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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12. 발버둥을 쳐서라도 줄거리를 뛰어넘자.

책뜰안애 2020. 7. 19. 18:26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다니엘 페나크는 <소설처럼>이란 책에서 책을 읽는 이유를 20가지 이상 말합니다. 책은 읽는 사람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과 부모님들은 한두 가지 이유 때문에 책을 읽고, 대부분은 공부에 도움이 되기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 책을 읽으면 주로 내용을 얼마나 아느냐를 생각합니다. 책을 읽고 알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간추리는 걸 줄거리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핵심내용과 주제 찾기를 가르칩니다. 학원에서는 더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책을 읽으면 줄거리를 먼저 생각합니다. 아니, 줄거리만 생각합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들은 책을 줄거리로 읽습니다. 독서감상문에서 줄거리가 빠지지 않습니다. 줄거리 이상을 보아야 하지만 안 됩니다. 저마다 다른 생각과 느낌을 적어야 하는 감상문이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처럼 비슷해지는 까닭은 줄거리 때문입니다.

독서감상문을 쓰면 아이들이 어떤 목적으로 책을 읽었는지 금세 드러납니다. 공부를 위해 책을 읽은 아이들은 줄거리만 씁니다. 글을 너무나 정답처럼 써서 재미도 감동도 없습니다. 자기 삶에 적용하기는커녕 자기 생각이 없다는 듯이 글을 씁니다. 줄거리를 빼고 글을 쓰라고 하면 아예 글을 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난 생각이 없어요. 줄거리를 빼고 어떻게 쓰라고요?’라는 확신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어렴풋이 글에 드러낸 아이만의 생각을 붙잡아 수없이 칭찬을 해줘야 정말요?’ 합니다.

줄거리는 글을 이끌어가는 기둥이지만 기둥만으로 건물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정말 좋은 건물은 구석구석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공간, 선명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간,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공간…… 추억이 서린 공간이 많을수록 좋은 건물입니다. 문장이 이런 공간을 만듭니다.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하나가 공간을 만듭니다. 문장 하나를 붙들고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아픈 기억이 치유되고, 가슴 따뜻하게 희망이 부풀기도 합니다. 줄거리를 읽을 때와는 다른 오묘함이 다가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여기에 이르지 못합니다. 책을 읽으며 줄을 긋는 어른을 본 적도 없고, 문장에 젖어 문장을 외우며 문장을 인용하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주변에 온통 줄거리를 잘 말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사람들뿐이어서 문장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책에 나온 문장으로 이야기를 나누면 아이들은 이런 말이 책에 있었어요?’라고 합니다.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는 외롭게 지내던 제시가 이사 온 레슬리와 만나 숲에 비밀 왕국 테라비시아를 만들고 비밀스런 우정을 나누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책입니다. 우정, 외로움, 이별, 오해를 겪어가는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독서반 아이들도 아주 좋아했습니다.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도 많이 나옵니다. 몇 개만 소개하겠습니다.

* <이따금 제시는 이 많은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무척 외로웠다. 심지어 딱 한 마리였던 수탉마저 얼마 전에 죽어 버렸다.> 아빠는 늦게 들어오시고 집에는 엄마, 누나 둘, 여동생뿐입니다. 조용한 제시와 달리 여자들은 모두 시끌벅적 떠들어댑니다. 제시를 무시하고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제시는 무척이나 시끄러운 집에서 늘 외롭습니다. ‘외로움조용함이나 쓸쓸함과는 다릅니다. 여러분도 제시와 같은 마음을 가진 적이 있나요?

* <레슬리는 테라비시아에 있을 때 내 마음속 벽을 허물고 그 너머에 있는 빛나는 세계를 보여 주려고 애썼던 거야. 거대하지만 무섭고, 아름다우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세계. 모든 것을 조심히 다루어야 하는 곳> 레슬리는 테레비시아를 만들고 제시를 초대했습니다. 이 문장은 테레비시아를 만든 레슬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레슬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제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 제시는 <이제 내가 밖으로 나가야 할 때야. 이제 레슬리는 그곳에 없어. 이제 내가 할 일은 레슬리가 내게 빌려 준 꿈과 힘을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세상에 되갚는 거야. 앞에 있는 두려움은? 제시는 두려움들이 모두 뒤에 있다고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 그런 두려움은 당당하게 맞서 이겨 내야지. 그리고 그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서도 안 돼>라고 말합니다. 레슬리를 떠나보내고 제시는 레슬리가 보여준 꿈과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갚겠다고 결심합니다. 친구의 죽음이 준 두려움에 맞섭니다. 레슬리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을까요?

문장을 읽고 서로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아이들은 줄거리를 뛰어넘습니다. 이런 순간이 저를 흥분시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바로 이 순간을 누리기 위해 독서반을 합니다. 제 마음을 함께 느끼는 아이들은 그저 좋아서독서반에 옵니다. 서로 다른 글을 쓰며 서로의 생각을 인정합니다. 도중에 독서반에 들어와 분위기를 모르는 아이가 얘들은 글을 잘 쓰지만 저는 글을 못 써요하며 의기소침하면 뭐지?’ 하며 쳐다봅니다. 독서반은 누가 누구보다 잘한다는 걸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글은 서로 다른 생각을 표현하는 공간일 뿐입니다.

찬반토론도 하고, 수다 떨듯 이야기를 나누고, 물고 늘어지는 주고받기 대결도 하고난 뒤에 글을 썼습니다. 아이들이 쓴 글의 첫 문장과 끝 문장은 이렇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아이들 일에 사사건건 물어보거나 참견을 한다. ~ 제시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싶어 하거나 사생활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자신만의 공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제시, 친숙한 마을과 친구들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갑자기 오게 된 레슬리 두 친구에겐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죠. 괜찮네요!

우리들은 살면서 수많은 유행들을 거처 지나간다.~ 유행으로 인해 다른 개성들은 묻히게 되므로 넓은 포용력으로 편견을 깨고 유행을 너무 뒤따라가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 “요즘 사회에는 독특하고 남들과 다른 취향, 성격 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우리와 다른 독특한 취향, 성격 등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 **과 오**는 독서 논술을 썼습니다. 형식과 내용 모두 다르지만, 그래서 더 좋습니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 가족은 4명이다. ~ 어쨌든 나는 우리 가족이 좋다. (**)”, “세상에는 여러 가족이 있고, 가족의 구성원들 모두 성향이 다르다. ~ 앞으로는 돈과 성공만을 따라가는 가족보다는 화목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족이 되면 좋겠다. (**)” 가족을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있네요. 레슬리는 이해하지 않는 가족 사이에서 힘들어했으니 좋네요. “제시와 레슬리도 혼자 있었을 때는 고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 그런 친구가 생기면 나도 그 친구를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 아이들이 전**처럼 생각하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기대한 마음을 표현한 사람은 전**뿐이지만 그래서 더 좋습니다. 아이들이 제 생각에 제한 받지 않고 책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는 것이니까요.

줄거리는 아이들 생각을 정답으로 제한시킵니다. 여러 가지 생각 사이를 넘나드는 아이들에게 줄거리를 요구하면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책에서 멀어집니다. 우린 모두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 생각을 존중하며, 내 생각을 들어주는 사람들 사이에 아이들을 세워주세요. 줄거리가 아니라 책이 주는 온갖 생각을 재잘대며, 느낌을 표현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