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수업 사례/초등 5~6학년과 토론한 기록

원고 13. 아무리 명작이라도 줄거리만 읽으면 졸작이 남는다.

책뜰안애 2020. 7. 26. 19:06

대상도서 : 15소년 표류기, 비룡소

15소년 표류기는 <80일간의 세계 일주><해저 2만리>를 지은 쥘 베른 작품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름난 소설이어서 세계 명작 시리즈에 꼭 들어갑니다. 독서반 아이들도 이미 몇 명이 읽었다고 합니다. 원작을 읽은 아이는 얼마나 될까요?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 출판사에서 적당히 줄여서 낸 책을 읽었습니다. 레미제라블이 영화로 나왔을 때 기대하며 보았습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어야 했는데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니 실망이 큽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줄여서 편집하지 않으면 10시간 분량이 되었을 테니까요.

원작을 줄여놓은 책은 편집자의 책입니다. 줄거리를 바꿀 수 없으니 설명과 묘사를 뺍니다. 중심 줄거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사소한 이야기도 빼야 합니다. 세부묘사가 빠진 소설은 읽는 맛이 완전히 다릅니다. 화학조미료 넣어서 흉내냈지만 구수한 맛이 사라진 음식과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원작을 줄여서 책을 내놓는 까닭은 아이들이 줄거리 중심으로 책을 읽기 때문입니다. 복선과 암시를 빼버리고 편하게 읽게 만들어야 많이 팔립니다.

독서반에서 아이들에게 토론할 질문을 스스로 만들라고 하면 저도 생각하지 못한 좋은 질문을 만듭니다. 깊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저를 놀라게 합니다. 글도 잘 씁니다. 그렇지만 책을 읽을 때는 줄거리가 우선입니다. 더 좋은 능력을 많이 갖고 있지만 줄거리를 읽어내는 수준을 뛰어넘기가 어렵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책은 내용이 마음에 들어야 끝까지 읽습니다. 내용은 줄거리입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줄거리 중심으로 글을 읽습니다. 이 습관을 고치려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하고 글을 씁니다. 꾸준히 하면 줄거리를 읽는 수준을 넘어서리라 믿고 계속 이야기를 나눕니다.

쥘 베른이 이름난 사람이고 15소년 표류기도 명작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미 150년 전 작품입니다. 내용이 단순합니다. 토론하지 않으면 15명이 폭풍우를 만나 섬에서 2년 반 살다가 구조되는 이야기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면 재미있는 책재미없는 책으로는 구분하지만 좋은 책나쁜 책, 의미 있는 책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읽고 줄거리를 알고 끝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하면 책을 깊이 읽습니다. 무조건 교훈을 찾으려고만 하지 않습니다. 깊이 느끼건, 날카롭게 분석하건 줄거리를 읽는 수준과는 견줄 수 없이 발전합니다. 15소년표류기를 읽고 이렇게 나눴습니다.

1. 분석 : 15소년은 폭풍우를 만났지만 아무도 안 죽습니다. 아이들은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나지만 모두 잘 헤쳐 나갑니다. 제규어도 단칼에 죽이고, 바다표범을 잡아 등잔으로 쓸 기름을 만들기도 합니다. 배를 분해하고 뗏목을 만듭니다. 도르레를 설치해서 무거운 물건을 뗏목에 싣습니다. 사냥도 잘하고 긴 겨울도 아무 사고 없이 버팁니다. 대포를 쏘면 백발백중이고 해적을 만나도 아무도 안 죽습니다. 당연히 해적은 모두 죽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우연을 찾아보니 너무 많습니다. 줄거리를 읽을 때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우연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이 웃습니다.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이거 너무 유치한 이야기잖아라고 합니다.

2. 비교 : <영국의 기숙학교는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자율권을 주고 따라서 아이들은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이것이 학생들의 장래에 매우 좋은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이 철없이 지내는 시간이 더 짧아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양교육과 지식 교육이 함께 이루어진다.(62)>라는 문장으로 우리나라 교육제도를 토론했습니다. 로알드 달이 지은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에 나오는 영국 기숙학교의 모습과 견주어 보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교육 받은 우리가 표류를 한다면 15소년처럼 할 수 있을까도 나누었습니다. 중학교에 가기 직전이라 중학교 교육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3. 인기투표 : 이 시간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려고 가장 마음에 드는 아이는 누구냐?’ 물었더니 브리앙, 고든, 도니펀, 쟈크를 말합니다. 여자 아이들에게 애인으론 누가 좋을까?’ 물었다가 토론교실이 콘서트장처럼 변해버렸습니다. ‘도니펀 잘생기지 않았니?’, ‘귀족이니까 돈도 많을 거야!’, ‘까칠한 게 멋있어하며 도니펀을 지지합니다. 몇몇은 다정하고 친절한 브리앙과 사귀는 것처럼 말합니다. 브리앙은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재미는 없을걸!’ 했더니 도니펀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남자는 역시 잘생겨야 해!’하며 깔깔댑니다.

4. 새로운 상상 : 브리앙과 도니펀이 갈등을 일으키다가 도니펀이 아이 3명과 함께 떠나잖아. 쥘 베른은 아이들이 돌아와 함께 지내는 이야기로 만들었지만 실제라면 어떨까? 실제로 고집 세고 콧대 높은 도니펀이 무리에서 떠난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미워하다가 총을 쏘며 싸웠을 것이다’, ‘도니펀이 브리앙을 해칠 것이다’, ‘도니펀이 해적들을 불러들여 브리앙 편에 든 아이들을 몰아낼 것이다에 이어 도니펀이 동쪽 동굴에 정착한 다음 살기 편하게 만들어서 브리앙 편에 있는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브리앙이 용서를 빌며 찾아와서 부하가 되겠다고 할 때까지 수를 쓸 것이다는 의견까지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희들 작가다. 지금 말한 식으로 글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있다고 했더니 무슨 책이냐고 묻습니다. 다음 달에는 읽자고 조른 그 책은 파리대왕입니다. ‘파리대왕은 아이들에게 어렵습니다. 그래도 계속 읽자고 합니다.

<분석>은 제가 주로 해줬습니다. 줄거리를 읽어내는 아이들은 책을 분석하지 못합니다. 제가 말해주고 나서야 비로소 , 그렇구나!’ 합니다. <비교>는 함께 나누었습니다. 로알드 달 시대 이야기는 제가 해주었고, 현재 학교 모습은 아이들이 주도했습니다. <인기투표>는 완전히 아이들 차지였습니다. 저는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새로운 상상>을 할 때는 질문만 했습니다. 토론하면서 아이들 마음은 우주와 같다. 잘 끌어내기만 하면 넓고 새로운 생각으로 끝없이 뻗어나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소년 표류기로 토론하면서 파리대왕을 끌어냈으니 이렇게 생각해도 되겠지요!

700쪽이나 되는 분량이 부담스러워서 350쪽 정도의 요약판을 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줄거리는 알겠지만 문장과 복선, 묘사와 긴장을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겁니다. 장면을 눈앞에 떠올리기 어려웠을 테고 유치한 이야기가 되었겠죠. 위에서 인용한 62쪽 문장은 줄거리에 영향을 주지 않으니 사라졌을 겁니다. 그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비교하며 토론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인기투표 역시 불가능합니다. 700쪽 분량에는 당시 삽화를 넣었지만 350쪽에는 그렇지 못하겠지요. 도니펀이 잘생겼다는 걸 알 수 없으니 아이들 모두 브리앙을 뽑을 겁니다. <새로운 상상>도 안 됩니다.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묘사와 설명이 없는 책을 읽으면 파리대왕은 없습니다.

책을 나눠주었을 때 아이들은 이렇게 두꺼운 책은 처음이에요.’, ‘400쪽 넘는 책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했습니다. 그렇지만 1주일이 지나고 다시 만났을 때는 ‘700쪽도 별 것 아니네요.’라고 합니다. 두께는 책읽기에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줄거리만 읽는 책읽기가 더 걸림돌입니다. 제대로 읽고 여럿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펼쳐야 합니다. 그렇게 펼쳐낸 생각들 가운데 하나를 붙들어 글을 쓰며 정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새로운 명작을 만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