대로 행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하셨으니 노숙자와 함께 자고 창녀를 집에 데려와 환대한다.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나를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성경 공부와 찬양을 하며, 기독교 문화에 젖어 살았다. 스스로 기독교적인 것들로 피둥피둥 살이 쪘다고 말한다. 그만 하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박살내셨다. 물론 그도 단번에 소유를 다 팔아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진 않았다. 친구가 노숙자를 찾아갈 때 두려워하며 따라갔다. 친구가 노숙자와 잠을 잔다고 말할 때 턱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친구를 따라갔다. 두려워하며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걸 안 뒤에는 돌아서지 않았다. 복음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그들의 짐을 나눠지는 거라고 믿었고 믿은 대로 행동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쉐인 클레어본은 이를 증명하고 증거한다.

그는 폐쇄된 성당에 기거하던 40명가량의 노숙자들을 퇴거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해 싸웠다. 믿음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찾아 테레사 수녀가 있는 캘커타에 가서 나환자를 돌보았다. ‘여러분의 캘커타를 찾으라는 테레사 수녀의 말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형제를 위해 수고하는 고귀한 대의도 좋지만, 부유함에 찌들어 가난한 이웃을 이웃으로 두지 않는 미국에서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은 쉽지 않다. 편안하게 살면서 가끔 노숙자를 찾아가고 휴가 기간에 캘커타와 같은 곳을 찾으면 굉장히 만족스럽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들을 멸시하며 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쉐인 클레이본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꺼리는 곳까지 나간다.

심플웨이 - 소박한 길

예수님과 선지자들이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행동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병자를 고치는 선에서 멈췄다면 환영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에 일하셨다. 쉐인 클레어본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따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자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심플웨이라는 무소유 공동체를 설립한다. 노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놀아준다. 여기서 멈추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복음을 좀 더 나은 삶, 양보하는 삶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법정에 출두하고 공항에서 보안요원에게 심문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자신에게만 적용하고, 복음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축소하지 않았다. 그에게 공동체는 내 집, 내 교회, 내가 함께 하는 노숙자 모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적당한 크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칭찬과 박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더욱 지나치게 행동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바그다드에 가서 미군이 폭격하는 동안 가정과 병원을 방문한다. 그는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전쟁을 거스르기 위해 이라크에 갔다. 법률에 대항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을 계속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행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정치와 사형제도, 국가 정책에 반대해서 불편한 일을 겪더라도 복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라고 한다.

저항할 수 없는 혁명

책의 원제는 <irresistible revolution>이다. 쉐인 클레어본이 예수님을 믿어온 행적을 주로 다루었으나 자서전은 아니다. 원제처럼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을 다룬 책이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복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말한다. ‘내가한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말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나처럼 행동하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함께 이 일을 행하자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 나서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릴 적에 위인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대단하게 태어나서 3살에 천자문 끝내고 7살에 호랑이 잡고 10살에 과거에 합격한 영웅 앞에서 느낀 기분을 다시 느낀다. 예수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된 것 같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서 이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라거나 이 사람 괜찮다고 말하기 부담스럽다. 이럴 때 찾아내는 괜찮은 도피처는 교리의 오류이다. 쉐인 클레어본처럼 행동하면서도 잘못된 교리를 전한 이단을 들먹이며 위험하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면 공격해서라도 무너뜨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그가 죄인이라고 몰아세워야 한다. 교리나 신학으로 따지면 저자도 걸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고 싶지 않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이 자꾸만 떠올라서 따질 수가 없다. 그만큼 저자의 삶과 말과 생각이 혁명적이다. 예수님이 역사에 일으킨 사랑의 혁명이 다시 생각난다.

쉐언 클레이본은 자신을 영웅으로 말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이며, 이 혁명은 행함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제자는 행하면서 배운다.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정말 귀하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귀하다.

모든 책은 읽는 이의 생각에 무언가를 더해준다. 삶의 방향과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꿔주는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성경 외에 내 전부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책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그런 요구를 한다. 그청년 바보의사, 난 당신이 좋아, 지금, 행복합니다처럼 강한 충격을 준다. 지금까지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모습이 정말 괜찮은지 묻는다. 지금이라도 내 소유를 다 팔고 쉐인 클레어본처럼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흔든다. 동시에 책을 소개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마음이 나를 뒤흔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무뎌지기 전에 무언가 덜컥 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제국의 모순논리에 현혹되지 않는 더 많은 바보들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힘보다 더 지혜롭다고 우기는 거룩한 바보들이 필요하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가 미쳤다고 할 것이다.(365)”

어쩌면 우리가 약간 미쳤는지도 모른다.(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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