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6. 고흐
저는 미술시간을 싫어했습니다. 그림은 고통을 주는 괴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미술가는 없었고 미술 관련 위인이나 책은 한 권도 안 읽었습니다. 교사가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아서 미술은 정말 가르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려라’ 외에는 할 말이 없어서 편하고도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감상’이 힘들었습니다. 느끼지 못하면서 ‘이 그림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한숨만 나옵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보며 감탄한다면 저도 태도를 고쳤겠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시골 촌놈들답게 사진과 가장 비슷하게 그려야 잘 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처음으로 ‘느낌’을 받았습니다. 램브란트는 그림을 5분 이상 들여다보게 만들었고, 저도 놀랐습니다. 네덜란드에 가서 풍차나 튤립이 아니라 미술관에서 원작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얼마 뒤에는 하버드 교수직을 내던지고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중증장애인을 돌본 헨리 누엔이 ‘탕자의 귀향’을 몇 시간이고 들여다 보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생긴 뒤로 가장 눈에 들어온 화가가 고흐입니다. 3-4학년들과 ‘해바라기를 사랑한 고흐(김미진, 파랑새어린이)를, 5-6학년들과 ’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염명순, 아이세움)‘을 토론했습니다. 저는 따로 ’안녕 내 친구 빈센트 반 고흐(김유리, 교학사)‘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반 고흐 지음, 예담)‘을 읽었습니다. 모르면 지나치지만 알면 보게 되고, 그러면 사랑하게 된다고 합니다. 고흐는 정말 멋집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고흐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기억에 나는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제가 어렸을 때와 달리 느낌을 풍성하게 나눕니다. 풍부한 표정을 담은 가셰의사를 좋아하는 아이, 붉은 수염이 인상깊이 남아있는 자화상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서로 겹치는 그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그림을 말합니다. 고흐가 가졌던 마음처럼 자신에게 와닿는 그림을 골라냈습니다.
고흐에게 좋은 영향을 준 일과 나쁜 영향을 준 일을 많이 찾는 시합도 했습니다. 찾은 내용 중에 3가지를 골랐습니다. 조카 이름을 빈센트 반 고흐로 지은 일, 동생 테오, 탕기영감을 만난 일, 고갱과의 만남, 의사 가셰를 만난 일이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고갱과의 만남, 청혼 실패, 가난, 정신병을 나쁜 일로 뽑았습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좋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밀쳐낸 사람들을 만난 것이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고 해도 고흐 역시 사람이었고 사랑과 이해에 목마른 영혼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이 고흐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고흐가 더욱 그림에 매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고흐를 읽고 ‘우리나라 위인전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나라 위인은 어려서부터 뭐든지 잘하고 뛰어나지만 고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위인전의 기본 법칙은 용꿈이나 호랑이 꿈을 꾸고 기대를 한몸에 품고 태어난 아이가 어려서부터 비범한 능력을 보이다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장군은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를 가져야 하고, 학자는 어린 나이에 어려운 책을 좔좔 읊어야 합니다. 자기 허벅지 살이라도 떼어주어야 효자가 됩니다.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고흐는 아이들이 보기에도 딱합니다. 되지도 않는 사랑에 목을 메고, 뒤늦게 그림에 빠져 세월만 낭비합니다. 돈이 되는 그림은 그리지 않고 고집 부리다가 인정받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래서 좋은 위인전입니다. 좌절하고 실망하고, 고민하고 애쓰는 보통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로봇 같은 대단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위인전은 좋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서며 애쓴 위인이 훨씬 좋습니다. 고흐는 그런 사람입니다. 게다가 고흐는 이상한 편집증까지 갖고 있습니다. 위대한 그림 뒤에는 고흐의 고뇌와 아픔이 들어있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고흐를 평가했습니다. 가족 관계, 이웃 관계, 친구 관계, 직장 생활, 이성 교제, 경제 자립, 그림 실력은 제가 정한 기준입니다. 아이들도 따로 기준을 정해서 성격, 지위를 평가항목으로 넣었습니다. 방송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답게 외모도 평가하자고 해서 함께 평가했습니다. 그림 실력은 점수를 좋게 주었지만 다른 기준은 들쭉날쭉입니다. 고흐가 잘생겼다고 10점 준 아이도 있고, 반대로 1점 준 아이도 있습니다. 테오를 생각해서 가족 관계를 9점 준 아이가 있는 반면에 부모를 힘들게 해서 낮은 점수를 준 아이도 많습니다. 늘 평가 받다가 다른 사람을 평가하니 재미있는지 연신 웃습니다.
한 항목씩 평가 결과를 발표하며 토론을 했습니다.
1. 고흐는 부모가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했다. 여러분이라면 부모님 뜻을 따를까?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까? (2명을 제외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2. 고흐 같은 아이가 전학 온다면 친하게 지낼까? 거리를 둘까? (한 명만 친하게 지내겠답니다. 고흐처럼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아이가 멋있다고 생각하며 고흐의 외모에 10점을 준 아이입니다.)
3. 여러분이 사장이라면 고흐 같은 직원을 붙들어둘까? 해고할까? (모두 해고하겠다고 합니다. 고흐의 태도를 이해하면
서도 돈을 버는 일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압니다.)
4. 고흐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해오는 사람이 있다면 받아줄까? 거절할까? (혼자만의 생각으로 자해소동을 벌이는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모두 거절한다고 말합니다. 고흐가 지금 태어나도 친구를 얻기는 어렵겠습니다.)
고흐의 가족관계를 이야기하며 ‘네 가족 관계는 어때?’ 묻습니다. ‘누구와 가장 갈등이 심해?’ 남자아이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가족 중에 한 사람과 갈등이 심하다고 말합니다. 함께 사는 형제, 자매, 부모 중에 한 명이 자신을 힘들게 한답니다. ‘짜증나게’ 해서 미치겠답니다. ‘그럼 너희들이 괜찮게 생각하는 한 사람과 함께 산다면 어떨까?’ 물으니 좋겠다고 팔짝팔짝 뜁니다.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자주 보고 가까이 있기 때문에 서로 찌르고 상처를 주는 거라고 말해도 일단 ‘짜증나게 하는 그 사람’보다는 좋을 거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까? 고흐처럼 한 가지 일에 미쳐서 살고 싶습니까?” 물으니 대부분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고흐가 워낙 독특한 예여서 한 가지에 미친 삶을 거부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시골아이들이어서 그런지 가족들과 화목하며 평안하게 지내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네요. 특별한 삶을 원한다고 말한 이가진(정라초등학교 6학년)은 이렇게 썼습니다. “고흐는 자기개성이 뚜렷한 사람이다. 한 가지에 꽂히면 미친듯이 그것에만 매달린다. 나는 그런 사람을 좋게 생각한다. ~ 사람들은 고흐의 이런 면을 이상하게 여기고,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모두 평범하기에 그렇다. 평범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이 뚜렷한 사람은 고흐를 이해해 줄 수 있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은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튀는 사람을 이상하게 느낀다. 그러나 지신의 세계가 따로 있는 사람은 자신처럼 개성있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잘 어울리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고흐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흐도 그저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독서반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합니다. 가진이는 어떤 점에서 특별한 삶을 살게 될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