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청소년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책뜰안애 2020. 7. 2. 07:01

1주일에 한 번씩, 학교 밖에서 책 좋아하는 중학생들과 독서반을 합니다. 책 한 권을 90분씩 4, 6시간 동안 나눕니다. 내용을 파악하고 토론하고 글을 씁니다. 깊이 읽고 곱씹어 진한 맛을 보려면 6시간으로도 부족합니다. 5년 동안 독서반을 하면서 학생들이 가장 좋아했던 책 중에 하나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입니다. 원제는 <작은 나무의 교육>입니다.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인 작은 나무를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백인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냅니다. 백인들은 편견과 탐욕에 물들어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을 처리해야 할 인디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훌륭한 문화와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땅을 빼앗고 가족을 죽이고 공동체를 무너뜨렸습니다. 꿈 꿀 수조차 없게 만들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소용돌이 속에서 할아버지는 숲에 숨어 술을 만들어 팔면서 살아갑니다. 손자인 작은 나무를 가르치면서 똑똑하고 발달한 문명을 자부하는 백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지 풍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편견과 탐욕에 물들어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작은 나무에게 자신이 어릴 적에 보았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남북 전쟁이 한창일 때 산속 깊은 골짜기 빈 터에 있던 오두막에 도망자가 찾아듭니다. 야위고 피곤에 찌든 여자, 여위어서 노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 여자애 둘, 누더기가 다 된 더러운 회색 군복(남군 군복)을 입은 다리 하나가 잘려나간 남자, 다리를 질질 끌며 간신히 걸어 다니는 흑인 노인 한 명입니다. 노새에게 채우는 가죽 끈을 자기들 몸에 두르고 한 번에 두세 걸음씩 겨우 움직이며 땅을 갈아엎습니다. 꼬꾸라지고 넘어지기만 할 뿐 일이 진척이 없지만 그들은 이 땅에 기댑니다. 그들에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같은 땅이었을 겁니다. 이때 연방군(북군) 병사들이 지나갑니다.

다음날 늙은 노새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노새가 오고 사흘 째 되는 날 밭의 1/4 정도를 갈아엎습니다. 나흘 째 되는 날 연방군 하사가 씨앗용 옥수수를 두고 갑니다. 다음날부터 날마다 일리노이 주 출신의 농부인 하사가 근무시간이 지난 뒤에 찾아와 쟁기를 끌고 함께 일합니다. 사과나무 묘목을 가져와 심은 뒤에 하사가 말합니다. “좋은 땅입니다.” 외다리 남자가 이어서 그래요. 좋은 땅이지요!” 라고 말하자 늙은 흑인이 제가 지금껏 길러본 중에서 가장 좋은 옥수수예요.” 라고 거듭니다. 소망을 갖게 해주고 살게 해줄 땅과 옥수수만큼 좋은 건 없겠지요.

갈 곳 없이 떠돌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쉴 곳을 주는 땅은 정말 좋은 땅입니다. 그 땅은 하나밖에 없는 다리로, 힘이 다 빠져나간 팔로 땅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어줍니다. 그들은 어느 빈 터에 꿈을 겁니다. 읽으면서 이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년인 할아버지가 메기를 갖다 주는 모습을 보면서 인디언, 흑인, 백인이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땅이 다툼과 탐욕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며 서로에게 소망이 되어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늦은 오후에 열 명이 넘는 감독관들이 말을 타고 옵니다. 다리 없는 백인과 야윈 여자, 노인 같은 여자아이, 다리를 끄는 흑인 노인이 갈아엎고 옥수수를 심으며 소망을 키워가는 이곳에 붉은 깃발을 꽂습니다. 이 땅을 탐낸 부자가 땅주인이 도저히 낼 수 없는 세금을 부과하고 땅을 빼앗아갈 때 쓰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새로운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정치가의 하수인들입니다. 땅을 갈던 세 사람은 감독관들에게 대항합니다. 세 사람에게 이 땅은 삶을 온전히 걸만한 마지막 소망과 같기 때문에 이기지 못하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땅이 누군가에게는 존재 자체와 같다는 걸 알고 있는 하사도 함께 대항합니다.

감독관들은 외다리 남자와 늙은 흑인, 하사까지 죽이고 폭동이라고 속입니다. 폭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이 재선되어야 하며, 폭동에 대비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고 떠들어댑니다. 어느 빈 터에 꾸었던 꿈이 무너지고 돈 많은 부자가 또 하나의 재산을 챙깁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묻습니다. “10억 벌기요!” 10억은 벌고 싶은 돈의 액수가 될 수는 있지만 꿈은 아닙니다. 꿈은 황무지에 곡식이 넘실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심은 사과나무에 꽃이 피어 열매를 따먹는 날을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흑인, 인디언, 백인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게 만드는 게 꿈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일지라도 기대하게 만드는 게 꿈입니다. 10억 벌어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건 꿈이 아니라 탐욕입니다.

저는 강원도 삼척에 삽니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 마당을 넓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마당에 붙은 언덕과 비탈을 사려고 주인을 알아보니 도시 사람입니다. 나무도 심지 못하고 밭을 일구지도 못하고 집을 지을 수도 없는 경사 급한 비탈을 도시 사람이 왜 샀을까요? 터무니없이 돈을 많이 달라고 해서 교회 마당을 넓히지 못했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꿈을 불어넣었겠지요. “괜찮은 땅이 있습니다. 몇 년 기다리면 돈이 될 겁니다.” 하는 꼬드김에 넘어가 땅을 샀을 겁니다. 한 번이라도 내려와서 봤다면 도로와 교회 사이에 있는 쓸모없는 비탈을 사지 않았을 텐데 지도만 보고 샀을 겁니다.

어느 빈 터에 꿈을 걸었던 세 사람이 꿈을 이루며 살 수 없을까요? 팍팍하게 계산기 두드려 돈으로 가치를 정하지 말고 꿈으로 가치를 정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꿈으로 가치를 정한다면 어느 빈 터는 세 사람이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기엔 현실이 너무 팍팍하지요! 경쟁사회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 미련하게 보일 겁니다. 현실을 무시한 환상이라는 걸 저도 압니다. 그러나 이건 순진한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 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263) 그럼 그 땅은 세 사람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그들은 그곳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저는 교회 비탈에서 총싸움을 하고 스파이 놀이를 했습니다. 눈을 쓸어내고 아카시아 나뭇잎을 잘라 놀았습니다. 비탈은 제게 추억의 장소입니다. 세 사람이 땅을 일구며 미래를 꿈꾼 것처럼 저는 비탈을 보며 추억에 잠깁니다. 땅 주인에겐 팔리지 않는 골칫거리인 그 땅이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고 꿈입니다. 땅이 이웃과 함께 발을 딛는 곳, 추억을 함께 나누는 곳이 아니라 투자 대상으로 여겨지는 사회는 정상이 아닙니다. 갑자기 땅값이 올라서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이상을 받으면 좋은 걸까요? 뛰어놀던 골목 잃고, 돌아갈 고향 빼앗기고, 추억이 깃든 공간을 내어주는 대가로 돈을 더 받는 건 좋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에게 꿈을 돈으로 계산하는 사회를 물려주면 안 됩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고 권민하(1 )가 쓴 글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랑한다는 표현 대신 이해한다.’고 하신다. 이해하면 서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서로 이해하는 가족이 적다. 부모와 아이는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는 자기가 열심히 일하는데 아이는 놀고 공부도 안 한다고 한다.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는 공부하는데 부모가 매일 화를 내고 논다고 한다. ~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돈과 문명에 젖은 사람들은 허무함조차 느끼지 못한다. ~”

돈과 문명에 젖어 허무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느 빈터에 꿈을 심지 못합니다. 외다리, 늙은 흑인, 가난한 아낙네가 땅을 잃을 때 어떤 마음일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마음이 아팠다. 할아버지는 네 기분이 어떤지 잘 안다. 나도 너하고 똑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다. 사랑했던 것을 잃었을 때는 언제나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지만 그렇게 되면 항상 텅 빈 것 같은 느낌 속에 살아야 하는데 그건 더 나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어느 빈 터에서 꿈을 꾸는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