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16. 질문이 토론을 이끈다.
책은 참 좋습니다. 아이들이 읽기만 한다면. 책을 많이 읽으면 더 좋습니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독서감상문을 쓰면 더더욱 좋습니다. 책 읽고 느낀 게 있다면. 그냥 책을 읽고, 느낌 없이 독서감상문 쓰는 거론 부족합니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독서감상문 쓰면서 책 읽기 싫어지고, 책 읽으며 스트레스 받으면 평생독자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독서 환경에서 <아침독서>만큼 크게 영향을 준 운동은 드뭅니다. 다독왕을 뽑고 독서퀴즈 대회를 하고 독서감상문 대회를 오래도록 해도 변화가 없던 독서환경을 단번에 바꾸었습니다. 공부 잘 하는 몇 명만 참가하던 독서퀴즈, 줄거리를 잔뜩 늘어놓는 독서감상문이 주지 못한 즐거움을 아침독서가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냥 읽고, 즐거워하고, 책을 좋아합니다. 아침독서는 학교 독서환경에 이슬입니다. 아침마다 아이들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줍니다.
아침독서는 시작점입니다. 아침독서가 정착되는 수준을 넘어 책으로 삶을 이야기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책 읽고 독서감상문 쓰는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토론을 해야 합니다. 독서토론을 하면 말하고 들으며 저절로 배웁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듣고, 다른 사람과 삶을 나눕니다. 합리성을 갖춰 자기를 주장합니다. 독서토론을 하면 글을 쉽게 씁니다. 줄거리를 넘어 깊이 뿌리를 내리는 귀한 기회입니다.
독서토론을 하려면 질문을 준비해야 합니다. 질문을 잘하면 설명하지 않고도 가르칩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창비>으로 독서토론을 해봅시다. 주인공 형제는 ‘사자왕 형제’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형 요나탄은 사자처럼 용감하지만 동생 카알은 겁쟁이입니다. 전혀 용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자왕 형제로 불립니다. 그래서 ‘별명’을 토론 주제로 잡았습니다.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요?
저는 3단계로 질문합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대답할 수 있는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긴장을 풀고 토론이라는 중압감을 이겨내게 합니다. <배경지식에 관한 발문>이라고 합니다. 1. 가장 듣기 괜찮았던 별명을 소개해주세요. 왜 그 별명이 마음에 드나요? 책 내용을 잘 몰라도 별명 이야기라 편하게 말합니다. 저도 별명을 말하고 아이들도 맞장구를 치며 별명과 관련된 경험을 떠올립니다. 책 내용과 관련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1-1) 요나탄은 동생 카알 레욘을 스코르빤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부를까요? 1-2) 카알은 형이 불러주는 별명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1-3) 이 별명 외에 다른 별명은 무엇인가요? 세 질문은 책을 읽어야 답합니다. 독서토론에서 책을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건 기본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3단계 ‘개인 삶, 사회 현상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1-4) 스코르빤과 사자왕이라는 별명은 카알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1-5) 카알의 별명은 사자왕입니다. 카알은 겁쟁이처럼 행동하며 사자왕에게 어울리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불러주어야 할까요? 실제로 카알과 함께 지낸다면 어떤 별명을 부르겠습니까? 두 질문은 마지막 질문을 하기 위해 꺼냈습니다. 1-6) 카알은 사자왕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겁쟁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사자왕처럼 행동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전혀 사자왕처럼 보이지 않는 아이가 사자왕이 될 수 있을까요? 이걸 “한 사람의 미래는 현재 드러나 보이는 능력에 달려있다.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로 바꿔 교차쟁점토론(찬반토론을 일정한 형식에 맞춰 진행하는 토론방식)을 하면 더 재미있습니다.
별명을 말하며 편하게 시작한 이야기가 ‘무엇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가?’로 이어집니다. 겁쟁이처럼 보이는 아이라도 사자왕으로 바라보고 기대하며 기다리면 변할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책에서는 겁쟁이 카알도 사자왕이 됩니다. 공부 못하거나 부족한 아이도 사자왕이 됩니다. 정말 그렇다면 부족해 보이고 친구들이 싫어하는 아이를 멀리하지 말아야겠죠. 사자왕이 되리라 기대하고 격려해야겠죠. 실제로 이렇게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토론하면서 마음이 바뀝니다. 저자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아이들을 워낙 좋아해서 어른을 이기는 아이 ‘삐삐’를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자왕 형제도 같은 뜻으로 만들어냈다고 봅니다.
어린이용 책으로 청소년, 어른도 독서토론을 하면서 깊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나비를 쫓는 아버지(현덕, 효리원)’는 그림책이지만 어른들이 울면서 토론하게 만듭니다. 그림책을 나누는 어른들 모임도 있습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도 초등 고학년 대상 책이지만 질문을 잘하면 청소년과 어른들도 토론할 수 있습니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2. 여러분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악당은 누구입니까? 한 중학교 여학생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성추행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좋지 않은 경험을 해서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들도 생각지 못한 대상을 ‘악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냥 토론이라면 말하기 어려울 텐데 등장인물에 감정을 투사해서인지 솔직하게 말합니다. 2-1) 텡일(책에 등장하는 악당)이 한 나쁜 짓을 모두 말해조세요. 텡일은 왜 그렇게 나쁜 짓을 할까요? 2-2) 텡일이 나쁜 짓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2-3) 텡일은 죽어 마땅하다.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 2-1, 2-2는 2-3을 나누기 위한 사전 질문입니다. 곧바로 2-3을 물으면 토론이 너무 쉽게 끝나거나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책 내용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2-3을 물으면 일정한 범위 안에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2-3은 선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불행, 악한 사람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 모습으로 이어졌습니다.
교사모임이나 어른들 모임에서 나누는 질문입니다. 2-4) “하지만 나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자네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인데도 적을 못 죽인단 말인가?”, “아무튼 목숨을 빼앗는 것만은 못 하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자네 같다면 죄악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텐데.” 나는 반대로 모든 사람이 요나탄 형 같다면 죄악 따위는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했습니다.(259쪽) 카알의 말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2-4)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은 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이다. 독일 SS중령으로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 전범으로 수배 중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 이름을 바꾸고 15년 동안 살았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었다. 재판 당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1962년 5월 31일에 처형되었다. 아이히만을 처형한 것은 정당한가요?
4월에 포항교사모임에서 이 질문들로 직접 토론하면서 독서토론을 가르쳐드렸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 선생님들은 토론을 배운다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한껏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자기 이야기와 세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나누었습니다. 토론을 끝내고 돌아가면서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토론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두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아이들이 멍하게 있다면 질문을 잘못한 거라 생각하세요. 질문을 바꾸면 아이들이 반응합니다. 또 하나, 강요하지 말고 마음을 이끌어내세요. 마음을 이끌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