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으로 현장학습 가는 버스에서 엄마와 떨어져서 사는 세 아이와 번갈아 이야기했다. 민감한 내용이라 세 아이를 A, B, C로 소개한다.
A 옆에 앉았다. 늘 같이 앉는 친구가 의아해한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현장학습 가서 좋은지, 과자 사왔는지 하는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해도 되지만, 결국 엄마 없이 사는 게 어떤지 물어야 한다면 대놓고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연락해?”
A는 이혼한 뒤에 엄마를 한 번도 못 봤다. 아예 연락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멀어진 건 아빠인데 왜 자식에게도 연락을 끊었을까 생각하는데 의외의 대답이다.
“네. 카톡 해요.”
A는 엄마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깜짝 놀랐다. 고마웠다. 자주 하는 건 아니지만, 소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엄마와 메시지 주고받는 걸 아빠도 안다고 한다. 엄마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사진으로 본다고 한다. 아이 모습에서 그늘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성격이 밝아서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사랑받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빠가 잘 길러서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엄마가 아이를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가 엄마를 더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아이를 위해 엄마가 만나러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예 연락하지 않으면 이런 ‘어쩌면’ 들을 혼자 생각하며 슬픔에 빠져들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엄마와 연락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궁금할 때 물어볼 수 있으니까. 다행이다.
B는 엄마가 외국에 산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있는 나라로 돌아갔다. 두 분이 하시는 일이 많아서 엄마가 도와주어야 한다. 아이를 보러 오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엄마가 이렇게 말한 것 같기도 하다. B는 엄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라인이라는 앱으로 엄마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엄마가 사진을 보내줘서 엄마 얼굴을 본다고 했다. 엄마가 한국말을 잘해서 메시지를 자주 한다.
“엄마 보고 싶지 않아?”
메시지를 자주 주고받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다. 엄마가 바빠서 자기를 보러 오지 않는 걸 이해한다.
“그럼 어떻게 해? 엄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대학생 되면 엄마 만나러 갈 거예요.”
“그래. 대학생 되면 엄마 만나러 가야지. 만날 수 있을 거야.”
아이 얼굴은 슬퍼 보였지만, 마음에는 엄마를 만날 날을 기대하는 희망이 있었다. 아이와 엄마 이야기를 하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아이 핸드폰에 있고, 핸드폰을 통해 아이 마음에도 있으니까.
C는 엄마를 본 적이 없다. 엄마 이름도 모른다. 엄마가 국내에 있었는데 C는 엄마 나라로 가버린 줄 알았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소송이 이루어져서 아빠 가족이 엄마를 싫어했다. 아예 잊기를 바란 것 같다. 그래도 아이는 엄마를 계속 생각했다. 1학년 <가족>을 배울 때 교실에서 엄마를 불렀다. 겉으로는 밝아 보였지만, 사실 많이 힘들어했다. 1학년 때 하루는 갑자기 아팠다. 아이 뜻과 상관없이 전학을 가야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열이 나서 늘어졌다. 선생님이 아이를 돌보는 아빠 가족에게 엄마 이름이라도 알려줘야 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아빠 가족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엄마 만나러 갔어요.”
“그래? 엄마가 우리나라에 계셔?”
“네, 00시(경기도)에서 일해요.”
C는 엄마를 몇 번 만났다. 아빠가 3시간 운전해서 엄마가 사는 곳에 아이를 데려갔다. 같이 밥 먹고, 엄마가 C를 안고 침대에서 잔다. 아빠는 침대 아래에서 잔다. 아침을 같이 먹고 다시 3시간 차를 타고 돌아온다. 엄마가 아빠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헤어지자고 했는데 왜 아빠를 방에 다시 들였을까? 아이 때문이겠지.
C가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빠와 엄마가 왜 떨어져서 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래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지난 주말(6월 29일)에는 엄마가 친구들과 삼척에 왔다. 호텔에 방을 잡고 아이를 불렀다. 맛있는 걸 사주고 같이 지냈다. 그 이야기를 써서 내게 보여주었다.
엄마에 관해 묻지 않았다면 엄마가 외국에 살아서 아이를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설프게 동정하진 않았겠지만, 섣불리 판단했을 수도 있다. 아이는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지내지 못했다. 과거에 엄마는 아이를 떠났다. C는 아빠와 살지도 못했다. C를 돌보던 어른들이 계속 바뀌었다.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엄마에 관해 묻지 않았다면, 아이가 엄마를 만나는 줄 몰랐다면 난 이걸 마음에 품고 ‘난 너를 떠나지 않아’ 하며 힘주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1년 가르치는 교사가 아이를 오랫동안 책임질 것처럼 다가갔을 수도 있다. 글쎄~ 이건 사랑이 아니라 선을 넘는 오버일 수도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손을 씻으러 간다. A는 큰 목소리로 친구와 떠든다. B는 옆에 와서 슬며시 손을 잡는다.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는데 이제는 먼저 손을 내민다. C는 친한 친구와 느릿느릿 움직인다. 갑자기 안기기도 한다. 다같이 식당에 앉아 밥을 먹는다. 사랑스럽다. 떠드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슬며시 손잡는 아이가 사랑스럽다. 친구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데 눈치 없이 늦게 와서 안기는 아이도 사랑스럽다. 세 아이가 행복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