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3. 줄거리만 보인다구요?
‘바보 온달’을 아시죠? 평강공주를 만나 똑똑해지더니 급기야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된 사람입니다. 멋진 왕자를 만나 행복해진 공주들 이야기는 참 많지만 온달처럼 여자를 잘 만나 성공한 남자이야기는 적습니다. 남자를 바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 생각 때문이겠지요.
바보 온달이 평강공주를 만난 건 좋은 일일까요? 바보 온달이 똑똑하고 용감한 장군이 되어 이름을 떨친 게 산에서 짐승들과 어울리며 바보처럼 사는 것보다 더 훌륭한 삶이냐는 겁니다. “그럼 좋은 대학 나와서 유명해지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면 좋지. 산에서 농사 지으며 조용히 사는 게 더 낫단 말입니까?”하고 반박할 수 있겠네요. 진짜 그런지 생각해보도록 안내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현주 작가가 쓴 ‘바보 온달(우리교육)’은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멋진 남자로 바꾼 게 정말 잘한 일인지 묻습니다.
이현주 작가가 쓴 ‘바보 온달’은 좀 다릅니다. 내용 앞과 뒤에 짧은 이야기가 붙어있습니다. 고장난 별을 고치는 어린 영혼이 고칠 별이 없다고 투덜대자 꼬마별이 일거리를 소개합니다. 밤마다 별에게 돌을 던지는 아이가 있으니 좀 고쳐달라고 합니다. 돌을 던지는 건 반항과 분노의 표현이므로 고쳐야겠지요. 그래서 어린 영혼은 돌을 던지는 바보 온달을 고치려고 평강 공주를 보냅니다. 바보 온달 이야기가 끝나고 부록처럼 붙은 뒷부분에서 어린 영혼은 “난 완전히 실패한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병든 게 아닌데 병들었다고 생각해서 고치려 든 게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별을 고치듯 사람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탈이라고 고백하며 별을 고칠 때 쓰는 도구를 던져버립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었다’고 말할 때는 줄거리를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책 다 읽었어요”라는 말에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그래, 어떤 내용이야?”하고 묻습니다. 줄거리를 잘 말하면 책을 다 읽었다고 인정합니다. 독서퀴즈나 골든벨 문제 역시 줄거리를 알면 대부분 맞출 수 있는 수준에서 문제를 냅니다. ‘온달이 평강공주 만나서 글도 배우고 무술도 배워 훌륭한 장군이 되었다. 나라를 구해내고 장렬하게 죽는다.’를 알면 바보 온달을 읽었다고 합니다.
줄거리만 아는 정도의 책읽기를 한다면 바보 온달 이야기는 다 똑같습니다. 그러면 “평강공주처럼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를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독서반에서 바보 온달을 읽고 첫 시간에 줄거리와 내용 파악을 했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앞뒤에 나온 ‘별과 어린 영혼의 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책에서 네 문장을 골라 무엇을 뜻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① 눈이 이토록 맑게 빛날 때가 있다 ② 곰같이 둔한 녀석은 그냥 버티고 서서 ③ (장군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반대로 (온달은) 누군가를 쫓고 있는 사람같이 보였던 것이다. ④ 끝없이 상처를 입으며, 그러나 그 상처를 스스로 훌륭하게 치료하며, 그리하여 그 상처를 자랑하며 언제나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 한 문단씩 글을 썼습니다. 김예은(초 6)은 “눈이 이토록 밝게 빛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인용해서 글을 썼습니다. “사람이 눈이 빛날 수 있다면 뭔가 관심 가는 것, 흥미로운 것을 봤을 때나 어떤 일을 열성적으로 할 때가 아닐까?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읽을 때나 블로그․ 카페에서 글 쓸 때, 친구들이랑 놀 때…… 그럼 반대로 눈이 빛나기는 커녕 빛이 사라질 때도 있다. 왠지 엄마 잔소리 들을 때의 눈빛이 빛이 사라진 눈빛과 같다. 흐리멍텅하게 구름 낀 것 같이 초점을 잃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했을 때의 눈빛일 것이다. 내 생활을 바라보면 눈빛이 사라질 때가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어린 영혼은 성급하게 바보 온달을 ‘바보’라고 단정짓고 고치려 들었습니다. 온달은 똑똑해지고 이름을 떨치게 되지만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자기가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는 이유만으로 온달을 때리던 고승장군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서 누구든지 밟고 지나가려 합니다. 현대 사회의 어린 영혼이 보낸 또다른 평강공주 때문에 예은이가 “눈빛이 사라질 때가 조금 더 많다”고 쓴 건 아닐까요! 바우와 함께 산과 들에서 즐겁게 뛰어놀며 어우러져 살아갈 바보 온달 모습이 보기 싫다고 교육을 시킨 건 아닐까요?
셋째 시간에는 온달이 바보처럼 사는 게 나았는지, 장군으로 사는 게 나았는지 토론했습니다. 이현주 작가 마음처럼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아이도 있고, 현대사회에 잘 적응해서 멋진 고승장군이 되면 된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마지막 시간에는 독서감상문을 썼습니다. 박아영은(초 6) 바보 온달을 이렇게 읽어냅니다. “결코 온달은 바보가 될 수 없다. 바보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어리석고 못나게 구는 사람을 얕잡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지능이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책 앞쪽에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어리석음의 기준은 무엇이지? 온달은 자기 자신에게 어리석고 못나게 굴었던가! 자신이 할 일을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였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보라면 온달같은 바보가 이 세상에 많았으면 좋겠다. 고승장군에게 맞으면서도 빌거나 도망가지 않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온달같은 사람들이 많다면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처럼 육체적 풍요로움보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넘쳐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고승장군같은 행동을 너무 많이 했다. (……) 마지막 장면에 온달이 죽게 되어 관에 시신을 넣고 가지고 산을 내려 가려고 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평강이 산으로 올라가 온달을 고승장군처럼 만든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자 관이 움직였다. 이것은 지난 날의 오만했던 온달 자신의 죄를 뉘우침과 동시에 자신을 그렇게 만든 평강을 용서하고 오만함에 빠져 죽이게 된 유일한 친구인 바우에게 미안함을 표하는 행동인 것 같다.“
정신적 풍요를 더 귀하게 여기는 아이를 만나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학원에서 하듯 문제를 풀지도 않고, 족집게 강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이야기나누고 글을 쓰러 오는 아이들을 보면 힘이 불끈 솟습니다. 아이들이 쓴 글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읽어봅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을 거칠게 표현하지만 글에 드러난 아이다움에 감탄합니다. 지치고 힘들 때면 아이들이 쓴 글을 읽고 힘을 냅니다. 이 맛이 너무 좋아서 줄거리로만 멈추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정답을 맞추지 말고 생각을 나누자고 독려합니다. 그렇게 해서 맺은 열매는 발버둥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습니다.
제가 독서모임을 하는 이유는 지친 아이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면서 마음을 털어내면 얼마나 좋은지 알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죠. 이런 과정을 힘들어하고 지치기도 할 겁니다. 그렇지만 슬픈 마음을 ‘슬프다’고 표현하고, 아픈 상처를 꺼내놓고 ‘아파요’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치유가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줄거리만 보지 말고 책이 삶을 이야기하게 하자고 꼬드깁니다. 한 문장을 쓰면서 이걸 하건, 중심이 되는 한 낱말을 찾아 글을 쓰면서 찾아가건, 토론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주건 이게 목적입니다.
3월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달입니다. 책을 꺼내든 아이들, 독서지도를 하려는 선생님들 모두 줄거리를 뛰어넘어 책으로 자신을 읽어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