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뜰안애 2020. 7. 19. 18:24

<위험한 비밀편지>를 나눠주자 아이들이 첩보추리소설을 떠올리며 즐거워합니다. 그동안 제가 나눠주는 책이 꽤나 무거웠나 봅니다. 좀 가벼운 책을 읽는다 해도 아이들 삶이나 사회 현상과 연결지어 고민을 끌어내려고 했으니 무겁게 느꼈을 겁니다. 쉬운 책이건 어려운 책이건 토론하다 보면 빠져들어 즐거워하지만 새 책을 정할 때면 위험한 비밀을 다루는 내용을 기대합니다. 새 책을 정할 때마다 가볍고 편한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작동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받아갈 때 표정이 아주 밝습니다.

잔뜩 기대했던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모였습니다. 추리소설이 아닌 건 참을만하지만 내용이 너무 허무하답니다. 비밀편지가 계속 이어지리라 기대했는데 편지 4번 쓰고 끝이라니 황당하다고 합니다. 바로 앞서 읽은 <책벌레들의 비밀후원작전>에 나오는 영국 아이들은 아프리카까지 찾아가지만 이 책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낙제위기에 처한 애비가 낙제를 받지 않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아이와 펜팔을 하다가 허무하게 끝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사디드라는 남자아이와 미국에 사는 애비라는 여자아이가 편지를 주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애비는 유급 위기에 처해 특별과제로 펜팔을 선택합니다. 애비는 아프카니스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숙제를 해내기 위해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마을어른들이 모여 회의를 엽니다. 적대국인 미국, 게다가 여자아이와의 편지라니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를 모르면 <위험한 비밀편지>는 위험도 없고 비밀도 없는 이상한 편지가 됩니다.

독서반 아이들도 두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는 뉴스에서도 아프가니스탄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음식점을 찾아가는 것도, 여행을 하는 것도 배경지식이 풍부할수록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배경을 모르고 단순하게만 이해하면 토론과 적용도 단순해집니다. 그래서 배경을 이해하는 조별활동을 했습니다. ‘사디드와 애비가 사는 곳의 차이점을 최대한 많이 찾기시합입니다. 묻어가는 아이가 없도록 2-3명으로 팀을 나눠 상품도 걸었습니다. 기준도 알아서 정하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정한 기준은 종교, 전쟁상황, 기후, 경제 여건, 성차별, 정치방식, 전자기기 사용, 인구밀도, 인종, 언어, 산업, 음식, 화폐, 지형, 학교 모습입니다. 많이 찾기 시합답게 유치한 대답도 나오지만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이 얼마나 다른지 이해합니다. 편지가 위험비밀을 담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래도 두 나라를 멀게만 느끼기 때문에 우리 형편에 맞게 재구성했습니다. “우리가 위험비밀을 느낄만한 편지 상대를 찾아보자. 서울 아이들은 어떨까? 제주도는?” ‘북한이라고 말하면 이해할까요? 직접 북한 아이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는다면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최대한 비슷하게 느끼는 쪽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는 독서토론 발문을 적용으로 이끕니다. 책에만 담겨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어떤 모습으로 되살아날까 묻습니다. 그래야 그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내 이야기가 되면 독서감상문도 내 느낌을 쓰고, 독서논술도 내가 살아가는 사회를 반영한 생각을 담아 씁니다.

이어서 세 가지 논제로 찬반토론을 했습니다. 1. 유급제도가 필요하다. 2. 사디드가 편지를 보낸 일은 정당하다. 3. 애비가 사디드에게 받은 편지를 감추고 동생 아미라의 편지만 게시판에 걸어놓는 것은 선생님과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인 논제는 유급제도입니다. 제가 생각지 못한 근거를 꺼내서 설득합니다. 찬성의견이 더 많습니다. 애비는 머리는 좋지만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몰라서 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유급된다는 말에 공부를 했으니 유급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동생들과 잘 어울려 놀기 때문에 한 해 더 배워서 알고 가는 게 낫다고도 합니다. 알아야 할 내용을 모르고 올라가면 결국 좌절한다는 의견도 냅니다. 반대편은 애비가 잘하는 것을 격려하지 않고 성적으로만 평가하는 건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오두막을 만들고 바깥놀이를 잘하는 장점을 살려주어야지 이미 아는 것을 왜 다시 해야 하는지몰라서 숙제를 하지 않은 애비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유급을 두고 말한 내용은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세 시간을 하면서 우리 삶과의 적용점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글로 쓸 만큼 이야기를 충분히 나눴지만 아이들에겐 부족합니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거나,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제 질문에 대답은 했지만 글로 쓰는 건 다릅니다. 여러 가지 질문을 연결지어 하나의 주제로 이어내는 건 어렵습니다. 전체를 넓게 보는 눈을 가져야 쉬운데, 아이들에게는 아직 어렵습니다. 제가 그렇게 질문하는 이유, 앤드루 클레먼츠가 <위험한 비밀편지>를 쓴 이유를 깨달을 정도는 아닙니다. ‘유급제도로 독서논술을 쓰는 주제가 아니라면 적당히 쓸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편지를 소개해보자고 했습니다. 주로 가장 친한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를 말합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에 갔을 때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데 몇 아이가 맞장구를 칩니다. 아이들 눈빛이 빛납니다. 잠시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지낼 때 돌봐주고 마음을 나눠준 사람들을 잊지 못한답니다. 사디드와 애비가 일상을 벗어난 경험을 편지로 나눴듯이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이런 마음을 일으키나 봅니다. ‘소중함따뜻함을 이야기하는 아이들 표정과 몸짓에 저도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느낌을 알고 있구나!’

마지막으로 빠르고 차가운 이메일, 손편지로 바꿔드려요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메일로 편지 내용을 보내면 손편지로 바꿔서 보내주는 서비스에 관한 기사입니다. 손으로 쓴 글씨가 더 좋다는 말을 아이들이 합니다. 독서반 아이들은 학원에 많이 다니지 않습니다. 대도시에서 사는 것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쁜 옷과 최신 스마트폰을 원하지만 따뜻한 이웃소중한 친구아름다운 추억의 가치를 압니다. 사람들은 흥미롭고 새로운 일들을 원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른다. 지금 곁에 있는 친구, 가족, 무심결에 지나친 작은 풍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막상 자신의 곁을 떠나면 그때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고 부수고, 깨뜨리고, 새로 개발하고…… (중략) 그저 많은 사람들과 만나 포장된 마음만을 보여준다. 포장된 마음을 끝없이 보여주며 진심을 감추는 사람들. 그건 로봇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이가진) 아이가 쓴 글에 마음이 뭉클합니다.

<위험한 비밀편지>위험비밀에 대한 기대에서 시작해서 허무함을 지나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따뜻함으로 끝났습니다. 이런 이야기로 흘러올지 저도 몰랐습니다. 책을 읽고 내용파악을 위한 첫 시간 발문을 준비하면서 토론이나 글쓰기 방향을 정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제 의도와 다른 곳으로 흘러갑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방향을 따라갑니다. 준비해간 발문지를 접어두고 아이들 흐름을 따라갈 때도 많습니다. 아이들은 저에게 배우려고 독서반에 오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배우려고 독서반에 갑니다. 책을 좋아해서 저를 찾아오는 아이들을 참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