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정 선생님 책 모임에 참여하고 싶었다. 너무 재미있어 보였다. 아이와, 어른과, 제자와, 학교에서, 집에서, 온라인에서, 아마 까페에서도 모이는 것 같았다. 아침 6시에 모이는 모임도 있고, 밤늦게 모이기도 하는 것 같다. 얼마나 재미있으면 시간,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않고 계속 모일까?
이 책은 <책 모임> 하라고 등 떠미는 책이다. <책 모임> 좋다고 말하고(1장), 책 모임을 어떻게 하는지 알려준다(2~3장).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모두 이끌어가는 큰 모임(4장)과 아이끼리 책으로 이야기하는 작은 모임(5장)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책 모임에서 궁금한 내용을 더 설명한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궁금하면 부록을 보면 된다. 책을 읽고 어떻게 질문할지 궁금하면 3~5장을 보면 된다. 무엇보다 책 곳곳에서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알려준다.
나도 독서동아리, 책 읽어주기, 독서 수업, 작가와의 만남 등 독서 활동을 많이 한다. 그러나 박미정 선생님 정도로 하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책 모임으로 학급을 이끈다. 인생에 책 모임뿐인 사람처럼 아이들과 책으로 모이고 모인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에 빠져들고, 책을 읽으며 자라고, 책 모임에서 이야기하며 건강해진다. 부럽다. 내 아이가 선생님 반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한다. 참 좋다.
박미정 선생님이 책 모임에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선생님이 책과 사람을 연결하며 계속 행복을 느끼기를 바란다.
나영상 선생님은 자신을 송곳이라 부른다. 할 말은 하는 사람. 나이, 직위, 분위기에 떠밀려 입 다물었다가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이 아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며 생각을 나누자고 한다. 참 좋은 태도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특히 학교에서 이런 태도로 지내면 불편한 일이 생긴다. 나영상 선생님은 모른 척하고 넘어가지 않는다. 나이와 경력, 직위나 관계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의논해보자고 한다.
이 책은 학교에서 지내며 겪은 일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썼다.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보자는 마음으로 다가가면서 겪은 이야기여서 ‘나와 너’의 생각 차이가 크게 드러난다. 책은 크게 교실 바로보기, 학교 바로보기, 세상 바라보기 꼭지로 썼다. 학생들 사이, 학생과 교사 사이, 교사들 사이, 교사와 주위 사람들(교장, 교감, 행정실, 급식소 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썼다.
내용이 새롭다. 저자가 자신만의 안목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믿고, 옆 반 선생님 눈치 보지 않고, 교장과 교감에게 주눅 들지 않는 생각이 좋았다. 30년 동안 나도 좀 남다른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며 ‘남다른 밝은 생각’을 만나 좋았다. ‘나는 이렇게 하지 못했는데~’ 하는 점이 많았다. 난 사람이 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혼자 놀았는데 선생님은 계속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고 차이가 도드라지면 불편할 텐데 선생님은 이를 배우는 기회, 조화를 이루는 기회로 삼았다. 참 좋다. 책을 읽으며 마음이 조금 더 열렸다. 추천한다.
→ 어떤 논리적인 이야기로도 학부모님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부모님의 시각을 결과보다 과정에 두도록 유도할 필요는 있다. 교육의 목표는 아이가 만든 결과가 아닌, 결과를 만드는 아이 자체이니까. (141~142)
배울 학(學) + 공훈, 가문 벌(閥) = 학벌(學閥). 학교, 학생, 학습에 쓰이는 낱말(學)과 족벌(族閥), 파벌(派閥), 재벌(財閥)에 쓰이는 한자가 더해지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가족이 세력을 이룬 족벌, 이해관계에 따라 세력을 이룬 파벌, 자본으로 세력을 이룬 재벌에 끼면 부와 권력을 누릴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배움과 파벌이라니? 이익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배움과 족벌이 나란히 붙었을까? 정말 좋은 학벌을 가지면 이익이 커질까?
지방 소도시에는 좋은 대학에 입학한 학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린다. 좋은 학벌을 갖게 되었다고 온 마을이 축하한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너도 열심히 노력해서 저렇게 돼라!’ 했다. 좋은 학벌을 갖추어야 한다는 당위 앞에서 학생들은 배움에 몰두했을까? 아니다. 경쟁에 몰두했다. 상대평가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험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을 길러야 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까?
『채용 대전환, 학벌 없는 시대가 온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리더로 꼽히는 일곱 명이 강연한 내용을 담았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들이 강사로 나섰다. 메가스터디 회장, 마이크로소프트 이사…… 이들은 학벌의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한다. 절대평가 체제에서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태도로는 새로운 시대에서 앞서나가지 못한다.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해서 개인의 능력으로는 시대를 이끌지 못한다. 서로 협력하고, 환경을 아끼며, 지금보다 앞으로 잘할 사람을 뽑는다.
기업은 이미 변화를 시작했다. 더 이상 능력을 자기 혼자 입증해 보이려는 사람을 채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홀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 기업에도 도움이 되었음을 자료를 통해 제시한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같다. 학벌과 스펙에 의존하는 채용은 좋은 인재를 가려내지 못한다. 면접과 역량 검사 등 사람의 역량을 확인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채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10년 안에 사교육이 사라질 수도 있다!. 학벌 체제에서 이익을 누린 사교육의 괴수(?)인 메가스터디 회장의 말이다. 경쟁을 독려하는 방식은 오히려 기업에게 방해가 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경쟁구조를 버리고 직업 평가 방식을 절대평가로 바꾸었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때부터 회사가 다시 살아났다. 옆자리 동료를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로 보는 관점, 함께 변화를 일으키자는 마음, 환경을 생각하고 생태계를 살리는 마음, 질문하고 새롭게 해보는 마음이 기업을 살렸다. 그렇다면 좋은 대학 가려는 노력 대신 무얼 해야 할까? 그래도 대학 이름이 중요하지 않나?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이런 대답이 들린다. “사회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느 대학 나왔는지가 여전히 중요하다.” “지금까지 한 건 뭐가 되나? 지금까지 좋은 대학에 가려고 투입한 노력은 누가 보상하나? 우릴 체제의 희생양으로 삼는 건가?”
공정성까지 따져가며 학벌을 옹호한다. “대학에서 배우는 게 중요한 것도 있다. 대학에서만 배워야 하는 내용이 있다.” 하며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학벌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 세력을 이룬 벌(閥)은 늘 자기들이 이룬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유지하려다 보니 변화에 적응하지 않았고, 새로운 시대에는 사라져버렸다. 재벌의 대표인 삼성도 직원 평가 방식을 상대평가에서 대부분 절대평가로 바꾸었다.
벌(閥)을 이룬 세력은 자기들 세력 이외의 무리에게 피해를 준다. 학벌은 소수의 특권층을 낳았고, 이는 국민 다수에게 피해를 주었다. 자기들 세력에 포함되지 않은 무리를 배제하는 방식은 다수에게 피해를 준다. 이런 방식은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름을 알아주는 대학 졸업생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다양한 개성의 인물이 나와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학생들, 청년들이 졸업한 대학 이름이 아니라 저마다의 독특한 능력에 따라 일하는 세상이 꼭 올 것이다. 『채용 대전환, 학벌없는 시대가 온다』를 읽고 생각을 바꾸면 좋겠다.
출간 6년 만에 150쇄를 찍은 책이다. 우리나라 독자는 이런 책을 참 좋아한다. 유명한 사람이 썼고, 성공을 이야기하는 자기 계발 서적 말이다. 우리나라 독자가 좋아하는 까닭이 하나 더 있다. 가장 똑똑한 무리(하버드,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생도와 졸업생 등)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를 자료로 내세운다. 이름난 작가와 학자의 실험 과정과 결과도 자료로 내세운다.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들, 전문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면 사람들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수많은 연구 결과와 면담, 설문 자료를 내세우며 계속 말한다. “그릿이 중요하다. 그릿을 가지면 성공한다.”
그릿은 열정과 집념이 있는 끈기, 투지를 말한다. 저자는 그릿이 성공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재능보다 그릿(노력)이 중요하다는 주장, 그릿은 고정된(타고난) 것이 아니라 성장한다는 주장, 그릿을 기를 수 있다는 주장에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책을 읽을수록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필요충분조건처럼 읽혔다. 저자가 면담하고 조사한 대상은 모두 그릿이 좋았다. 그렇다면 실패한 사람들을 면담하고 조사했다면 그릿이 좋지 않았다고 나올까? 저자가 그릿 대신 다른 조건을 주제로 내세우고 조사했다면 저자가 의도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성장을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로 내세우는 게 싫었다. 우승하고, 승진하고, 목표를 이루고 성취하면서 우리가 잃는 게 얼마나 많은지! 미국인 특유의 승리주의에 빠져 신음하는 지구, 소외된 이웃, 작고 약해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존재를 무시하는 오류에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그릿을 말하며 해보자고, 투지를 갖자고 말하려 한다. 시골 아이들에겐 성장을 도와주는 사람이 곁에 별로 없다. 부모가 곁에 있기만 해도 다행이지. 부모가 있어도 자녀의 성장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학교에 맡기고 학원에 맡기면 끝인 줄 안다. 시골 아이들에겐 해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무조건 노력하자는 게 아니라 한 단계 나아지기 위해 생각하고 노력하자는 저자의 말이 산골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책을 읽고 스스로 투지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면 도움이 되겠지만, 아이들에게 "투지를 가지면 성공한다. 너도 투지를 갖고 살아라!" 강요하면 효과가 없을 것 같다.
덤으로, 독서와 글쓰기와 토론 지도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읽었다. 자녀가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게 하려면 초기에는 격려해야 한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맞춤법을 잘 알거나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다. 그리고 토론에서는 무엇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 초기에는 초보자들이 관심사에 전념하고 싶은지 또는 관심을 끊고 싶은지 여전히 따져보는 중이므로 격려가 매우 중요하다. (151) : 독서, 글쓰기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 스펠링 비 대회 결선 진출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취미로 하는 독서는 의외로 효과가 없었다. 스펠링 비에 출전한 거의 모든 아이들이 언어에 관심이 있고 독서를 즐겼지만, 독서와 철자 맞히기 실력 간에는 어떤 관계도 발전되지 않았다. (175)
《온작품 읽기》,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한 학기 한 권 일기, 어떻게 할까?》, 김주환 외 《나의 책읽기 수업》, 송승훈
<알쓸신잡> 공주 편에서 김영하 소설가가, 자기 작품을 교과서에 싣지 말라고 했던 일화를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라고 쓴 작품을 일부만 잘라서 실을 바에는 싣지 않는 게 낫다고 한다. 부록에라도 작품 전체를 넣어, 전체를 읽고 이야기를 나눈 뒤에 에세이를 쓰는 수업을 추천한다. 특히 지문을 읽고 답을 찾지 말라고 한다. 작가가 생각하지 못하는 ‘작가의 의도’가 많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방식을 완전히 바꾸라는 뜻이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자기감정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학생들은 줄곧 작품의 일부를 읽고 작가의 의도, 등장인물의 마음, 공감하는 부분 찾기를 했다. 이 작품에서 낱말의 짜임을, 저 작품에서 문단 구성을, 다른 작품에서 인물의 마음을 배웠다. 조각난 글을 읽고 지식 조각을 배우기 때문에 작품이 삶에 이어지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몇몇 교사가 작품 전체를 학생들의 삶과 만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분들의 노력 덕분에 온작품 읽기, 통권 읽기 수업이 <한 학기 한 권 읽기>라는 이름으로 교육과정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한 학기 한 권 읽기의 목적과 의도를 모른 채 ‘더해진 수업’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온작품 읽기’,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다룬 책 중에 몇 권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책을 많이 읽는 다른 교사의 의견을 받아, 별 숫자로 반영했다.
★ 초등학교
『(이야기가 넘치는 교실) 온작품 읽기』,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 다섯 아이들이 작품의 가치를 온전하게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한 교사들이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시작되기 전에 전체 작품으로 수업했다. 『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독서토론』의 수업 버전 같다. 좋은 분들이 참 좋은 수업을 했다. 국내 작가의 작품을 많이 소개해서 좋다.
『한 학기 한 권 깊이 읽기에 빠지다』, 박정순 외, 초등 ★ 넷 반 실제 수업한 사례이고, 수업 내용도 좋다. 1장은 한 학기 한 권 읽기에 대한 설명이다. 교사가 관심 가질 내용을 간단하고 쉽게 썼다. 2장 동화책, 3장 그림책, 4장 동시집을 깊이 읽는 내용이다. 동화책과 그림책 내용은 아주 좋고, 동시집도 꽤 좋다. 다만, 학년별 추천도서에 어려운 책이 포함되어 아쉽다.
『초보자도 할 수 있는 온작품읽기』,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 셋 반 제목이 말해주듯 온작품읽기를 처음 시도해보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다. 전체의 2/3가 실제 교실 이야기다. 책 한 권으로 수업하는 이야기다. 내용이 쉬워서 초보자 눈높이에 맞겠다.
저자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학교, 학부모, 학생들의 상황을 고려한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교육과정이라 한다. 학생들의 삶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라고 한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넘어 책을 매개로 학생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학생들 간 서로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소개한 책 외에 다른 책도 꽤 있다. 내용을 참고하되 아이들의 독서 수준과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책 속에 나온 교실의 아이들은 몇 해에 걸쳐 꾸준히 온작품을 읽어 왔다. 긴 호흡으로 긴 글도 읽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아이들에게 큰 기대감을 가지고 적용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초등 책이 많다. 읽기에 대한 수업이니 책을 읽고 하면 좋겠다.
★ 중학교
『한 학기 한 권 읽기 어떻게 할까?』, 김주환 외, ★ 넷 반 서론, 수업 시간에 책 읽기, 시 경험 쓰기 수업, 서평 쓰기 수업, 청소년 문학상 선정 수업, 프로젝트 수업을 다루었다. 시 수업은 여행 가방에 시집을 가득 넣고 학생들에게 나눠주며 수업을 시작한다. 내용이 좋아서 초등 고학년과 해보고 싶다. 서평 쓰기는독서 활동의 꽃이라 불리지만 학생들이 힘들어한다. 줄거리 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잘 안내했다.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겠다. 청소년 문학상 프로젝트는 독서의 종합예술 같은 느낌이었다. 웬만한 애정 없이는 못하겠다. 독서 프로젝트 수업 내용에서는 선생님의 열정과 마음이 얼마나 큰지 보였다. 과목을 넘나드는 수업이라 다른 과목 선생님들과 협력해야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맺는 글’이다. <질문이 있는 독서를 위하여>라는 맺는 글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 고등학교
『나의 책 읽기 수업』, 송승훈, ★ 다섯 참 좋은 책을 만났고, 책을 읽으며 참 좋은 사람을 만났다. 1교시(수업 실패기), 2교시(학생들이 글쓰기까지 과정)는 내가 쓴 글을 읽는 것 같았다. 3-5교시(3-5장)는 배우고 싶은 내용이다. 선생님은 평가를 꼼꼼하게 한다. 수업을 촘촘하게 잘 짜되, 학생들에 대해서는 여유를 보인다. 본받고 싶다. 다른 교과의 독서교육 방법도 소개한다. 그런데 저자인 국어교사가 다른 과목 독서교육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놀랐다. 독서에 대해서는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아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는’ 게 아니라 학생들과 부딪치면서 알게 된 사람의 고백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독서교육의 목적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똑똑해지게 하려고 독서 수업을 한다. 또한 착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참 좋다.
이 책은 목차를 정하고, 하나, 둘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설명하는 말투로 썼다. 송승훈 선생님 말투나 표정, 몸짓을 안다면 책이 훨씬 생생하게 다가오겠다.
『한 학기 한 권 읽기』, 송승훈 외, ★ 넷 반 현직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업을 한 자료를 소개한다. 고등학생은 책을 읽고 자기 나름의 논평을 작성할 수 있다. 책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서평이다. 서평은 책과 나, 자신이 사는 세계를 나란히 놓는 일이다. 서평을 쓰려면 학생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주어야 한다. 송승훈 선생님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교사의 몫은 학생이 기웃거릴 책을 준비해서 펼쳐놓는 일이다. 책을 잘 읽는 학생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학생이 관심을 가질 책까지 준비해야 한다. 이건 기초를 놓는 일이다. 여러 사람의 수업 내용을 보여주어서 좋다.
자기만의 방식을 찾자.
나는 독서캠프,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업에서 학습지를 쓰지 않는다. 만들기도 안 한다. 이런 건 자신이 없다. 책 읽기 전에 아이들이 책에 관심을 갖게 꼬드기고, 같이 책을 읽고, 독서 놀이와 토론을 했다. 내가 잘하는 활동으로 수업했다. 책을 읽고 마음에 들면 그대로 따라 하라고 권한다. 그대로 하기 힘든 내용을 빼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활동(미술, 음악, 연극, 놀이, 운동 등)을 더해도 된다. 자신감을 갖고, 진짜 수업하는 맛을 누리기를 기대한다.
저는 아이들과 글을 씁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각을 사랑합니다. 어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밋밋하고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눈에 무채색인 세상에 자기만의 색깔을 입힙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새롭습니다. 감탄을 일으킵니다. 마음을 울리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이들 글 덕분에 다르게 생각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 보통의 어른과 다른 태도로 다가가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와 시각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많은 아이가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글을 쓴다고 해도 진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배우는 시는 내용을 잃고 형식이 앞섰습니다. 일기는 보여 주기 위해 꾸며 씁니다. 편지에는 마음이 없고, 독서 감상문에는 줄거리뿐입니다. 논술은 논리를 앞세워, 사려 깊은 고민이 사라졌습니다.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원래 아이들은 이렇지 않습니다.
일본 작가 하이타니 겐지로는 17년 동안 교사로 지내며 아이들과 글을 썼습니다. 저는 《난 선생님이 좋아요》에서 아이들에게 배우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태양의 아이》에서 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사랑하는 어른을 만났습니다. 《상냥한 수업》에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르침을 만났습니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상냥한 수업》에는 초등학교 우리 반 아이에게 읽어 주고 싶은 글, 독서반 중고등학생에게 읽어 주고 싶은 글이 많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저는 중학생 신분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는 한 달도 채 다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끔 결석을 했지만, 중학교는 한 달밖에 안 다녔다고 해도 될 정도로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 3년은 저에게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64쪽)
중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않은 아이가 쓴 글이 마음을 울립니다. “… 저는 너무 지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숙제를 해야 했습니다. … 공부 말고,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 우리보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들에게 배우고 싶은 것은 수학이나 영어만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 어리니까 앞으로 많은 벽에 부딪힐 테고, 어쩌면 산산조각이 나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벽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어른들에게 다시 배우고 싶습니다.”(65~66쪽)
너무 지쳐 학교를 떠나 버린 학생의 마음에 글이 있었습니다. 가게에서 껌을 훔치고 쓴 아이 마음에도, 집이 불 타 버린 아이 마음에도 글이 있습니다. 아이들 글을 보여 주는 선생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에 힘든 아이만 나오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존경하는 선생님의 수업, 저자의 수업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우라기 히데오 선생님 이야기를 읽으며 예전에 했던 다짐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만져 주고, 아이들이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게 만드는 수업을 꿈꿨습니다. 어느새 무뎌져 가는 마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상냥함에 대하여’란 수업은 제가 해 보고 싶은 딱 그런 수업이었습니다.
이 책은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만큼이나 좋은 책입니다. 선생님이 만났던 아이들 이야기를 해 주는데 따뜻하고 마음이 울렁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 서야지, 계속 아이들과 글을 써야지, 이 글은 아이들에게 읽어 줘야지, 이렇게 수업하고 싶다….’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잔잔하게, 소박하게, 그렇지만 따뜻하게, 울림을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분께 권합니다.
도서관, 우리 선생님
지금도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 독재자 아사드 정권이 다라야를 4년 동안 포위했습니다. 다라야는 사람도 물건도 드나들지 못하는 데다가 사린가스 공격을 받았습니다. 드럼통 폭탄이 떨어져 건물이 무너지고 주변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4년 동안 8,000개가 넘게 떨어진 폭탄을 피해 사람들이 지하로 스며들었습니다. 그곳에 갇힌 사람들이 무너진 폐허에서 건져낸 책을 모아 지하에 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독재자와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 사이에서 책을 모아 분류하고 라벨을 붙이고 지하에 정신의 보고를 세웁니다.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며 토론하고,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은 권력을 가진 독재자에 대항하여 정신으로 맞선 사람들이 보여 주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고립된 도시, 언제 어디에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처지에서 무얼 할까요? 먹을 것이 줄어들고, 환자는 늘어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저는 책을 읽을 겁니다. 우리를 죽이는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독재와 반대편에서 자기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이기는 방법은 ‘그들의 정신에 동의하지 않는 태도’, ‘총과 칼이 아니라 대화’, ‘나와 다르면 모두 적으로 여기는 태도를 벗어 버리게 만드는 토론과 나눔’입니다. 이걸 갖추게 해 주는 게 바로 책입니다.
아흐마드는 그렇게 소란한 가운데서도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서 수천 권의 책을 구해 내어 모든 주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곳에 모아 만든 ‘책으로 된 피난처’를 만들었습니다. 쉴 새 없이 퍼붓는 폭격에 대한 공포와 허기를 달래기 위해 책으로 만든 수프, 정신을 살찌우려고 미친 듯이 책을 읽습니다. 이 도서관은 포탄에 맞서는 그들만의 은밀한 요새, 대중 교육을 위한 무기였습니다.(13쪽)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친구 오마르는 병참선에 자신의 ‘작은 도서관’도 만듭니다. 모래주머니 뒤로 틈을 메워 완벽하게 정렬한 10여 권의 책으로 꾸민 도서관입니다. 폭탄이 잠잠해지면 책을 돌려 가며 읽습니다. (72쪽)
아흐마드와 다라야의 다른 운동가들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그리고 절망감으로 과격화하는 것을 막으려고 ‘혼돈’이라는 잡지를 만듭니다. 아이들과 여성들을 위한 이동도서관도 만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참호를 지킬 때도, 폭탄이 떨어지는 곳에서도 그들은 증오를 이겨 내는 책의 힘을 붙듭니다.
“살아남은 그는 책이 주는 유익함을 믿었다. 몸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고 해도, 마음의 상처를 달랠 권리는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단순한 행위가 아부에게는 엄청난 위로였다. 그것은 도서관을 세우면서 알게 된 감정이었다. 그는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좋았다.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며 훑어보는 것, 마침표와 쉼표 사이에 몰입하여 길을 잃는 것,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는 것.”
“책은 지배하지 않습니다. 책은 무언가를 선사해 주죠. 책은 거세하지 않습니다. 책은 성숙하게 합니다.”
언젠가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날이 올 때 그들이 읽은 책이 그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지배하기보다 선사하기를 원한 사람들, 적을 제거하지 않고 함께 성숙해지기 원한 사람들이 시리아를 다스리는 날이 꼭 올 것입니다.
글, 책, 이해와 공감
저는 아이들 글이 좋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여 줍니다. 그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기대하며 글을 씁니다. 또한 저는 책이 좋습니다.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 생각을 편하게 읽는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폭탄이 떨어지는 도시, 폐허가 된 곳 지하에서 책을 모으고 읽는 사람들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칼과 창, 탱크와 폭탄을 막으려면 더 강한 무기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상냥한 수업》과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꼭 읽어 보세요. 책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실 거예요.
『죽은 시인의 사회』, N. H. 클라인바움, 서교출판사 『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문학동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고 독서반 학생들과 토론했다. 영화로 성공한 이야기답게 재미있고 감동적이라고 좋아한다. “뻔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재미있다, 선생님이 떠나서 슬프다, 닐이 죽어서 안타깝다. 제목이 슬퍼 보였는데 내용은 그렇지 않다. 감동적이다.”라고 소감을 말한다. 책상 위에 올라가서 키팅을 배웅하는 마지막 장면을 읽을 때는 남학생들도 눈물 났다고 한다. 나도 감명 깊게 읽었다. 내가 교육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죽은 시인의 사회>가 영화로 개봉되었다. ‘Captain, my captain'을 부르며 좋은 교사를 꿈꾸었던 옛 일이 떠올랐다.
웰튼 아카데미는 명문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전쟁터와 같다. 부모, 교사, 학생 모두 대학 입학만 바라보며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린다. 무조건 강요하는 아버지 때문에 상처 받은 닐, 형과 비교당해서 힘들어하는 토드의 마음은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에 짓눌려 무시당한다. 부모의 강요, 형제나 친구와의 비교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이 얼마나 많던가! 대한민국 학교에는 자신이 시인이라는 걸 모르는 ‘죽은 시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키팅, 멋지기만 한 선생님!
키팅은 멋진 선생님이다. 학교에서 대세를 거스르기 어려운데 키팅은 소신껏 가르친다. 책을 찢고 시를 읊고 대학 입시와 관련 없는 일을 벌인다. 죽은 시인을 살려내려고 발버둥 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시를 읊고 운동장에서 국어 수업을 하다니…. 독서반 학생들에게 마음에 드는 시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교회 다니지 않는 고 1 남학생이 아래 시가 마음에 든다고 낭송했다.
성자들이 우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그가 와서……. 그대는 어린양의 피로 몸을 깨끗이 씻었는가?
문둥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따라가네. 진흙탕의 갈대와 뒷골목의 매춘부와 창백한 약물 중독자가 넘실대며 춤을 춘다. 정욕에 지친 사람들이여 영혼의 힘은 덧없이 약해진다……. 그대는 어린 양의 피로 몸을 깨끗이 씻었는가? (304~305쪽)
문둥이, 갈대, 매춘부, 약물 중독자, 정욕에 지친 사람들은 약자다.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병든 자, 가난한 자, 권력에 눌려 고통당하는 자들을 사랑했다. 어린 양인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으면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외쳤다. 문둥이, 매춘부, 약물 중독자, 정욕에 지친 사람들처럼 짓눌린 웰튼 아카데미 학생들을 키팅이 구해줄 수 있을까? 키팅의 생각에 동조하면 어린 양의 피로 몸을 씻고 구원 받을 수 있을까?
키팅과 학생들이 동굴에서 이 시를 읊고 있을 동안 닐이 집에서 자살한다. 키팅 과 친구들이 시를 읊는 장면과 닐이 자살하는 장면이 번갈아 나온다. 닐이 아버지에게 짓눌려 꿈이 꺾인 채 죽어갈 동안 키팅은 학생들과 분위기에 취해 시를 읊는다. 미국 영화는 대책 없이 감정을 자극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와 독서반 학생들 모두 이 책을 읽고 감동 받았지만 사실 키팅에게는 대책이 없다. 학생들 마음을 움직였지만 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새로운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반항심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끝난다.
20대에 나는 학교에서 나만의 동굴에서 아이들과 놀았다. 성적, 경쟁, 기한 내 업무처리, 형식과 절차... 무시했다. 추억을 많이 쌓으며 지냈기 때문에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대로 하라고 멍석 깔아줘도 못할 정도로 무모한 짓을 했다. 즐겁게 지냈지만 무얼 가르쳤는지 모르며 지낼 때가 많았다. 반항심과 허영심에 빠져 핵심을 놓쳤다. ‘옳지 않은 현실’에 반대하느라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 무얼 하며 살아갈까?’ 생각하지 못했다. 잘 가르치지도 못했다.
그때 그렇게 지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안다. 다른 반 아이들과 학부모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이 너무 많았다. 죽은 시인을 살려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나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대책 없는 선생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괴로워한 아이가 많았을 것이다. 마음만 앞세우지 말고 ‘가르침’을 남겨야 했다는 후회가 남는다.
<학교의 슬픔>에서 벗어나기
독서반 학생들에게 키팅에게 배울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절반 이상이 키팅에게 배우면 대학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배우지 않겠다고 한다. 학생들과 토론하기 전에 나는 키팅에게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생들도 키팅을 선택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키팅이 무얼 가르쳤을까?” 이야기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책을 읽고 감동 받아 눈물 흘리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다시 살펴보니 키팅은 잠깐의 추억만 남겨주고 쓸쓸하게 학교를 떠났다. 죽은 닐에 대한 쓰라림을 안고.
“죽은 시인의 사회는 선동, 자기만족, 고답주의(속세에 초연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사상이나 태도), 어리석음, 센티멘털리즘, 영화적 허술함과 지적 빈약함 등 차분하게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논쟁거리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도 고등학생들은 떼 지어 영화관으로 몰려갔고 만족스러운 얼굴들로 극장을 나섰다.” 다니엘 페낙이 <학교의 슬픔>에 쓴 글이다.
<학교의 슬픔>을 쓴 다니엘 페낙은 학습부진아였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말썽꾸러기였다. 키팅과 정반대인 교사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프랑스 대학 입학시험인 바깔로레아를 목표로 공부 시키는 교사를 만났다면? 페낙은 실제로 그런 선생님을 만났다. “수업에 완전하게 몰두하는 선생님의 현존은 단번에 감지된다.(159쪽)” 페낙은 학습부진아마저 수업에 몰두하게 만드는 교사를 만났다. 선생님은 두뇌를 자극하는 문장을 외우고 받아쓰기를 했다. 학생들이 동사와 형용사 변화에 빠져들게 만들어 페낙을 구해주었다.
페낙이 키팅을 만났다면 학습부진에서 벗어나 수업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글을 쓰고 책을 냈을 수도 있다. 페낙이 쓰는 독특한 문장과 톡톡 튀는 표현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장을 제대로 쓰고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대학에 꼭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낄낄대며 고민하게 만드는 페낙의 문장을 읽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겠지.
토론하면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만약 키팅이 수학 교사라면 무얼 했을까? 수의 아름다움을 시로 썼을까? 사회 교사나 과학 교사라면 어땠을까?” 영화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체능 교사, 국어 교사는 가능하지만 키팅을 수학과 과학 교사로 설정하면 낭만적인 요소가 확 줄어들 것이다. 영화는 ‘가르침’보다 ‘선동, 자기만족, 고답주의에 빠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센티멘털리즘’을 자극해야 성공한다. 키팅이 학생들 마음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무언가 가르쳤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키팅을 좋지 않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을 선동했다. 어리석은 낭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만족에 빠졌다. 고답주의에 빠져 현실을 무시하고 살았다. 학생들과 지내는 동안 추억을 쌓고, 마음을 나누며,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잘 가르쳐야 한다. 교사 경력 20년이 지나면서 비로소 ‘아, 내가 마음만 앞섰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구나!’ 생각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자극했어야 했다.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도와주려는 마음만 앞세우지 말고 실제로 도움을 주어야 했다. 마음으로는 죽은 시인을 살려 구름 위에 올려놓았지만 실제로는 공부를 힘들어하는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학생이 슬픔에서 벗어날까? 키팅처럼 학생들 마음을 사로잡고 현실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도와주어야겠다. 또한 학생들이 수업에 몰두하도록 인도하며, 공부를 힘들어하는 아이를 도와주어야겠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학교에서 슬퍼하는 아이들에게 빛이 되어주자.
도덕경은 5000여 자로 이루어진 81편의 시이다. 노자에 관한 이야기는 진실과 허구를 판가름하기 어려워서 노자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일 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도덕경에 쓰인 내용은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될 정도로 가치가 있다.
대학 때 노자의 시 한 문장을 참 좋아했다.
“진정한 지도자는 계획한 일이 잘 되었을 때 ‘우리가 함께 해냈다.’고 말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는 내용이다.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모습이 그려져서 좋아했다.
『가르침과 배움의 관점에서 새로 쓰는 도덕경』도 비슷한 내용이다. 내용이 참 좋다. 도덕경을 가르침과 배움의 관점에서 쓰고 짧게 해설을 달았다. 예를 들어보자.
도덕경 1장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를 “우리가 따르는 길은 영원한 길이 아니다. 우리가 붙인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로 해석했다. 그리고 “가르침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배움에도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라고 썼다. 이를 설명하며 “교사는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가르칠 때마다 무지의 영역을 깨뜨립니다. 그리하여 학생이 됩니다. 다시 배움의 길로 들어갑니다.~”라고 썼다.
도덕경을 옮긴 구절이 참 좋다. 맑고 깊다. 저자의 해설도 따뜻하다.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2020년에 노자 도덕경을 풀어 쓴 『배움의 도』를 읽었는데 그것보다 더 좋다. 교사와 학부모가 천천히 읽으면 좋겠다. 나도 모임에서 나누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