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회심
간증집회 강사로 이만한 사람은 드물다. 극적이고 대단하다. 강력한 반전도 있다. 저자는 레즈비언이었다. 레즈비언 파트너와 살면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트레스젠더) 권익을 위한 활동을 했다. 영문학 종신교수였고 프로이트, 마르크스, 다윈의 철학과 정치적인 세계관에 기반을 둔 19세기 문화와 문학을 가르쳤다. 특히 퀴어이론(정상적인 성 행위를 당연시하는 전제에 저항하는 이론)을 주로 연구했다. 교회에서 죄라고 부르는 음란한 행위가 정당하며, 죄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편견이고 혐오스러운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라는 단어가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았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에 온다면 우리가 그녀를 목구멍에 걸린 가시로 볼 것이다. 음란의 화신이라며 악수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녀는 회심했다. 예수님을 만났다. 목사와 결혼했다. 종신교수가 대학을 떠나 평범한 목사 아내로 살아가는 것도 대단한데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을 입양해서 홈스쿨로 양육했다. 적의 심장부에 있던 사람이 아군으로 귀순한 경우와 같다. “예수님을 모를 때는 죄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예수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구원 받았습니다. 이젠 이전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간음하지 마세요. 음란하지 마세요……” 이런 식의 간증을 하면 대박나겠지만 아니다. ‘극적인 회심’이 아니라 ‘뜻밖의 회심’이다. 사울이 한 방에 쓰러져서 바울이 된 것처럼 회심하지 않았다. 뭔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우리의 간증이 크리스천들의 삶의 여정이라는 전체적인 지평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만약 내 간증이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었나”를 말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마치 지금은 죄와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구원을 받은 후 지금 느끼는 안도의 감정이나 사람들이 내 간증을 듣고 흔히 보이는 반응을 전한다거나 내가 얼마나 훌륭한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에게 공을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머리말에서)
예기치 않은 회심
저자는 ‘공공연한 레즈비언’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페미니즘 교수이다. 하나님, 성경, 기적……을 달나라 토끼처럼 생각한다. 지역신문에 PK(남성회복운동 단체)의 성차별적인 논리를 비판하는 글을 싣고 편지를 엄청나게 받는다. 상자 두 개를 준비해서 한쪽에는 증오의 편지를, 다른 쪽엔 공감의 편지를 담았다. 시러큐스 개혁장로교회 담임목사 켄 스미스가 보낸 편지도 받았다. 목사는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외치지 않고 질문을 했다.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나?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걸 어떻게 검증할 수 있나?” 저자는 편지를 어느 통에 담아야 할지 몰라 책상 위에 두었다, 쓰레기통에 던졌다. 다시 꺼내 읽었다.
그의 질문은 내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그의 질문은 언제나 그랬다.) (50쪽)
저자는 편지에 쓰인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에 응해 캔을 만난다. 켄이 자신을 존중해 주었다(35쪽)고 한다. 교회로 나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간음에 대한 율법, 음욕이 불타는 것 같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대로 하는(롬 1:26-27절) 바울의 경고’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구속’을 강의했다. 저자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마치 신선한 피 냄새를 찾는 상어처럼 그 성경말씀(행 16:31)을 들려줄 사람, 특히 나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매기 마련이다.(53쪽)” 라고 생각했지만 캔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정죄하지 않고 존중하지만 할 말은 했다. 할 말은 하지만 존중했다고 해야 할까? 켄은 구약에서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숨겨져 있는지 신약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 설명했다. 레즈비언인 저자를 받아들이지만 그런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저자는 2년 동안 성경을 읽으며 켄과 그의 아내 플로이와 대화를 이어갔다. 켄과 플로이가 사람들을 먹이고 재워주고 도와주는 모습도 지켜봤다. 저자가 예수님께 점점 마음이 열려가는 동안 게이 공동체 친구들은 걱정하며 마음을 돌이키라고 했다.
오래도록 한국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 구원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나눴다. 이후에는 구원받은 의인, 구원받지 못한 죄인에 구도자가 더해졌다. 이 기준에 의하면 저자는 구원을 찾아가고 있는 구도자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저자를 어떻게 도와주어야 어리석은 생각(예수를 믿는 것)을 버리고 돌아올까 고민하는 레즈비언 파트너는 당연히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다. 그럼 목사이지만 게이로 살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괴로워하는 사람은 어디에 속할까? 자기들 생각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모두 죄인 취급하는 종교인은 어디에 속할까? 책에는 더 많은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켄이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존중하는 태도로 대답을 들어준 것처럼, 이 책 역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다린다.
저자는 합리성으로 무장했기에 질문과 대화로 하나님을 찾아갔다. 모든 사람에게 ‘질문’이라는 방식이 통하지는 않는다. 합리성보다 감정, 소속감, 기복주의가 뿌리 내린 우리나라에선 선포와 체험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상대를 존중하며 질문하고 꾸준히 들어주는 태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기독교를 ‘답답하고 일방적이며 자기들만의 잔치에 빠진 사람들의 종교’로 받아들이는 오늘날은 더욱 그러하다.
회심에도 과정이 있다.
1999년 4월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다고 적었다. 동성애 파트너와는 헤어졌고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동성애가 왜 죄인지는 몰랐다고 한다. 자만심이 죄라고 깨달아서 그것부터 시작했다.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동성애에 대한 응징보다는 자만이라는 걸 발견했다.(겔 16:48-50, 마 11:23-24) 계속 성경을 묵상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행동(동성애)이 아닌 사고의 패턴에 죄가 뿌리를 내린다는 걸 깨닫는다.(78쪽) “내 삶을 주님께 바치겠다는 결심은 단순히 철학적인 노선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번에 끝날 수 있는 절차도 아니고 내 표면적인 편견들과 변하기 쉬운 충성됨을 다시 조정하는 일도 아니다. 회심은 내 삶을 조율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 영혼과 인격을 샅샅이 조명하는 고되고도 치열한 과정이었다.(80쪽)”
회심을 단번의 선택으로 받아들인 간증을 꽤 들었다. 이전에는 완전 죄인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전도자가 되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단번의 회심은 멋져 보인다. 간증하기도 쉽다. 끙끙대며 몇 년씩 고민하다가 예수님 믿으면 회심의 순간을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낱낱이 적어놓지 않는다면 고민한 과정을 전달하기도 어렵다. 구원파에선 이를 빌미로 구원 받은 정확한 일시를 물어온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단번의 회심은 진짜 회심 같다. 오래도록 끙끙대며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은 찜찜한 회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번에 회심한 간증을 듣고 더 극적일수록 하나님 은혜가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회심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아니었고 어떤 상투적인 행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침묵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그때까지 내가 들어봤던 간증들은 모두 에고와 자만이 가득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 내가 정말 장하지 않나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내 결정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내 삶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단했어요. 아직 길을 발견하지 못한 저 이방인들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겠어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런 식의 생각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만다. 나는 지독한 경험주의자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았다. 아니,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사람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응답을 해야 한다. 응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이야기의 전부이다.(165쪽)”
하나님의 선택은 단번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걸 단번에 깨달을 수도 있고 오래도록 깨달아 갈 수도 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이 사울을 단번에 꺾으셔서 감사하다. 또한 레지비언 교수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비하면 우리가 어떻게 회심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이러고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과정을 거친다. 고민하고 돌아보고, 따져보고 끙끙대며 서서히 변해갔다. 그러면서 자신의 편견을 깨뜨리는 작업을 했다. 자기 주관성과 경험 위에 성경을 덧바르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깨달을 때마다 돌이키고 또 돌이켰다. 레즈비언 교수의 간증집에 어울리지 않게(?) 성경말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많이 나온다. 교회에서 말하는 정답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얼 말씀하실까 고민하며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라 절절하게 다가왔다. 무조건 믿으라는 말을 듣고 잘 믿어지지 않는 사람, 계속 튀어나오는 의심에 ‘내가 믿음이 적은 건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밑줄 그어가며 읽을 것이다. 이 고민은 정식 교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저자는 회심을 ‘결단의 순간’이 아니라 ‘과정’으로 겪어간다. 그러므로 의인, 죄인으로 양분하는 사람이 읽으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회심 이후의 삶도 과정이다.
저자는 2000년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한 선서를 한다. 책에는 1999년 8월, 시러큐스 대학교 대학원 신입생 입학식 축하 강연 전문이 실려 있다. 스스로 ‘현실적이고 무난한’ 글이라 생각한 연설이지만 자신이 더 이상 레즈비언 공동체에 함께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레즈비언 공동체의 비난은 예상했겠지만 이후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저는 죄를 떠났고 하나님은 제게 축복을 주셨습니다’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사람과 결혼을 약속하고 약혼했지만 결혼을 몇 주 앞두고 파혼했다. 늘 복음을 말하며 자신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도록 도와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스스로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기 쉽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초자아는 우리의 의식 중에서도 타인들이나 단체들의 기대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자 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즉 교회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113쪽)”
저자는 이미 마음이 하나님께 기울었다. 경험주의, 합리성, 패미니즘 시각,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으로 해석하던 모습에서 떠났다. 세계관이 바뀌자 해석이 바뀌었다. 또한 저자에겐 삶과 기도로 에워싸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정든 집과 대학을 떠나지만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과 선한 공동체를 만나게 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은 뒤에 고민이 더 많아졌다. 이 고민이 <선한 사람들, 선한 공동체>라는 제목의 장에 나온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밑줄을 좍좍 그었다. 여기 50쪽 분량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다.
성적인 존재인 내가 그리스도에게 응답을 하는(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것은 과거 이성애자였던 내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77쪽)
저자는 켄트와 결혼한다. 남성이 권위를 내세우는 낌새라도 보이면 덤벼들던 페미니즘 교수가 하나님 안에서 남자의 권위를 인정하며 가정을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 창조의 과정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197쪽)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결혼과 부부의 관계가 무엇을 말하는지 밝힌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지 않다면 일어날 수 없는 변화이다. 개척교회로, 캠퍼스 사역을 하면서도 고민한다.
4장에서 갑자기 입양 이야기가 나온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을 입양해서 홈스쿨로 키워간다. 고민은 사라지고 아이들을 어떻게 입양했는지 들려준다. 입양과 홈스쿨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부모로서 아이를 기르는 일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처럼 돌보는 게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결혼과 입양 이야기를 허탈하게 읽었다. 이것만으로도 강력한 간증거리지만 저자의 고민이 어떻게 드러나고 해결되는지 더 듣고 싶었다. 저자의 생각이 바뀌는 과정을 읽으며 속이 다 시원했다. 회심을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 있는 이야기’로 읽어가는 게 너무 좋아서이다.
뜻밖의 회심이 계속되면 좋겠다.
저자가 힘들어하며 고민해서 고맙다. 저자의 고민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내 고민이 얼마쯤은 해결됐다. ‘이 사람은 정말 고생했는데 내 고민은 사치구나!’ 라는 관점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하게 여겨온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다른 질문과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까?’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갈 때 복음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그들이 귀 기울일만한 질문을 들고 가야 한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질문 말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떠밀면 대화를 시작조차 하지 않을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한국 교회엔 켄목사가 필요하다. 질문하고 고민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준비 되지 않은 사람에게 ‘당장 결단하세요’라고 강요하지 말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질문은 켄목사가 했지만 저자는 선한 사람들과 선한 공동체로부터 대답을 들었다. <선한 사람들, 선한 공동체>가 많아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켄의 태도를 배운다면 뜻밖의 회심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뜻밖의 회심>은 혼란과 좌절, 갈팡질팡하는 과정이 담겨있어 귀하다. 저자는 이전 세계관으로 질문하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그 세계관을 깨뜨리고 하나님 생각을 알려줄 사람을 계속 보내셨다. 바리새인의 공동체가 아니라 고민하는 사람을 돕는 공동체가 많아진다면 뜻밖의 회심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