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권일한

 

사회복지사들이 카야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테이트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가서 꼭꼭 숨으라고 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 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카야는 그냥 저 숲속 깊은 곳, 야생 동물이 야생 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140) 하고 물으며 테이트에게 통나무집을 알려주었다.

카야가 카야답게 사는 곳이 통나무집일까? 위협을 느끼면 카야는 통나무집으로 도망쳤다. 사회복지사는 통나무집을 찾지 못한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 딱딱한 껍데기 안에 자신을 숨기는 곳에서 가재는 노래하지 않는다. 자기를 가두고 어떻게 노래한단 말인가!

이젠 강원도 삼척에서도 가재를 보기 어렵다. 가재를 찾으려면 사람이 없는 숲속 개울에 가야 한다. 등산로가 없는 곳, 상류에 배추밭과 고랭지 채소밭이 없는 곳이라야 한다. 가재가 곳곳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해도 사람에게 떠밀려 그럴 수 없다. 밀려난 곳에서 가재는 노래할 수 있을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도 불안이 스며든다. 누가 찾아오지 않을까 떨며, 밖으로 나갈 때도 조심조심 살펴야 하는 곳에서 가재가 노래할 수는 없다.

통나무집은 피하는 곳이다. 아버지에겐 습지의 집, 어머니에겐 이모의 집이 그랬다. 아버지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습지에 자신을 가두었다.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겁쟁이처럼 행동했는데 영웅 대접을 받았다. 겁쟁이 영웅은 모순이고, 모순된 삶은 분열을 일으켰다. 이 분열을 감당하지 못해 아버지는 피했다. 습지로 피했고, 술로 피했고, 폭력 뒤에 마음을 숨겼다.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다. 직면을 피하고 회피를 선택한 결과, 자기 자신에게서 절연되어 회복과 멀어졌다.

아버지는 병사가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 뒤로 진짜 자신을 마주할 때까지는 계속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산다. 그런 자신이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 이러지 말자고 숱하게 다짐했을 테지만, 혼자 있을 때 생각이 실제 관계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는 단절된 사람이었다. 자기를 잃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껍데기를 뒤집어쓴 모습이 곧 자기 자신이 된다. 자신을 새롭게 보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새로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을 새롭게 보도록 눈을 열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자기 껍데기에 갇혀버렸다.

엄마는 떠밀려 살았다. 남자 말만 듣고 따라나섰다가 속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안락한 곳에서 황폐한 곳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떨어져 습지로, 평안에서 불안으로 떠밀렸다. 아이를 다섯이나 낳을 동안 남편은 상처만 줬다. 예상치 못한 길을 걸어가며 줄곧 낙담했다. 불안이 엄마를 짓눌렀다. 아무도 없는 습지 한가운데에서 남편이 언제 주먹을 휘두를지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나날이 길어졌다. 불안은 마음을 갉아먹는다. 정신을 헤집어 놓는다. 소망이 사라지자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혀 달아났다. 새끼를 두고 떠나는 여우처럼. 가재가 노래하지 못하는 곳으로.

카야가 조디 오빠를 다시 만난 날,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 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 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 거야(295).” 카야의 생각이 바뀌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도 잔인무도한 행위가 일어나지만, 대를 이어 계속 살아간다고.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를 유전자 탓으로 돌리며, 가혹해 보이는 일이 엄마를 도망치게 했다고 받아들였다.

 

습지에 카야만 남았다. 엄마도, 아버지도 카야를 버리고 떠났다. 카야는 혼자 지내는 동안 내내,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상상력은 깊디깊은 외로움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46). 카야가 습지로 둘러싸인 곳, 아무도 없는 곳에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면서 외로움이 뿌리를 내렸다. 외로움이라는 절박함은 판단을 극단으로 내몬다. 닭과 오리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대상을 엄마라고 생각하고 따라다닌다. 카야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사람에게 전부를 걸었다. 테이트가 떠난 자리를 대신한 체이스에게 받은 상처를 테이트가 다시 치유하기까지 의심과 흔들림이 컸다.

체이스는 습지를 몰랐다. 바클리코브에 자신의 삶을 두고 카야를 만날 때만 습지에 왔다. 체이스에게 습지는 일탈의 장소, 숨 한 번 내쉬는 곳이었다. 고개 숙여 봤으면 습지에 어우러지는 수많은 생물을 봤을 테고 카야의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체이스에게 습지는 오가는 곳이었다. 카야도 잠깐 스쳐 지나가는 대상이었다. 체이스에게 카야는 영원한 사랑, 진실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겁쟁이 영웅 아버지 같은 사람을 또 만나다니…… 늪에 살던 최초의 인간에게 일어난 일, 여우에게 일어난 일이 카야에게도 일어났다. 그러나.

 

은혜는 생각지 않은 곳에 길을 낸다. 습지엔 생명이 있다. 테이트가 보았고, 카야를 살게 했던 생명이 가득하다. 정작 카야를 살린 건 카야가 매달렸던 체이스가 아니었다. 카야를 둘러싼 습지에 존재하는 생명이 카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끊어진 마음에 자리를 틀어잡은 외로움을 녹여버린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카야가 몰랐을 뿐.

카야가 분노할 때건 외로울 때건 기쁠 때나 슬플 때건 아랑곳하지 않고 기러기는 늘 카야를 둘러쌌다. 점핑은 카야가 다른 곳으로 뛰어오르게 도왔다. 메이플은 카야에게 달콤한 사람이었다. 샐리 캘페퍼 선생님은 카야의 일이 우연히 잘 풀리게(머피의 법칙과 반대인 샐리의 법칙, 보고도 모른 척) 해주었다. 싱글터리 부인은 카야 몰래 거스름 돈을 더 줬다. 부인의 친절과 웃음은 카야를 안심하게 했다. 톰 밀턴은 수컷 고양이처럼(톰의 뜻) 꼭 필요할 때 우연히 다가와 카야 곁을 지켰다.

카야는 통나무집으로 달아나지 않았다. 가족이 살았던 집에서 계속 살았다. 카야는 습지를 알고 느끼고 사랑한다. 습지가 바로 카야가 노래하는 곳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조상(할아버지)이 물려준 곳, 엄마가 그림 그리는 걸 알려준 곳, 테이트가 글씨를 알려준 곳이다. 카야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내밀었던 사람들이 카야를 자신으로 살아가게 했다. 습지에 은혜가 흐른다. 습지는 절연된 카야 자신이 사람들과 은혜로 연결되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습지는 외로움의 공간이며 친구를 만나는 공간이다. 내게도 습지가 있다. 내가 세운 목표를 이루고 노래하는 순간을 꿈꾸게 하는 곳은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면 가재는 홀로 노래해야 한다. 정말 자기만의 습지가 되고 만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 곁을 내주는 사람들과 함께 노래해야 한다. 책으로 만나, 삶을 나누는 모임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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