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거기 두고 쓰던 물건(볼펜, 자, 컵……) 위치를 바꾸었다. 손을 뻗었는데 없다. ‘어, 왜 여기 없지?’ 하다가 ‘아, 자리를 바꿨지!’ 한다. 잠시 뒤에 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아, 자리를 바꿨는데 참~’ 하며 멋쩍게 웃는다. 화가 나기도 한다. 생각이 몸을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몸이 생각을 움직인다. 우린 의지보다 습관에 따라 산다. 운동선수들은 몸이 기억할 때까지 연습한다. 그러면 생각할 겨를이 없는 찰나에도 몸이 반응한다. 습관이 의지를 이긴다.
팔다리가 절단된 뒤에도 환자는 팔다리에서 통증을 느낀다. 늘 거기 있던 팔다리가 사라진 걸 실제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없어진 팔다리가 가렵고 따갑고 아프다. 늘 곁에 있던 사람이 없어져도 비슷하다. 목소리가 들린다. “왔어?” 하며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픈데, 인사를 들은 느낌이 나서 더 아프다. 며칠 전에 가지치기하고 쉬다가 문득 ‘내가 먼저 죽으면 여긴 어떻게 될까? 나무와 풀을 볼 때마다 내 빈자리가 보일 테고, 가족이 환지통 비슷한 아픔을 느끼겠지!’ 생각했다. 작은 물건 하나 자리만 바뀌어도 몸이 착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얼마나 힘들까!
바움가트너는 애나와 헤어진 뒤에 주디스를 만났다. 주디스는 바움가트너와 달리 결혼할 마음이 없다. 바움가트너는 애나와 같은 집에 함께 살면서 둘 다 자유와 자기실현을 찾아낸 반면, 주디스는 신랄하고 허세가 심한 조 때문에 숨이 막히는 느낌으로 살았다(125). 주디스는 결혼에 환지통을 느낀다. 조와 지낸 결혼은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바움가트너는 결혼하고도 행복과 자유를 느끼겠지만, 주디스는 다르다. 주디스에게 결혼은 잘라낸 팔다리와 같다. 주디스는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했던 바움가트너를 만나 조와 보낸 세월에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걸로 만족한다. 그래도 결혼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습관이 의지를 이긴다.

『바움가트너』는 사고로 시작해서 사고로 끝난다. 두 사고는 다르다.
1장의 사고는 혼란스럽다. 애나를 잃고 혼란에 빠진 바움가트너는 일을 제대로 못 한다. 약속을 잊어서 전화를 안 하고, 약속을 기억해도 정신이 없어서 전화를 못 한다. 냄비를 태우고, 그 냄비에 손을 덴다. 약간 불그스름해질 뿐이었는데 마치 손가락이 잘린 듯한 분위기다. 지하실로 내려가다가 떨어진다. 정원은 엉망이다. 플로렌스 부인이 잘 정리하고 청소한 상태보다 바닥에 떨어진 냄비가 크게 보인다. 1장은 혼란 그 자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이렇게 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데 그대로가 아니다. 크게 데지 않은 손가락이 마치 잘린 것처럼 일상이 고통스럽다. 바움가트너는 플로렌스 부인을 시켜 아내 물건을 그대로 유지한다. 애나의 옷을 꺼내 개고, 다시 넣기를 되풀이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대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열차에 탄 아이(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들이 긴 세월 자신을 쫓아다닌 것처럼(149) 애나를 곁에 둔다. 그럴 수밖에 없다. 40(?)년 동안 사랑하며 함께 산 사람의 죽음을 툭 털어버릴 순 없다.
5장에는 타버린 냄비에 덴 것보다 큰 사고가 일어난다. 집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숲길에서 차가 나무를 들이받았다. 에어백이 터지지 않아 이마를 다쳤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바움가트너는 이마에서 피가 계속 흐르는 채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춥고 외딴곳에서 도움을 찾아 걷는다. 냄비에 손을 뎄을 때는 호들갑을 떨며 3~4분 동안 찬물에 손을 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흐르는 피를 쓱 닦고는, 통증도 느끼지 않고, 별일 아닌 것처럼 걷는다. 책은 마무리되었고, 집은 정리되었고, 지하실 계단도 멀쩡해졌다. 정원도 11년 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4장이 전환점이다. 1장의 혼란은 2장의 환지통으로 드러난다. 3장에서 주디스를 만나면서 13개월이 지나는 동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일으킨 참사에서 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구해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라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 빌어먹을 것을 그냥 내버려둬야 하며, 그러다 보면 마침내 그게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 거리감이 생기고, 그때 용기를 내 다시 집어 들면 마치 처음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202).”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 매몰되어 그것만 생각하면 늪이 돼버린다.
바움가트너는 글을 쓰다가 과거를 떠올린다. 가족 여행을 떠올리고 여동생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편지를 기억하고, 아버지가 미국에 정착한 과정을 생각한다. 할머니가 엄마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이해한다. 엄마의 삶을 생각하고 <스타니슬라프의 이리들>을 처리하고 나서야 다시 살게 된 마을을 생각한다. 또한 애나의 글을 정리하고 출판하면서 애나를 다시 마주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모두 서로 의지하고 있고 어떤 사람도, 심지어 가장 고립된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171).”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움가트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환지통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 읽을 때는 ‘재미없네. 너무 질질 끌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빨리 말하고 끝내지!’ 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책에 빠져들었다. 문장도 많이 보이고, 작가가 이끌어가는 구조도 보인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두 번 읽었기 때문이 아니다. 방학 동안 학교에서 물러나 거리를 두고 지내면서 내 처지가 달라졌다. 처음 읽었을 때 삼척 환지통을 앓았다. 시골 아이들이 그리웠다. 강릉지역, 학부모가 자녀를 위해 고른 학교, 1학년에겐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책을 읽기도 힘들었다.
바움가트너는 아팠다. 주디스도 아팠다. 바움가트너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팔다리 하나씩 끊어낸 채로 살았다. 고향, 꿈, 희망이 끊어졌고 가족을 끊어낸 사람도 있다. 너무 아플 때는 다른 사람의 아픔이 보이지 않는다. 방학 동안 쉬었다. 계속 쉬었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등장인물들의 아픔이 보였다.
<책 내용 요약>
1장. 혼란 : 전화 약속 잊음. 냄비 태우고 손 뎀. 애나 물건 그대로 둠. 계단에서 떨어짐. 검침원 상사에게 전화할 생각을 머릿속에 둠. 정원은 엉망.
2장. 환지통 : <환지통> 에세이 쓰기 시작. 애나를 회상함. 애도 상담사에게 비참 토로. 애나의 친구 프랭크 보일. 마호가니 책상, 타자기, 옷을 개고 다시 넣기, 전화 소리 꿈.
3장. 애나와 주디스 : 주디스 이야기 바움가트너에, 애나가 바움가트너와 결혼한 과정 글 <자연 발화>. 애나와 주디스 떠올림. 주디스가 바움가트너와 결혼하지 않는 이유
4장. 뿌리 찾기 : 13개월 뒤, 글 쓰다가 과거를 기억함. 가족 여행과 여동생, 지하철에서 아빠에게 맞은 아이, 아버지의 편지, 아버지 정착기, 어머니와 할머니. 여행기 <스타니슬라프의 이리들>
5장. 변화 : 책 마무리, 비어트릭스 코언. 책 정리, 집 고치기(지하실 계단), 정원 정리, 애나 작품 출판 계획. <운전대의 신비> 소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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