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 춘분입니다. 3월 21일이 춘분 아니냐고요? 맞아요. 올해는 2월이 29일까지 있는 해라 1년이 366일입니다. 춘분이 하루 일찍 왔어요.
아침에 창밖을 보니 헉~! 눈이 10cm는 왔네요. 눈이 그쳤다면 운전해서 출근하겠지만, 눈이 점점 더 많이 옵니다. 지금은 싸락눈이 쏟아져요. 함박눈은 살포시 내려서 슬며시 녹습니다. 겨울 함박눈은 많이 쌓이지만, 봄 함박눈은 그냥 녹아요. 싸락눈이 와다다다 떨어지면 바닥에 닿아도 녹지 않습니다. 싸락눈이 도로와 땅을 덮어버리면 이어서 함박눈이 내립니다. 눈으로 꽉꽉 다져서 급속도로 쌓입니다. 3월 20일 아침이 이런 상황이었어요.
등산화 신고 걸었습니다. 학교까지 3km, 40분쯤 걸립니다. 처음엔 차들이 저를 앞질러 갑니다. 2km쯤 가니 차들이 제 걸음과 비슷한 속도로 갑니다. 학교 앞 교차로에 오니 주차장입니다. 학교 앞이 살짝 오르막인데 차가 여기저기 미끄러지면서 오도 가도 못하네요. 아주 꽉꽉 막힙니다.
학교 버스가 9시 40분쯤 들어왔어요. 4명은 도로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열 명과 함께 책 읽고,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찾아내기 게임하고, 수학 덧셈과 뺄셈 문제를 풀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아이들과 운동장으로 나갔습니다. 남자아이들과 성을 쌓았습니다. 눈을 굴려 1m 정도 크기의 덩어리를 만들고, 덩어리 몇 개를 붙였어요. 성을 쌓으니 공격 본능이 솟구치나 봅니다. 싸울 대상을 찾아다닙니다.
“이제 선생님이랑 말 안 할 거예요!”
여자아이가 삐쳤어요.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왜? 왜 말 안 해?”
“남자애들만 해주고, 우리 도와준다고 해놓고는~”
“아하, 그렇구나! 이제 해주러 왔지. 그런데 진짜 말 안 할 거야?”
“말 안 할 거예요.”
“진짜?”
“진짜예요.”
“지금 나랑 말하고 있는데~”
그러자 입을 꾹 다뭅니다. 3학년 여자아이 삐침은 5분 가나요? 열심히 눈 미끄럼틀 만들어주니 재잘재잘 계속 이야기합니다.
“자, 타자. 1단계부터 3단계까지 있어. 1단계는 천천히, 2단계는 보통, 3단계는 빠른 거야. 손님 나와서 단계를 말하세요.”
“저는 2단계요!”
“네, 손님! 2단계 갑니다.”
눈 미끄럼틀 꼭대기에 누운 아이 다리를 높이 들게 한 뒤에 양쪽 신발을 모두 잡고 아래로 확 당겼습니다.
“우와~ 재미있다. 재미있어요. 이제 3단계 해주세요.”
“3단계는 빨라. 위험할 수도 있어. 자 눕고, 다리를 들고, 준비, 출발!”
“우와, 우와! 진짜 재미있어요.”
놀이터 미끄럼틀 길이의 1/3밖에 안 되는데도 이게 더 재미있습니다. 눈 미끄럼틀이니까요. 스무 번쯤 미끄럼틀 태워주니 팔이 아픕니다. 왼손으로 바꿨습니다. 왼손은 힘이 없어서 속도가 빠르지 않습니다. 다시 오른손으로 바꿔서 손님을 모십니다. 말 안 한다던 아이는 이미 제 편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한동안 미끄럼틀에 손님을 모셨습니다. 남자아이들을 눈 산성 위에 올라가게 한 뒤에 뛰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에니메이션 캐릭터 포즈인데 저는 잘 모릅니다. 나루토 뭐라 했는데 기억이 안 납니다.)
학교에 오지 못한 네 아이도 즐겁게 지냈겠지요. 제 기억에 남은 눈 추억이 있어요. 군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병무청에 가기 3일 전부터 눈이 왔습니다. 병무청에 가기 전날까지 180cm나 내렸습니다. 신호등 위에 눈이 쌓여 신호등이 부러졌지요. 지붕에서 소리가 나면 자다가도 지붕에 올라가 눈을 쳤습니다. 주택, 스케이트장, 창고도 많이 무너졌습니다.
2005년 3월 4일, 마읍분교에 부임하던 날 눈이 70cm 왔습니다. 산골짜기 한가운데 있는 분교여서 겨우 올라갔습니다.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길을 뚫고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나왔습니다. 잠깐 입학식하고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줬습니다. 2010년, 모교에 근무할 때 160cm가 왔어요. 2016년 소달초등학교 졸업식하던 날 130cm 왔던 눈도 기억납니다. 소달초에 있을 때는 4월 3일에도 눈이 왔지요. 날리는 정도가 아니라 운동장을 하얗게 덮었습니다.
눈이 오면 아이들이 신나지요. 다음날(3월 21일)도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놉니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눈 밟은 자국이 많이 남았습니다. 운동장이 여기저기 파인 것 같아요.
“선생님, 운동장이 바다 같아요.”
“그래? 어떻게 바다처럼 보이지?”
“그냥 바다 같잖아요.”
“너희 눈에는 눈 덮인 운동장이 바다처럼 보이는구나!”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눈이 많이 녹아 흙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심 먹으려고 손 씻으러 가는데
“선생님, 운동장이 갯벌이 됐어요!”
“우와, 시네. 눈이 오면 운동장이 바다가 돼요. 눈이 오면 운동장이 갯벌이 돼요.~”
눈이 아이들 마음에서 시를 길어냅니다. 마읍분교 6학년 남자아이가 3월 30일쯤 눈이 온 날에 시를 써왔습니다. 그 산골 마을이 눈에 선합니다.
봄눈 오는 날
6학년 배강길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떠보니
창밖으로 눈부신 햇빛이 내 얼굴을 비추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온 마을이 하얀옷으로 갈아입었다.
학교 가면서 나무를 보면 나무는
내가 보고 있는 게 부끄러운지 눈을 떨구어 버린다.
까마귀 한 마리가 눈에 젖어버린 자기 몸을
나무 꼭대기에서 파드득 떨고 있다.
까마귀는 나를 못 보았는지 이상한 짓까지 하며
자기 젖은 몸을 털고 있다.
이제야 나를 보았는지 바둥~바둥거리며 날아간다.
날아가다가 전깃줄에 앉아 젖은 몸을 다시 털고
저 산 너머로 날아간다.
갑작스러운 봄눈에 바쁜 아줌마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인사를 해도 들은체 만체 양동이를 들고 가버린다.
아줌마 얼굴은 발갛~발갛게 얼어있다.
학교에 오니 나무들도 트리처럼 반짝거리고
창가에는 구슬비 같은 눈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다.
반짝반짝 투명한 구슬 같다.
봄눈 오는 날엔 모두 변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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