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만들었다. 책이 있는 뜨락에서 평안하게 사랑하자는 뜻으로 <책뜰안애>라는 현판을 붙였다. 서재에서 책, 삶, 하나님 말씀, 상처와 아픔을 나누며 교회를 이루고 싶었다. 첫 모임으로 독서 토론 모임(월 1회)을 생각했다. 서재를 완성하기 전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했다. 나와 두 자녀(고3, 고2), 교사 5명, CBS 아나운서, 목사 1명이 참석했다. 책으로 초범(처음으로 소년원에 간) 청소년을 도와주는 사역을 하는 목사님이 서울에서 KTX를 타고 오기 때문에 살짝 부담이 되었다. 책을 보면 좋겠지만 나를 보면 실망할 텐데……
2월 첫 모임에서 서로를 소개하고 『부활』을 읽기로 정했다. 독서모임에 대한 기대가 높을 때, 독서모임을 막 시작해서 의욕이 많을 때 두꺼운 책을 읽기로 했다. 800쪽 분량이 부담스러워 1부, 2부, 3부를 나눠 읽었다. 3월에 1부를 나누며 네흘류도프와 카튜사가 결혼할지 궁금했다. 4월에 2부를 읽으며 의아했다. 네흘류도프와 카튜사의 관계는 거의 변하지 않고 러시아 농민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부활’이란 말도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5월에 3부까지 다 읽었다. 그리고 글을 썼다.
『부활』을 읽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야기로는 참가한 분들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글을 나누며 각자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알았다. 정** 선생님(30대 여교사)이 쓴 글이다
제목은 <삶의 제1 법칙>
뉴턴의 운동법칙 중 제 1법칙- 관성의 법칙, 외부에서 힘이 주어지지 않는 한 자기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 만물이 자연을 관장하는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함처럼 나의 삶도 그러했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큰 탈 없이 사회의 모범적인 테두리 안에서 별 일 없이 살아가는 삶을 지속하고 싶었다. 옳은 일인지 아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옳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외부에서 힘이 주어지는 불행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며, 때로는 저항할 수 없이 다가오는 그 힘마저 거부하고, 살고 있는 대로 살아가고 싶은, 편안하나 평안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기억함만으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날. 그러나 아직도 놓아주지 못하고, 차마 잊지 못하는 그 사건. 세월호. 교사로 살아가는 동안 정지해 있는 물건처럼 눈과 귀를 닫고,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었던 나에게 가해진, 거부하고 싶으나 거부할 수 없는 최초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편안하지 않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톨스토이의 부활 속 ‘네흘류도프’에게 나 자신을 대입해가며 읽는 내내 묵직한 한숨과 안도의 한숨을 번갈아가며 내쉬었다. 풍족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별 고민 없이 살아가던 네흘류도프에게 다가온 청년의 시기는, 늘 그랬던 대로 생각하며 살지 않았기에 악을 저지르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갔다. 그런 그에게 재판장에서 만난 마슬로바는 –내게 세월호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최초의 그리고 강력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악과 부조리함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삶이 너무도 낯설게 여겨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충격과 낯섦은 삶에 작은 틈을 내었고, 그 틈은 부서짐과 쪼개어짐 그리고 다시 태어남의 시작 지점이었으리라.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여겨질 때의 당혹감에서 네흘류도프의 삶은 부활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네흘류도프가 작품의 초반에 행동의 기준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데서 찾았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 속의 절대적인 가치에서 찾고 있다. 살아지던 대로 살아가던 삶을 멈추게 할 어떤 힘에 순응하며 용기를 내는 순간, 선물처럼 자신 속의 가치들이 삶을 이끌어가는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사랑, 평등, 관용, 평등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삶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절대적 가치가 이끄는 삶이 바로 네흘류도프가 부활한 증거인 것이다.
네흘류도프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지한 상태의 물건처럼 살아가던 삶이 능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삶으로 바뀌는 기쁨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때론 공짜로 땅을 나누어 주겠다는 선한 의지를 곡해하는 사람들도 만나고, 그런 그를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심지어 마슬로바조차 네흘류도프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그의 의도대로 변화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인다. 움직이는 물체에게 그 움직임을 지속하려는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듯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움직임은 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가져오는 힘으로 작용한다. 네흘류도프의 삶의 여정을 통해 부활의 삶이란 어느 한 시점의 회심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세월호가 가라앉은 그 날 이후 비로소 세상의 악과 부조리가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지된 편안한 삶을 살던 나를 조금씩 움직이게 되었다.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지 못한 자는 어떤 형태로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믿음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불만이 있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사회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속내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중성도 버려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나만 위하는 삶에서 벗어나, 연대하며 모두를 위한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아직은 그 움직임이,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흔들림이지만 매일 매일 조금씩 가속도가 붙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삶의 관성이 내 삶의 마지막 날까지 법칙처럼 나를 붙들리라 믿는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네흘류도프의 삶이 절대적인 가치들에 붙들려 옳은 방향을 찾았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가리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나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함께 하는 이들이 있기에, 나를 비추어주는 책이 있기에……
정** 선생님 생각에 공감했다.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문제, 고통의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나 역시 문제로부터 떨어져 나만 편안하게 살기 바랐다. 네흘류도프가 공작의 지위로 죄수들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사랑한다면 공작 지위까지 내버리고 그들 가운데로 가야지!’ 생각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떨어져 편안하게 지내면서…… 그들은 아이들이고, 이웃이고, 사회에서 약자이며, 예수님께서 돌보신 고아와 과부이다. 말로는 사랑하는 척, 예수님을 따르는 척하지만 나는 그들이 부활하도록 돕지 않았고, 나도 부활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두 가지 무지로부터 부활하기
**운 선생님(40대 여교사)은 <두 가지 무지로부터 부활하기>라는 글에서 ‘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는 그 자체로서의 무지’와 ‘알거나 보고 싶지 않은 혹은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자신이 피곤해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외면으로부터 오는 무지’를 말한다. 공작 네흘류도프가 창녀인 카튜사에게 일어난 일을 알면 첫 번째 무지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자신이 힘들어진다는 생각을 버리고 손을 내밀면 진짜 부활이 일어난다.
‘아는 것이 힘’이라 하지만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지식은 다른 사람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힘들게 한다. 타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앎은 힘이 아니다. 그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든 죄악일 뿐이다.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부활은 상대를 아는 것,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고아와 과부의 처지를 아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알고 나서 자기만의 편안을 버리고 그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