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8. 실패도 의미가 있을까? (서찰을 전하는 아이)
제가 근무하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뒤늦게 독서반을 열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재잘거리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한 학년에 반이 두 개밖에 없는 작은 학교라 아이들이 저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처음 만난 어색함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서모임을 처음 하는 아이들이라 읽기 쉬운 책을 골랐습니다. ‘서찰을 전하는 아이’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던 1894년 전후 이야기입니다. 분량이 적당하고 내용이 흥미진진합니다. 책이 어땠느냐고 물으니 재미있다고 합니다. 5학년 아이는 두 번 읽었고 6학년들은 한 번 읽고 대충 다시 한 번 보았다고 합니다. 다 읽었다고 해도 내용을 잘 모릅니다. 독서반을 오래 하다보니 아이들이 말하는 ‘잘 읽었다’와 제가 원하는 ‘잘 읽었다’가 다르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늘 정말 잘 읽었는지 확인을 합니다.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려고 내용을 확인하는 문제 14개를 내줬습니다. 대충 읽어도 맞출 수 있는 문제 5개, 한 번 읽으면 찾을 수 있는 문제 5개, 집중해서 읽어야 맞출 수 있는 문제 5개를 주관식으로 냈습니다. 저는 항상 첫 시간에는 내용 확인 문제 풀이를 합니다. 문제의 2/3이상을 모른다면 그날은 내용 확인에 관한 이야기만 계속 나눕니다. 책 내용을 제대로 모르면 책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아무리 수준이 낮아도 책 내용에 바탕을 두고 말하면 독서토론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대화 수준이 높아도 책 내용과 상관 없으면 독서토론이 아닙니다.
문제를 풀어보니 한 아이만 제대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독서모임 시간 100분 동안 내용 확인만 했습니다.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물으며 앞뒤 내용을 연결지었습니다. 도중에 아이들 경험과 연결지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책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문단에 줄을 그어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자기가 골라온 내용을 소개하며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를 말했더니 ‘책에 이렇게 좋은 내용이 있었나?’합니다. 왜 이걸 골랐는지 말하고 아이들 의견을 들었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고 때로는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는 겉표지 문장을 말한 아이도 있습니다. 줄거리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문장을 남길 수 있는 책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이어서 찬반토론을 했습니다. 다른 독서반을 할 때는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식 독서토론을 하고 세 번째 시간에 찬반토론을 합니다. 올해는 워낙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찬반토론을 먼저 했습니다. 세 가지 토론주제로 발문지를 만들었는데 너무 열심히 토론해서 두 가지 주제로 토론을 하고 나니 100분이 다 지났습니다. 첫 번째 토론 주제는 “아버지는 아들과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봉준 장군을 찾아가려고 한다. 한 사람을 살리려다가 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여러분이 아버지라면 서찰을 전하러 가겠는가? 안 가겠는가?”입니다.
독서모임을 처음 하는 아이들은 근거를 말하지 않고 ‘간다, 안 간다’라고만 말합니다. 가고 안 가는 이유를 물어도 아주 간단한 대답만 합니다. 배경을 충분하게 이끌어내지 않으면 단답형으로 말합니다. 자세하게 근거를 들어가며 토론하려면 쉬운 이야기부터 끌어내야 합니다. 토론을 하기 전에 토론을 이끌어내는 질문을 몇 가지 던져주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1) 아이는 서찰에 쓰인 글 뜻을 알아내기 위해 네 번 돈을 지불한다. 누구를 만나 얼마를 내고 알아내는가?
(아이들 대답을 들었습니다.)
2) 가난해 보이는 아이가 글씨를 묻는데 돈을 받고 알려준 사람들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하나? 받아들일 수 있나? 지나친
요구인가? (서로의 필요를 위해 거래한 것이므로 돈을 받는 게 정당하다고 대답했습니다.)
3) 가장 돈을 많이 쓴 때는 언제인가? (처음 거래할 때) 4) 아산에서 아이는 김진사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두 냥씩 받았다.
글씨를 알아내기 위해 쓴 돈과 비교할 때 노래를 불러주고 두 냥을 받은 것은 합당한가? 아닌가?
(김진사가 부자이기 때문에 합당하다는 의견과 노래 하나에 두 냥은 비싸다는 의견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네 가지 질문을 하면서 아이가 한 거래에 초점을 맞추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거래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거래는 무엇인가? 이유를 들어 말해보자.” 아산 도련님이 글씨를 알려주고, 아이가 노래를 불러준 거래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나쁜 거래는 ‘오호’ 두 글씨를 알려주면서 두 냥을 받은 장사꾼이라고 대답합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차별’을 중심으로 발문했습니다.
1) 아산에서 아이는 양반댁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가?
2) 당시 사회의 신분제도를 설명해 보자.
3) 요즘에도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귀하고 천한 사람으로 나누는가?
4)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차별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해보자.
5)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가장 큰 차별은 무엇인가?
6) 차별이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7) 차별을 없애기 위해 일하고 있는 단체를 소개해 보자.
4번 질문에서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열을 냅니다. 엄마가 성적으로 차별하고, 할머니가 남자인 오빠만 좋아하고, 언니만 좋아하고…… 성토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분노폭발’하거나 울어버릴 것 같아 말려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당하는 차별에 아이들은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차별은 잘 모릅니다. 아직 그 정도까지 생각하지 않았겠지요. 조선시대 신분차별과 남녀차별은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겪은 차별은 실제입니다. 실제는 머리에 있는 생각을 가슴으로 끌어내립니다. 느끼고 표현하게 만듭니다.
독서모임 첫 시간에 조선 후기 관리들과 농민들의 관계에서 차별이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도 ‘그런가?’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차별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그럴 수 있겠다’, ‘나라도 그렇게 했겠다’로 바뀌었습니다. 역사를 배우지만 누가, 언제, 어떤 일을 했는지만 알면 역사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동학농민운동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시험 끝나면 곧바로 잊습니다. 중국과 일본 군대가 왜 개입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일감정이 들끓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일본을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기까지 가진 못했지만 ‘서찰을 전하는 아이’가 한 걸음 더 내딛게 했을 거라 믿습니다.
아이들은 차별이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소망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전봉준’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겁니다. “아이가 서찰을 전해주어 김경천을 조심하라고 말했는데도 전봉준은 ‘나와 함께한 동지도 믿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하며 잡힌다. 전봉준은 죽을 줄 알면서 왜 피노리에 갔을까?” 이 질문은 어려운지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을 말해주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동료들이 계속 잡혀가는 걸 참을 수 없어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희생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서찰을 전하는 아이, 2편 원고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