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잉타이는 대만의 국민작가다.
인생 3부작으로 알려진 <아이야, 천천히 가렴>, <사랑하는 안드레아>, <눈으로 하는 작별>을 썼다.
이 중에 두 권을 소개한다.

<사랑하는 안드레아>는 2016년 1월 Thanksbook에 실린 책소개 글이다.
<눈으로 하는 작별>은 2016년 9월 월간 좋은교사에 실린 책소개 글이다.

그땐 그랬지, 지금은 안 그래요.
(사랑하는 안드레아, 양철북)

그땐 그랬지!”

그땐 그랬지!” 하면 어떤 추억이 떠오를까? 625나 가난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중요한 시험에 합격한 순간이나 성공한 기억, 어릴 적 친구들과 놀던 일을 떠올리기도 하겠다. 2016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 학생들은 무얼 추억으로 떠올릴까?

지난해 10월에 학부모와 함께 울릉도에 현장체험학습을 다녀왔다. 전교생 10명이 엄마, 아빠, 선생님과 울릉도에 가서 시내버스 타고 다녔다. 내수산 전망대에서 삼선암 쪽으로 3시간 동안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지나가는 봉고차를 얻어 탔는데 어쩌다 보니 봉고차 한 대에 22명이 가득 탔다. 봉고차 안에 쭈그리고, 허리 숙이고, 끌어안고 낑낑대면서도 다들 웃었다.

다음날에는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히치하이킹으로 세웠다.
아니, 내가 손을 들면 한 번도 차가 서지 않던데 선생님은 손만 들면 차가 서네요.”

이렇게 말하는 아빠는 얼굴이 무섭게 생겼다. 뭐라 말하기 어려워서 그러게요.’ 하며 웃었다. 관광업체와 계약하지 않고 다녔기 때문에 많이 걷고, 지루하게 시내버스 기다리기도 했다. 땀 흘리고 헉헉대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 않는 건데……하던 학부모들이 돌아오는 길에 내년에 다시 가자고 한다. 고생 많이 해도 하루만 지나면 추억이 되나 보다. 힘들었기 때문에 더 소중한 추억!!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무얼 추억으로 간직할까? 30년 뒤에 무얼 떠올리며 그땐 그랬지!”라 할까? “그땐 ○○○ 게임을 했지!”라고 하진 않겠지! 학원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다고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시 아이들이 무얼 추억으로 간직할지 모르겠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사는데도 도시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기 때문일까?

 

“지금은 안 그래요.”

공간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만든다. 사는 곳이 다르면 생각이 다르다. 시골에 사는 아이와 도시에 사는 아이는 생각이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공간의 차이가 줄어들었다. 옛날에는 서울 가면 코 베어간다고 했지만 지금은 시골 사람이 더 약았다고 한다. 시골에서도 인터넷 활용해서 공간의 차이를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시간의 차이는 어떨까? 30년 전을 추억으로 간직한 부모와 지금을 추억으로 간직할 자녀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30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생각의 차이를 좁힐 수 있을까? 어렵다. 변화가 느린 시대, 부모와 자녀가 비슷하게 살았던 고대 사회에도 세대 차이가 존재했다. 기원전 1700년 경 수메르 시대에 쓰인 점토판에 요즘 젊은 것들 버릇이 없다.” 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은 자신이 겪은 일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부모는 그때겪은 일, 30년 전에 생긴 가치관으로 판단한다. ‘그때를 모르는 자녀는 지금은 안 그래요.” 라고 말한다. 당연히 차이가 생긴다. 부모는 자녀가 철이 없다, 버릇이 없다고 한다. 자녀들은 부모 세대를 고리타분하다, 말이 안 통한다고 한다. “그땐 그랬지.”지금은 안 그래요.”의 차이가 어찌나 큰지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으르렁대게 만든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에게라고 편지를 시작하면 어떤 내용을 쓸까? 공부 열심히 하고 건강해라, 항상 최선을 다하고 행복해라, 게임 그만하고 성공하라고 쓸까? 부모는 자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성공하기 원한다. 이를 위해 게임 그만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 말을 듣지 않는다.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을 즐긴다. 미래보다 현재의 즐거움을 더 좋아한다.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지금 행복하기 원한다. 부모 속을 긁어댄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기 힘들다.

룽잉타이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1986-1999) 독일에 갔다. 대만 문화국장 일을 하기 위해 독일을 떠날 때 아들 안드레아는 14살이었다. 문화국장 일을 끝내고 홍콩에 건너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안드레아는 18살이 되었다. 4년 동안 떨어져 지낸 아들은 와인 잔을 들고 차갑게엄마를 바라보았다. 아들은 담배를 피우고, 엄마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자기는 엄마의 사랑스런 아들 안안(어릴 때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고 말했다.

엄마 룽잉타이는 안안을 잃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들 안드레아를 영영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들을 알아가려면 잘 지내니? 밥은 먹었니?”만 물을 수는 없다. 엄마가 어릴 때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내세워서, 아들을 엄마의 그림자에 가두어도 안 된다. 서로를 이해하려면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야 한다.

사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큼 불편한 상대가 어디 있으랴!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오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미워하기 싫어서, 더 멀어지지 않으려고, 가까이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또 실망하고 더 미워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민감한 이야기를 피하고, 서로의 솔직한 생각을 알면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진실한 사랑만이 두려움을 이긴다. 그래서 어렵다.

 

천천히 생각을 나누면서

편지는 느린 방식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면서 편지가 그땐 그랬지의 대상이 돼버렸다. 전화하거나 만나면 될 일을 굳이 편지로 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빠르게 지나가면 깊이 보지 못한다. 한 번 해버린 말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하기 어렵다.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가까이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했다.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면 조금씩 덧붙여져서 뜻이 바뀌기 쉽다. 편지는 내용이 그대로 남는다. 오해하지는 않았는지, 편지 쓴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다시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

편지를 쓰는 자체도 어렵지만 30년간의 시간 차이도 부모와 자녀를 가로막는다. 부모와 자녀가 안부편지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니 얼마나 힘들까! 편지에는 감정 대립, 논리 싸움이 계속 이어진다. 그래도 룽잉타이와 안드레아는 3년 동안 꾸준히 편지를 썼다. 신문에 칼럼을 내면서 원고료를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모와 아들이 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귀하지만 둘이 편지에서 나눈 내용이 더 귀하다. 개인 일상이야 당연히 나누겠지만 홍콩, 대만, 독일, 싱가포르에서 일어난 이슈로 논리 싸움을 벌인다.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편지가 가치관, 문화, 취미, 인생의 목표에 대한 대화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부모와 자녀의 세대 차이, 독일에서 자란 사람과 대만에서 자란 사람의 문화 차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극복해간다. 우리나라 18살이 이런 생각을 할까 싶다. 교수이며 문화부 장관이었던 사람의 생각이 깊은 거야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18, 여전히 부모를 의지하는 나이인데도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통찰을 보여준다.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읽었다.

둘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는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룽잉타이와 안드레아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대의 생각을 확인하고 이해한다. 아들이 엄마처럼, 엄마가 아들처럼 되지는 않지만 어느 부분에서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하며 받아들인다. 게다가 신문에 낸 칼럼을 읽고 독자들이 보낸 편지가 균형을 더한다. 대만과 독일의 차이를 넘어서서 세계적인 시각으로 균형을 잡아가게 돕는다.

부모와 자녀 세대가 지금처럼 멀어진 적이 있을까! 앞으로는 얼마나 더 멀어질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 자녀가 부모를 좋아하는 마음만큼 서로를 이해하면 삶이 얼마나 풍성해질까! 부모와 자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길을 가면서 이야기하면 좋겠다. 정치 색깔이 다르다고 비난하지 말고,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며 대화하는 국민이 많아지면 좋겠다.

 

일상, 인생, 떠나보냄

눈으로 하는 작별, 룽잉타이, 양철북, 327쪽

어떤 이별은 견디기 어렵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온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한다. 누군 키가 좀 컸고 누군 얼굴이 까매졌다. 건강해 보인다. ‘, 누가 안 보인다. 어떻게 된 거지?’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하나가 2학기 개학식 날 학교에 오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하는 싸움도 한 번 하지 않던 착한 친구였다. 산딸기를 큰 통에 가득 따와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좋은 친구였다. 친구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개학하고 들었다. 여름 내내 공부만 하다가 한 번 가족과 함께 놀러 갔는데 돌아오지 못했다. 조용한 친구였기 때문일까, 나와 그리 친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놀라긴 했지만 슬프진 않았다. 슬픔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슬픔을 몰랐다. 친척 형들과 놀기만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슬펐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제자를 잃었을 때는 많이 울었다. 나와 마음이 통했던 교회 형이 하나님 곁으로 갔을 때는 통곡했다. 어떤 이별은 무덤덤하다. 그리고 어떤 이별은 견디기 어렵다.

교사가 된 뒤에 아이들과 22번 헤어졌다. 전담교사로 헤어질 때는 그리 슬프지 않았다. 담임으로 만난 아이들과 헤어져도 같은 학교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때는 슬프지 않았다. 아쉽고 허전하고 때론 시원섭섭했지만 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아이들을 어디서 다시 만날까!’ 했던 때도 같은 학교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슬픈 이별을 생각하지 않았다.

금요일에 헤어지면서 우는 아이는 없다. 월요일에 다시 만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금요일에 헤어지고 월요일에 만나고, 다시 헤어지고 만나고 하면 방학 동안 헤어져도 이별을 힘들어하지 않는다. 다시 만날 테니까. 그러나 언젠가 진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온다.

엄마, 또 올게요.” “아빠, 설날에 내려올게요.”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되풀이하면 다음에 또 만날 거라 생각한다. 부모님이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만남을 미루기도 한다. 그러다가 덜컥 다시 만나지 못할 형편이 되면 그 사람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떨까? 이별을 미리 준비해도 슬픔을 견디기 어려운데 준비하지 못한 이별을 만나면 너무 힘들다.

 

눈으로 하는 작별

눈으로 하는 작별20162월호에 소개한 사랑하는 안드레아의 저자인 대만 작가 룽잉타이가 썼다. 책에는 가족, 일상, 인생 그리고 떠나보냄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아버지가 늙어 가면서 점점 움직임이 줄어들고 자녀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느낀 마음을 에세이로 썼다. 비슷한 종류의 다른 책처럼 다시 만나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매달려 아버지 이야기만 계속 늘어놓지는 않았다. 어릴 적 추억과 풍경, 부모님의 사소한 습관을 기억하며 늙음과 죽음이 무엇인지 적었다. 책을 읽으며 크게 3가지를 느꼈다.

첫째, 룽잉타이가 부러웠다. 사랑하는 안드레아에서도 보여준 바 있듯이 룽잉타이는 보는 눈이 다르다. 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보고도 보통 사람과 다른 생각을 펼쳐낸다. 나는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앞부분을 읽으면 작가가 무엇을 말하는지, 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하지만 룽잉타이의 생각은 거의 읽어내지 못했다. 작가가 펼쳐놓은 오묘한 이야기에 스르륵 빠져버렸다. 에세이 하나하나 모두 맛깔나고 색달라서 줄거리를 어떻게 요약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미에는 비나무가 있다. 비나무는 큰 종처럼 커다랗고 둥글게 생겼는데,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가 삼십 미터나 된다. 나뭇잎이 그토록 무성하고 빽빽한데도 비나무 밑에서는 작은 풀도 잘 자란다. 날이 흐리거나 어두워지면 비나무의 가는 잎이 오므라들면서 잎 사이로 비가 그대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형제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선로라기보다는 한 그루 비나무에 달린 가지나 잎이 아닐까. 비록 삼십 미터나 떨어져 있지만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고, 밤에는 잎을 오므리고 땅바닥으로 곧장 떨어지는 비를 함께 보면서, 나무와 비와 함께 늙어가는 것이다. 어찌 아니 좋겠는가! (61)

게다가 룽잉타이는 박학다식하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참 많다. 지뢰, 홍콩의 역사와 문화, 한 번도 듣지 못한 작가와 시인, 우리나라 이야기도 나온다. 사랑하는 안드레아를 읽을 때는 처음이라 놀랐는데 이번에도 깜짝 놀랐다. 일상에서 겪은 평범한 일에 낯선 이야기를 엮어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비나무에 대한 글이 마음에 남았다. 약간 길지만 소개한다.

둘째, 대만 국민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 대만은 공산당(모택동)과의 싸움에 밀린 국민당(장개석)이 본토에서 쫓겨나와 세운 나라라고 알고 있었다. 본토에서 쫓겨난 아픔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이산가족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본성인(2차 세계대전 이전에 대만에 들어와 살고 있던 중국인)과 외성인(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에게 패해 국민당과 함께 온 사람들) 사이에 생긴 갈등의 골도 상당히 깊다는 걸 알았다. 둘은 정치 성향까지 정반대여서 여당과 야당으로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지뢰 조심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 대만의 진먼이라는 섬을 소개하고 있다. 진먼은 대만보다 중국에 가까운 대만 영토이다. 청일전쟁 때 평양이 불바다가 되었던 것처럼 대만과 중국 사이에 있다는 것만으로 폭탄 세례를 받았던 섬이다. 이 섬은 1958년 가을, 44일 동안 47만 발의 폭탄을 받아야 했다. 그 후로도 사십 년 동안 전투지역으로 봉쇄되면서 수많은 지뢰를 묻었다. 지금은 관광객이 가기도 하지만 모래사장을 뛰어다닐 수도, 숲에서 열매를 딸 수도, 바닷물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칠 수도 없다. 지뢰가 어디에,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모택동 군대의 공격을 피해 대만에 정착한 사람들이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이 꼭 우리가 625 이후에 겪은 이야기 같다. 이웃이 한순간에 폭탄으로 사라지고, 내 편 네 편 나뉘어 서로를 죽이는 곳에서 겨우 견뎠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진먼 역사 기념관의 그림 속 얼굴을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꾸면 거기나 우리나 서로 비슷하다. 대만 사람이라면 우리가 겪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룽잉타이가 부모에게 정말 잘한다. 내가 아들이라서 그런가, 딸은 다 이렇게 애틋한가 싶다. 딸이 엄마에게 애틋한 건 이해하지만 아버지에게도 이런 마음을 가지다니 놀랍다. 더구나 룽잉타이는 문화부 장관으로 바쁘게 일하는 중에도 자주 아버지를 찾은 것 같다. 골목 사이에 숨은 작은 가게에서 아버지가 예전에 입던 양모 조끼, 모직 외투, 털실로 짠 장갑에 천 신발을 구해서 아버지에게 입혀 드린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을 구해 드리는 게 효도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두 장면은 이렇다. 룽잉타이가 걷는 법을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아빠 손을 붙잡고 아빠가 들려주던 시조를 읊으며 한 발 두 발 걷기 연습을 시킨다. “해는, 서산에, 기대어, 지려하고……한 발 한 발 내딛으며 황하는, 바다로, 흐을러, 가안다……방향 바꿔서~ (303~304) 두 번째는 할아버지 말문을 트게 하면 상금을 주겠다며 아이들을 꼬드기는 장면이다. 아이들이 할아버지에게 고향, 엄마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침묵을 깨고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해준다.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죄송하다고 우는 할아버지 모습을 손자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시조까지 배웠으니 최고의 효도를 한 셈이다.

 

어떤 이별은 정말 슬프다

아이들과 헤어지면서 엉엉 운 적이 있다.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아픔을 글로 쓰고, 아픔을 치유해주려고 더 많이 사랑했다. 나이가 더 들어 추억을 곱씹는 즐거움으로 살아갈 때가 되면 아이들을 많이 보고 싶을 것 같다. 그때 아이들과 함께 모여 옛날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나는 비나무 기둥이 되고 아이들이 삼십 미터나 되는 가지가 되어 함께 늙어 가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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