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19. 학급문고
학기초에 학급문고로 살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제가 책을 잘 알고 있으니 목록을 보내달랍니다. 목록을 보내주면 그대로 삽니다. 교실에 꽂아두고 ‘책벌레 선생님이 추천한 책이다. 좋은 책이니 읽어봐라’ 합니다. 제게 목록을 부탁한 교사는 읽을까요? 책을 읽으라고 말은 하지만 ‘이 책’을 읽어라 하진 않습니다. 책 안 읽는 교사에게는 ‘이 책’이 없으니까요. 책을 덩어리째로 던져주면 아이는 잘 읽지 않습니다. 아이에겐 ‘책들’이 아니라 ‘바로 이 책’이 필요합니다.
교사마다 좋아하는 책이 다릅니다. 전문가의 추천이 아무리 좋아도 직접 맛을 보고 입맛에 맞아야 다른 사람에게 권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시키지 않아도 하지만 의무에 떠밀리면 시켜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읽는 분은 제게 목록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산 학급문고는 제역할을 못합니다. ‘책벌레 선생님이 추천한 책이다’는 좋지 않습니다. ‘내가 읽어봤는데 말이야 이 책은~’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좋은 책을 갖다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대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학급문고는 소문으로 들은 좋은 책 덩어리가 아니라 아이에게 자신있게 권해줄 수 있는 ‘이 책’을 갖다놓아야 합니다.
학급문고가 왜 필요할까?
제게 목록을 부탁하는 분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학년 전체가 한 사람이 정한 목록을 그대로 사기도 하고 지난해에 산 책을 그대로 사기도 합니다. 도서실에 가면 같은 책이 20권씩 꽂혀 있습니다. 남의 목록 그대로 사는 분은 “도서실에 책이 많은데 왜 자꾸 교실에 학급문고를 만들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네요.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학급문고로 교실에 굳이 놔둘 필요가 있을까요?
도서실은 책을 읽는 곳입니다. 책이 많아야 합니다. 교실은 무얼 하는 곳일까요? 책 읽는 곳입니다. 책이 있어야 합니다. 집은 무얼 하는 곳이죠? 책 읽는 곳입니다. 책이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는 텔레비전이나 옷장이 아니라 책장이 있어야 합니다. 교실에서 아이들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도 책이 있어야 합니다. 책 없이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가르칩니까? 학급 문고는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건 책벌레에게나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학급문고가 필요할까요?
제 자녀는 중학생인데 핸드폰이 없습니다. 스마트폰 빌려줘도 금방 싫증냅니다. 책을 주면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도 무시합니다. ‘여기만 읽고 갈게요’ 하고는 한참 지나야 옵니다. 온 사방 책으로 가득한 곳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합니다. 우리반 아이들도 책을 친근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책이야기를 합니다. 무언가 물어보면 책에서 찾아줍니다. 스스로 답을 찾도록 책을 건네줍니다. 학급문고 앞에서 서성입니다. 그럼 아이들이 책을 읽습니다.
도서실에 가라고 해도 아이들은 한 귀로 흘립니다. 교실 안에, 바로 곁에,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책이 있어야 합니다. 스마트폰보다 책을 더 좋아하게 하려면 자주 만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에 도서실은 너무 멉니다. 저는 교실을 예쁘게 꾸미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냥 책을 꽂아둡니다. 책 읽고 쓴 글, 일기글을 자주 바꿔가며 걸어줍니다. 우리반 아이들은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잘 씁니다. 자주 접하면 잘하고 좋아하게 됩니다.
학급문고에 어떤 책을 둘까?
저는 3가지 기준으로 학급문고를 정합니다. 먼저 제가 재미나게 읽은 책을 고릅니다. 진짜 재미있다고 말할 책입니다. 입소문 타는 맛난 음식점에 데려가듯 ‘내가 읽어보니까~’ 합니다. 베스트셀러는 아닙니다. 소문만 요란한 책이 아니라 진짜 제 입맛에 맞는 책입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책, 제목만 말해도 얼굴 표정이 바뀌고 ‘와~’ 하는 책입니다. ‘선생님이 저렇게 좋아할 정도면 나도 읽어봐야겠다’고 느끼게 만드는 책입니다.
두 번째로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책을 고릅니다. 수준은 떨어집니다. 만화류 몇 권, 주인공 두세 사람이 과거로 가서 여행하며 역사적 사실을 겪어내는 이야기 몇 권, 단순 흥미 위주의 추리나 이야기 몇 권입니다. 일종의 시식코너입니다. ‘일단 맛을 보시라니까요’ 꼬드기는 책입니다. 학급문고 앞에 발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책을 꺼내게 만들기 위한 유혹거리입니다. 이런 책은 괜찮은 관련 책을 함께 삽니다. ‘북극에서 살아남기’를 읽은 아이는 북극에서 살아가는 ‘이누이트 이야기’에 손을 뻗습니다. 일단 맛을 본 뒤에 먹을 더 좋은 걸 준비해 놓습니다.
세 번째로 공부와 관련한 책을 삽니다. 4학년을 가르치면 도시와 촌락에 관한 책,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삽니다. 화산과 지진, 식물의 성장에 관한 책도 삽니다. 인물, 사건, 배경이 잘 나타난 동화책도 삽니다. 4학년에서 배우는 수학동화도 삽니다. 선행학습은 배울 내용을 그대로 미리 가르칩니다. 이미 배운 내용을 학교에서 또 배우면 재미가 없습니다. 책으로 읽으면 어떨까요? 책은 넓게 알려줍니다. 배경지식을 쌓게 만듭니다. 공부할 때 관련 이야기가 떠오르게 해서 흥미를 유발합니다. 학급문고에 학년에 맞는 공부 관련 책을 두면 조사․참고 자료로도 씁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볼까요? 난이도를 조절하세요. 약간 쉬운 책, 보통 수준, 약간 어려운 책을 1/3씩 사세요. 처음엔 쉬운 책을 읽습니다. 2학기가 되면 보통 수준 책이 쉬워지고 학기말에는 약간 어려운 책에 눈높이가 맞아집니다. 저절로 이렇게 되진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렵고 힘들면 피하려 합니다. 교사가 욕심 부려서 고급스럽고 어려운 책을 두면 먼지만 쌓입니다. 포장만 요란하지 아무도 읽지 않는 ‘우리 학교 필독서, 우리반 필독서’는 만들지 마세요. 반대로 너무 쉽고 만만한 책만 사면 어려운 책은 아예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발전이 없지요.
3월에 한꺼번에 다 사기보다는 1, 2학기로 나눠 두 번 사면 더 좋습니다. 저는 1학기에 2/3를 사고 2학기에 1/3을 삽니다. 새로움을 두 번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강원도 소규모 학교라 가능하지만 이렇게 하기 어려운 학교도 있을 겁니다. 책을 감춰두고 조금씩 꺼내주세요. 한꺼번에 학급문고에 꽂아두고 ‘올해는 여기 30권을 다 읽어라’ 하지 말고 10권만 꽂아두고 다음에 또 꺼내놓으세요. 아이들은 변화를 좋아합니다. 턱 강요하지 말고 조금씩 꺼내서 유혹하세요.
어떻게 해야 학급문고에 관심을 가질까?
학급문고로 산 책을 조금씩 꺼내주면 관심이 계속 이어집니다. 아이들이 학급문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책 읽어주기입니다. 1주일에 하루, 10분씩 한 권을 꾸준히 읽어주세요. 저는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줍니다. 책을 다 읽어주고 나면 영화를 보여줍니다. 제가 읽어줄 때 같은 책을 빌려와서 손으로 짚어가며 따라 읽는 아이도 있습니다. 로알드 달 책도 읽어줍니다. 그럼 도서실에서 로알드 달 책이 사라집니다.
1주일에 한 권씩 책을 바꿔가며 한 부분만 읽어줘도 좋습니다. 올해 입학식 때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림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옛날 옛날에 파리 한 마리를 꿀꺽 삼킨 할머니가 살았는데요, 심스 태백>와 <옛날에 오리 한 마리가 살았는데, 헬린 옥스버리 그림>을 들으면서 입학식에 따라온 동생과 학부모까지 깔깔깔 웃었습니다. 읽은 책을 입학생과 따라온 동생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학급문고를 사면 예전과는 다르게 반응하겠지요.
아이에게 책을 자주 접하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독서지도입니다. 공부할 때 인터넷이 아니라 책을 찾습니다. 좋은 말을 해줄 때도 책에서 인용합니다. 식물도감 들고 운동장에서 나무와 꽃이름을 찾습니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합니다. 학급문고에 있는 책이라면 더 좋겠지요. 학급문고에 있는 책에서 좋은 구절을 찾아 교실에 걸어놓고 “이 구절은 우리반 학급문고 어느 책에 나와 있을까요?”라고 써놓으세요. 누군가 틀림없이 “선생님, 여기 있어요. 이 책 맞지요?” 할 겁니다. 그럼 “와, 정말 찾았구나! 굉장한데……” 해주세요.
과학을 전담으로 가르칠 때입니다. 5학년 교실에서 아이들이 실험관찰 정리할 동안 학급문고를 구경했습니다. 책이 뒤집어져서 꽂혀 있는 거야 이해합니다. 누군가 보고 그렇게 꽂아두었다는 거니까요. 1학기 다 지나가는 6월인데 책이 너무 깨끗합니다. 그래서 책을 양쪽으로 나누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책을 왼쪽으로 옮기고 왼쪽에 있는 책을 오른쪽으로 옮기며 학급문고 앞에 서있으니 묻습니다. “선생님 뭐하세요?” “응, 책을 나누고 있어.” “어떻게 나누는데요?” “정말 좋은 책을 왼쪽으로 보내고 있어.” 했더니 “실험관찰 다 정리했는데 책 읽어도 되요?” 합니다. “그래, 가져가라!” 했더니 왼쪽에 있는 책을 가져갑니다. 다른 아이도 와서 왼쪽에 있는 책을 가져갑니다. 실험관찰 다 못한 아이가 “과학 선생님은 책도 썼대. 선생님이 좋다고 하는 책 나도 읽고 싶은데~” 합니다. 사실 오른쪽에 있는 책이나 왼쪽에 있는 책이나 똑같습니다. 책 좋아하는 선생 이름 걸고 기회를 준 겁니다. 과학 시간 끝날 때는 왼쪽이 있는 책이 텅 비었습니다.
학급문고에 손 댈 기회를 자주 주세요. 비 오는 체육시간에 책상 뒤로 밀어놓고 책을 살짝 펼쳐서 세워놓은 뒤에 뛰어넘기라도 해보세요. 책 다섯 권 주고 높이 쌓기 시합이라도 하세요. 아무도 읽지 않은 책 꺼내서 “무조건 정답 찍기” 독서퀴즈를 하세요. 그럼 체육 시간에 뛰어넘은 책, 높이 쌓으려고 몇 번 만진 책, 전혀 모르는 내용 찍어서 퀴즈대회 한 책을 읽으려고 할 겁니다. 관심을 갖도록 책으로 찔러대세요.
학급문고로 무얼 할까?
책 읽으면 교사들은 대부분 독서감상문을 쓰라고 합니다. ‘아, 지겨워!’ 독서감상문을 쓰니까 아이들이 책을 안 읽습니다. 30권 읽고 독서감상문 30개를 쓰면 지겹습니다. 똑같은 독서감상문 30편 쓰는 건 하지 말아야 할 짓입니다. 독서감상문을 쓰지 말아야 할까요? 1년 동안 독서감상문으로 쓸 책을 딱 한 권만 정하세요. 독서감상문 전용 책이죠. 아이가 좋아해서 몇 번이고 읽는 책을 골라야 합니다. 아이마다 다르겠죠. 처음 읽고 독서감상문을 씁니다. 5번쯤 읽으면 다시 씁니다. 10번 읽고 다시 씁니다. 세 편을 견주어보세요. 세 편이 모두 똑같은 내용이라면 소용없는 쓰기활동 하지 말고 어떻게 쓰는지 가르치세요.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만드세요. 세 편 모두 내용이 달라졌다면 어떻게 달라졌는지 견주어보세요. 글감이 바뀌었는지, 깊이가 깊어졌는지……
학급문고가 오면 우리반 책을 정합니다. 1년 동안 우리반 아이들 모두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입니다. 딱 한 권입니다. 5학년을 할 때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선미>을 정했습니다. 3월 2일, 아이들을 처음 만나면 마당을 나온 암탉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과학 시간에 동물을 배우면 마당을 나온 암탉에 나오는 동물을 찾아 조사합니다. 계절을 배우면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계절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찾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암탉이 어려움을 이겨낸 모습을 찾습니다. 헤어질 때는 암탉이 초록머리를 떠나보내는 장면을 함께 나눕니다. 우리반 아이들이 다 알고 있어서 이야기만 꺼내면 공감대가 형성되는 책으로 만듭니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독서감상문이 달라집니다.
12월에는 우리반 책으로 퀴즈대회를 합니다. 문화상품권 받으려고 몇 명만 책을 달달 외우는 대회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모두 한 문제씩 내고 함께 맞춥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이 해준 이야기는 어떤 부분일까?”는 아주 좋은 문제입니다. 책과 우리 경험을 연결해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입니다. 우리반 책으로 낱말퍼즐을 만들고, 그림자연극을 합니다.
어떻게 할지 잘 모르면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읽게 하세요. 어설프게 부담 주지 말고 ‘책 참 재미있다’ 말하게 해주세요. 이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3월에 학급문고 들여놓고 ‘읽어봐라’ 한 뒤에 잊고 지내다가 방학 직전에 ‘몇 권 읽었냐? 많이 읽은 사람 독서상 준다’ 하지 마세요. 별다른 활동 하지 않아도 꾸준히 학급문고를 아이들에게 던져주세요.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강요는 금물, 살살 꼬드기세요.
제가 준 목록 그대로 학급문고 산 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강요합니다. 책벌레 선생님이 추천한 책이므로 읽지 않으면 아이 탓으로 돌립니다. 책은 좋지만 아이가 읽지 않아서 문제라는 거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관심해집니다. 학급문고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읽지 않아도 신경 안 씁니다. 학급문고가 장식용이 되는 겁니다. 아, 슬픕니다.
독서지도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역시 강요합니다. 독서록을 쓰라고 하고 읽은 책 목록을 만듭니다. 책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에게 결과를 재촉합니다. 아이들은 느낌 없이 강제로 하는 활동을 거부합니다. 책을 억지로 읽는다고 해도 책을 싫어합니다. 책을 싫어하게 만드는 학급문고, 독서활동은 끔찍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에서 손 뗍니다. “어릴 때는 책 참 많이 읽었는데……”만 남습니다.
살살 꼬드기세요. 자꾸 만나게 해주세요. 학급문고에 얽힌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세요. 선생님들도 학급문고 앞에서 좋은 추억 만드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