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N. H. 클라인바움, 서교출판사
『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문학동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고 독서반 학생들과 토론했다. 영화로 성공한 이야기답게 재미있고 감동적이라고 좋아한다. “뻔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재미있다, 선생님이 떠나서 슬프다, 닐이 죽어서 안타깝다. 제목이 슬퍼 보였는데 내용은 그렇지 않다. 감동적이다.”라고 소감을 말한다. 책상 위에 올라가서 키팅을 배웅하는 마지막 장면을 읽을 때는 남학생들도 눈물 났다고 한다. 나도 감명 깊게 읽었다. 내가 교육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죽은 시인의 사회>가 영화로 개봉되었다. ‘Captain, my captain'을 부르며 좋은 교사를 꿈꾸었던 옛 일이 떠올랐다.
웰튼 아카데미는 명문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전쟁터와 같다. 부모, 교사, 학생 모두 대학 입학만 바라보며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린다. 무조건 강요하는 아버지 때문에 상처 받은 닐, 형과 비교당해서 힘들어하는 토드의 마음은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에 짓눌려 무시당한다. 부모의 강요, 형제나 친구와의 비교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이 얼마나 많던가! 대한민국 학교에는 자신이 시인이라는 걸 모르는 ‘죽은 시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키팅, 멋지기만 한 선생님!
키팅은 멋진 선생님이다. 학교에서 대세를 거스르기 어려운데 키팅은 소신껏 가르친다. 책을 찢고 시를 읊고 대학 입시와 관련 없는 일을 벌인다. 죽은 시인을 살려내려고 발버둥 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시를 읊고 운동장에서 국어 수업을 하다니…. 독서반 학생들에게 마음에 드는 시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교회 다니지 않는 고 1 남학생이 아래 시가 마음에 든다고 낭송했다.
성자들이 우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그가 와서…….
그대는 어린양의 피로 몸을 깨끗이 씻었는가?
문둥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따라가네.
진흙탕의 갈대와
뒷골목의 매춘부와
창백한 약물 중독자가 넘실대며 춤을 춘다.
정욕에 지친 사람들이여
영혼의 힘은 덧없이 약해진다…….
그대는 어린 양의 피로 몸을 깨끗이 씻었는가? (304~305쪽)
문둥이, 갈대, 매춘부, 약물 중독자, 정욕에 지친 사람들은 약자다.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병든 자, 가난한 자, 권력에 눌려 고통당하는 자들을 사랑했다. 어린 양인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으면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외쳤다. 문둥이, 매춘부, 약물 중독자, 정욕에 지친 사람들처럼 짓눌린 웰튼 아카데미 학생들을 키팅이 구해줄 수 있을까? 키팅의 생각에 동조하면 어린 양의 피로 몸을 씻고 구원 받을 수 있을까?
키팅과 학생들이 동굴에서 이 시를 읊고 있을 동안 닐이 집에서 자살한다. 키팅 과 친구들이 시를 읊는 장면과 닐이 자살하는 장면이 번갈아 나온다. 닐이 아버지에게 짓눌려 꿈이 꺾인 채 죽어갈 동안 키팅은 학생들과 분위기에 취해 시를 읊는다. 미국 영화는 대책 없이 감정을 자극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와 독서반 학생들 모두 이 책을 읽고 감동 받았지만 사실 키팅에게는 대책이 없다. 학생들 마음을 움직였지만 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새로운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반항심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끝난다.
20대에 나는 학교에서 나만의 동굴에서 아이들과 놀았다. 성적, 경쟁, 기한 내 업무처리, 형식과 절차... 무시했다. 추억을 많이 쌓으며 지냈기 때문에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대로 하라고 멍석 깔아줘도 못할 정도로 무모한 짓을 했다. 즐겁게 지냈지만 무얼 가르쳤는지 모르며 지낼 때가 많았다. 반항심과 허영심에 빠져 핵심을 놓쳤다. ‘옳지 않은 현실’에 반대하느라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 무얼 하며 살아갈까?’ 생각하지 못했다. 잘 가르치지도 못했다.
그때 그렇게 지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안다. 다른 반 아이들과 학부모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이 너무 많았다. 죽은 시인을 살려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나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대책 없는 선생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괴로워한 아이가 많았을 것이다. 마음만 앞세우지 말고 ‘가르침’을 남겨야 했다는 후회가 남는다.
<학교의 슬픔>에서 벗어나기
독서반 학생들에게 키팅에게 배울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절반 이상이 키팅에게 배우면 대학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배우지 않겠다고 한다. 학생들과 토론하기 전에 나는 키팅에게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생들도 키팅을 선택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키팅이 무얼 가르쳤을까?” 이야기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책을 읽고 감동 받아 눈물 흘리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다시 살펴보니 키팅은 잠깐의 추억만 남겨주고 쓸쓸하게 학교를 떠났다. 죽은 닐에 대한 쓰라림을 안고.
“죽은 시인의 사회는 선동, 자기만족, 고답주의(속세에 초연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사상이나 태도), 어리석음, 센티멘털리즘, 영화적 허술함과 지적 빈약함 등 차분하게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논쟁거리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도 고등학생들은 떼 지어 영화관으로 몰려갔고 만족스러운 얼굴들로 극장을 나섰다.” 다니엘 페낙이 <학교의 슬픔>에 쓴 글이다.
<학교의 슬픔>을 쓴 다니엘 페낙은 학습부진아였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말썽꾸러기였다. 키팅과 정반대인 교사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프랑스 대학 입학시험인 바깔로레아를 목표로 공부 시키는 교사를 만났다면? 페낙은 실제로 그런 선생님을 만났다. “수업에 완전하게 몰두하는 선생님의 현존은 단번에 감지된다.(159쪽)” 페낙은 학습부진아마저 수업에 몰두하게 만드는 교사를 만났다. 선생님은 두뇌를 자극하는 문장을 외우고 받아쓰기를 했다. 학생들이 동사와 형용사 변화에 빠져들게 만들어 페낙을 구해주었다.
페낙이 키팅을 만났다면 학습부진에서 벗어나 수업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글을 쓰고 책을 냈을 수도 있다. 페낙이 쓰는 독특한 문장과 톡톡 튀는 표현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장을 제대로 쓰고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대학에 꼭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낄낄대며 고민하게 만드는 페낙의 문장을 읽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겠지.
토론하면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만약 키팅이 수학 교사라면 무얼 했을까? 수의 아름다움을 시로 썼을까? 사회 교사나 과학 교사라면 어땠을까?” 영화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체능 교사, 국어 교사는 가능하지만 키팅을 수학과 과학 교사로 설정하면 낭만적인 요소가 확 줄어들 것이다. 영화는 ‘가르침’보다 ‘선동, 자기만족, 고답주의에 빠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센티멘털리즘’을 자극해야 성공한다. 키팅이 학생들 마음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무언가 가르쳤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키팅을 좋지 않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을 선동했다. 어리석은 낭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만족에 빠졌다. 고답주의에 빠져 현실을 무시하고 살았다. 학생들과 지내는 동안 추억을 쌓고, 마음을 나누며,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잘 가르쳐야 한다. 교사 경력 20년이 지나면서 비로소 ‘아, 내가 마음만 앞섰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구나!’ 생각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자극했어야 했다.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도와주려는 마음만 앞세우지 말고 실제로 도움을 주어야 했다. 마음으로는 죽은 시인을 살려 구름 위에 올려놓았지만 실제로는 공부를 힘들어하는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학생이 슬픔에서 벗어날까? 키팅처럼 학생들 마음을 사로잡고 현실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도와주어야겠다. 또한 학생들이 수업에 몰두하도록 인도하며, 공부를 힘들어하는 아이를 도와주어야겠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학교에서 슬퍼하는 아이들에게 빛이 되어주자.
'내가 읽은 책 >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학기 한 권 읽기 (0) | 2023.01.23 |
---|---|
우리들의 선생님 (0) | 2022.05.29 |
가르침과 배움의 관점에서 새로 쓴 도덕경 (0) | 2022.01.28 |
중고등 시 쓰기, 소설 쓰기 (0) | 2021.11.28 |
평균의 종말 (5) | 2021.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