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살림, 535쪽
『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베크만, 다산책방, 451쪽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면 얼마만큼의 위로가 있어야 할까?
괴테와 실러의 도시로 알려진 독일 동부의 바이마르. 괴테는 이곳을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바이마르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한 곳 있다. 바로 나치가 1937년에 건설한 ‘부헨발트 수용소’이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무대이기도 했고 본 회퍼가 잠시 수용되었던 곳이다. 관리소장의 아내 엘자 코흐는 부헨발트의 마녀로 유명했다. 유대인들의 피부에 새겨진 문신을 오려내어 기념품으로 만드는 게 취미였던 잔인한 여자였다.
독일을 여행하면서 일부러 이곳을 찾았다. “사람은 죗값을 치른다.”고 적혀있는 정문을 지나 줄지어 이어진 수용소 터에 들어서면 온갖 생각이 든다. 아내와 아이들은 화장장을 보고는 더 이상 못 보겠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체를 쌓아두던 곳, 가스로 사람을 죽이던 곳, 유대인들 신발과 물건을 전시한 곳, 생체실험의 증거자료를 보여주는 곳을 다니며 이곳에서 포로들이 느꼈을 공포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면 머리가 하얘졌다.
수용소 한가운데 지름이 거의 1미터쯤 되는 참나무가 밑동이 잘린 채 남아있다. 나무 위에는 돌이 수북이 쌓여있다. 나치가 수용소를 만들 때 모든 나무를 베어버렸지만 이 나무만은 베어내지 않았다. 나무 아래에서 괴테가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삭막한 수용소 한가운데 서있는 나무는 포로들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언젠가 푸르른 나무 아래에서 평화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오리라는 희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괴테의 참나무’는 1944년 8월 연합군 비행기가 투하한 폭탄에 맞아 죽고 말았다. 나치에게 잡혀온 포로들을 위로하던 나무를 연합군이 죽였으니 묘하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며 올려놓은 돌이 그때의 기억을 지금도 전하고 있다.
자살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뮌헨에 있는 다하우 수용소와 바이마르의 부헨발트에서 본 장면은 충격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똑똑히 보았다. 내가 만약 이곳에 잡혀왔다면 ‘오늘만 살아남자’는 생각 외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 같다. 팔다리를 동상에 걸리게 했다가 뜨거운 곳에 옮기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실험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스스로 죽기도 힘들었다. 나치가 죽이기 전에는 죽는 권리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포로들에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자살을 살인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나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조금씩 자살하는 사람이 이해가 되었다. 이러다가 어쩔 수 없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조조 모예스는 어쩔 수 없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미 비포 유>의 주인공 윌 트레이너는 잘생기고 멋진 억만장자이다. 유능하고 활발하며 승승장구하는 젊은 사업가였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온갖 스포츠를 즐겼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악이라 생각하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살았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사지마비 환자가 되어 간병인의 돌봄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었다. 대소변을 튜브로 받아내야 하고, 체온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다. 갑자기 찾아온 통증 때문에 발작하고 합병증에 시달린다. 결정적으로 현대 의학으로는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윌은 제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윌의 부모는 윌에게 6개월의 말미를 주며 새로운 간병인을 구한다. 미스 클라크는 윌이 죽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돈을 벌기 위해 간병인이 되었다. 이미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까칠한 환자(윌)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클라크는 윌을 도와주려 애쓰지만 오히려 윌에게 새로운 삶을 도전해보라고 떠밀린다. 그런데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가 뒤통수를 쳤다. 535쪽이나 되는 긴 이야기를 단숨에 읽게 만들었다. <앵무새 죽이기>만큼 재미있고, 이상하게 따뜻한 이야기였다. 교사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자살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에 대해 토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오베라는 남자
오베도 자살하고 싶어 한다. 오베는 까칠함의 극치를 달리는 아저씨다. 유대인의 율법을 모르지만 바리새인과 다름없다. 규칙을 정확하게 지키는 즐거움 외에 아무 기쁨이 없는 사람 같다. 오베는 날마다 정한 시간에 일어난다. 정확하게 따른 분량의 커피를 마시고, 거주 지역 내에 자동차가 들어오는지 확인하며 시찰한다. 밤사이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든 차고를 점검한다. 방문객 주차구역에 24시간 주차 시간을 넘긴 차량이 있는지 조사한다. 이런 식으로 쓰레기통, 자전거 보관소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오베는 자기 일을 자기가 책임지는 사람이다. 라디에이터, 자전거, 창문과 지붕 무엇이건 자기가 고친다. 이런 일을 하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날마다 호통을 치고 머저리들 사이에서 찡그린 인상으로 살아가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오베가 부드럽게 대하는 유일한 사람, 오베의 말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내뿐이다. 그러나 한눈에 반해서 결혼한 아내가 죽고 나서 오베는 자신이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자살시도. 천장에 고리를 걸고 올가미를 만들어 목을 맸다. 물론 바닥에는 비닐을 깔아 자신이 죽은 뒤에 사람들이 마루에 흔적을 남기지 않게 준비했다. 그러나 고리가 빠져서 살아났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차에 들어오도록 호스를 연결하고 자동차에 앉았다. 총으로 자신을 쏘려고도 했다. 그때마다 방해꾼이 나타난다. 방금 이사한 멀대와 이란 여자는 고리를 걸려고 천장에 구멍을 뚫을 때 렌치를 빌리러 찾아왔다. 오베의 까칠함에도 굴하지 않는 두 사람은 계속 오베의 삶에 간섭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고, 자기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멍청이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오베. 반면에 평범한 이웃은 라디에이터를 고치지 못하고, 자전거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지만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삶의 비밀을 알고 있다. 오베가 일상의 신비를 알았다면 아내가 없다고 깔끔하게 죽어버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남는다.
<오베라는 남자>는 가볍고 재미있다. <미 비포 유>는 깊고 심각하게 재미있다. 오베가 자살하려 한다면 말릴 수 있을 것 같다. 오베가 정을 느끼도록 가까이 다가가면 될 테니까. 물론 오베의 ‘지적질’을 수없이 들어야 하겠지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윌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논리로는 윌을 말리지 못한다. 이 말을 받아들이기엔 윌이 겪는 삶의 고통이 너무 크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윌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더 설득력 있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그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견뎌야 할 고통보다 삶이 주는 의미가 더 크다면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은 삶에 커다란 의미를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큰 고통도 이기게 만든다. 그러나 사람은 해답을 바로 앞에 두고도 한 발을 내딛지 못해 끙끙대는 존재이다. 영원한 삶보다는 당장의 고통과 좌절을 더 크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뚱한 결정을 한다.
두 책은 오랜만에 읽은 베스트셀러다. 재미와 감동을 보장한다. 둘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남는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는지 직접 확인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