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동해 지역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독서 토론반을 했다. 1학기가 끝나갈 즈음 6학년 여학생이 전학 왔다. 5년 반 동안 동해의 북쪽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다니다가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두고 남쪽에 있는 우리 학교로 왔다. 북쪽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 실력이 낮다고 알려진 중학교에 가야 한다. 괜찮다고 알려진 중학교에 가기 위해 그동안 사귄 친구를 떠나 낯선 곳으로 왔다.
우리 학교에 오자마자 기말고사에서 월등한 점수로 1등을 했다. 말수가 적었다. 시간 날 때마다 공부를 했고 교육청 영재교실에 다녔다. 2학기에 독서 토론반에 들어왔을 때 공부만 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듣지만 말은 잘 하지 않아서 ‘원래 말수가 적은 아이구나!’ 생각했다. 『1940년 열두 살 동규』를 토론하면서 동규처럼 외로운 적이 있는지 물었다. 외로움을 말하는 도중에 1등 한 아이에게 물었다.
“넌 어때?”
“사람들이 공부 잘한다고……”
첫 마디도 끝내지 못하고 울었다. 나도, 아이들도 깜짝 놀랐다. 아무 말 없이 공부만 하는 아이가 주위의 기대를 부담스러워 하며 고민하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독서토론 끝나고 아이에게 친구가 생겼다. 외로워 힘들어하는 다른 아이와 함께 이야기하며 걸어갔다.
학교에서 독서반을 하던 학생들이 졸업하고 나서 계속 토론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일요일에 중고등 독서 토론반을 시작했다. 『딸들의 제국』을 토론할 때 몇 년 동안 독서반에 꾸준히 나온 학생이 전교 2등이라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지 처음 알았다.
“와! 너 공부 잘하는구나. 그런데 2등이 좋다니 무슨 말이야?”
“1등은 부담스러워요. 힘든 자리예요. 2등이 더 좋아요.”
몇 년 뒤에 전교 1등하는 다른 고등학생이 독서반에 왔다. 고2가 되더니 공부하기 싫다고 한다. 그냥 짜증나고 싫다고 한다. 엄마가 공부하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더 하기 싫어진다고 위로를 구한다. 이 학생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독서반에 들어왔다. 엄마가 논술에 도움이 된다고 보낸 모양이다. 다른 학생들이 의견을 말할 때 학생은 정답을 찾으려 했다. 1년 반쯤 지난 뒤에 갑자기 공부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독서반에 오래 다닌 학생들이
“그거 독서반 때문이야. 여기 오면 생각을 해야 돼. 왜 공부하는지 생각하면 암기만 하는 공부가 힘들어져! 너 이제 큰 일 났다.” 하며 웃었다.
무조건 달리기만 하면 안 된다.
대한민국 학생들은 대학을 향해 달린다. 성적이라는 줄에 옭아 매여 옴짝달싹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린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3년만 아무 생각하지 말고 달리자.” 하더니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중학교 3년도 달리라고 시킨다. 좋은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초등학교 6년도 달려야 하고, 결국 유치원 때부터 달려야 한다. 동화작가인 배유안이 앞만 보고 달리는 학생들에게 『스프링 벅』이라는 책으로 묻는다.
“아프리카에 사는 스프링벅이라는 양 이야기 아니?”
스프링벅이 평소에는 작은 무리로 평화롭게 지낸다. 계속 작은 무리로 지내면 평화가 유지된다. 그러나 풀을 뜯다가 큰 무리가 되면 이상한 행동습성을 보인다. 무리가 커지면 뒤쪽에서 따라가는 양들이 뜯어 먹을 풀이 없어진다. 그러면 앞으로 나아가서 풀을 뜯으려 한다. 다른 양들이 풀을 다 뜯기 전에 먼저 풀을 먹으려 한다. 무리가 움직이면 앞서 가는 양과 뒤처지는 양이 반드시 생긴다.
뒤처진 양들이 앞으로 가려하고, 앞선 양들이 뒤처지지 않으려고 하면 무리에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무리 전체의 속도가 서서히 빨라진다. 앞에 있는 양, 뒤처진 양 할 것 없이 모든 양들이 앞서 가려고 뛴다. 뛰는 속도가 기준을 넘으면 풀을 뜯어 먹겠다는 생각을 잊고 오로지 다른 양보다 앞서려고 한다. 한번 뛰기 시작한 수천 마리의 양은 멈추지 못한다. 전체 무리를 멈춰 세울 만한 장애물을 만날 때까지 계속 뛰기만 한다.
“계속 뛰어. 계속. 여기가 어딘지도 몰라. 풀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아. 그냥 뛰어야 해.(47쪽)”
우리 아이들 이야기이다. 힘들고 지쳐 쉬고 싶어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바로 스프링 벅이다. 앞서 가는 양은 따라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뒤따르는 양은 앞으로 치고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이상한 경쟁에 떠밀려 날마다 열두 시간 넘게 의자에 앉아 문제만 푸는 아이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면서 무얼 하고 싶을까? 뚜렷한 목표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학생들은
“공부 잘해?”
“그 성적으로 대학 가겠어?”는 당연하고
“넌 꿈이 뭐야?”도 듣기 싫어한다. 학생들이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 없어서 부모가 시키는 꿈을 쫓아간다. 돈 많이 벌기만 하면 꿈같은 건 없어도 된다고 한다. 꿈이 없는데도 자기소개서에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이러저러하게 노력했다고 쓴다.
강원도 시골 학생들이 도움 받을 곳이 없어 나한테 자기소개서를 갖고 왔다. 독서반 학생을 빼고 모두 그냥 열심히 했다고, 뽑아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썼다. 어떤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무얼 했느냐 물으니 그런 거 없다고 한다. 그냥 시키는 대로 공부만 했다고 대답한다. 안타깝다. 학생들은 왜 꿈을 꾸지 못했을까?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자기 이유를 찾아라.
경쟁에서 이기려고 쉼 없이 달리면 꿈을 꾸기 어렵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는 목적으로 앞만 보고 달리면 꿈이 보이지 않는다. 꿈을 꾸려면 쉬어야 한다. 잠에 깊이 빠져들면 꿈을 꾼다. 쉬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야 한다. 무얼 할 때 기쁜지, 무엇에 가슴이 뛰는지 알아야 꿈을 꾼다. 앞서 간다고 꿈에 한 발 가까이 가는 건 아니다.
독서반 학생들은 꿈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독서, 토론과 거리가 먼 꿈을 꾸면서도 일요일 아침마다 독서반에 나온다. 친구들이 문제를 풀 동안 책을 읽고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썼다. 왜 사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곳에서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토론했다. 친구들이 스프링 벅 무리에 섞여 앞만 보고 달리는 동안 ‘왜 뛰어야 할까? 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어디로 방향을 바꾸어야 할까?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면 어떨까?’를 고민했다.
내 딸이 고등학생이 되고 모의고사를 봤다. 전국에 있는 고1 학생들을 열 개의 등급으로 나눠 과목별로 몇 등급인지 적어놓았다. 모의고사 끝난 뒤에는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마음이 점점 복잡해졌다. 지금까지는 시험 기간에 편히 쉬며 놀았다. 그런데 이젠 그럴 수 없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친구를 이겨야 한다. 자유롭게 살아온 새를 새장에 가두고 “3년 동안은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 부르던 노래 그만 두고 새로운 노래를 부르도록 연습하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참아야 한다.” 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를 닦달하며 공부시키는 건 내 가치를 거스르는 행동이다. 지금까지 아이와 함께 추억을 쌓고 생각을 나누며 살아온 과정을 뒤집어야 한다. 대학이라는 필요는 아이를 기르면서 유지한 가치를 무시하고 내가 싫어하는 길을 가라고 강요한다. 한 번도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 않았는데 이제부터는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며, 아이가 공부하기 원하는 대한민국의 학부모가 되었다.
딸은 자기 속도로 공부하기 원했다. 친구들을 한 줄로 세우고 더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공부하는 건 싫다고 했다. 모의고사는 학교 석차를 알려주지 않아서 그나마 편안했지만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힘들어했다. 그래서 아이가 공부하기를 원하면서도 겉으로는 괜찮은 척, 공부 적당히 하라고 말했다. 시험 잘 치라고 스트레스 주지 않았지만 아이는 시험이라는 말만 들어도 싫어했다. 친구를 이겨야 하는 시험이라니~
“뛰어, 뛰어. 정신없이 뛰어.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해안 절벽에 다다르면…… 앗, 절벽! 하지만 못 서지. 수천 마리의 양 떼는 굉장한 속도로 달려왔기 때문에 앞에 바다가 나타났다고 해서 곧바로 멈출 수가 없는 거야. 가속도, 알지? 설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모두 바다에 뛰어들게 되는 거지. 그렇게 해서 한 번에 수천 마리의 양이 익사하는 사태도 발생한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 아니니?(47-48쪽)”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계속 꿈을 꾼다. 어제는 요리사가 되겠다던 아이가 오늘은 기술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농부, 선생님, 디자이너도 넘본다. 계속 꿈을 꾸는 게 귀엽고 멋지다. 얘들은 운동장에서 실컷 뛰고 나면 또 새로운 꿈을 꾼다. 경쟁하지 말고 누군 천천히, 누군 빨리, 자기만의 속도로 꿈을 꾸며 제 길을 걸어가면 좋겠다. 꿈이 계속 바뀌는 초등학생을 응원한다. 방황하는 중학생, 지친 고등학생도 응원한다. 모두 함께 쉬고 이야기하며 천천히 꿈을 꾸는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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