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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의 자리

책뜰안애 2020. 12. 20. 19:01

하나님을 당황스럽게 하자.

나치는 유대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일을 시키거나 죽였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도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먹고 죽을 정도로 일했다. 조금만 잘못해도 맞고, 사냥당하는 동물처럼 죽어갔다. 유대인 600만이 죽었다는 사실이 무덤덤하게 숫자로만 들린다면 홀로코스트를 겪은 작가들(엘리 위젤, 시몬 비젠탈, 빅터 프랭클 등) 책을 읽어보라. 상상할 수 없는 내용에 할 말을 잃는다. 다하우 수용소에 다녀왔지만, 부헨발트 수용소에 갔을 때도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끝없이 들었다.

유대인들은 1년에 한 번씩 욤키푸르(대속죄일)를 지낸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날은 금식한다. 일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말하고 천천히 걷는다. 텔레비전을 켜도 기도합시다라는 정지화면만 나온다고 한다. 환자, 노약자는 금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최대한 적게 먹는다. 수용소에서 욤키푸르를 지킨 유대인들이 있다. 나치가 욤키푸르라고 강제노동을 쉬게 해주지 않는데도, 하루 안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가 아닌데도 금식했다. 땅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라도 감사하게 먹는 사람들이 왜 하루종일 금식했을까?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동안, 가족들이 가스실에서 죽는 동안 하나님이 무얼 하셨는지 묻고 또 묻다가 대속죄일에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금식을 선택했다.

약함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는 존재

약함의 자리에 자살한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견뎌내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죽음으로 해결하려 했다. 한 사람은 저자인 마이클 호튼의 친구로 목사이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청년이다. 친구 목사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 자폐증 딸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살했다. 청년은 동성애 성향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

저자도 고통당했다. 아버지가 뇌종양에 걸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비되었다. 아버지를 간호하던 어머니는 뇌졸중에 걸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했다. 아내는 수차례에 걸친 유산에서 겨우 회복하는 중이었다. 이후에 임신한 세 쌍둥이에게 문제가 생겨 20주를 겨우 넘기고 500g 조금 넘는 태아를 조기 분만했다.

제목과 1장을 읽으며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필립 얀시나 저자도 언급하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 헤롤드 쿠쉬너같은 책일 거라 생각했다. 저자가 세상의 포로 된 교회를 쓴 사람이니 고통의 문제/C. S 루이스처럼 고통의 의미를 따져보는 무거운 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고통당했으나 지금은 승리와 축복과 기쁨만 가득하다는 아니길 바랐는데 뛰어넘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정도가 아니다. 저자는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만 하지 않는다. 죄 짓고 아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장소라 설명한다. 질병과 고통슬픔과 아픔죄와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진 인간 존재를 위한 책이다.

약함(연약한 자)를 위한 장소

1장에서 저자는 고통을 겪으면서 신학을 지식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고통에 대한 책을 쓴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고통의 좋은 면을 살핀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과 다르다. 저자는 우리가 고통당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약함을 벗어나 강하고 축복받고 높아지는 게 아니라 고통과 연약과 낮아짐이라고 한다. 부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지 말고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붙들라 한다. 소망을 가장한 탐욕과 기쁨을 구하는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죄와 슬픔 가운데 십자가를 찾으라고 한다. 삶의 목표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타까운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3장을 지나면서 점점 어려워진다. 스토아철학, 실용주의, 현대철학을 넘나들고 교부들과 니체를 인용한다. 철학과 인문학 지식으로 풀어가기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성경으로 돌아와서 약함의 자리가 곧 십자가의 자리이며 우리가 거할 자리라고 논증한다. 천천히 읽어야 할 책이다. 4-하나님은 과연 크신 분인가?, 5-거기 위에 누가 계신가요, 6-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만 있다면, 장제목 하나만으로도 책 한 권을 써낼만한 내용이다.

2부는 강해서 같다. 7장은 욥기를 해설한다. 저자는 우리 믿음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욥을 위한 구속자이다. 또한 우리를 위한 구속자이다. 욥보다 더한 고통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셨다. 8장은 로마서 5-8장을 해설한다. 우리를 고소하는 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심 앞에서 깨진다. 9장은 에베소서 6장과 이사야 59장을 통해 진리의 허리띠를 비롯한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말한다. 10장은 요한복음 11(죽은 나사로)을 해설한다. 나사로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을 이긴다. 욥을 통해 고통을, 로마서에서 죄를, 에베소서와 이사야를 통해 영적 전쟁을, 나사로를 통해 죽음을 말한다. 모두 약함의 자리다.

약함을 위한 장소(책의 원제)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이 약함을 이기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약함의 장소에 오셨다. 그래서 이 책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고통의 의미를 쓴 책이라기보다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신학책 같다. 우리가 약함의 자리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축복과 번영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약함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까닭을 예수님의 모범과 성경으로 설명한다.

약함의 자리에 계시는 예수님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아이가 교수형을 당하는 모습을 나이트에 적어놓았다. 소년은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형을 당했지만, 너무 가벼워 단번에 죽지 않았다. 30분 넘게 몸부림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1만 명의 포로가 강제로 지켜보았다. 뒤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때 위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라는 대답이 자기 안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고 적었다. 가볍게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쓰는 예화로 보지 말자. 마이클 호튼이 전하는 약함의 자리가 바로 그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약하고 고통당하고 아파하는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는 의무규정이 아니라 내가 아파할 때, 고통당할 때, 죽을 수밖에 없을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친구 목사인 스티브의 자살에 대해 스티브는 우리의 약함 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다(167)”를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자살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맥락은 아니지만, 물음표를 써놓았다. 자살한 청년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의심이 없다라고 써서 또 물음표를 치게 한다. 전체 내용을 보면 자살이 초점이 아니라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뜻이지만 나도 아직 약함의 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이 부분에 대해 물음표가 생긴다.

 

- 삶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이다. (42)

- 기독교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지는 못한다. 기독교는 우리의 개인적 치료를 위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극복하셨다는 진리다. (166)

- 새로운 창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 는 이미 도래했으며, 이미 우리를 놀라운 빛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약함 가운데 있으며, 아직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