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 잃은 신
『호모데우스』, 유발 하라리
『키아바의 미소』, 칼 노락
키아바는 북극에 가까운 곳에 사는 이누이트 아이입니다. 얼음에 구멍을 내고 낚싯줄을 드리웁니다.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지만 놓아줍니다. 물고기가 키아바를 보고 미소를 지었거든요.
“나는 미소 짓는 물고기는 절대 먹을 수가 없어!”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큰 곰이 아빠와 키아바의 앞길을 막아섭니다. 아빠는 총을 갖고 오지 않았죠. 으르렁거리는 곰에게 다가가, 키아바가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일을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곰이 당황해서 가버립니다. 아빠와 마을 사람들이 마법사라고 칭찬하자 키아바는 미소 지은 일밖에 한 게 없다고 대답합니다.
다음날, 어마어마하게 큰 폭풍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모두 얼음집을 두껍게 쌓으며 폭풍에 대비합니다. 키아바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폭풍에 맞서 키아바가 무얼 했을까요?
신이 된 인간
인간은 물고기를 많이 잡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배가 커졌고, 빨라졌고,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기술을 가졌습니다. 바다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물고기가 있는 곳을 찾아냅니다. 재빨리 찾아가 물고기를 싹 잡아버립니다. 법으로 금지하지 않으면 거대한 고래부터 작은 치어까지 모두 배에 끌어 올립니다.
인간은 과학기술 덕분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 명이 힘을 합쳐야 곰을 잡던 시절은 벌써 지났습니다. 이젠 곰이 사람을 피해 다닙니다. 사람 때문에 곰이 한꺼번에 죽어갑니다. 언젠가 폭풍도 통제하겠지요. 기술 발달이 우리를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류를 가장 괴롭힌 세 가지 적을 굴복시켰다고 썼습니다. 굶주림, 전염병, 전쟁의 위협!
『호모데우스』는 기아, 역병, 전쟁을 이긴 인간이 미래에 어떤 모습이 될지 예측합니다. 예전에는 과학기술이 아프고, 힘들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 속도가 빨라지면서 평균 이하의 사람을 구하는 일을 뛰어넘어 표준을 뛰어넘는 사람을 만들어낼 것이라 합니다. 벌써 그러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치는 흉부외과보다 더 예쁘고 날씬하게 만드는 정형외과 지원자가 더 많습니다. 이러다 보면 정말 유발 하라리가 말한 인간이 나올 것 같습니다. 불멸, 행복, 신성을 향해 미래로 나아가는 인간! 신과 같은 사람 호모데우스!!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까요? 인간의 능력이 향상되면 행복할까요? 5주 동안 독서반 학생들과 『호모데우스』를 토론하고 6주째에 글을 썼습니다. 7주에 글을 고치는데 고 1 남학생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만에 아래 글을 써냈습니다.
호모데우스를 읽고 / 김**(고 1)
옛날의 나는 지금보다 더 시골에 파묻힌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일어나면 보이는 게 산과 밭이었고 100m만 가면 강이 보였다. 그때 나는 핸드폰도 없었고 TV도 없었고 책마저 없었지만 아무 이유 없이 걸어 다녀도 즐거웠고 형이랑도 아무런 주제를 갖지 않고 얘기하며 놀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시내로 오면서 내 삶은 달라졌다. 매일 TV를 봤고 가끔씩 컴퓨터 게임을 했다. 처음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얘기하려면 그때는 그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친구들과 친해지기 위해 시작했던 TV와 컴퓨터가 내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어느 샌가 학교에 가자마자 집에 가서 컴퓨터 할 생각하는 내가 보였다. 아무 이유 없이 놀던 내가 무언가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게임이 싫어졌다. 나를 잃어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슴없이 나쁜 말을 하고 친구의 압부보다는 친구가 몇 레벨이 오르는지 궁금해 하는 나 자신을 보는 순간 친구라는 것에 의문이 생겼다. 내가 어째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게임을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친구와 대화하며 못할까 두려웠고, 아니면 이미 빠져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게임을 그만둬도 아무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지적하지 않았고 학교생활은 평온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문제였구나, 하고.
하지만 중학교 와서는 얘기가 달라졌다. 중학교 때 핸드폰이 전국적으로 학생들에게까지 보급되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학교에 가서 가장 먼저 보이는 표정이 핸드폰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었다. 나도 핸드폰이 있었지만, 게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같은 게임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조금 거리가 생겼다. 항상 겉돌았고, 친구들이 모이면 PC방에 가거나 핸드폰 게임만 하기에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함께 노는 친구들이 많이 사라졌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내가 모르는 얘기만 했고 나는 거기에 끼기가 너무 힘들었다. 물론 나중에 게임을 하지 않은 친구들과 친해져서 절친이 됐지만 나는 중학교에 와서 괴리감을 느꼈다. 게임 이미지 없는 학생들에게 우정이 존재할까? 난 PC방을 싫어해서 가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모일 때마다 PC방에 갔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학생들이 게임, 휴대폰이 없으면 대화도 못하는 상대가 돼버린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과학기술에 의심을 던졌다. 내가 보기에 과학기술은 쾌락만 주고 인간 속의 무언가를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 나도 휴대폰이 있고, 많이 하교 유용하게 본다. 하지만 쓴 후의 찜찜함은 사라지질 않는다. 『호모데우스』를 읽으며 인간이 신이 될 것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 속에는 과학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나는 유전공학의 엄청난 기술 따위는 모른다. 하지만 내 앞에서 펼쳐지는 과학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멀게 해줌을 느낀다. 서울에 놀러 갔을 때 지하철에서 본 사람들의 눈을 잊지 못한다. 모두의 눈은 스마트폰을 향해 있었고 무표정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싸늘함만이 가득했다.
할머니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내가 느꼈던 할머니의 눈은 이렇지 않았던 것 같다. 더 충격적인 것은 똑같이 행동하는 나였다. 내 눈도 핸드폰을 향하고 액정에 비친 나 또한 무표정의 식은 눈이었다. 인간의 즐거움이란 것은 한계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우리는 그 즐거움의 목표를 차근차근 발견해 나갔지만 과학이 쾌락을 주면서 쉽게 그 한계를 채워서 어느 순간부터 무표정이 돼버린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뭇가지 하나로도 즐거웠던 나지만 이제는 나뭇가지를 쥔다고 해도 즐겁지가 않다. 축구 뉴스를 안 봐도 궁금하지 않던 내가 이제는 매일 아침 뉴스 창에 들어가 본다.
학교는 우리에게 말했다. “4차 산업 시대가 온다. 정보가 중요하다. 뒤처지지 마라.……” 우리는 무슨 정보를 찾은 것인가? 옆집 사람이 죽은 건 모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유명인이 물 먹는지는 아는 사회에서 중요한 정보란 무엇일까? 과학은 직접적인 쾌락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과정을 제거해버린다. 그리고 그 쾌락이 없으면 살지 못하게 해버린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에게 인간이 신이 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왜 내 앞의 사람과 나는 나뭇가지 하나로도 즐거웠던 옛날의 나보다 멍청해 보이는 것일까?
관계를 잃어버리고 신이 되는 게 좋을까?
유발 하라리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한 말보다 더욱 발전된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나 저와 민좌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뒤처지지 마라~ 과학 기술의 발전에서 뒤처지면 신이 된 인간을 섬겨야 한다. 어쩌면 인공지능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할 일 없이 숨만 쉬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 미래에 언젠가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신이 되지 못해 뒤처지는 날보다 지금 당장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큽니다. 과학기술에 의존해서 무언가를 잃어가는지도 모르는 존재로 사는 것, 과학기술의 주는 쾌락에 빠져 우리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지 느끼지도 못하는 존재로 되어버리는 것, 정보들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이웃집과의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 이런 게 더 두렵습니다.
저는 『키아바의 미소』를 읽으며 미소를 짓습니다. 키아바의 미소를 사랑하며 그런 미소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호모데우스가 된 인간이 로봇으로 물고기를 기르고, 로봇 곰을 북극에 보내고, 폭풍을 조절하는 날씨 제어 시스템을 가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과연 키아바의 미소를 보고 미소 지을까요? 편안하게 사는 호모데우스보다 폭풍우 앞에서 미소 짓는 소년이 더 ‘인간’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