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묵상

<하늘과 땅 식료품점>을 읽고

책뜰안애 2025. 2. 27. 07:29

-“         ”는 본문 인용 -

권일한

모태 신앙으로 내내 교회에 다녔다. 중고등부가 가장 좋았다. 그때는 교회가 집보다 좋았다. 형과 누나가 많았고 친구도 많았다. 64계단을 금세 올랐고, 다다다다 뛰어 내려와도 무섭지 않았다. 탁구를 배웠고 긴긴 계단을 웃으며 쓸었다. 좋은 기억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서로 챙기고 사랑했다. 사랑하자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1980년대 교회는 하늘과 땅 식료품점 느낌이 났다. 그러나 이젠 이런 교회를 찾기 어렵다.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니면 내가 변했을까?

무엇이 그때 우리를 행복하게 했을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나를 살아있게해주었던 30년 교사 시절과 달리 그땐 할 일이 없어도 살아있음을 느꼈다. 순간순간 얼마나 생기로웠던지! “자애가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묻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교회 곳곳에 자애가 넘쳤다. 교회에 초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랑이 많은 권사님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문을 잠그는 법이 없다. 사람들에게 늘 외상을 주고 돈을 갚으라고 하는 법이 없는데 누가 물건을 훔치겠는가.”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곳이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아니었나? 어린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라 아름답기만 했던 걸까? 그런 부분도 있다. 그때 교회는 편견이 많았다. 목사와 장로는 모두 남자였다. 사십일 금식 기도한 사람을 엘리야인 양 우러러봤다. 나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이(헌금 많이 하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 있었다. 초나처럼 흑인들에게 전화를 쓰게 해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사랑이 많았으나 근본주의 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함께 모여 소리를 높이고 같이 울며 사랑했지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말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말이 끄는 수레를 가진 유색인을 고용해서 그가 끄는 수레 뒤에 타고 마을로 내려가, 마을 공용 우물의 급수용 펌프 꼭지에서 여러 개의 통에 물을 가득 받아와 그 유색인에게 비어 있는 미크바에 목욕물을 채우게 했다면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여자가 나서고, 장애인이 나서면 입방아를 찧었다. 상처 많은 사람이 함께 우는 곳이었지만, 위로만큼이나 다시 상처를 주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도 그 교회가 그립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에 가까웠던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식료품점은 우리를 먹이는 곳이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은 하늘의 음식을 땅에, 땅에서 난 것들을 하늘에 보내는 식료품점이다. 영업이익이 없는 곳, 흑인과 백인의 경계가 없는 곳, 종교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곳, 뿌리를 끊어내고 새롭게 이식한 곳에서 싹을 내기 위해 끙끙대는 미국 이민자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넣어준 곳이다. “제 나라 없이 유령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 어떤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과 이성 너머의 그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사람이 뿌리를 내리게 해주는 곳이다.

이런 교회를 꿈꾸었다. 교실을 이렇게 만들고 싶었다. 이런 공동체를 이루고 싶었다. 잠깐 그런 적이 있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에 가까웠던 교실과 공동체를 몇 번 맛보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상처를 내보이며 함께 울었던 독서 모임도 있다. 그러나 치킨힐의 흑인들이 초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그녀를 이웃이 아니라 자유에 숨을 불어 넣는 자유의 동맥처럼 여겼다.” 1980년대 교회가 엄마들에게는 자유의 동맥이었지만, 내겐 아니었다. 내가 누린 교실과 공동체도 잠시뿐이었다. 내가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았을까?

몽키팬츠가 도도를 도와주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이런 내용을 좋아했고 나도 몽키팬츠를 꿈꾸었다. “친구를 위험에서 구해주기 위해, 친구에게 쏠릴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 어둠의 땅에서 친구에게 빛을 던져주기 위해 스스로를 더럽히고싶었다. 조금 더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조금 더 힘들게 살았다. 어쩌면 몇몇은 내게서 초나의 일부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들면서 추상적이고 고상하기만 한 (유대교) 가르침들이 점점 더 쓸모없고 멀게만 느껴져 고이 접어 두었다.” 하는 점만 비슷한 것 같다. 더구나 햇살과도 같은 도도라는 현실이 내게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나타난다고 해도 지금은 글쎄~

미기는 로우갓(낮은 하나님)이 어디에서 왔던 우리는 우리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하고 말했다. 내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은 1980년대 교회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 이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초나의 병은 그들 모두를 뒤흔들었고 그녀가 회복하자 그들 모두 행복해졌다는데”, 교회는 점점 회복에서 멀어진다. 20년 동안 가르친 중고등부도 조금씩 조금씩 하늘과 땅 식료품점에서 멀어졌다. 하늘과 땅 식료품점은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학교가 교회라고 생각했다. 내게도 도도가 있었다. 아프고 슬프고 힘들게 사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삶의 절름발이였다. 아이들에게 기댈 언덕이 되고 싶었다. 슬픔을 살폈고 아이의 슬픔을 읽으며 울었다. 잠깐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이루어졌다. “절름발이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함께 온전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이루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온전한 모습으로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만나면 온전하게 사는지묻지도 못하겠다. 아이는 스스로 자기 길을 가야 하니까.

초나 같은 사람이 없어서 교회가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되지 못했을까? 다른 이유가 있을까? 내가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도도를 도도로, 몽키팬츠를 몽키팬츠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치려 했던 노력이 지나쳤던 것 같다. 내 힘으로 이르지 못할 높이를 바라보고, 힘을 쏟았다. 벌써 할아버지가 된 것 같다. 그 교회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도도를 만나지 못할 것 같고, 만나도 어색할 것 같다.

랍비 현자들이 말하길, 우리는 세 가지의 이름이 있다고 하더군요.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 가족이 지어준 이름, 그리고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주는 이름이요.” 친구, 가족, 자신은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들이 불러주는 이름보다 타인, 우리와 시간을 보내지 않고 우리와 추억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초나를 절름발이로 부르는 이들 말이다.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살라고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지 않아서,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이렇게 말했나 보다. 1980년대 교회에 다니던 중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았던 것 같다. 교사가 되면서 좋은 교사가 되려고 힘을 줬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약한 모습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